내가 너에게 절대로 말하지 않는 것들
셀레스트 응 지음, 김소정 옮김 / 마시멜로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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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너에게 절대로 말하지 않는 것들. 사람들에게는 각자의 비밀이 있다. 이를 비밀이라고 할지, 트라우마라고 할지, 마음 속의 상처라고 할지, 단어 선택은 본인의 자유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를 안고 살아간다. 극복하는 자와 극복하지 못하는 자로 나뉘어서.

 

소설은 리디아의 죽음으로 시작된다. 어느날 아침 침실에서 자고 있어야 할 리디아는 자리에 없고 결국 호수에서 시체로 발견된다.

 

리디아의 아빠인 제임스는 중국계 미국인이다. 이민 초기 미국에서 인종차별은 흔한 일이었고 제임스는 친구 하나 없이 학교를 졸업해야 했다. 수업에서는 학생들이 대놓고 무시하며 비웃었고 확실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교수직은 다른 사람에게로 넘어갔다. 그래서 제임스는 ‘좋은 인간관계’에 대한 일종의 강박관념이 생겼다. 자신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우정을 딸과 아들이 보여주었으면 하는 바람이 생긴 것이다. 또한 인종차별의 경험은 무의식중에 제임스를 파고들어 자식들을 대하는 태도에도 변화를 주었다. 자신과 같은 동양인의 특성을 가진 네스와 한나보다 파란 눈의 리디아에게 자신도 모르게 더욱 사랑을 쏟는 것이다.

 

리디아의 엄마인 메릴린은 가부장적인 가정 안에서 자랐다. 메릴린의 엄마는 메릴린이 하버드에서 남자를 만나 자신처럼 착한 아내, 좋은 엄마가 되기를 바랐다. 하지만 메릴린은 의사가 되고 싶었고 실제로 능력도 뛰어났다. 대학교에 입학한 메릴린은 우연히 제임스를 만나 사랑에 빠진 후 자신의 커리어를 잠시 미룬 뒤 가정에 집중한다. 후에 가족을 떠나 다시 의사의 꿈에 도전하지만 역시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고 돌아온다. 이러한 과거는 리디아를 의사로 만들어 자신의 잃어버린 꿈을 되찾고자 하는 잘못된 욕망을 만들어낸다.

 

리디아의 오빠인 네스는 가족들의 관심이 리디아에게로만 쏠리는 것에 지쳐 하루 빨리 독립하고 싶어 한다. 초반에는 제임스와 메릴린에게 대화를 시도하거나 새로운 행동을 보이면서 관심을 받고 싶어 하지만 실패하고 결국 스스로의 힘으로 하버드 합격을 이루어낸다. 리디아의 동생인 한나는 네스와 같이 가족들의 관심을 원하지만 실패하고 무기력하게 남게 된다. 아직 어리고 모두가 한나를 있는 듯 없는 듯한 존재로 여기는 것이다.

 

그렇다면 리디아는 어떤 아이였을까. 엄마와 아빠의 사랑을 독차지하는, 오빠와 동생에 비해 서양인과 같은 외모를 가진 아이였다. 말로만 들으면 가장 행복해야 하는 인물이다. 하지만 리디아는 불행했고 결국 죽음을 선택한다. 아빠의 관심에 리디아는 없는 친구들을 만들어내 통화를 해야 했고, 엄마의 바람에 원하지도 않는 의사의 길을 걸어야만 했다. 유일한 친구라고 생각했던 네스는 집을 떠나고 한나는 리디아에게 존재감 없는 동생이었다.

 

방황하던 와중 리디아는 우연한 계기로 학교 친구인 잭과 친해지게 된다. 잭은 네스가 무척 싫어하는 인물이다. 과거 수영장에서 잭이 네스를 무시한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실제로 잭은 네스를 우습게 본 것이 아니고 오히려 네스를 좋아한다. 자세히 설명되지는 않지만 잭이 네스에게 닿았던 손을 핥는 모습을 한나가 목격하고 리디아가 네스의 이름을 반복하는 장면에서 우리는 이를 추측할 수 있다. 리디아는 잭에게 자신의 고민을 털어놓지는 않지만 잭과의 대화를 마지막으로 마음을 정리하고 호수로 향하게 된다.

 

리디아가 자살하는 장면은 아름답게 그려진다. 실제로 리디아가 자살하려는 마음을 먹었는지도 의문스러울 정도이다. 리디아는 수영을하지 못한다. 그래서 가족들과의 갈등을 스스로 해결하고 호수를 헤엄쳐 집으로 가고자하는 리디아의 모습은 더욱 이상하게 느껴진다. 리디아에게는 정말로 이를 극복하고자하는 의지가 있었던 것일까.

 

사실 이 소설에서 퀴어의 비중은 크지 않다. 2016년 퀴어 문학 신간 총정리편에 있는 책이지만 내용적인 면에서 보면 잭의 성적 정체성보다는 리디아에게 잭이 어떤 의미였는지가 더욱 중요하게 다루어진다. 따라서 퀴어 문학 리뷰를 이렇게 작성해도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리디아와 사람들과의 관계, 또한 그들의 상처에 초점을 맞추어 글을 작성했다. 전체적으로 소설은 사람의 감정을 세밀하게 표현했고 그냥 지나칠 수 있는 장면을 극대화시켜 일상 속에서 가족들이 리디아의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이는지를 섬세하게 나타냈다. 일부러 감동 포인트를 건들이지는 않았지만 사람들이 책에서 눈을 떼기 힘들게 만들었다.

 

결말에서는 리디아의 가족들이 각자의 방법으로 죽음을 극복하는 과정을 보여주었다. 리디아가 모두와의 갈등을 정리하고 끝을 선택한것처럼 가족들도 밝은 미래를 암시하는 내용으로 소설의 끝을 맺었다. 아마 이들은 리디아의 죽음뿐만 아니라 자신의 상처 또한 함께 극복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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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계선의 아이들 디스에픽 노벨라 시리즈 9
김준영 지음 / 에픽로그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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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뷰의 특성상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을 수 있습니다.

 

 사회파 미스터리 소설이라는 소개에 걸맞게 김준영의 『경계선의 아이들』은 한 사립대학 교수가 살해되면서 시작된다. 이 사건을 담당하게 된 '장영동' 형사는 범인으로 추정되는 여자아이의 흔적을 쫓지만 살인사건이란 게 늘상 그렇듯이 쉽지만은 않다. 더구나 조사 끝에 찾아낸 유력한 용의자는 '현수'라는 이름의 남자아이다. 금방 끝이 날 것만 같았던 수사는 미궁 속으로 빠져들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영동' 형사는 결코 포기하지 않는다. 사건을 바라보는 시각을 조금 달리한 끝에 그는 마침내 진실에 다다르게 된다.

 

 사실, 독자들은 작품의 맨 앞부분에 등장했던 '수영'이라는 아이가 범인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이 작품이 취하고 있는 장르적 스탠스 상 그의 성적 정체성은 미스터리에 가려져 있다가 서서히 드러나게 된다. 흥미로운 건 '수영'의 성적 지향이 드러나는 방식이다. '수영'과 '현수'와의 관계에 대해서 서술할 때 가볍게 언급되던 '수영'의 성적 지향은 이야기가 끝을 향해 나아갈수록 점점 더 구체화된다.

 

(…) 하지만 최근 얼마간은 각자의 사정으로 조금씩 멀어져가는 중이었다. 한동안 연락마저 끊고 지냈지만 그럼에도 최악의 순간 선뜻 수영의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현수의 얼굴이었다.

 

가출을 결심한 날, 거하게 다투고 집을 나서던 자신을 바라보던 엄마의 눈빛을 떠올리며 수영은 고개를 저었다.

"싫어도 할 수 없어. 당장 거기밖에는 갈 곳이 없잖아. 당분간은 얌전히 있는 게 좋아. 어제 일은 모두 잊고."

엄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차분하게 다독이듯 말하는 현수에게서 듬직한 어른의 느낌이 묻어난다. 서로 깔깔거리며 놀던 친구는 어느새 멀찌감치 그만의 길을 찾아 나아가고 있었다. 자신이 누구인지조차 모른 채 방황하며 제자리걸음 중인 수영과는 달리.

 

"학교에서 애들이 말이 많아."

"무슨 말?"

관자놀이 근처를 긁적이며 현수는 관성적으로 되물었다.

"너랑 수영이 이야기. 둘이 사귀는 거 아니냐고…"

(…)

"뭐라냐."

"물론 아니라는 거 나도 알아. 하지만 애들이 그렇게 말한다고. 게다가 요즘 수영이 관련해서 안 좋은 소문들도 계속 돌고. 학교 애들이 봤다는데, 늙은 아저씨랑 같이 모텔 들어가는 거. 정말 더럽지 않니?"

"다 했냐? 나윤미."

현수는 찌푸린 얼굴로 소녀를 바라봤다.

 

 즉 '수영'의 성적 지향은 남성성을 향한 것이다. 그런데 '수영'의 성별 정체성은 이 작품이 가지고 있는 서술 트릭과는 별개로 모호하게 느껴진다. 어느 정도 미스터리 장르에 익숙한 독자라면 '수영'의 성별, 즉 젠더가 남성이라는 것은 금방 깨달을 수 있다. 이해하지 못한 독자라도 처음부터 다시 읽게 된다면 알아챌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이 선천적으로 지니고 태어나는 젠더와는 달리 자라면서 스스로 정체화하게 되는 성별 정체성은 다른 것이다. 즉 읽다 보면 '수영'이 남성으로서 동성에게 끌리는 동성애자인지 아니면 여성으로서 이성에게 끌리는 트렌스젠더인지 혼란이 올 수밖에 없다. '수영'의 정별 정체성을 알려주는 문장은 '(……) 생각지도 못한 행색으로 자신 앞에 선 수영의 모습은 무척 낯설었다. 마치 처음 만난 사람처럼. 그것은 너무나 불안정하고 아슬아슬한 모습이었다. 현수에게는 그 순간 수영의 모습이 가느다란 선 위에 서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꿈과 현실, 천국과 지옥, 빛과 어둠, 소년과 소녀 그리고 친구와 연인. 그 아슬아슬한 경계선 위에 신기루처럼 수영이 흔들리고 있었다.(p.113~114)'라는 문장 뿐이다. '수영'이 크로스드레싱이 등장하긴 하지만, 크로스드레싱을 한다고 해서 무조건 트렌스젠더라고 볼 수도 없다.

 

 물론 '수영'의 젠더와는 달리 성별 정체성은 작품 내에서 곁가지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젠더가 중요한 트릭으로 작용하는 이상 이와 관련된 성별 정체성은 어떤 의미로는 작품 전체를 꿰뚫는 중요한 화두다. 쉽지 않은 소재인만큼 분명 어느 정도 한계는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작품 말미에서 모든 것을 알게 된 '장영동' 형사는 '수영'과 '현수'에 대해 "응, 사정이 딱하잖아. 착한 애야. 저녀석도 그리고 살인범도(p.107)"라고 후배에게 말한다. '장영동' 형사는 실상을 알기 전에도 줄곧 그 둘을 따뜻하게 대한다. 이것은 곧 작가가 성소수자 청소년들에게 보내는 시선이다.

 

"행사 연습 때문이죠 뭐. 그런데 취소됐어요. 무기한 연기랍니다. 똥개 훈련도 아니고."

김 형사는 추운 듯 잔뜩 목을 움츠린 채 투덜거렸다.

"연기라니, 왜?"

"종교 단체에서 반발이 있었나봐요. 소수자 권익 보호 어쩌고 하는 행사다보니까 그쪽에서 민감한 부분도 걸리는 게 있었거든요. 대충 뭉개고 가려 한 모양인데, 그래도 나라에서 주최하는 행사인데 어찌 이단을 옹호하느냐면서 난리 피우는 데야. 아휴, 저야 잘됐죠 뭐. 그대로 강행했으면 그 아줌마 아저씨들 상대했어야 하니까."

장 형사는 짐작이 간다는 듯 쓴웃음을 지었다. 김 형사가 차출된 행사는 지역에 새로이 설립될 소수자 인권 보호 센터 발대식이었다. 얼마 전 높으신 분이 그와 관련하여 힘을 실은 발언을 하면서 위에서 잔뜩 관심을 기울이는 터였기에 상당히 이슈가 되었고 행사도 예정보다 규모가 훨씬 커져버린 터였다. 하지만 결국 엉뚱한 이유로 흐지부지될 모양이었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란 거 아시잖아요."

여전히 고개를 들지 않은 채 뇌까리는 현수의 목소리는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뭐가 말이냐? 네가 감싸는 그 친구의 실체, 아니면 너와의 관계? 늙다리 아저씨라고 무시하지 말거라. 이래봬도 형사 생활 하면서 별의별 사람 다 만나봤어. 다른 늙다리들보다는 마인드가 깨어 있는 꼰대라는 말이다. 틀린 것과 다른 것을 구분할 줄 안다는 거지. 물론 여전히 고정관념이란 틀 속에서 살고 있기는 하다만. 나윤미한테 최수영이란 여학생 어떤 애였냐고 물었다가 망신을 당했으니 말이다."

 

(…) 서술 트릭 기법의 근본 원리가 그렇듯 편견에 관한 이야기로 읽힐 수도 있을 겁니다. 아이들은 편견을 극복하며 성장하고, 형사는 편견을 깨면서 사건을 해결합니다. 그럼에도 그들이 사는 세상은 그리고 우리가 사는 진짜 세상도 너무 많은 편견들이 가득하다는 의심은 지울 수 없습니다. 저 같은 글쟁이가 독자들을 속여먹을 수 있을 정도의 딱 그만큼의 편견만이 남은 세상이 언젠가는 오리라 기대하며 이 소설을 세상에 내어놓을 수 있게 해준 분들 그리고 그것을 읽어주신 모든 이에게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수영'의 젠더나 성별 정체성이 서술트릭을 위한 도구처럼 보이는 부분이 아쉽게 느껴졌다. 그러나 바로 위에서 인용한 「작가의 말」에서 작가는 '편견'에 대해 언급한다. 작가의 이런 마음가짐이 있기 때문에, 나는 분명 작가는 이보다 더 좋은 작품을 쓸 수 있을 거라 믿는다. 김준영 작가의 다음 작품을 기다리며 이 리뷰를 마친다.

 

 

 

1) 김준영, 『경계선의 아이들』, 에픽로그, 2016, p.17.

2) 위의 책, p.19.

3) 위의 책, p.27~28.

4) 위의 책, p.87~88.

5) 위의 책, p.105.

6) 위의 책, 「작가의 말」, p.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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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씨 각본
박찬욱.정서경 지음 / 그책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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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다양한 색깔과 개성을 가진 여성 중심 영화가 관객들 곁을 찾아왔었다. 그 중 흥행을 비롯하여 가장 많은 주목을 받고 화제를 몰고 온 영화는 다름 아닌 박찬욱 감독의 ‘아가씨’였다.


영화 아가씨의 각본집이 발간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무척이나 기뻤다. 나의 각본집 구매는 한참이나 늦었지만, 아마 수많은 팬들이 각본집 출간의 소식을 듣고 같은 심경이었으리라. 영화로만 만나보았던 히데코와 숙희를 각본으로 만나는 경험은 아가씨의 팬으로서 굉장히 고대해왔던 일이었다.


작품 안에서 입체적으로 살아 숨 쉬는 두 여성 캐릭터들의 표현방법을 영화와 각본으로 각각 비교하며 떠올리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지문과 대사를 따라 읽어갈 때면 각각의 캐릭터를 연기한 배우들의 호흡이 떠오르거나 머릿속에서 만들어진 가공의 인물들이 툭 툭 튀어오른다. 각본을 읽는 것은 영화의 원작 소설을 읽는 것과는 비슷하면서도 또 다른 묘미를 가진다. 영화를 본 관객이라면 각본과 영상화의 차이를 찾아가는 재미가 무척 쏠쏠할 것이다.


군데군데 각본집과 영화화된 시나리오 사이의 차이점들이 분명히 존재하는데, 예를 들면 영화에 들어가 있는 숙희의 나레이션이 각본집에는 많이 빠져있다. 짐작하게만 했던 그녀의 심정을 영화는 숙희의 독백을 빌려 직접 심경을 말하게 한 것. 또한 히데코의 나레이션들이 영화와 달리 일본어로 쓰인 것도 두드러지는 차이점이다.

 각본집에 담긴 대사를 읽는 내내 숙희를 연기한 김태리의 또랑또랑한 목소리가 음성지원 마냥 비워진 여백 사이에 찬찬히 수 놓인다. 히데코 역을 맡은 김민희의 탁월하게 아름다운 일본어 연기도(각본집 안에 쓰여진 말소리로는 한번도 들어본 적 없는) 절로 귓가에 내려앉는다.


“숙희야...내가 걱정돼? 나는 네가 걱정돼.”


제 처지도 딱한데 그 애의 처지에 슬퍼지고 또 딱해지고 끊임없이 걱정하는 히데코. 그리고 숙희. 많은 패러디를 낳기도 한, 아가씨의 캐치프레이즈에 가까운 그 대사 “내 인생을 망치러 온 나의 구원자. 나의 타마코, 나의 숙희.”는 원래 “내 인생을 망치러 온 나의 구원자. 남숙희...내 동무.”였던 모양이다. 각본집에서 히데코의 이 나레이션은 물론 전부 일본어로 쓰여 있다. 영화에서 바뀐 나레이션도 좋지만, 히데코의 ‘동무’라는 단어 선택에도 큰 의미가 담겨 있는 걸로 보인다. 사랑하는 이들은 대개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친구 사이가 되곤 하지 않나. 게다가 이 두 사람은 서로의 지옥에서 서로의 몸과 영혼을 구해낸 이들이다. 연인이자 동무이면서 그 ‘남자’들의 세계에서 서로의 구원자가 되어 준 이 여성 동지들은 히데코도 이야기한 것처럼 ‘하필이면’ 서로에게 꼭 맞는 답이었다.


두 여자의 사랑은 작품에서 가히 노골적으로 표현된다. 영화 속 섹스 신 같은 경우는 ‘과잉된 장면‘이라는 감상이 불쑥 튀어나올 정도로 보는 이의 모든 감각을 고양시킨다. 대사나 포즈에 저도 모르게 웃음이 터지는 것 또한 장면들을 더듬고 즐기는 과정 가운데 하나였다. 각본집을 읽을 때는 조금 감상이 달랐는데, 영화를 통해 해당 신들을 접했을 때의 고양된 감정들이 좀 더 가라앉는 느낌이었다. 과잉을 덜고 영상보다 훨씬 느린 호흡으로 천천히 대사와 움직임을 따라갈 때 아마 읽는 이들은 각자 자신만의 섹스 신을 만들어내게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작가의 말에서 밝힌 정서경 각본가의 이야기처럼, “이것은 두 사람의 사랑이야기면서 성장담이다.” 히데코와 숙희는, 숙희와 히데코는, ‘아가씨’의 세계 속에서 서로의 삶과 사랑을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각자의 과거와 인생을 가지고 각 장면마다 생생히 현재를 살아가며 살아 숨 쉬는 두 캐릭터를 우리는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각본집에서는 이 두 캐릭터의 사랑과 성장이 담긴 이야기를 더욱 밀착하여 만나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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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것들의 책 폴라 데이 앤 나이트 Polar Day & Night
존 코널리 지음, 이진 옮김 / 폴라북스(현대문학)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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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데이빗'은 제 1차 세계대전 당시의 런던에서 살고 있는 조용한 소년이었다. 그러나 어느날 어머니가 지병으로 사망하고, 몇 개월 뒤 '로즈'라는 새 어머니와 '조지'라는 이복동생을 맞게 되면서 지독한 사춘기를 겪게 된다. '데이빗'은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괴로워하다가 책 속 세상으로 빨려들어가게 된다. 본래 스릴러 작가였던 존 코널리는 동화를 어둡고도 환상적인 모습으로 각색하여, '데이빗'의 내면을 훌륭하게 표현해냈다. 그리고 존 코널리는 그 과정에서 동화 속에서 그동안 드러나지 않았던 동성애자라는 존재를 등장시켰다.

 

 동성애자들에 대한 언급이 처음 등장하는 것은 초반부, 새 어머니 '로즈'의 삼촌이었던 '조나단 툴베이'과 그의 여동생 '애나'의 실종 사건이 언급되면서부터다. '데이빗'은 둘이 가출한 뒤 어떤 일이 있었을지를 상상하면서 부모님의 당부를 떠올린다.

 

 (…) 데이빗의 아빠는 혹시라도 길을 잃게 되면 경찰관을 찾거나 어른에게 경찰서에 데려가 달라고 부탁하라고 했다. 남자들끼리만 모여 있는 사람들에게는 절대 물어선 안 되고 여자에게 묻거나 여자와 함께 있는 남자, 아니면 어린아이가 있는 사람이면 더 좋다고 했다. 아주 조심해야 한다고 아빠는 말했다.

 

 그러면서 '데이빗'은 '빌리 골딩'이란 아이를 떠올린다. 데이빗과 같은 일요일 축구팀 소속이었던 '빌리'는 어느날 갑자기 하교길에 실종되어 발가벗겨진 시체로 발견된다. 그리고 그 근처에서 어머니와 단 둘이 살고 있던 한 남자가 유력한 용의자로 체포된다. '데이빗'의 회상으로 전개되는 이 짧지만 충격적인 이야기는, 18세기 당시 동성애자들이 어떤 취급을 받으면서 살고 있었는지에 대해 보여줌과 동시에 '데이빗'에게 낯선 젊은 남성에 대한 묘한 두려움을 심어주게 된다.

 동화 속 세계로 들어간 '데이빗'은 원래의 세계로 돌아가기 위해서 그곳의 국왕을 만나려 한다. 그 과정에서 자신을 도와주던 '숲사람'을 변종 늑대인 '루프'들의 습격으로 잃는가 하면 무시무시한 사냥꾼과 마주치기도 하고, 백설공주와 살고 있는 난쟁이들과 조우하기도 하는 등 고된 모험을 겪는다. 그리고 그는 곧 '롤랜드'라는 인물과 마주친다.

 '롤랜드'는 앞서 등장했다가 사라진 '숲사람'이 갖고 있던 조력자 포지션을 계승하는 인물이지만 '숲사람'과 전혀 다른 역할을 수행한다. '숲사람'이 '데이빗'의 아버지를 향한 그리움을 형상화한 인물이라면 '롤랜드'는 '빌리 골딩' 사건 이후로 '데이빗'이 막연하게 갖고 있던 남성 동성애자에 대한 두려움을 해소시키는 인물인 동시에, '데이빗'을 성장시키는 인물이다.

 

 '하얀 말(p.221)'을 타고 등장한 '롤랜드'는 동화 속에서 흔히 묘사되는 왕자의 외양을 하고 있다.

 

 (…) 그가 점점 더 가까이 다가왔다. 두 개의 태양이 그려져 있는 은색 갑옷을 입고 머리에는 은색 투구를 쓰고 있었다. 허리춤에 칼이 꽂혀 있었고 어깨에 활과 화살을 메고 있었다. 아마 이 세계에서는 주로 활과 화살을 무기로 사용하는 모양이었다. 역시 두 개의 태양이 그려진 방패가 안장에 걸려 있었다. 그는 말을 몰아 데이빗이 있는 곳으로 다가와서 그를 바라보았다. 말을 탄 사람의 인상이 어딘가 숲사람을 연상시켰다. 차분하고 따듯한 사람 같았다.

 

 자신을 '그냥 투사일 뿐(p.224)'이라고 소개한 '롤랜드'는 '데이빗'의 첫인상처럼 지혜롭고 용기 있는 인물이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어딘지 미스터리한 인물인데, 그는 '데이빗'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거의 하지 않는다. 국왕이 설파하려고 했던 새로운 종교에 대해 이야기하며 그는 "난 내가 사랑하고 신뢰하는 사람들만 믿는단다. 그 외의 다른 것들은 다 엉터리야.(…)(p.239)'라는 말을 하지만 '데이빗'이 "아저씨가 사랑하는 사람이 누군데요?(p.239)"라고 묻자 '그의 말을 못들은 척(p.239)' 한다. 하지만 잠결에 '데이빗'은 '롤랜드'가 누군가에게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을 듣게 된다.

 

 꿈은 꾸지 않았다. 아침 햇살인 줄 알고 딱 한 번 눈을 떴을 뿐이었다. 눈을 떴을 때 롤랜드가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는 소리가 들렸다. 돌아보니 그는 목걸이에 달린 조그만 은색 액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액자 속에는 롤랜드보다 어리고 잘생긴 남자의 얼굴이 보였다. 롤랜드는 그 사진 속의 남자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무슨 말인지 전부 다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사랑'이라는 말을 한 번 이상 했던 것은 분명했다.

 조금 무안해진 데이빗은 담요를 머리까지 끌어올린 다음 잠이 들 때까지 그 단어를 지워버리려 애썼다.

 

 '데이빗'은 아침에 일어난 뒤 그 남자에 대해서 물어보고 싶었지만 그만두고, 대신 '롤랜드'가 이곳으로 온 이유에 대해 묻는다. 그러자 '롤랜드'는 '라파엘'이라는 자신의 친구 이야기를 한다. '겁쟁이'라고 험담하는 이들에게 자신의 용맹함을 보여주기 위해 마녀의 저주로 잠든 여성을 구해주기 위해서 길을 떠났다가 다시는 돌아오지 않은 친구 이야기를. 그러면서 '롤랜드'는 "(…) 나한테는 형제나 다름없는 친구였단다. 난 무슨 일이 있어도 라파엘을 찾아서 도대체 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아내고 말겠다고 결심을 했어. 만약 죽었다면 왜 죽었는지 알아내서 복수를 하겠다고.(p.246)" 하고 말한다.

 그의 말처럼 '롤랜드'는 어디를 가도 '라파엘'의 행방을 찾는 일을 잊지 않는다. 지나가다 들른 마을에서 이장인 '플레처'에게 '라파엘'을 보았지만 돌아온 적이 없다는 말을 듣고 그는 '목걸이의 뚜껑을 닫고 가슴에 한 번 더 대보았다. 롤랜드는 식사가 끝날 때까지 한 마디도 하지 않(p.256)'는다. 하지만 '롤랜드'는 직감으로 '라파엘'이 이미 사망했다고 느끼고 있었다. 이에 대해 죽음이 두렵지 않냐고 '데이빗'이 묻자 '롤랜드'는 이렇게 답한다.

 

 "나도 죽음의 고통은 두렵단다. 예전에 심하게 다친 적이 있었는데, 그땐 그대로 죽을 것 같더구나. 그 고통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해. 다시는 그런 고통을 겪고 싶지 않아. 하지만 난 늘 다른 사람의 죽음을 더 두려워하면서 살았어.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잃고 싶지 않았지. 그들이 내 곁에 살아 있을 때조차도 그런 걱정을 하면서 살았어. 그들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정작 그들과 함께하는 시간들을 즐기지 못했던 것 같아. 라파엘과도 그랬어. 라파엘은 내 몸 안에 흐르는 피, 내 이마에 흐르는 땀과 같은 존재였는데도 말이야. 라파엘이 없는 지금 나는 더 이상 예전의 내가 아니란다."

 

 작품이 중후반부로 흘러가면서 '데이빗'도 '롤랜드'와 '라파엘'의 사이가 그냥 친구관계가 아니었다는 것을 눈치채게 된다. '롤랜드'는 자신을 그저 투사라고 했지만 그의 갑옷과 무기에는 모두 금장식이 있었고, 뛰어난 리더십을 통해 마을 사람들을 통솔하여 마을을 습격하러 온 괴물을 물리치기까지 했다. '데이빗'이 그 이유를 캐묻자 '롤랜드'는 자신은 거대한 영토를 가진 영주의 후계자였지만, 아버지가 자신을 후계자로 인정하지 않아 쫓아냈다는 이야기를 하지만 '데이빗'은 그 이유가 전부라고 생각지 않는다. '롤랜드와 라파엘의 관계에는 아주 사적이고 은밀한 뭔가가 있는 것(p.294)'처럼 느낀 것이다. 맨 처음 '데이빗'을 이 동화 속 세계로 끌어들인 '꼬부라진 남자'는 그런 '데이빗'의 마음을 부추겨서 내밀한 곳에 숨겨져 있던 남성 동성애자에 대한 두려움을 깨운다.

 

 꼬부라진 남자가 음흉하게 웃었다.

 "그자가 그렇게 말하든? 쯧쯧. 그자가 가지고 다니는 사진을 봤겠지? 라파엘이라는 친구를 찾아다닌다고 했지? 라파엘! 정말 멋진 이름이야. 그 둘은 아주 가까웠어. 무슨 뜻인지 알겠니? 아주 많이 가까웠단 말이다."

 데이빗은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왠지 더럽고 추잡한 의미를 담고 있는 것 같았다.

 "어쩌면 너를 새 친구로 사귀고 싶은 건지도 모르겠구나. 그자는 밤마다 네가 잠든 모습을 바라보면서 네가 참 아름답다고 생각하거든. 너하고 가까워지고 싶어한단 뜻이야. 그것도 아주 많이."

 "함부로 말하지 마세요!"

 데이빗이 소리쳤다.

 

 '데이빗'은 '꼬부라진 남자'의 요구를 들어주진 않았지만, '롤랜드'가 갇혀 있던 그를 꺼낸 뒤 얼굴을 어루만지자 움츠러든다. 그리고 이후 둘 사이에는 '묘한 긴장이 감돌(p.305)'기 시작한다. '데이빗'은 잠깐이나마 '꼬부라진 남자'의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 데이빗은 지금 알지도 못하는 사람, 롤랜드가 특별한 감정을 갖고 있다는 사람을 찾아 헤매고 있었다. 게다가 꼬부라진 남자의 말이 옳다면, 롤랜드가 친구에 대해 품고 있는 특별한 감정은 전혀 자연스러운 감정이 아니었다. 데이빗이 살던 세계에서는 그런 사람들을 칭하는 이름이 따로 있었다. 데이빗은 늘 그런 사람들과 가까이 해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자랐지만 이 낯선 세계에서 그런 사람과 친구가 되어 있었다. (…)

 

 하지만 혼란스러워하고 있는 '데이빗'에게 '롤랜드'는 이렇게 말한다.

 

"네가 그 기분 나쁜 자식한테 끌려갔다 온 뒤로 우리 관계가 좀 불편해진 것 같구나. 그자가 너한테 무슨 이야기를 했을지 대충 짐작이 간다. 라파엘에 대한 나의 감정은 오직 나만의 것이야. 나는 라파엘을 사랑했고 그게 전부란다. 그 나머지는 다른 사람이 상관할 바가 아니라고 생각해. 그리고 너에 대한 감정은…… 넌 내 친구야.(……)"

 

 이렇듯 '롤랜드'의 성숙된 반응은 아마 본인이 처해 있었던 여러 상황들 때문에 얻어진 것들이라 추측된다. 한편으로 '롤랜드'를 이렇게 만들어준 사람은 '라파엘'이기도 하다. '데이빗'은 아마 '라파엘'이 죽음을 맞았으리라 추측되는 마법의 성에 들어간 '롤랜드'를 기다리며 깨닫는다. 이렇게 생각한다. '롤랜드는 라파엘 없이는 살 수가 없고, 라파엘 없이 사느니 차라리 죽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p.320)'다는 것을.

 결국 '롤랜드'는 성에서 돌아오지 않고, '데이빗'은 '롤랜드'를 찾기 위해 마법에 걸린 성에 들어가기로 한다. 그리고 결국, 성 안을 헤매던 '데이빗'은 '롤랜드'의 모습을 발견한다. 그리고 '데이빗'은 그곳에서 '롤랜드'와 그의 사랑의 형태를 보고, 그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게 된다. 작가는 이 장면에서 직접적인 서술을 통해 '데이빗'의 성장을 표현한다.

 

 롤랜드의 시체가 거대한 가시에 찔린 채로 바닥에서 3미터 정도 떨어져서 매달려 있었다. 가시가 그의 가슴을 관통하고 갑옷 위로 뚫고 나와 두 개의 태양 문양을 일그러뜨렸다. 갑옷 위로 핏자국이 있었지만 많지는 않았다. 롤랜드의 얼굴은 회색빛이었고 야위었으며 뺨은 움푹했고 뼈가 앙상하게 드러나 있었다. 롤랜드의 시체 옆에 두 개의 태양 문양이 새겨진 갑옷을 입은 또 다른 남자의 시신이 있었다. 라파엘이 분명했다. 롤랜드는 마침내 사라진 친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아냈던 것이다.

 (……)

 데이빗의 분노가 두려움을 넘어섰다. 이제 달아나고 싶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 순간 그는 소년이라기보다는 남자였다. 이제 막 어른이 되려는 순간이었다.

 

 이후 '데이빗'은 성의 마녀를 죽여서 '롤랜드'의 복수를 갚는다. 그후 '데이빗'이 가장 먼저 한 일은 '롤랜드'의 시체를 수습하는 일이었다. 그는 '라파엘의 시체도 곁에 나란히 눕(p.342)'힌 다음, '칼을 그들의 가슴 위에 올려놓은 뒤 두 사람의 손을 칼자루 위에 포개놓(p.342)'는다.

 

 작가는 이 책의 말미에서 자신이 각색한 문학작품들을 모두 정리해놓았는데, '롤랜드'는 로버트 브라우닝이라는 시인의 「롤랜드 공자가 암흑의 탑으로 돌아왔다」라는 작품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라 밝히고 있다. 작가는 이 작품에서 중요한 것은 '그것이 무엇이건 롤랜드가 그 모험을 치를 각오가 되어 있다는 사실(p.587)'이라고 말한다. 작중에서 등장하는 '롤랜드' 역시 성에서 자신을 기다리는 것이 무엇이든 그것을 대면할 각오를 가진 인물이었다. 여기서의 '성'이란 말 그대로 성 자체를 이야기하는 것이지만 사회를 뜻하는 것이기도 하다. 작가는 '롤랜드'를 두고 '입지가 다소 불분명한 사람(p.588)'이라 표현했다. 그러나 이렇게 입지가 불분명한 '롤랜드'는 사회에서 그에게 줄 불이익을 감수하고 자신의 정체성과 대면한 인물이다. 그가 '데이빗'에게 자신을 '투사'라고 밝혔던 것은 사실 그 때문이었을 것이다.

 

 '데이빗'은 '롤랜드'의 존재를 받아들이고 이해함으로서 비로소 어른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그러나 '롤랜드'는 단순히 '데이빗'의 성장을 위한 도구로 사용된 인물은 아니다. 어떤 의미로 그는 시공을 넘어 현대를 살아가는 퀴어들을 대신하는 '투사'다. 2016년을 마무리하며, 항상 퀴어들 옆에 있어 주었던 '롤랜드'와 같은 '투사'들에게 경의를 표하며 리뷰를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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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짝반짝 빛나는
에쿠니 가오리 지음, 김난주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0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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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쿠니 가오리의 <반짝반짝 빛나는>은 정서불안과 알코올중독을 가진 아내 쇼코와 게이인 남편 무츠키, 그리고 그의 애인인 곤이 등장하는 따뜻한 소설이다. 등장인물 소개를 보면 그려지는, 어쩌면 뻔한 신파와는 다른 분위기로 묘사한 책이다. 출간된 지 시간이 좀 지나 소위말하는 '언피씨'한 부분이 있기는 하지만, 큰 비중을 차지하는 부분이 아니라 불편한 부분은 없었다. (사실 다시 읽으면서 거슬리는 표현이 정말 많아졌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전에 다른 분이 리뷰를 쓰신 적도, 무지개 책갈피의 추천도서로 올라온 적도 있지만, 연말이니까 모처럼 좋아하는 책의 리뷰를 올리고 싶었다. <반짝반짝 빛나는>은 한달에 한 번 리뷰를 올리면서도 국내 문학만을 고집하던 내가 좀 더 어렸을 적부터 설탕 과자처럼 꺼내 읽던 책이었다. 

 

"나는 지금 이대로가 좋아."-105p

 

쇼코는 지금 이대로가 좋다는 말을 자주 한다. 그녀의 신념이라고도 할 수 있다. 소설에는 등장하지 않았지만 나는 쇼코를 에이섹슈얼로 해석하고 있다. 지난 연애사도 그렇고, 쇼코에게도 애인이 필요하다던 무츠키의 말에도 '지금 이대로가 좋다'고 말하는 쇼코는 성적 끌림을 느껴본 적이 없는 사람처럼 보인다.

 

"은사자라고 아세요? 색소가 희미한 사잔데 은색이랍니다. 다른 사자들과 달라 따돌림을 당한대요. 그래서 멀리서 자기들만의 공동체를 만들어 생활한다는군요. 쇼코는 말이죠, 저나 곤을, 그 은사자 같다고 해요."-131p

 

쇼코가 말한 '은사자 전설'의 내용이다. 무리에서 떨어져 초식을 하고 무리지어 살아가다 단명하는 은사자. 어쩌면 이 은사자는 퀴어를 말하는게 아닐까 싶었다. 그리고 인용한 대사 다음에 이어지는 아버지의 답변은 쇼코도 그 은사자 같다는 내용이었다. 퀴어, 그리고 멀리 나아가 사회적 소수자들. 낭만화 같은 이야기지만 문학적인 표현으로 읽히기도 한다.

 

"그렇지만 내가 남자를 좋아하는 건 아닙니다. 무츠키 씨를 좋아하지."-140p

"호모입니다, 호모. 근본적으로 결혼할 자격이 없는 인종 아닙니까."-164p

 

별로 첨언할 것 없는 퀴어포빅한 대사도 인용해본다. 위쪽에 쓰인 곤의 대사는 에쿠니 가오리의 다른 작품에 잠깐 얼굴을 비추며 이야기가 달라진다. 구체적으로는 적지 않기로 한다..

 

"후회하지 않아. 물론 후회하지 않아."-166p

물을 안는 기분이란 섹스가 없는 허전함이 아니라, 그것을 서로에 대한 콤플렉스라 여기고 신경을 쓰는 답답함이다. - 183p

 

두 사람이 사는 집엔 두 통의 진단서가 있다. 쇼코의 정신병이 정상적인 영역을 벗어나지 않았다는 진단서와, 무츠키가 에이즈에 걸리지 않았다는 진단서이다. 전자는 두 사람의 가족이 모두 알고 있었고 쇼코의 친가는 무츠키가 게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지 않았다. 하지만 그 비밀이 탄로되고, 두 사람은 비일상 속에서 위태롭게 나아간다. 두 통의 진단서를 꺼내보이며 '친족회의'를 마친 둘은 점차 일상으로 돌아간다.

 

"이제야 간신히 독립한 부부 두 사람을 위하여."-203p

 

해피 애니버서리, 두 사람이 처음 만난 날을 마지막으로 소설은 끝난다. 후속작 아닌 후속작은 있지만. 모든 정리를 마치고 일상 속으로 돌아온 세 사람은 드라마틱한 일을 겪으면서도 독자의 마음을 투명하게 해준다. 개인적으로는 1년 전 까지만 해도 좋아하는 사람에게 추천해주고 싶은 책 1순위였지만, 다시 읽어보니 나 자신이 그동안 성장했다는 생각이 든다.

여담이지만 소설의 처음 배경이 크리스마스였다. 2016년 마지막 리뷰를 쓰는 이 시점도 성탄절이 코앞이다. 메리크리스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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