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통과한 밤
기준영 지음 / 문학동네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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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어떤 모습을 보고있는 것일까. 그 사람은 나의 어떤 모습을 사랑할까. 내가 가진 모든 모습을, 그 사람이 가진 모든 모습을 우리는 사랑할 수 있을까. 연애를 하다 보면 문득 갖게 되는 의문들이다. 나는 그 사람에게 조잘조잘 내 이야기를 하는 쾌활한 사람이고 싶다가도, 가만히 말을 들어주는 친절한 사람이고 싶고, 때로는 둘 다 해내지 못하는 우울한 사람이 되기도 한다. 이 모든 모습이 나이기도 하면서, 어느 것 하나 내 모습으로 특정 지을 순 없다. 결국 나는 어떤 모습을 보여주고 또 보여주지 않으면서 끊임없는 연극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가 통과한 밤>의 채선과 지연 역시 각자의 일면을 보여주거나 보여주지 않으면서 서로 사랑하고 있다. 지연은 맡은 일을 꼼꼼히 해내는 엘리사벳이 되었다가, 활달한 얼굴을 한 리사가 되기도 하고, 조용하고 단정한 지연이 되기도 한다. 채선 역시 그런 지연에 맞춰 감정을 쉽게 드러내는 마고가 되었다가, 용건만 간단히 하는 무뚝뚝한 채선이 된다.


내가 앉은 자리에서는 거실의 소파 일부가 보였고, 지연이 앉은 자리에서는 유리잔이 진열된 싱크대 위의 선반이 바라보였다. 지연이 내 주의를 끌기 위해 고개를 갸웃하며 “있잖아요’하고 말머리를 길게 끌 때마다 나는 소파 등받이에 걸쳐놓은 지연의 붉은 케이프 자락으로 시선을 미끄러뜨렸다. 그래서 지연은 그때마다 내게 닿지 못한 제 말들이 유리잔들 사이를 배회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을지 모른다. 아니, 그 모든 건 그저 나에게 선택적으로 남아 있는 감각인지도 모르겠다. 그날, 그 저녁 식탁의 분위기를 계속 복기하려는 내 노력이 그 풍경을 끝없이 바라보고 있어서인지도. 어긋남과 이어짐, 따뜻한 음식과 찬 음식, 깨지기 쉬운 것들과 깨지지 않는 것들, 붉은 것과 투명한 것이 공존하는 저녁 어스름의 한 순간.


 채선은 그들이 통과한 밤을 이렇게 기억하고 있다. 드러난 부분과 의도적으로 숨겨진 부분, 숨겨진 것들은 유리잔처럼 투명한 것에 담겨 금방이라도 떨어져 깨질 것 같은 긴장을 만들지만 마냥 불쾌하지만은 않은 긴장감을 준다. 이런 긴장 속에서 채선과 지연은 끊임없이 서로를 탐색하고 마고와 리사와 엘리사벳을 발견해나간다. 그리고 서로의 면면들을 알아가면서, 긴장은 약해지고 관계는 기존의 균형을 잃고 새로운 균형을 쌓아간다.


나는 매 순간 지연의 이야기를 듣기 좋은 자세에 관해 의식했다. 언제나 충분히 부담을 덜어내고 들을 수 있어야 했다. 시소를 타는 것처럼 내 무게로 한 자리를 지켜내면서 오르락내리락 장단을 맞춰주는 것이 최선이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나는 점점 균형을 잃어갔다. 지연이 가라앉아있으면 나도 그리로 떨어져내렸다. 내가 뻗대며 뒤로 물러나면, 지연의 존재, 그에 얽힌 사물과 소리들이 내게로 와르르 쏟아져내렸다. 도망가지 않은 것이 내 실책이자 애착의 지점이 되었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 사람의 세상에 들어가는 일일 것이다. 그 사람의 과거를 듣고 현재를 함께하며 미래를 그려보는 것. 처음에는 긴장 속에서 선택적으로 자신의 모습을 골라 보여주던 채선과 지연도, 사랑하는 연인들이 그러하듯, 서로의 세상에 쏟아져 들어갔다. 결국 채선은 지연의 세상에 들어가 과거의 엘리사벳을 만났고 지금의 리사를 보며 미래의 지연을 그리게 되었다. 그리고 끝내는 그 모든 모습이 지연이고, 자신은 지연의 모든 모습을 사랑하는 것임을 점차 깨달아간다.


 채선과 지연, 그리고 나와 세상에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하는 모든 이들은 결국 끊임없는 연극 속에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렇게 저렇게 나를 보여주면서도 상대방이 보여주는 모습을 이렇게 저렇게 해석하는 이 연극의 끝은 무엇이 될 수 있을까. 모든 이들이 채선과 지연처럼 서로의 무든 것을 보고 그 모두를 사랑하는 연극을 올리지는 못할 것이다. 다만, 소설 초반에 채선이 마지막 연극의 커튼콜을 올리며 느낀 감정과 비슷한 것을 느낄 수 있다면 적어도 해피엔딩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으면서 이런 기분을 느껴본 적이 있다면 그건 분명 괜찮은 연극이다.


손을 눈높이까지 들어 왼쪽에서부터 오른쪽으로, 마치 작은 무지개를 그리듯이. 나를 둘러싼 대기와 내가 일시에 팽창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폐가 부풀어오르고 혈관에 빠르게 피가 돌면서 발끝이 살짝 들리는 기분. 나는 가늘게 휴, 더운 숨을 내뱉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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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씨의 입문
황정은 지음 / 창비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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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입술을 열면 창비시선 418
    김현 지음 / 창비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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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학시절

    청년노동자

    우리들의 하느님 


    박근혜가 대통령이 되었다

    p10 「불온서적」


     


     가만히 앉아 표지를 매만지는 것도 사치스러운 시기에 시집을 샀다. 그리고 딱 두 편을 눈에 새겼다. 시인 김현은 모든 것을 여과 없이 담아낸다. 책을 펼치기 전까진 민감했던 모든 주제도 예외는 없다. 때문에 독자는 여유롭게 실소할 만한 틈이 생긴다. 그게 첫 감상이었다. 어느 순간부터 상상 없이는 시를 못 느꼈기에, 단 두 편을 몇 번이고 반복해서 읽었다. 그러다 강의 시간에 쫓겨 책을 덮어뒀다. 그다음이 재밌다. 단 두 편으로 나는 온종일 웃었다. 끝을 봐야 하는 책이었다.


     하나같이 ‘나’는 없다. 김현의 시에 ‘나’는 없다. 어떤 것이 다른 어떤 것을 향할 뿐이다. 그것은 눈이 되었다가 얼굴이 되었다가, 입술이 된다. 입술이 얼마나 많은 것을 보고 말하고, 느낄 수 있는지 알 수 있다. 또한 만물은 적어도 둘 이상의 기능을 한다며, 김현은 발가락 끝부터 일깨운다. 방식이 직설적일 뿐 그가 언급하는 대상은 물 흐르듯 모양을 시시각각 바꾼다.

      


    여자와 남자는

    가슴 없는 보지와 자지 달린 가슴을 전시한다


    자리마다 투쟁이다

    투쟁은 사회적인 동물이다

    p132 「가슴에 손을 얹고」 중

      


     종교와 세상에 대해 말하는 것. 김현의 시에는 기도와 전前 대통령이 담긴다. 영혼까지 열어 보여주는 듯한 단어만 족족 골라내어 시를 덧입힌다. 시 속에서 그들은 기도하고, 천사가 되고, 예배당에서 또다시 간절하게 기도를 한다. 전 대통령은, 또 세상은 김현을 부추긴다. 불온서적이란 단어를 입술에 올리게 하고 과거를 현실 위에 떠올린다. 시위자에게 물대포를 쐈던 그 날을 끌어올린다. 그 과거를영혼에 동공을 만들어서까지 바라보게 한다. 세상에게 우리는 과거를 직시하고 현재를 살아가는, 아니 싸워나가는 존재기 때문에 김현은 말한다. 종교에게 성 소수자는 존재하노라고 말한다. 성별을 두고 어떤 모습으로든 이 땅에서 발 딛고 살아가고 있다고. 김현은 고한다.


     


    2018년 1월

    빛이 있는 곳에서

    김현

    p211 시인의 말


     


     영혼과 빛. 김현의 시에서 ‘빛’은 그저 시어로 쓰이다가도 말과 위로를 건넨다. 다정하고 따뜻하게 몸을 통과한다. 그것이 참 내가 받은 것도 아닌데 따스하다. 그리고 시인의 말 마지막에 스민 빛은 책의 끝을 알리는 말이 아니었다. 언젠가 빛에 도달한 시인 김현의 곁에 도달하면 이 모든 고통이 매듭지어진다. 종국엔 그렇게 되리라는 김현의 빛 같은 확신이다.


     그리고 김현은 누구에게도 잊힐까 걱정하듯 시 한 편, 한 편 영혼을 언급한다. 그림 하나를 조목조목 뜯어보는데 하필 추상화인 것처럼, 책을 덮기까지 수많은 영혼과 마주해 마음이 고됐다. 하지만 그에 비해 열기는 두 번째로 책을 덮었을 때도 가시질 않았다. 김현에게 영혼을 그러한 것이 아닐까. 괴로워도 결국 마주해야 하는 것. 입술을 열어 꺼내놓아야 비로소 알게 되는 것. 이미 빛에 도달해 영혼을 입에 담고, 흘러 흘러 당신도 이 어려운 걸 담아보라고 이끄는 듯한 단어. 우리는 입술을 열어야 한다. 그것이 곧 추락할 입술일지라도. 어느 순간 마음을 편해질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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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랑무늬영원 - 개정판
    한강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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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이야기로 시작하려고 한다. 

     생일 케익 촛불을 불며 소원을 빌기 시작했을 때부터 내가 빌어온 소원은 줄곧 한 가지였다. 내 주변 사람들이 행복해지게 해주세요. 20년이 넘도록 꾸준하게 빌어왔지만 한낱 바람에 꺼져버리던 촛불은 끝내 그 소원을 이뤄주지 않았다. 소원의 힘으로 행복해지길 바랐던 이들 중 누구는 가족을 잃었고, 또 누구는 꿈을 잃었으며, 몇몇은 나를 떠나갔다. 결국 지독히도 이뤄지지 않던 내 소원을 통해 깨달은 건 한 가지 명료한 사실이다. 

     모두가 각자 몫의 불행을 갖고 살아간다는 것. 

     사람들은 그 명백한 사실을 알면서도 “유리 조각들이 촘촘히 흩어져 박힌 것 같은 침묵” 아래 각자의 불행을 솜씨 좋게 감췄을 뿐이었다. 이제는 그 소원을 포기한 지 오래다.


     <에우로파>의 ‘나’와 인아는 그 불행이 이미 각자의 몫을 초과하기 직전이다. 인아는 6년 간의 불행한 결혼생활을 마친 뒤 깊은 우울증을 겪었다. 다시 일어나 움직일 수 없을 것만 같던 인아는 죽은 화분에서 핀 꽃처럼 기적같이 일어서 가수가 되었다. 한편 ‘나’는 남성의 몸으로 태어났지만 자신이 여성이길 바라는 트랜스젠더이다. 인생을 무기력하고 무관심한 태도로 살아가고 싶은 ‘나’는 셔츠를 입고 넥타이를 맨 회사원으로 살면서도, 인아와 밤산책을 나설 때면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찾고 싶어한다. 그것이 하룻밤의 짧은 순간일지라도 말이다. 

     둘은 이러한 각자의 불행을 서로 공유하면서도 완전히 공유하지 않은 경계선의 관계에 서 있다. ‘나’는 인아가 불행한 결혼생활을 한 것을 알지만, 어떠한 폭력이 있었는지는 알지 못한다. 인아는 ‘나’의 성 정체성을 알고 그것을 실현할 수 있도록 도와주지만, ‘내’가 정말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묻지 않는다. 너무나 잘 알지만 완전히 모든 것을 알지 못하는 관계. 깊지도, 얕지도 않은 그 관계 안에서 인아와 ‘나’는 무던한 듯 위태롭게 하루하루를 보낸다.


    그녀가 나를, 내가 그녀를 깊게 상처 입히리란 것을 알고 있다. 우리 산책이 영원하지 않으리란 것을 안다.

    인아의 방을 나서기 전에 나는 묻는다.

    그대로 잘 거야? 불 꺼줄까?

    여전히 미소를 머금은 채 그녀가 고개를 끄덕인다.

    복종하듯 나는 스위치를 내린다. 인아의 단단하고 창백한 얼굴이 순식간에 어둠에 잠긴다. 다시 스위치를 올려 날카로운 불빛을 불러들이거나, 저 불분명한 어둠을 향해 비명을 지르고 싶은 충동을 나는 침착하게 억누른다.


     소설의 마지막에서 침착하게 억누른 그 충동은 언제까지 유지될 수 있을까. ‘나’는 왜 그 충동을 침착하게 억눌렀을까. 둘의 관계는 ‘나’와 인아 사이에 있는 어둠을 둘 중 누구도 깨지 않았기에 이어지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금방이라도 ‘내’가 불을 켜서 인아의 불행을 캐묻고 비명을 지른다면, 인아 또한 ‘나’의 불행을 파해치고 소리칠 것이다. 서로의 불행을 파해치는 것과 그 불행을 알면서도 가만히 옆에 있어주는 것, 무엇이 해피엔딩인지는 각자의 선택에 달렸다. 그러나 확실한 건, 불행에 대해 이유를 묻지 않고 추궁하지 않는 지금의 상태가 유지된다면 관계는 계속될 것이라는 점이다. 지금까지와 다를 바 없이 무던하게 말이다.


    에우로파, 너는 목성의 달. 암석 대신 얼음으로 덮인 달.

    지구의 달처럼, 하얗지만 지구의 달처럼 흉터가 패지 않은 달

    아무리 커다란 운석이 부딪친 자리도 얼음이 녹으며 차올라

    거짓말처럼 다시 둥글어지는, 거대한 유리알같이 매끄러워지는.

    후리후리한 우리 그림자가 골목길 위로 앞서 걸어가는 것을 나는 지켜본다. 조그만 허밍으로 후렴부를 따라 부른다. 키를 낮게 잡았기 때문에 인아의 목소리는 높고 처연한 음역대로 들어가지 않는다. 노래가 완전히 끝날 때까지 그녀의 음성은 낮고 무겁다.


     주변 사람들이 모두 행복해지기는 어렵다는 것을 이제는 안다. 잃어버린 가족은 돌아오지 않을 것이고, 한 번 놓친 꿈은 되찾기 힘들 것이며, 나를 떠나간 사람들은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소설 속의 두 사람이 그랬듯, 함께 선 그림자가 앞서 걸어가는 것을 같이 지켜볼 사람이 있다면 불행을 조금 덜 수 있지 않을까. 극적인 행복은 아니지만, 낮고 무거운 인아의 음성처럼 잔잔하게 퍼지는 행복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래도 다음 생일 소원을 찾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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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 제8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임현 외 지음 / 문학동네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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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극적인 연인이 등장하는 퀴어문학을 읽으면서 가장 열심히 하는 일은 등장인물과 나의 동일시를 기피하는 일도 아니고문단과 문단을 살피며 의미를 파악하는 일도 아니고두 사람의 사랑을 인류 보편적인 사랑으로 읽으면서 퀴어를 소재로 밀려나게 하는 일도 아니다나는 아주 성실한 태도로주어와 서술어와 목적어를 못 읽은 체 하고쓰이지 않은 이야기 쪽으로 생각하고오독한다. (오독하는 것은 필연적으로 그럴 수밖에 없는 일이지만.)

    그러니까 적어도 안 헤어지는 이야기적어도 다른 사랑하는 사람을 각자 가지게 되는 이야기아니면 상대방이 없어도 두 사람 모두 각자의 삶을 살아가는 이야기또는 아무도 죽지 않는 이야기였다고 읽는다왜냐하면 나는 퀴어이기 때문에나는 사랑해도 살아있을 수 있다고 믿고 싶기 때문에나는 간절하게 읽는다.

     

    다섯 개의 프렐류드그리고 푸가는 효주와 선생님이 서로를 향해 쓴 편지로 구성되어 있다효주는 선생님에게 자신의 어머니의 죽음에 대해 묻는다효주 어머니의 죽음을 목격했던 사람이자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고 있던 효주를 거둔 사람인 선생님은 효주의 어머니의 자살에 대해 아름다웠다고 써서 보낸다자신의 질문에 대한 답을 받게 된 뒤에도 효주는 선생님에게 편지를 보낸다결혼을 하게 되었다는 소식을 전하기 위해임신하게 되었다는 소식을 전하기 위해효주는 선생님이 죽은 뒤에도 편지를 쓴다그리움을 전하기 위해서선생님 또한 효주에게 지속해서 편지를 보낸다다섯 개의 프렐류드그리고 푸가를 읽지 않고 이 글의 여기까지 읽으셨다면 독자 분들은 아마도 이 소설이 효주와 선생님의 사랑 이야기일 것이라고또는 선생님이 효주 어머니를 사랑해서 효주를 주워다 기른 애틋한 이야기일 것이라고 생각실지도나도 그랬으니까.

    선생님의 답장에는 효주의 편지와는 달리 아래의 인용된 부분과 같은 서늘한 기운이 곳곳에 박혀 있다.

     

    나는 경제적 여유가 있었고 너에게 들여야 하는 비용과 관심을 추후에라도 다른 곳에 돌릴 필요가 없었다무엇보다 내 눈에 비친 너라는 아이는 약간의 도움만 있다면 충분히 자신의 삶을 홀로 꾸려나갈 수 있을 만한 인간이었지굳이 이런 말을 하는 건 내가 너에게 보인 작은 호의를 과장되게 평가하지 않길 바라는 마음 때문이다.’ (천희란, 「다섯 개의 프렐류드, 그리고 푸가」, 『2017 제8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문학동네, 2017, 293쪽. 이하 본 작품을 인용할 때는 쪽수만 표기한다. 예: 312쪽)

     

    이러한 서늘한 기운의 원인은 소설의 마지막에 등장하는 선생님의 부치지 않은-효주에게 바로 닿지 않도록 한국인 바이올리니스트에게 맡긴-편지에 드러난다그곳에서 선생님은 자신과 효주어머니는 연인 사이였으나효주 어머니가 효주 외할아버지를 두려워해 선생님과 헤어졌고또한 효주 외할아버지의 바람대로 남자와 결혼하여 효주를 낳았다는 사실효주 어머니가 효주 아버지에게 자신의 정체성을 밝히고 이혼한 사실효주 어머니는 자살로 생을 마감한 것이 아니라그 사실을 전해 듣고 분노한 선생님이 효주 어머니에게 찾아갔던 날 사고로 죽었다는 사실이 담겨 있다또한 효주에 대한 적대감이 직설적으로 드러난 문장들로 소설의 분위기는 긴장된다.

     

    너는 한때 나를 원망했던 순간이 있다고 고백했지나는 그렇지 않았다너를 평생 원망했어네가 없었다면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 한순간도 자유로웠던 적이 없다. (312)

     

    나는 한때 네 엄마를 진심으로 사랑했지만너를 사랑했던 적은 결코 없다네게 해줄 수 있는 것은 모두 해주리라 마음먹었지만그것은 네 엄마에 대한 속죄였을 뿐 너를 애틋하게 생각했기 때문은 아니었어. (312)

     

    그리고 다음과 같은 문장들로 끝난다.

     

    내가 네게 용서받지 않기 위해 부러 내 마음을 가혹하게 포장하고 있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다이 모든 게 진심이니까그렇다고 해도 나는 네가 많은 걸 이겨낼 수 있다고 생각하기도 하지놀랍지 않니이런 두 개의 마음이 한 사람의 가슴속에 양립해서 존재하고 있었다는 거 말이야건강하렴이제 나를 미워해도 좋다.

     

    바젤에서.

    (314)

     

    이 소설을 처음으로 다 읽었을 때나는 절망하고 밤에 자다가 울었다선생님의 단호한 원망이 효주의 마음을 산산이 무너지게 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효주는 엄마를 죽게 만든 것이 자기 자신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할 것 같아서였고효주의 엄마와 선생님은 서로 다시는 사랑할 수 없어 보였기 때문이다.

    시간이 지나서 나는 이 소설을 다시 읽었다서둘러 고집스럽게 잘못 읽을 용기가 나서였다그리고 소설 안에서작가노트에서 다르게 읽기 위한 실마리들을 긁어모았다.

     

    절대로 쓰고 싶지 않은 이야기를 가진 것의 의미를 알 것 같다한 작가에게 쓰고 싶지 않은 것은 곧 쓸 수 없는 것일 테다비열한 글쓰기란 자신과 타인의 삶을 팔아 연명하는 것도핍진한 허구를 구성하지 못하는 것도삶의 새로운 의미를 발굴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그저 쓸 수 없는 것을 쓸 수 없는 것으로 남겨두는 것지금까지의 절망이 모두 허위였음을 비로소 깨달았다.” (304)

     

    기억을 선별하고 축조하여그로부터 인생을 건져올리는 행위는 얼마만큼은 기만적이다그러나 동시에 내가 현실의 경험으로부터 연원하지 않은 기억을 가지고 살아왔을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이 남아 있는 한나는 나의 기만을 의식하며 살아간다그것은 기억이지만 기억에 균열을 내는 기억이며벌어진 틈 그 자체이기도 하다내가 기억을 더듬어 나를 비추려고 할 때그 틈으로 내가 결코 의미화할 수 없는 이미지가 소실되거나 틈입하고 있을 것이다. (천희란, 작가노트 기억이 나를 본다」, 위의 책, 317)

     

    이 문장들은 내가 편지 밖으로 시선을 돌릴 수 있도록 해 주었다중요한 것은 편지가 아니라 편지 밖에서 편지를 쓰고 있는 인물들이었다소설은 그들에 대해서는 서술하고 있지 않다그리고 그 생각은 다음 질문들을 불러 왔다.

    선생님이 쓸 수 없는 것을 쓸 수 없도록 만든 것은 무엇인가?

    선생님이 기억을 선별하고 축조하여그로부터 인생을 건져올리는’ 기만적인 행위를 하게 만든 이유는 무엇인가?

    불완전한 기억과 같은 허구의 등장인물이 쓴 편지들 사이 벌어진 틈에서 서성이는 이미지들은 무엇인가?

    그 질문들의 답은 살아 있는 효주였다주어진 편지들 안에서 우리는 효주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아직 모른다효주도 죽었을지도효주만은 살았을 수도살아 있다면 어떻게 살아있을지도그래서 다음엔 어떤 프렐류드를 연주하게 될지도답을 알 수 없는 질문을 만났을 때 마음껏 다른 것을 상상하자고 나는 생각한다나는 선인장의 꽃을 피워내고 무사히 낙화시켰을 것이라고 믿어버린다.

    또한 효주에 대한 나의 믿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바라는 것은 사랑의 당사자들이 살아남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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