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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밀리미터의 혁신 - 5년 안에 50배 성장한 발뮤다 디자인의 비밀
모리야마 히사코.닛케이디자인 지음, 김윤경 옮김 / 다산4.0 / 2017년 4월
평점 :
품절
2년 전 7월, 그렇지 않아도 부실했던 선풍기가 망가졌다. 웬만한 건 고장이 나기 전까지 쓰는 나이기에 그해까지만 넘기기를 바랐는데, 극성스런 무더워가 선풍기에도 영향을 미쳤는지 발에 걸려 쓰러진 선풍기는 안전망과 분리되면서 팬의 날개 하나가 툭!하고 부러졌다. 선풍기 없인 살 수 없는 날씨라 당장 근처 가전제품샵으로 갔다. 몇 가지 모델이 있었고 딱히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고작 선풍기니까, 선풍기야 거기서 거기니까, 그래봐야 몇 만 원짜리라 그나마 마음에 드는 걸 들고 직원을 보며 이렇게 말했다. 아저씨, 이거 작년 모델인데 만 원만 깎아주세요. 기대 없이, 영혼 없이 습관적으로 말한 건데 직원은 날 삼초 정도 보더니 그러자고 했다. 그렇게 참 기분 좋게 들고 와서 지금도 잘 쓰고 있다. 이 글을 쓰는 내 옆에 그 선풍기가 돌아가고 있는데, 버튼이 있는 하단부의 꽃문양이 지금은 촌스러워 보인다. 그때는 참 세련되게도 그렸다 싶었는데...
딱히 가전제품에 흥미를 갖거나 디자인 분야의 일을 하지 않는 이상, 혼자 사는 노총각이 가전제품에 관심을 가질 확률은 별로 없지 않을까. 고로 난 ‘발뮤다’라는 가전제품 브랜드 이름을 이번에 처음 알았다. 책을 읽는 중간에 ‘그린팬’ 선풍기를 검색했고, 아무리 수입이지만 고작 선풍기가 이렇게 고가라는 점에서 깜짝 놀랐다. 고작 선풍기 아닌가. 모터에 팬을 달아 인공바람을 날리는, 에어컨이 아닌 이상 선풍기의 성능이래야 거기서 거기일 텐데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렇게 비쌀 수가 있을까?! 명품에 무지한 난 루이비x, 구x 등의 이름을 들으면서 그것들의 가격 중 반은 남들에게 과시하기 위한 ‘허영’비가 포함돼 있다고 생각하고 있기에 ‘발뮤다’ 또한 그렇다고 생각했다. 물론 좋은 재질에, 뛰어난 디자이너의 영감이 들어간 작품이라고 하더라도, 브랜드 값이 포함되어 있다고 해도 소위 말하는 명품백의 가격은 범인이 보기에 황당할 정도가 아닌가. 여튼 명품에 무지한 난 그렇게 생각했다.
이 책 앞표지에 이렇게 쓰여 있다. ‘5년 안에 성장한 발뮤다 디자인의 비밀’. 그리고 책 제목은 ‘0.1mm의 혁신’. 그러니까 발뮤다라는 기업이 기술력과 더불어 어떻게 디자인을 활용해 도산 직전에 살아남았는지를, 성장하고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이 얘기가 무엇보다 흥미롭다.
[p 5. 2009년, 도산 위기에 처한 어느 스타트업 기업이 있었다... 직원 3명에 연매출 4,500만 엔을 벌어들였던 작은 회사 발뮤다는 미국발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와 세계 금융 위기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았다. 판매 중이던 상품은 주문이 뚝 끊겼고 매출 역시 수직으로 낙하했다. 설립자는 생각했다. ‘어차피 망할 거라면 진짜 해보고 싶었던 제품이라도 만들어보고 끝내자.’ 이때부터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궁지에 몰려 개발한 제품이 날개 돋친 듯 팔리기 시작한 것이다... 기적을 불러온 제품은 <그린팬>이라는 선풍기였다. 그 뒤 5년 동안 발뮤다는 혁신적인 가전제품을 잇달아 출시하며 50배 이상 급성장했다.]
오래 전, 구멍가게 장사를 한 적이 있다. 물건을 떼어다 파는 수준이었지만 그쪽 일을 잠시 하다 시작한 장사라 루트도 어느 정도 알았고, 이쪽 장사를 하는 사람도 많지 않았으며, 초반에 기대 이상의 매출을 올렸던 터라 조금 더 확장하면 그럭저럭 먹고는 살겠다 싶었다. 그리고 2년 반 만에 접었다. 장사의 유통과정을 아는 게 전부가 아니었다. 제일 중요한 건 ‘자릿세’였다. 아마 내 자리만 오랫동안 잡고 있었어도 지금까지 했을지 모르겠다. 수입의 반 이상이 자릿세로 나갔으니까. 돈 없는 사람은 이쪽에서 영원히 호구겠구나 싶었고, 장사 물건도 계속 바뀌지 않는 이상 초반에 빤짝 이상을 넘지 못했다. 이래저래 사정이 겹치면서 스트레스가 늘었고 결국 폐업을 써 붙였다. 이상하게도 홀가분했다. 고민하면서 장사는 아무나, 적어도 내가 하는 게 아니구나,를 절감해서일까, 잠시라도 장사의 스트레스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일까, 그리 큰 적자는 아니어서 일까. 여튼 우리 사회의 많은 자영업자들의 슬픈 상황과 감정을 나 또한 잠시라도 조금 경험했기에, 비록 당시의 발뮤다 같은 입장은 아니더라도 도산, 부도, 폐업이란 단어가 주는 압박감의 무게가 어떤지 알기에 조금은 동감이 갔다.
보통 그런 상황이면 재고처리에 열을 올린다. 그런데 발뮤다의 대표는 위 지문처럼 ‘어차피 망할 거라면 진짜 해보고 싶었던 제품이라도 만들어보고 끝내자.’는 생각을 했고 실행에 옮겼다. 어려운 상황에서 돈을 더 들이는 행동을 한 것이다. 그에게 있어 장사는 단지 남들에게 물건을 팔아서 얻는 이익의 행위 그 이상이었던 거다.
[p 23. 물론 불황의 영향도 컸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때 비로소 깨달았습니다. 제가 이상적이라 여기며 만든 제품과 소비자가 원하는 제품이 결코 일치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말이죠...
불황의 파도에 휩쓸려 회사가 도산할 위기에 직면하자 테라오 겐 대표는 큰 깨달음을 얻었다. 많은 사람이 필요로 하고 기꺼이 구매할 수 있는 제품을 개발할 때 ‘행복한 삶에 도움이 되는 도구’를 만들겠다는 발뮤다의 디자인 경영 원칙 역시 빛을 발하게 된다는 사실을 말이죠.]
도산 직전의 발뮤다를 살린 제품은 ‘그린팬’이란 선풍기다. 독자적으로 개발한 14장의 이중 구조 날개가 보통의 선풍기와 달리 자연에 가까운 순한 바람을 제공하며 장시간 쐬어도 쾌적한 기분을 느끼게 해주며, 초절전 전력 소비량과 나비의 날갯짓 소리보다 조금 더 큰 13데시벨의 저소음만 낸다고 한다. (내 옆에 있는 4장의 날개가 달린 선풍기 팬이 초라해 보인다...)
고작 선풍기가 아니라는 거다.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선풍기의 기술력을 확 끌어올렸다는 거다.
[p 245. 이런 감성과 경험이 기존 관념에 얽매이지 않는 유연한 생각과 만나고, 논리적 사고와 결합할 때 비로소 혁신적인 제품이 탄생할 수 있다. 예를 들어 ‘그린팬’에 적용된 획기적인 날개 구조는 공장 장인들이 선풍기를 벽으로 향하게 한 후 부딪혀 돌아오는 바람을 쐬는 장면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 회전하며 부는 바람이 벽에 부딪히며 소용돌이 기류가 파괴되면서 돌아오는 바람이 부드러워진다. 테라오 겐 대표는 이를 이론적으로 검증하기 위해 홀로 유체 역학을 공부했고,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친 끝에 가장 자연에 가까운 바람을 구현해냈다.]
기술력이 좋다고 많은 사람들에게 어필할 수는 없다. 오히려 요즘 시대에 제품의 성공은 디자인에서 판가름이 난다고 할 수 있다.
[p 19. 하지만 뭐니 뭐니 해도 <그린팬> 시리즈의 가장 큰 경쟁력은 일찍이 선풍기 업계에서 찾아보기 힘들었던 깔끔하고 심플한 디자인이었다. 사람들의 시선을 압도하는 정갈한 디자인은 압도적인 성능과 기분 좋은 바람을 극적으로 부각시켜 주었다.
p 76. ‘전에는 모던한 디자인에 집착했다’는 테라오 겐 대표의 말에서 알 수 있듯이, 과거의 발뮤다는 주로 멋진 외형과 쾌적한 사용감을 중시하는 디자인에 공을 쏟았다. 그러나 지금은 예전만큼 디자인에 집착하지 않는다. 오히려 의식적으로 디자인적 요소를 억제하려고 노력한다. “집 안에서 선풍기가 가장 빛날 필요는 없습니다. 거주하는 사람이나 테이블, 또는 의자처럼 주인공이 될 수 있는 존재는 아주 많습니다. 어느 순간부터 가전제품이 사람이나 다른 물건에 비해 더 존재감을 가질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반대로 그 존재감을 억눌러야 한다고 생각했죠.
p 238. 발뮤다의 심플한 디자인은 그 자체에 목적을 두지 않습니다. 적절하고 간결한 디자인을 통해 사람의 마음에 호소하는 무언가를 담아내는 것이 디자인의 핵심이죠.]
난 디자인에 문외한이다. 그럼에도 2010년 출시된 발뮤다의 첫 그린팬과 불과 2년 전에 산 내 옆의 선풍기를 보면 그 차이를 확연히 느낄 수 있다. 물론 가격차가 있고 그 가격차에는 여러 요소가 존재하겠지만, 그래도 어쨌든 내 옆의 꽃무늬 선풍기는 ‘그냥 선풍기’라는 느낌 이상을 주지 못한다. (아까부터 계속 꽃무늬가, 도드라지게 튀어나온 버튼들이 신경 쓰인다...)
반면 그린팬은 무심할 정도로 심플함에도 계속 시선을 당긴다. 마치 심플함에 정답이 있다는 것처럼 말이다.
[p 45. 작동 상태를 표시하는 전면 인디케이터 부분의 LED 라이트 비침 정도를 조절하기 위해 플라스틱 두께를 0.1밀리미터 단위로 바꿔가며 실험했다. 발뮤다의 제품 개발은 이렇게 세세한 부분까지 꼼꼼하게 테스트를 거치며 이루어진다.
p 102. 테라오 겐 대표는 발뮤다의 제품이 집에 전시하는 가전제품 수준에 머물지 않았으면 한다. 그래서 삶에 필요한 도구로써 어떤 형태를 띠면 좋을지, 어디에 두고 어떻게 사용하면 유용할지 고민한다. “사용자가 제품을 구매하고 사용하면서 어떤 가치를 느낄 것인가. 이 사실을 늘 의식하면서 기획하고 개발합니다.” 테라오 겐 대표의 이러한 고집이 기존에 없던 흰 항아리 모양의 가습기를 세상에 나오게 했다.]
난 명품에 문외한이지만 명품에 담긴 가치가 얼마나 사람들에게 중요하게 어필하는지는 조금 알고 있다. 남들 눈엔 그저 장난감일 뿐인 피규어가 몇 십만 원 대일 때 그 피규어에 담긴 장난감 이상의 가치를 어느 정도 알아볼 수 있다. 단지 가격이 세다고 명품이 아니다. 그 속에 담긴 내용과 동작의 의미, 표현하고자 하는 영감과 작품의 재질 등에 따라 피규어의 값어치는 크게 달라진다.
발뮤다의 역사는 오래 되지 않았고, 도산 직전의 기업을 구해낸 첫 ‘그린팬’은 7년 전에 출시되었을 뿐이며, 발뮤다는 문어발처럼 이것저것을 만들고 또 제품마다 가격대에 맞춰 이것저것을 생산하는 기업이 아니다. 제품 하나를 만들어도 ‘가치’를 중심에 둔다. 그 가치를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사람마다 가격을 받아들이는 느낌이 다를 것이다.
책에 나온 발뮤다의 제품을 보며 사고 싶다는 생각에 검색을 했을 때의 높은 가격대에 매우 놀랐다. 다른 건 몰라도 발뮤다를 구해낸 그린팬의 가격은 솔직히 황당했다. 고작 선풍기 아닌가. 아무리 기술력이 좋아도 팬이 달린 선풍기란 말이다. 디자인이 마음에 들어도 수집용이 아니라 실제 사용하는 선풍기다. 그 선풍기를 며칠째 계속 보고 있다. 그리고 선풍기가 선풍기처럼 다가오지 않는다. 갖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한다. 필요에 의해 사는 것보다 선풍기를 선풍기처럼 보이지 않게 만드는 그 어떤 가치를 느끼게 한다. 나쁘게 말하면 과소비일 수 있다. 그렇다면 내 옆에 있는 꽃무늬 선풍기를 사면된다. 그러나 제품에 어떤 가치를 느끼고 그것을 살 수 있는 상황이 된다면 그리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내가 피규어를 보는 것처럼 말이다. 물론 명품 핸드백은 여전히 잘 모르겠다...)
이 책은 발뮤다의 제품들이 어떤 과정을 거치며 만들어졌는지, 그 과정에서 기업의 어떤 가치를 담았는지, 앞으로 발뮤다가 어떻게 성장하려고 하는지를 담고 있다. 그래서 이번에 처음 알게 된 ‘발뮤다’라는 기업에 대해 문외한인 내가 어떻다고 말하는 건 꽤 오버다.
가장 크게 흥미를 끌었던 부분이 제품의 기술력과 디자인에 대한 발뮤다의 열정이었고, 그걸 대표하는 예로 선풍기를 들었다.
모든 기업들이 발뮤다 같을 필요는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 그러나 적어도 확실한 이념과 가치를 담은 열정적인 기업들이 존재할 필요는 분명히 있다. 발뮤다가 그걸 보여주고 있다.
선풍기다. 고작 선풍기다. 고작 선풍기가 아니다. 선풍기 그 이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