퀴어 펭귄클래식 59
윌리엄 S. 버로스 지음, 조동섭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웅진)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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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트세대의 대표작가 윌리엄 버로스의 「퀴어」는 그의 자전적인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는 ‘동성애’에 대한 갈망이 노골적으로 드러나 있다는 이유로 30년 동안이나 세상 밖에 나오지 못하다가 1985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처음 출간된 비운의 작품이기도 하다.

 

버로스는 마약 중독자의 이야기를 다룬 전작 「정키」와 같이, 작가의 분신 격인 인물 ‘윌리엄 리’를 다시 한 번 등장시킨다. 대략적인 줄거리의 얼개는 이러하다. 마약으로 인해 환각과 고통을 수반하는 금단증세에 시달리고 있는 주인공 리가, 유진 앨러턴이라는 청년을 향한 반응 없는 사랑을 갈구하는 내용. 이야기는 그게 전부다. 분량이 많지 않은데다 어찌 보면 큰 사건 없이 비교적 잔잔하게 흘러가 읽는 이에 따라서는 지루함을 느낄 수 있는 작품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 가벼운 페이지의 집합 속에 담긴 한 개인의 고통은 꽤나 크고 상해있어서 읽는 사람을 마냥 지나칠 수 없게 만든다.

 

 

소설 속의 리는 불행해 보인다. 그는 되돌아갈 곳이 없는 방랑자처럼 끊임없이 마약과 사랑을 찾으며 정처 없이 미대륙을 떠돈다. 허나 온 몸을 비집고 들어와 찢어놓는 금단 기간의 고통보다 더욱 그를 애처롭게 만드는 것은 당연하게도 앨러턴의 냉담함과 외면이다. 몽롱한 환각 상태와 육체적 아픔을 오가는 약물 중독 상태에서 리는 자신의 강박과 넋두리를 받아줄 단 한명의 관객, 유일한 관객이었으면 싶은 앨러턴에게 집착하지만 그는 자꾸만 객석을 이탈한다. 홀로 남겨진 리의 과도하게 연극적인 혼잣말과 제스처들은 책 속의 다른 인물들뿐만 아니라 읽는 이들마저 민망하게 만든다. 그는 그 가운데서 너무나 처연한, 마치 빛 한줄기 없는 무대에 올라와 있는 버림받은 배우처럼 보인다.

 

리와 앨러턴의 관계는 매우 진솔하게 그려진다. 단순히 리에게 있어 강박을 벗어내기 위한 사랑 이상의 관중 자체였던 앨러턴은 ‘자신은 결코 퀴어가 아님’을 리의 손길을 거부함으로써 나타낸다. 둘은 분명 동행하고 있지만 그것은 리에게 너무나도 외로운 동행에 다름없다. 결코 가질 수 없는 사람을 사랑했을 때 남는 것은 몇 줌의 눈물 정도일 것이다. 그 과정에서 리의 말과 행동은 이미 처절한 자기고백이 되어 독자에게 전해지고 그 고백에 동감과 연민, 혐오를 더해 느끼며 소설 자체는 하나의 소통이 된다.

 

 

버로스는 자신의 아내 조앤을 실수로 쏘아 죽였던 사건이 계기가 되어 이 소설을 썼다. 아무리 애써도 지워지지 않는 죄책감과 상실감으로 얼룩진 과거를 글쓰기로 승화하며 자신이 경험한 고독과 괴로움을 작가로서, 소설로써 선언한 것이다. 그는 이 글쓰기에서 ‘퀴어’이자 한 인간이었던 자신의 불행에 오롯이 집중했다. 「퀴어」는 작가의 모든 상실과 통증과 욕망에서 비롯된 고통이 응축된 그런 소설이다.

 

불행하고 절망에 가까운 퀴어 서사는 지긋지긋할 정도로 통용되고 있으며 때때로 ‘우리도 행복할 수 있다’라는 외침과 이미 존재하고 있는 행복한 삶을 지워버리기도 한다. 그렇다고 해서 고통 받는 퀴어 서사를 의도적으로 배제하고 행복한 퀴어 서사만을 지지하는 것이 궁극적인 해결책은 아닐 것이다. 소수자가 가지는 고통의 서사는 이미 우리 안에 공공연히 존재해왔고, 아마도 더 나은 세상이 되기 전까지는 존재할 것이다. 지향해야하는 것은 더 많은 종류의, 그러니까 퀴어 서사의 다양성이다. 독자는 리의 고통을 곱씹으며 그 날 것 그대로의 자기혐오와 마주한다. 버로스의 「퀴어」 속 리의 불행과 비참함은 어떤 종류의 자기검열 없이 토해내듯 쏟아져 나온 어느 퀴어의 자기고백이라는 점에서 진실로 읽는 이와 소통하고 있다. 혹은 독자가 잘 이해하지 못했더라도, 그것은 이미 의미 있는 하나의 고백이 된다. 자신과 자신의 목적에 전혀 확신을 갖지 못하는 자의 끊임없이 되풀이되는 우울한 감정과 분열된 현실일지라도 그것 또한 의미를 가지는 퀴어의 목소리다.

 

 

「퀴어」에서는, 마치 향신료에 버무린 날고기의 냄새가 난다. 「퀴어」를 버로스의 작품 중 가장 훌륭하다고 말할 수는 없을지언정 그의 세계를 가장 잘 보여주는 작품이라고는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버로스는 「퀴어」의 프롤로그에서 이렇게 밝혔다. '「정키」는 내가 직접 쓴 것이라면, 「퀴어」는 그 안에 내가 적혀 있는 기분이다. (p.16)'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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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집의 영희 씨 창비청소년문학 70
정소연 지음 / 창비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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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소연의 단편소설 「마산앞바다」는 마산 바다의 림보(물에 빠져 죽은 사람들의 얼굴이 수면으로 떠오르는 곳)에서 시작한다. 소설의 화자이자 주인공인 ‘나’는 처음으로 림보에서 보았던 여학생의 얼굴을 회상하며, 언젠가는 자신도 마산앞바다에 떠오르는 얼굴이 될까 생각한다. 림보에 떠오르는 다양한 얼굴들은 마산 주민들의 시선에 맥없이 놓인 채로 그저 바라보아진다. 그리고 사람들의 따뜻하지 못한 시선을 받는다는 점에서 림보에 떠오르는 얼굴들은 사회적 시선 하에 놓인 성 소수자들의 위치와도 맞닿아 있다. 그리고 이 글은 그와 같은 시선을 마주하며 벽장에서 걸어 나오는 한 여성의 커밍아웃에 대한 이야기이다.

 

주인공 ‘나’는 여성 성 소수자로 학창시절 여학생과 교제한 적이 있다.

 

좋아해. 정말이야. 손. 팔. 같은 반이면 좋겠다. 어깨. 입술. 우리 이상해. 왜 그래. 너네 진짜 친하다. 왜 이렇게 집에 늦게 들어오니. 온기. 좀비는 따뜻하지 않아. 네가 제일 처음 본 사람은 누구였어. 언젠가는 우리도 바닷속에서 만나게 될까. 뺨. 턱. 가슴. (74)[1]

 

회상조로 쓰여있는 글들은 물러섬도 없이 동성 연애를 하고 있는 여학생들의 모습을 그려낸다. ‘나’는 망설임 없이 “이유가 무엇이든 그 애도 나를 좋아했다”(68)고 선언하며, 두 사람 사이에는 “막연한 동경과 절실한 애정과 불가해한 욕망이” 존재하고 있었다고 이야기한다. ‘나’는 “나와 같은” 여성의 몸을 “궁금해”했고, “살과 살이 닿는 느낌을 알고 싶”어했으며, “마음과 마음이 닿는 듯한 기분 좋은 감각에 푹 잠겼다” (68). 두 사람의 관계는 치기 어린 일탈이나 한 순간의 불장난으로 설명될 수 있는 것 그 이상이었다.

 

그러나 나는 “금기에 매료”되었던(68) 옛 기억들을 “애써 잊”고(74) “유년기를 마산앞바다에 버리고 상경”한다(77). 이제는 기억 속 연인의 이름이 은경인지 은영인지 헷갈릴 정도로 ‘나’의 정체성을 정의해 주었던 청소년기는 나에게서 멀어진 상태이다. ‘나’가 여자 후배인 지원의 구애에 확답을 주지 못하고 망설이고 있는 것은, 아마도 이와 같은 자신의 정체성을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자신이 림보의 그 얼굴들처럼 타인들의 시선에 노출되는 상태가 되는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다. 그리고 그와 같은 두려움은, 동성연애자들을 “정신병자”로 부르는 어머니와의 대화에서 겪게 되는 “찰나의 은밀하고 아득한 좌절감”에서 야기된다(75-6).

 

하지만 정소연의 소설은 ‘나’를 그 자리에 머물러 있도록 두지 않는다. 폭우가 내린 마산, 피해자들의 목록에서 은영이라는 이름을 발견하고 불안한 마음에 마산으로 내려간 ‘나’는 동성연애자로 살았던 과거를 완전히 내려놓지도, 떠나오지도 않는다. 다시 마주 선 마산앞바다에서 그녀는 자신이 억지로 지우려 했던 기억들과 정면으로 마주하며, 자신이 얼마나 많은 기억들을 인위적으로 짓누르고 있었는지 자각하고 “물벼락을 맞은 듯 정신이 번쩍” 깨어난다(81). 그리고는 “거울을 꺼내 들여다”보며 자신의 정체성을 포용하고, “시멘트 벽 밖으로, 밖으로 발을 옮”긴다(84).

 

선명하게 떠오르는 림보의 얼굴들은 지원의 말대로 무섭지만 “어쩔 수 없는” 것이다(82). 평생 받아야 하는 사회적인 시선들도 두렵지만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정체성은 주어지는 것이지만 그와 같은 정체성으로 살겠다는 결심은 개인의 선택이다. ‘나’는 “걸어다니는 커밍아웃”(82)이라는 후배 지원의 마음을 받아들이며 다시 한 번 성 소수자로서의 인생을 '선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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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해 너무나 너무나 담푸스 그림책 6
저스틴 리처드슨 외 글, 헨리 콜 그림, 강이경 옮김 / 담푸스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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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물들의 동성애는 매우 '자연스러운' 현상이며, 그중에서 동성애를 하는 펭귄들은 1911년에 최초로 발견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미국 뉴욕 시의 센트럴파크 동물원에서 일어난 실화를 바탕으로 한 이 그림책은 가족을 이루기 위해서 가장 기본적으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다. 이곳에는 '엄마, 아빠, 털북숭이 새끼들로 이루어진 애기판다 가족도 있고, 아기원숭이들을 키우는 아빠원숭이와 엄마원숭이도 있(p.6)'으며 '두꺼비 가족도 있고, 큰부리새 가족도 있고, 목화머리타마린 가족도 있(p.6)'다. 하지만 이곳에는 '조금 다른 펭귄도 두 마리 있(p.10)'다. 이곳에 있는 대부분의 펭귄들은 암컷과 수컷이 짝을 짓는데, '로이'와 '실로'라는 이름을 가진 두 수컷 펭귄이 서로 짝을 지은 것이다.

 

같이 절도 하고.

같이 걷고,

같이 노래하고,

같이 헤엄쳤어요. 로이가 가는 데마다 실로도 따라 갔어요.

(…)

로이와 실로는 암컷들하곤 별로 놀지 않았어요. 암컷들도 로이와 실로하곤 별로 놀지 않았고요.

로이와 실로는 서로 목을 부비며 놀았어요.

 

 이 작품에서 유일하게 등장하는 인간인 사육사 '그램지 씨'는 이런 둘의 행동을 보며 '서로 사랑하는 게 틀림없어(p.12)'라고 생각한다. 가장 이해받을 수 없을 것 같은 다른 종족의 동물에게서 이 두 펭귄은 이해를 받은 것이다. 이 이해자는 새끼를 갖고 싶어하는 로이와 실로의 행동을 보고, '한 가지 생각을 해(p.20)'낸다. 보살펴줘야 하는 알을 찾아내 로이와 실로의 둥지에 몰래 놓아둔 것이다. 그리고 둘의 정성어린 돌봄 끝에, "삐익! 삐익!(p.24)"하는 소리와 함께 '둘만의 아기(p.26)'가 태어난다. 여기에 이해자 그램지 씨는 이렇게 말한다.

 

"아기 이름을 탱고라고 짓자꾸나. 탱고는 혼자선 출 수 없는 춤이니까."

 

 '동물원에서 아빠가 둘인 펭귄은 탱고가 처음이었(p.27)'지만, 로이와 실로는 다른 펭귄 가족들처럼 탱고를 데리고 나가 헤엄을 치고, 서로 꼭 끌어안고 잔다. '다른 펭귄 가족들처럼, 동물원에 사는 다른 동물 가족들처럼, 큰 도시에 사는 모든 가족들처럼 말이(p.31)'다.

 

 이 가슴 따뜻한 이야기를 읽은 뒤, 우리는 작가의 말을 꼭 읽어야 한다.

 

센트럴파크 동물원에 가면 탱고와 탱고의 아빠들이 니퍼, 스쿼크, 찰리, 와사비, 피위 같은 친구들과 함께 첨벙거리며 노는 걸 볼 수 있어요. 센트럴파크 동물원에는 턱끈펭귄 마흔두 마리가 살고 있고, 전 세계에는 천만 마리가 넘게 살고 있어요.

하지만 탱고는 이 세상에 딱 하나뿐이죠.

 

 하나의 가족을 이루기 위해서 기본적으로 필요한 건 딱 한 가지다. 바로 사랑, 그것뿐이다. 하지만 로이와 실로의 사례에서 우리가 가장 중요하게 눈여겨봐야 할 것은 바로 그램지 씨라는 이해자다. 그램지 씨는 로이와 실로의 사랑을 인정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들이 그토록 갖고 싶어 했던 가족을 만들어주는 데 도움을 줬다. '동성 결혼 합법화 반대'와 같은 슬로건이 떠도는 세상에서, 가족을 우리고 싶은 퀴어들에게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이해자다. 이런 이해자가 꼭 같은 퀴어일 필요는 없다. 퀴어든 헤테로든, 우리는 서로를 이해할 수 있고 그들에게 세상에서 딱 하나뿐인 가족을 만들어줄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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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무덤에서 춤을 추어라
에이단 체임버스 지음, 고정아 옮김 / 생각과느낌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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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퀴어라는 단어는 마치 첫사랑의 상징이라도 되는 것처럼 많은 퀴어소설(이라고 불리는 것들)에서 서술되어왔다. 필자가 리뷰했던 성석제의 <첫사랑>(http://www.rainbowbookmark.com/xe/review/7289), 무라카미 하루키의 <스푸트니크의 연인>(http://www.rainbowbookmark.com/xe/review/4435)과 같은 책들이 그렇다.

 그러나 이 소설은 어마어마한 임팩트를 주는 것치고는 위의 것들만큼 퀴어니스를 뽐내고 있지 않았다. (오히려 이것을 '청소년 소설'이라고 분류하는 글들을 보면서 오싹했다. 청소년의 필자가 읽었다면 멘탈이 조각조각 박살났을 것 같다.) 그래서 우리가 알고 있던 ‘첫’, 우악스런 애정의 횡포를 맞서 바라보기로 했다.

 

 

 

 아마도 나는 그를 사랑했던 것 같다. 그렇다고 생각했다. 내가 사랑이라는 말을 이해하는 만큼은.

 사람들은 그걸 어떻게 알까? 나는 나한테 그런 일이 일어나면 금방 알 줄 알았다. 아무런 의문도 품지 않고 곧바로. 하지만 내가 분명히 알았던 건 만나고 또 만나도 부족하다는 것뿐이었다. 나는 언제와 그와 함께 있고 싶었다. 그런데 그와 함께 있어도 충분하지 않았다. 그를 보고 싶었고, 만지고 싶었고, 그의 손길을 느끼고 싶었고, 그의 말소리를 듣고 싶었다. 그에게 이야기를 하고 싶었고, 그와 함께 많은 일을 하고 싶었다. 언제나. 231p

 

 

 

 실패의 경험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안겨준다. 그것이 어떤 실패이든, 같은 실패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내면의 우리는 무의식적인 노력을 일삼게 된다.

 헨리의 연인이었던 배리는 나를 그저 한시 한때 스쳐가는 인연으로 대하는 것처럼 보인다. 적어도 헨리의 서술에 따르면 그렇다. 배리는 ‘자유롭고’(멋진 연인을 열망하는 눈먼 심정으로는 자유롭다는 표현만큼 맞아떨어지는 것이 없다), 멋지고, 냉혹하다.

 이 소설이 배리의 관점에서 쓰였다면 배리가 헨리를 사랑하지 않았다고 단정지어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사랑은 흔적과 같다. 어떤 자리에 변함없이 누군가를, 혹은 수많은 이들을 초대하여 앉을자리를 마련해준 것과 같다. 짐작컨대 배리에게는 어떠한 경험이 있을 것이다. 헨리는 그 흔적을 쫓는 인물이다.

 안타깝게도 ‘흥미’는 추종을 향할 때 오래가지 못한다.

 

 

 

 “네가 원한 건 배리가 아니었어. 네가 원한 건 배리라는 관념이야. 왜냐면 배리는 네가 생각한 그런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실제로는 배리도 너만큼 겁이 많았어. 아니면 나만큼. 아니면 대부분의 사람들만큼. 그렇지 않은 것처럼 행동했을 뿐이야. 연기를 잘한 거지. 너한테만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도. 내가 볼 때 너는 그저 배리의 얼굴과 몸에 반해 놓고, 거기다 네가 원하는 사람의 관념을 뒤집어씌운 거야.” 368p

 

 

 

 많은 경우 첫 실패는 바로 ‘언제나 그와 함께 있고 싶었’던 행동의 말로이다. 로맨스가 찾아올 때면 우리는 곧잘 정신을 잃는다. 끊임없이 함께이고 싶어한다. 그럼에도 첫 실패가 끝까지 실패로 남지 않는 것은 흔적이 남기 때문이다. 득달같은 처음 이후 새 사랑이 시작되면 그제야 내게 남은 흔적을 돌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모든 것을 폭발시킬 수는 없고, 모든 것을 집어삼킬 수도 없다는 것을. 사랑이라는 흔적 위에 죽음이라는 짙은 색이 입혀지면 인과는 더욱 선명해진다. 그래서 헨리는 배리의 무덤 위에서 춤추기 위해 그렇게 애를 썼으리라. 이 사랑을 잘 끝내기 위해.

 

 

 

 세상에서 중요한 단 한 가지는 우리 모두가 어떻게 해서든 우리 자신의 역사에서 탈출하는 것이다. 377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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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너스에게 자음과모음 청소년문학 3
권하은 지음 / 자음과모음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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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번달에도 국내 청소년 퀴어 소설의 리뷰를 쓰려고 한다. 앞서 리뷰를 남겼던 <줄리엣클럽>과 같은 해에 출판된 <비너스에게>의 주인공은 게이이다. <줄리엣클럽>과 <누나가 사랑했든 내가 사랑했든>를 비교하며, '퀴어가 주인공이 되어가는 시간'을 강조한 것은 필자의 실수였다고 생각한다. <비너스에게>는 주인공인 성훈의 삶을 굉장히 역동적인 성장서사로 보여주며 소수자를 보여준다. 역동적인만큼 타자화나 대상화의 위험이 컸다는 것은 <줄리엣클럽>에서도 보였던 아쉬운 점이었다. 하지만 사회적 소수자가 모여 서로의 상처를 이겨나가는 등의 소재들과 주체적으로 사랑을 꾸려나가는 스토리에 큰 의의가 있다고 본다. 여기까지가 간단한 책소개와 전반적인 감상이다.

 

비너스에게.

이제 내가 왜 하필 너에게 편지를 쓰게 됐나 이야기할 차례야. - 59p

 

 초반의 성훈은 자신의 성적지향을 부정하며 아이들에게 자신의 이성교제를 과시하던 '디나이얼 게이'였다. 그리고 학교 선배인 '군'을 만나며 지독한 짝사랑을 앓고, 그 일련의 감정과 실수는 소설의 첫머리를 충격으로 장식한다. 파노라마처럼 지나가는 스토리 안에서 작가는 혐오를 굉장히 자세하고 생생하게 서술해냈다.

 소설은 주인공의 일기 형식으로 이어진다. 마치 안네의 일기처럼, 주인공인 성훈은 상담가 '양나'의 추천으로 편지 형식의 일기를 쓰게 된다. 모두를 사랑할 수 있는 여신인 비너스에게 남기는 편지인 만큼 성훈의 일기엔 사랑의 감정이 유독 짙게 묻어있다.

 

비너스. 그건 무척 이상한 기분이었어. 내게 뭔가 끔찍한 문제라도 있는 양 취급을 받다, 갑자기 가장 정상적인 존재가 돼버리는 것 말이야. - 122p

 

 성훈은 상담소의 아이들을 만나며 새로운 이야기들을 전개해나간다. 여기서 개인적으로 아쉬웠던 점은 소재의 가벼움이었다. 대마초를 피우던 아이, 학교폭력 피해자인 아이들이 묘사되는 방식이나, '정상'이라는 단어를 반복적으로 쓰는 성훈의 태도가 걸렸다. 말고도 역동적인 스토리를 위해 움직이는 아이들이 실제 청소년의 시각에서는 부자연스럽게 느껴지는 것. 여기까진 대부분의 청소년 소설에서 보이는 점이다. 모든 작품이 그런 것은 아니지만, 어른의 시점에서 보는 청소년의 성장기는 조금 판타지스럽다고 감히 이야기해본다.

 

사람에게는 그런 게 있어. 가지기 어려운 것일수록 쉽게 가질 수도 있다고 끊임없이 자기 암시를 하게 되지. 그러니까, 그때의 나는 그야말로 엉망진창, 누구든 나를 원하기만 하면 거리낌 없이 섹스했어. - 102p

 

 소설 속에서 결핍을 겪고 성장하는 인물은 성훈과 다른 아이들 뿐이 아니다. 양나는 현재의 애인, 현신은 과거를 통해 결핍을 드러낸다. 다행인 것은 이성애자인 성훈의 엄마에게도 그런 결핍이 서술된다는 점이다. 앞 뒤 자르고 읽는다면 호모포빅으로 봐도 무방했을 것이다. 다소 예민한 소재였지만, 국내 청소년 소설이라는 점에서 소설에 종종 등장하는 섹슈얼한 소재를 높게 산다.

 

 

"그래. 난 아쉽게도 바이가 아니야. 바이면 얼마나 좋겠니. 남녀 가릴 것 없이 정말 좋은 인간과 사랑할 수 있잖아." - 129p

"나는 우리 가족에게 자신의 한계를 넓혀보라고 요구하고 싶지 않아. 너무 사랑하고 있으니까." - 202p

나는 그 파티에서 나온 많은 말들이 일반적인 사회에서 통용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고, 심지어는 내 친한 친구 영무와도 절대 나눌 수 없다는 것을 알아. - 258p

 

 소설이 쓰인 시점에서 몇 년이 지난 지금, 몇가지 더 아쉬운 점이 있다면 다른 성적지향에 대한 이해과 커밍아웃에 관한 것들이었다. 어제가 바이섹슈얼 프라이드 데이였던 만큼 위 문장을 지적해본다. 퀴어 내에서도 이루어지고 있는 바이 혐오를 겪는 당사자 입장에서는 영 좋지 않은 문장이었다. 낭만화는 대상화, 곧 혐오의 일종이기 때문이다. 커밍아웃에 관한 현신의 발언도 달갑지는 않았다. 굳이 소설 속에서까지 이해받지 못하는 것을 합리화하고싶지 않았던 걸지도 모르겠다. 성소수자를 떠나 타인을 완벽히 이해할 수 없다는 것도, 이해한지 못한다고 해서 행복한 시간이 존재한다는 것은 누구라도 그렇게 말할 수 있다고 본다.

 

 리뷰의 끝이 다가오니 말해본다. 작품은 충분히 의의를 가지고 있지만, 현재를 살아가는 청소년 퀴어 당사자 입장에서는 불편한 점이 많았다. 커밍아웃에 대해 수차례 고민하며 비성소수자 친구들과도 많은 얘기를 나누는 입장에서 나오는 불편함이었다. 그만큼 한국 사회의 퀴어 인식이 빠르게 발전하고 있다고 봐도 무방하다고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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