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려지지 않은 예술가의 눈물과 자이툰 파스타
박상영 지음 / 문학동네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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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은 주인공인 '박감독'의 일상으로부터 시작된다. K감독 회고전의 GV에 초대된 그는 메인 게스트인 '오감독'의 들러리 역할을 부탁받았다. 주인공에 의하면 오감독이라는 인물은 아이돌과의 염문설을 흘리며 가짜 게이 힙스터 행세를 하는 재수없는 놈이었다. 상영되는 영화를 보는 동안, 박감독은 자신의 친구인 '왕샤'의 어깨에 기대어 졸기 시작한다. 샤넬 향수를 고집하는 그와는 자이툰 부대에서 처음 만난 사이였다. 그저 편한 친구와도 같은 모습으로 등장한 그와의 추억은 마치 베일을 벗기듯 회상된다. 

 

동성애를 훈장처럼 전시하지도, 대상화해 신파로 소모해버리지도 않는 순도 백 퍼센트의 퀴어 영화를 만들리라. - 201p

 

영화과를 다니던 주인공은 원대한 꿈을 지니고 있었다. 한국에서 개봉하는 퀴어 영화를 꼬박꼬박 챙겨보고, 실망을 거듭하면서 얻은 다짐이었다. 예술계에 종사하는 퀴어들의 마음과 목표는 비슷한게 아닐까. 어떤 장르이든 퀴어를 다룬 작품들은 비퀴어를 다룬 작품과 쪽수에서부터 큰 차이가 있다. 비퀴어, 이성애자들은 마치 인간의 디폴트로 지정되기 때문이다. 여기서 퀴어를 소재로 하는, 퀴어 등장인물이 등장하는 예술작품을 구상할 때 흔히 겪는 딜레마가 있다. 대상화의 기준은 뭔지, 비퀴어 영화와 뭐가 달라야 하는지. 절절한 신파로 퀴어를 소비하면 이젠 진부하고도 대상화 낭낭한 작품이 탄생하고, 그렇다고 퀴어인 인물이 평범하게 살아가는 작품을 접한 사람들은 굳이 등장인물이 퀴어였을 '필요'가 있었냐고 물어본다. 더 나아가 별 볼일 없는 작품을 특별하게 포장하기 위해 퀴어인 인물을 집어넣은게 아니냐는 혐의도 지목된다. 그래서 퀴어는 어떻게 다뤄야 하는데?!

 

박감독 세대는 어떨지 모르겠는데, 우리가 느끼기에는 그렇게 별 고통 없이 정체성을 받아들이는 인물이 동성애자인 게 너무 이상하고 어색하게 느껴진다고. 너무 나이브하지 않나, 사회적으로 고립된 소수자들이 왜 그런 말투를 쓰는 건지. - 221p

 

가짜 게이 행세를 한다고 소개되던(?) 오감독은 위와 같은 발언을 한다. '사회적으로 고립된 소수자들'이면 발랄한 말투도 쓰면 안되는 것인가. '별 고통 없이 정체성을 받아들이는 인물이 동성애자인 게' 어째서 이상하고 어색하게 느껴지는 것인가. 게다가 오감독의 영화줄거리는 정말, 흉물이었다. 고통과 신파, 아무튼 고통!

 

그의 논리에 따르면 영화 속에 퀴어를 등장시키려면 무조건 합당한, 그러니까 보통의 사람들을 설득할 수 있는 치명적인 '지점'이 있어야 하는 거였다. - 222p

 

왜 성소수자가 자신의 고통을 설명해야할까. 얼마 전 퀴어포빅한 페이스북 게시글에 달린 (더) 퀴어포빅한 댓글을 본 적 있다. '게이들의 성생활'에 치료와 위생교육이 필요하다며 정성껏 영상까지 첨부한 댓글이었다. 그에게 남성 동성애자란 에이즈의 주범이고 나이를 먹으면 항문이 늘어나 변을 흘리는 존재였다. 자신은 혐오를 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위한 주장을 가져온 것이라며 우겼다. 오감독의 논리는 그 댓글과 별로 다르지 않았다. 그의 세상에서 동성애자란 '매일 술을 마시고. 약에 취해 익명의 남자들과 섹스를 하'는 비참한 게이들인 것이다.

 

닥치세요. 제발.

지금 뭐라고 했어.

닥치라고 씨발.

어디서 욕질이야. 어린놈의 새끼가.

- 223p

 

그리고 우리에겐 독자를 대신해 오감독에게 한 방 먹이고, 소소한 복수를 해주는 주인공이 있다. 소소해서 눈물겨운 복수이다. 그는 아무것도 아니다. 포부가 대단한 예술가 지망생은 소설 속에도, 소설 밖에도 널려있었다.

 

자기 연민이나 광기가 예술의 조건이었다면 우리는 이미 세계적인 예술가가 됐어야 했다. - 244p

 

유쾌한 실패자의 얘기는 언제 읽어도 재밌고 불안하다. 문학동네 가을호에 실린 이 소설과 함께, 릿터 7호(8/9)에도 같은 작가의 짤막한 소설이 실려있었다. 오랜만에 공감대를 자극하면서 시원시원하게 진행되는 스토리의 단편을 읽을 수 있어 정말 즐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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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들의 학교
박민정 지음 / 문학동네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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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가까운 사람들의 두 가지 결혼 소식을 들었다. 시스젠더 이성애자 동창의 대규모 결혼식과, 레즈비언 커플의 캐나다 이민 결혼이었다. 모두 축하할 일이다. 그럼에도 후자 쪽에 조금 더 감동하고 만다. 아직까지는 그렇다. 나는 비혼주의자에 가깝지만 결혼을 선택할 수 있는 권리는 인간의 기본권이라고 믿는다. 동성결혼 합법화를 포함한 퀴어들의 다양한 가족구성권은 결승점이 아니라 출발점이다. 당연한 얘기다. 하지만 이 당연한 이야기가 소설 속에서는 거의 얘기되지 않았다. 퀴어문학 속의 가족들은 대체로 단단하게 사랑했고 외부에서만 공격받았다. 이렇게나 ‘건강’하고 아름다운 가족이 왜 인정받지 못하는가. 그런 방식으로 호소했다.

 

  퀴어문학에도 단계라는 것이 있다면 정체성 인정을 호소하는 것에서 나아가, 퀴어 정체성이 사회에서 소비되는 방식을 집요하게 탐구하는 이야기가 필요하다. 그래서 박민정의 단편 소설 「아내들의 학교」는 지금에 꼭 걸맞게 느껴진다. 소설은 동성혼 합법화가 이루어진 근미래를 다룬다. 고등학교 때부터 사귀어온 레즈비언 커플 ‘선’과 ‘설혜’는 결혼한 사이로, 입양한 아이 하나가 있다. 선은 늦깎이 중고 신인으로서 모델 서바이벌 프로그램에 출연하고 있다. 가정주부 설혜는 집에서 아이와 함께 그 광경을 보고, 여유 있는 어머니들의 모임인 단미 협동조합에 나가는 것이 주요 일과다. 설혜는 충실한 ‘아내의 역할’을 수행한다. 누구도 배우자의 성별을 중시하지 않는다. 이 세계에는 직접적인 혐오 발언이 없다. 이제 혐오는 보다 미시적이고 ‘세련된’ 방식으로 바뀌었다.

 

  먼저 선의 경우를 보자. 여기서도 TV는 자기가 가장 잘하는 것을 한다. “평범화가 비극을 누르는 승리.”(필립 로스) 나이가 많은 모델은 이미 퇴물 취급을 받는다. 선의 가장 아름다운 개성인 붉은 머리카락이 검게 물들어지고 잘려나간다. 눈물을 흘리는 선에게 프로답지 못하다는 비난이 쏟아진다. 선이 점점 우승에 가까워진다. 그 꿈을 이루기 위해 선은 설혜와 아이를 방송에 출연시키기로 한다. 퀴어 가족의 특수성은 대중이 열광할 만한 드라마다. ‘우리가 이렇게 열심히 살고 있습니다, 우리 같은 사람들에게 힘이 되고 싶습니다.’

 

  그리고 설혜의 이야기. 설혜는 늘 평범한 사람이었다. 인생에서 가장 특별한 경험은 선의 연인으로 살아왔다는 사실이다. 반면 설혜에겐 부자 부모가 있다. 아르바이트 한 번을 하지 않고 살았다. 그런 설혜가 대학에서 여성주의를 지향하는 여학생회 활동을 했다. 여학생회 언니들은 가난하지 않은 설혜는 약자가 아니라고 말했다. 너 자신을 부끄러워하지 말라며 다큐멘터리 카메라 앞에 설혜를 세우기도 했다. 설혜는 지금도 그들을 만난다. 여성주의를 공부하며 모성을 다소 경멸했다. 하지만 설혜는 늘 아이를 키우고 싶었다. 그런 자신을 이해할 수 없었다.

 

  박민정 소설은 이렇게 꼼꼼하게 흔들린다. 틈틈이 들여다본다. "이야기에 들어맞지 않는 것, 이야기가 없는 것, 거의 존재하지 않는 듯한 사슬의 환한 반짝임. 살아 있는 모든 존재를 서로 단절시키는 외로움."(도나 타트) 그동안 여성주의 모임, 퀴어 가족은 늘 ‘올바른’ 쪽이었다. 이것은 물론 정치적인 기획이며 잘 짜인 거짓말이다. 같은 곳을 바라보더라도 몸은 부딪친다. 여러 곳에서 흘러온 물이 고이면 썩는다. 집단은 폭력적이다. 가장 바른 곳에서조차 개인은 다친다. 더욱이 자본이 개인을 앞서는 사회다. 꿈을 이루고 싶다는 소망, 가족을 꾸리고 싶다는 욕망, 존재를 인정받고 싶다는 희망. 이것은 "얼마나 자본과 관련한 비자본적인 일일까."(김현) 이것이 바로 좋은 페미니즘/퀴어 서적조차 놓칠 수 있는 진실, 소설만이 담아낼 수 있는 이야기다.

 

  나는 퀴어가 규범과 끊임없이 대척하면서 규범을 질문하는 존재라는 정의에 동의한다. 이 소설의 주인공은 일차적으로 레즈비언 커플이기에 퀴어하다. 한편 ‘정상가족’과 가정 내 성역할이라는 규범에 가까이 다가갔다는 점에서 반-퀴어하다. 하지만 동시에, 성정체성과 ‘정상 가족’ 규범 사이에 벌어지는 충돌을 경험하며 첨예하게 질문하고 있다는 점에서 궁극적으로 퀴어하다. 규범과 존재 사이의 충돌을 이렇게까지 세세히 그려낸 작품은 많지 않았다.

 

  그렇다. 박민정 소설은 동성화 합법화 이후의 세계를 다룬다. 이 설정은 누군가에게 유토피아일지 모르겠다. "그래, 이렇게 좋아진 세상에서 너희들이 더 당당하게 살 수 있으리라고도 생각해. 꼭 결혼해라, 네가 원했던 유토피아가 왔으니까." 라는 여학생회 선배의 문자를 보고 설혜는 분노한다. 분노했다. 지금 설혜는 퀴어 가족으로 적극적으로 소비될 방송 촬영을 준비한다.

 

  퀴어 가족을 이야기할 때 우리는 축복어린 결혼식, 맞잡은 손, 서약의 키스를 상상한다. 우리는 그런 이미지를 소비한다. 척박한 현실에서 이것은 매혹적이다. 유혹을 꿈으로 짜깁기해 입는 것은 나쁜 일이 아니다. 다만 그것은 쉽다. 하지만 의심하는 것은 어렵다. 그 어려운 일을 이 소설은 한다. 열심히 한다. 작가는 “공동체를 갈등 없는 유토피아로 그릴 수는 없다”고 말했다.[1] 나는 최선을 다해 의심하는 이 작가를, 최선을 다해 신뢰하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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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키스하게 놔둬요 큐큐클래식
사포 외 지음, 황인찬 엮음, 이성옥 외 옮김 / 큐큐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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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키스하게 놔둬요>는 국내에서 최초로 출간된 퀴어 시선집이다. 흔히 알려진 오스카 와일드, 아르튀르 랭보부터 각국 LGBT 작가 서른 아홉명의 사랑시 75편을 엮었다. 오랫동안 폄하되거나 지워지고 죄악시 되어온 '또 다른 사랑'의 절절함을 다룬 시편들은 남다른 감성을 지니고 있다. '또 다른 사랑'이라는 표현이 지극히 이성애중심적이라는 지적에서 시작해 '사랑'이라는 관념을 파괴한 뒤 재구성 하기에 이르는 황인찬 시인의 서문도 인상적이다.

 

퀴어 문학은 사랑을 재현하지 않고, 사랑을 파괴한다. 그리고 그 파괴를 통해 사랑을 재구성한다. (…) 나는 이 책을 통해 우리가 '사랑'이라는 관념을 다시 사유할 기회를 갖기 바라며, 동시에 그것을 전복하고 전유할 수 있기를 바란다.

- 황인찬, 서문 <또 다른 사랑을 넘어서>

 

 시집의 내용은 전반적으로 해외 작품의 번역서임에도 불구하고 풍부한 어휘와 가독성을 겸비하고 있다. 다양한 시대와 상황을 관통하는 '퀴어적 정서'도 이 작품들을 엮는 요소의 핵심이다. 그저 단순한 '금지된 사랑' 등의 애절함이 아닌, 실존하는 사회 속 성소수자가 연인에게 느낄만한 사소한 감정이 섬세한 어투 속에 스며들어있다.

 

아니, 우리가 키스하게 놔둬요,

이 저녁의 고통 속에서 단지 키스뿐이에요.

- 안토니오 보토, <소년>

 

 시선집의 마지막에 실린 작가 소개는 책에 실린 작품을 집필한 작가들의 생을 옅볼 수 있다. 성소수자라는 이유로 지워지곤 했던 생의 일면이 작가이자 성소수자였던 그들의 문장과 목소리를 더욱 생생하게 접해볼 수 있는 요소로 작용한다. 애절하거나 절박할 수도, 애잔하거나 욕망하거나 발랄할 수도 있는 퀴어 시집을 찾는다면 강력히 추천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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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지는 곳으로 오늘의 젊은 작가 16
최진영 지음 / 민음사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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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라는 상투

 

  나는 로맨스를 싫어한다. 사랑 이야기는 진부하다. 추측컨대 남성 중심적인 시스-이성애 연애서사에 질린 모양이다. 사랑이란 단어만 들어도 약간 이골이 난다. 사랑은 타인에 대한 복잡 미묘한 감정을 응시하지 않으려는 사람이 손쉽게 선택한 언어라고 생각한다. 사랑이라는 말은 어딘지 매끈한 표백제 냄새를 풍긴다. 나는 사랑을 도무지 모르겠고, 사랑을 좀처럼 사랑할 수가 없다.

 

  최진영의 소설 <해가 지는 곳으로>는 “사랑해.” 라는 세 음절의 단어로 끝난다. 정체불명의 바이러스로 인해 인류가 죽어가는 세계를 배경으로 한 작품이다. 이렇게 마지막을 그리는 소설의 마지막이 사랑이다. 그렇다. <해가 지는 곳으로>는 포스트-아포칼립스 소설이라기보다 사랑 소설이다. 그래서 포스트-아포칼립스라는 설정만을 보고 최진영 소설을 선택한다면 SF 장르로서는 아쉬울 수 있다는 평가[1]는 충분히 수긍할 만하다. 반면 “사랑은 남는다.”라는 작가의 말에 감동할 독자라면 이 끈질긴 사랑 이야기에 깊이 공감할 것이다. 무너질 것이다. 무너지며 사랑할 것이다.

 

  사랑이 사라질 때를 상상할 수 있다면 사랑하기는 쉽다. 영국의 소설가 G. K. 체스터튼의 말이다. 세계 전체가 죽음으로 허물어지는 곳에서 주인공들은 삶을 다시 응시한다. 삶의 의미, 그 깊숙한 곳에서 그들은 사랑을 채굴한다. 바이러스가 퍼지기 전 ‘류’는 남편과 아이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거의 하지 않았다. “힘들어 죽겠다는 말로 죽음을 밀어”(99쪽)내는 한국의 도돌이표 같은 삶과 달리, 종말 직전에야 류는 ‘소중한 사람을 미루지 않는’ 삶을 살게 된다. 한편 소년 ‘건지’는 한국에서 언제나 폭력의 피해자였다. 집에서도 학교에서도 맞았다. 바이러스가 퍼진 후 유일한 친구이자 구원자인 ‘도리’를 따라 러시아로 왔다. 건지는 도리를 사랑한다. 도리와 헤어진 후, 건지는 도리를 다시 보고 싶다는 마음으로 생존해간다. 한국에서 건지는 늘 죽고 싶다고 생각했다. 이제 건지에게 삶은 ‘좋은 것을, 소중한 것을, 내 중심에 있는 이것을 지키는’ 것이다.

 

  이렇게 죽음이 드리워진 곳에서 삶을 구원한다. 사랑을 이야기한다. 상투적이다. 그러나 사랑이 진부하다고 말할 때 그것은 내가 사랑을 이미 너무 많이 접했다는 뜻이다. 나의 인생이 죽음보다 삶에, 증오보다 사랑에 가깝다는 뜻이다. 상투적이라는 평가는 권력이다. 그래서 두려워진다. 사랑이 진부하다는 태도를 반복하다보면 언젠가 사랑을 입에 담지 못하는 순간이 오지 않을까. 바이러스 없는 여기, 한국. 사랑이 조금씩 죽어가고 있다.

 

 

사랑이라는 사인(死因)

 

  뿔에 대한 시를 쓴 적이 있다. (시를 모르기에 시를 쓸 수 있던 시기가 나에게도 있었다.) 무릎에 뿔이 달린 사람의 이야기다. 걷기만 해도 사람이 다친다. 무릎을 꿇거나 엎드려 빌 줄도 모른다. 이 자화상은 오만하고 정확하다. 상대가 누구든 그와 나 사이에는 뿔만큼의 영원한 거리감이 있었다. 스스로의 퀴어 정체성에 자부심보다 두려움이 컸을 때고, 그에 대한 반동처럼 누구도 다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꿈이 지금보다도 강했을 때다.

 

  만약 그때 <해가 지는 곳으로>의 도리와 지나를 만났다면 나는 조금 변할 수 있었을까? 도리는 지나의 빨간색 머리를 보자마자 한눈에 사로잡힌다. 둘은 사랑한다. 처음 키스를 한 순간, “추위도 허기도 불행도 재앙도 모두 우리의 키스에 놀라 자취를 감춰 버렸다.”(58쪽) 둘은, 이 엄청난 풍경 속에서, 사랑을 한다. 지금 나는 시금치를 처음 입에 넣어보는 아이처럼 일부러 사랑, 사랑, 사랑을 곱씹고 있다. 다행히 최진영은 체하지 않도록 등을 도닥일 줄 아는 작가다. 잔혹한 풍경과 아득한 사랑도 그의 글에서는 부드러운 미음으로 섞인다.

 

  퀴어 인물을 그려낼 때도 마찬가지다. “모든 사랑은 특별하면서도 평범”하기에 도리와 지나의 사랑 역시 “모두의 사랑 중에 하나”로 그려냈다는 작가의 말[2]에서처럼, 도리와 지나의 사랑은 도리와 지나의 사랑일 뿐이다. 다분히 특수하면서도 어딘지 무성적인 둘의 사랑에 강하게 매혹될 독자들도 많을 것이다. 사랑에 빠진 것이 (우연히) 두 소녀라는 표면적인 사실을 제외하면 이 소설은 퀴어 소설로 느껴지지 않는다. 사실 나는 퀴어의 사랑이 ‘다를 게 하나 없다’는 태도가 위험하고 시혜적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모든 사랑은 다르다. 하지만 ‘퀴어이기에 다른’ 지점을 다양하게 이야기하는 소설이 지금 우리에게 많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아마 <해가 지는 곳으로>는 이 부분을 이야기하는 대신, 그저 사랑일 뿐인 도리와 지나의 모습을 보여주는 데 집중하기로 한 것 같다.

 

  한 장면을 보자. 혼란 통에 헤어졌던 도리와 지나가 다시 만나 키스를 한다. 강제 수용된 수많은 사람들에 둘러싸인 상태다. 누군가 둘에게 욕을 하며 침을 뱉는다. 그러나 침을 뱉는 자들은 퀴어-포비아라기보다 사랑-포비아 같다. 소설 속 세상은 이미 아비규환이다. 생존에 집중하면서 삶은 오히려 죽음보다 추해진다. 약한 자에 대한 폭력이 난무한다. 바이러스가 사람들을 죽음으로 내모는, 러시아. 멀고 먼 배경임에도, 사랑이 사어(死語)가 되는 이 풍경은 낯설지만은 않다. 도리와 지나는 사랑이 소거된 곳에서 사랑을 하는, (성적 지향이나 성별과 상관없이) 아주 이질적인 존재다.

 

  소설이 시작할 무렵에 인물들은 사랑을 지키기 위해서는 살아야겠다고 생각했었다. 이때 죽음은 사랑의 대척점이다. 죽지 않고 함께 살아갈 것(건지). 살아서 사랑할 것(도리와 지나). 더 많이 사랑한다고 얘기할 것(류). 하지만 점차 죽음이 아닌 삶이 사랑을 방해하는 상황으로 변해간다. 삶은 억압적인 것, 인정사정 보지 않는 것, 결국 파괴적이고 살인적인 것과 분리될 수 없다(아도르노). 삶에 대한 숭배는 사랑을 죽인다. 그래서 일련의 포스트-아포칼립스 소설과 달리 이 소설의 핵심은 주인공들의 생존 여부가 아니다. 삶보다 사랑이 중요하다. 남겨지는 삶보다 함께하는 죽음이 나을지 모른다. 소설의 결말에서 도리와 건지는 ‘우리’라는 이름으로 하나가 된 채, 삶과 죽음이 모호한 채로 “사랑해.” 라는 세 음절만을 남기고 함께 출발한다. 둘은 어디로 갔을까. 어디든 상관없다. 둘은 함께이고, 둘은 사랑을 한다. “나는 너와 사인(死因)이 같았으면 한다”(박준)고 말한 시인이 있었다. 이들의 사인은 사랑이다.

 

 

[1] 듀나, 「그들은 어떻게 러시아로 갔을까… ’한국 SF의 핸디캡’」

http://news.bookdb.co.kr/bdb/Column.do?_method=ColumnDetail&sc.webzNo=30070#

[2] 반디앤루니스 작가인터뷰: 『해가 지는 곳으로』 최진영 소설가 “무너지는 세계, 당신은 어디로 가고 있나요”

    http://blog.bandinlunis.com/bandi_blog/document/459597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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똑똑한 마카롱 씨
디디에 반 코뵐라르트 지음, 이혜정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17년 3월
평점 :
절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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