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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니론더링 - 2억 엔의 행방
칸베 타쿠 지음, 미키 와카코 그림, 정승민 옮김 / 출판미디어 율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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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돈의 효용성

 

일도 사랑도 꿈도 잃은 청년 백수의 손에 어느 날, 은행에서 강탈된 2억 엔이 굴러들어온다.’

책소개의 두 번째 문장이다. 이 글의 시작이자 전체적인 설정이고 등장인물들이 뛰노는 무대다. 솔직히 이런 설정은 소설, 드라마, 영화 등에서 자주 볼 수 있어 그리 참신하지 않다. 그럼에도 이 글을 보게 된 건, 책소개의 첫 번째 문장이 흥미로워서다.

‘20억 엔을 손에 넣는다면, 당신은 무엇을 하시겠습니까?’

그러니까, 공돈이나 마찬가지인 이 20억 엔이 돌고 돌아 누구의 손에 들어가느냐, 결국 승자는 누구냐가 아니라,

당신이라면 이 20억 엔을 어떻게 사용하겠는가?에 방점이 찍혀 있다는 게 재밌어 보였다.

20억 엔은 은행털이범이 산속에 묻는 걸 우연히 본 20대 중반의 주인공이 돈을 사용하게 되면서 벌어지는 일들을 그리고 있는데, 일단 현실에서의 나라면 어떻게 쓸 것인가?(만약 신고하지 않고 쓴다는 가정 하에.)

사건이 잠잠해질 때까지 한 일 년 정도 고이 모셔둔다. 그런 후 흔하고 어느 정도 안전하다고 생각되는 머니 론더링(돈 세탁)’을 작은 액수로 조금씩 실행해 생활비와 여유자금을 만들어간다. 하다보면 노하우가 생길 것이고, 조금씩 액수를 높여 머니 론더링을 한다. 그렇게 먹고 산다. 이게 간이 작은 내가 생각할 수 있는 정도다.

그럼 주인공은? 처음엔 조금씩 이곳저곳에서 환전을 통한 수법으로 머니 론더링을 한다. 누구라도 할 법한 일이다. 그러다 4년 근무했던 무역회사 시절의 노하우를 바탕으로 사업을 시작한다. 물론 이 사업은 큰 액수를 위한 머니 론더링이었지만 주인공의 노력과 실력, 운이 맞아 금세 확장된다. 그러나 호사다마, 경찰은 꼬리를 잡아 점점 주인공에게 근접하고, 주인공은 우연히 알게 된 여자와 사랑에 빠지면서 야쿠자까지 개입하기에 이른다. 소동극이 벌어지고 결국 승자는?

 

나라면 절대 하지 않을 사업을 주인공은 한다. 깨작거리는 환전이 아닌 보다 큰 액수를 위한 사업이었으나, 중요한 건 이 사업의 성질이다. 무역회사에 다니던 시절에 자신이 냈던 아이디어를 실현시킨 것. 비록 내 돈이 아닌 불법자금이지만, 주인공은 이 사업을 통해 자신의 능력을 내보이고 인정받는다. 이게 중요하다.

대학 졸업 후 무역회사에서 4년 근무하다 퇴사 당하고, 다시 음식점 체인에서 근무하다 몸이 상해 퇴사, 편의점 알바로, 건강식품 온라인 쇼핑몰에 다니다 손님과의 트러블로 3개월 만에 짤린 백수 주인공. 그나마 돌아가신 부모님이 남긴 30평짜리 이층집이 있다는 게 다행스럽지만 어쨌든 여느 청년들처럼 암담한 미래에 불안해하는 주인공이, 공돈이 들어왔다고 나처럼 조금씩 쌓아놓을 생각을 하는 게 아니라 비록 동기는 머니 론더링이었지만 자신이 구상한 사업을 실현시킨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하고 꽤 흥미로웠다.

패기와 열정, 자신만의 아이디어로 창업을 꿈꾸며 도전을 해보려는 많은 청년들이 있지만 자금 때문에 시작도하기 전에 접어버리는 지금의 우리 실정을 이 글과 대입해 생각해보면 청년창업지원의 중요성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주인공은 비록 불법자금을 활용하지만 자신에게 맞는 일을 찾아내 앞날을 개척해나간다. 사랑하는 여자를 지키기 위해 야쿠자와 맞선다. 그리고 본인의 양심에 맞춰 불법자금을 처리한다. 엄밀히 말하면 시작부터 잘못이다. 그러나 이 글은 평범한 사람이 저지를 수 있는 잘못을 사회적 문제와 접붙이며 한 편의 유쾌한 소동극으로 끝날 수 있도록 최선의 마무리를 짓는다.

결국은 공돈을 누가 차지하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그 공돈을 어떻게 사용하는가에 맞춰진 이 글은, 돈의 효용성까지 확장시켜 생각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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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둔감하게 살기로 했다 - 초조해하지 않고 나답게 사는 법
와타나베 준이치 지음, 정세영 옮김 / 다산초당(다산북스)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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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외력과 내력의 싸움

 

무협소설(또는 영화)에 공통적으로, 자주 나오는 단어가 있다. ‘내공이다. 여기서의 내공은 심신을 단련해 기()를 강화시켜 자신을 보호하고 몸 바깥으로 발출할 수도 있는 기의 흐름, 기의 힘, 기의 크기 등을 말한다. 이 힘의 크기에 따라 고수와 하수의 차이가 난다. 우리 생활에서도 가끔 쓰는 단어다. 요즘 드라마 나의 아저씨를 즐겨 보는데, 극중에서 박동훈이 이지안에게 이런 말을 한다.

모든 건물은 외력과 내력의 싸움이야. 바람, 하중, 진동. 있을 수 있는 모든 외력을 계산하고 따져서 그것보다 세게 내력을 설계하는 거야... 항상 외력보다 내력이 세게. 인생도 어떻게 보면 외력과 내력 싸움이고. 무슨 일이 있어도 내력이 세면 버티는 거야.”

 

청년실업이, N포세대가, 폐업 속출,.. 이란 말이 전혀 낯설지 않은 상황에서 경쟁력으로 지칭되는 단어가 스펙이다. 남들보다 영어점수를 더 높게, 자격증 하나라도 더, 공모전 수상에... 그렇게 쌓고 쌓아서 간신히 들어간 직장인데, 회사가 전쟁터라면 밖은 지옥이라고 하니 어디가 나은지, 어디서 살아야하는지조차 모르겠다. 아니 살 곳보다 일단 어떻게 해야 살아남을 수 있을까.

이 책 나는 둔감하게 살기로 했다, 어떻게 해야 이 세상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에 대한 저자 나름의 해법을 제시하는 책이다. 그리고 그 해답은 원제처럼 둔감력을 기르자!

 

회사원이든 자영업자든 학생이든 그 누구에게든, 자신이 살고 있는 세상 문제의 상당부분은 인간관계에서 비롯되지 않나싶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맺음이 주는 스트레스는 정도에 따라 다르겠지만 심할 경우 자살로 이어지기도 한다. 나에게도 자존감이 있는데 언제까지 참고 지내야할까. 저자는 몇 가지 상황을 예로 들며, 지나간 상황과 마음의 상처는 빨리 잊고 오히려 뻔뻔해지라고 충고한다. 예의 없으라는 게 아니라, 그것들은 나에게 아무 것도 아니며, 그러니 타인의 시선 따위도 괜히 신경 쓸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한 마디로 둔감해지라는 거다. 타고나지 않았다면 그런 척이라도 하라고 한다. 결국 상처받는 건 자신이기 때문이다.

동의한다. 뭉뚱그려 말해, 예민한 사람들이 있다. 누군가의 말에 쉽게 상처를 받거나, 사소한 잘못에도 자책을 하거나, 타인의 시선을 과도하게 신경 쓰거나, 일어나지 않은 일 등을 걱정한다. 그것들이 자신을 더 힘들게 하는 줄 알면서도 그렇게 된(). 어쩔 수 없는 상황이거나, 상황을 바꾸기 어렵다는 이유로, 타고났다는 이유로, 성격이... 등등의 이유가 있다지만, 결국 그 문제를 풀 수 있는 사람은 자신뿐이다. 어떻게 해야 할까. 저자는 둔감해지라고 말한다.

 

여기서 중요한 건 상황에 따라 다르겠지만, 상대의 무례함을 비굴하게 참는 게 아니라 당당하게 넘긴다는 점에 있다. 흔히 말하는 갑질에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게 아니라, 위축되지 않고 나에게 타격이 되지 않을 정도의 외력이라면 흘려버림으로 점점 갈고 닦자는 거다. 갑질이 명백한 상황에서 본인의 행동을 어떻게 하라고 교과서적으로 말하는 건 또 다른 몰이해다. 당사자가 아닌 다음에야 어찌 그 상황을 온전히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으며, 누가 그 행동과 여파를 책임질 수 있을까. 누구도 그런 수십, 수백 가지의 개별적인 상황에 대한 해답을 줄 수 없다. 다만 저자는 우리가 필요 이상으로 예민해지는 걸 경계하고 보다 나은 삶을 위해 둔감해질 필요가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p 204. 그런 당당함의 원동력은 무엇일까요? 빈정거림 따위는 통하지 않는, 또는 빈정거림 따위는 무시해버리는 둔감한 마음의 힘. 바로 둔감력입니다.]

 

예민하지도 않은데 굳이 둔감할 필요가 있을까란 의문이 들 수도 있다. 저자는 둔감해서 좋은 이유를 몇 가지 설명한다. 이를테면 건강에 도움이, 수면습관의 힘, 이성의 마음을 사로잡는 둔감한 매력, 주변 환경의 변화에 대처하는 힘 등으로 둔감함의 여러 매력을 설명한다.

[p 237. 적응 능력이 둔감력이랑 도대체 무슨 상관이지? 의아하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건강한 몸에는 둔감력이 넘쳐흐릅니다. 주변 환경의 변화에도 늘 자기 자신을 유지하는 몸과 마음의 힘. 그것이 바로 이 시대가 원하는 둔감력입니다.]

 

가끔 내공이 강하다, 라는 말을 실생활에서 들을 때가 있는데, 그런 사람을 한 마디로 외유내강이라고 보면 된다. 자신을 이리저리 흔드는 어떤 강풍에도, 머리부터 짓누르는 상당한 무게에도, 발을 딛고 있는 위치를 뒤흔드는 진동에도 꿋꿋하게 버티고 서 있는 사람이 결국 자신과 다른 이들에게 미소를 보인다. 견디고 살아남았기 때문이다.

외력이 강하다면 그보다 더 세게 내력을 설계하면 된다. 지금 당장 설계가 힘들면 더 연마하면 된다. 그렇게 나아가는 게 중요하다. 저자는 그 방법의 한 가지로, 둔감력을 기르자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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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루티드
나오미 노빅 지음, 오정아 옮김 / 노블마인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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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아그니에슈카

 

오염된 숲 우드의 재앙을 막아내며 폴니아 왕국을 지키는 마법사 드래곤’. 그는 자신의 탑 근처 마을인 드베르닉에서 십년마다 열일곱 살의 소녀를 데려간다. 십년 후에 풀어주는 전통이 있고 그에 따른 여러 추측들이 난무하는 가운데, 마을사람들이 데려갈 소녀로 유력하다고 생각했던 카시아대신 엉뚱하게도 아그니에슈카를 선택하는 드래곤. 솔직, 당돌, 자유분방한 소녀 아그니에슈카와 차갑고 이성적인 마법사 드래곤의 동거. 그리고 우드의 재앙은 마을 드베르닉을 넘어 폴니아 왕국 전체로 뻗어나가는데...

 

작품의 줄거리다. 이것만 놓고 보면 유쾌한 판타지로맨스처럼 보이지만, 작품의 내용은 진중하다. 분위기는 차분하며 문장은 유려하고 묘사 또한 세밀하다. 가볍게 보는 여타의 판타지로맨스가 아니라는 거다. 왜 아닌가?

 

주체적인 결정

마을 사람들은 예쁘고 밝으며 똑똑한 카시아가 드래곤의 선택을 받을 거라고 생각했다. 카시아 또한 그것을 자신의 운명처럼 여겨왔다. 그러나 드래곤의 선택은 키만 크고 자유분방한 아그니에슈카였다. 그녀에게 흐르는 천부적인 마법의 기운을 느꼈기 때문이다.

소설은 크게 캐릭터 위주와 스토리 위주로 나눌 수 있는데, 이 작품은 일인칭 시점이기도 하지만 아그니에슈카란 매력적인 여자주인공이 이야기를 끌고 나간다. 사건을 만들어서 글을 풍성하게 만들기 위해 흔히 이런 자유분방한 인물을 설정하곤 하는데, 중요한 건 주인공의 행동에 얼마나 개연성이 있는가, 자연스러운가가 독자들의 공감획득을 좌우한다.

 

드래곤의 탑에 갇히게 되는 아그니에슈카의 예전 생활이 자유분방했다고 해서 그걸 전제로 탑 안에서의 행동 또한 그렇게 그려졌다면 글은 매우 가벼워졌을 것이다. 그러나 아그니에슈카의 생활은 당연하게도 두려움과 걱정, 그로인한 실수투성이다. 드래곤에게 마법을 배우는 속도 또한 매우 느리다. 무시당하기 일쑤인 아그니에슈카지만, 그녀는 절친 카시아가 우드로 잡혀간 것을 알고는 탑을 탈출해 자신의 힘으로 카시아를 구출한다.

이후의 모든 행동도 아그니에슈카, 스스로 판단을 내리고 행동한다. 드래곤을 비롯해 주변 사람들의 조언과 질책 등이 있지만 결정은 자신이 한다. 주체적인 인물이란 거다. 자신이 옳다고 믿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주인공. 그로인한 결과는 오로지 자신의 몫이고 파생되는 상황 또한 그녀가 감당해야하지만 아그니에슈카는 그 모든 걸 감내한다. 자유분방하기만 했던 주인공이 역경을 이겨내면서 점차 지혜롭고 강단 있어진다는 거다.

작품은 이런 아그니에슈카의 모험을 통해 주체적인 결정과 그에 따른 결과의 감내가 우리 삶에 있어 매우 중요하단 걸 어린 소녀의 성장으로 잘 보여주고 있다.

 

이 작품은 그리 많은 인물들이 등장하지는 않는다. 마녀의 기운을 가진 아그니에슈카, 천재 마법사 드래곤, 왕권을 노리는 폴니아 왕국의 둘째 왕자 마렉과 드래곤의 라이벌인 궁정마법사 팔콘, 마렉의 어머니인 왕비 정도가 주요인물이라고 할 수 있는데, 아그니에슈카만큼이나 흥미로웠던 인물이 바로 카시아다.

 

개인적으로, 드래곤의 선택을 받지 못한 카시아가 어떤 행보를 보일지 읽으면서 꽤 궁금했다. 운명이라 여겼던 선택에서 탈락했다면 주인공 아그니에슈카를 꽤나 미워하고 그로인해 그녀를 방해하는 인물로 비중 있게 그려졌을 법도한데, 작가는 카시아를 여전히 절친으로 남겨둔다. 그리고 절친인만큼 아그니에슈카의 유능한 조력자로 성장시킨다.

아그니에슈카만큼 주체적으로 상황을 이끌거나 하지는 않지만, 두드러지는 활약상은 아니지만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 최선을 다해 돕고 행동한다. 그렇게 점차 자신의 길을 발견하고 성장하는 카시아의 모습이 어쩌면 아그니에슈카보다 더 강한 신념의 소유자처럼 보이게도 한다. 우드에 잡혀가 죽을 위기에서 살아나고, 오염되지 않았을까 하는 사람들의 냉혹한 시선을 꿋꿋이 감내하며, 아그니에슈카를 이해하고 다독여주는 카시아의 속 깊은 마음씨와 행동은 환경이 어떠하든 자기 삶의 주인공은 자신이란 걸 보여주는 듯하다.

사람들의 관심에서 멀어지고 삶이 헝클어졌다고 해서 포기하는 게 아니라, 그 상황에서 최선을 다한다면 자기만의 길이 보이고 개척해나갈 수 있다는 걸 카시아는 곳곳에서 은연중에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작가는 아그니에슈카의 한쪽에 사부이자 연인으로 드래곤을, 한쪽에는 절친이면서 주인공과는 또 다르게 성장하는 카시아를 배치했다. 드래곤을 통해 주인공의 외적능력을 높이고 자신의 신념을 대비시키는 효과를 가져갔다면, 카시아를 통해 내적고통을 나누고 서로를 의지하게 만들었다.

점점 힘들어지는 환경에 놓이지만 아그니에슈카는 그 두 사람이 있기에 흔들리지 않고 상황을 타개해나간다. 어떻게 보면 작가는 아그니에슈카란 한 인간 속에 드래곤이란 차가운 이성을, 카시아란 따뜻한 인간미를 이식시키고 싶었는지 모른다. 그 두 가지을 바탕으로 아그니에슈카란 매력적인 인물이 구현된 게 아닐까.

 

오염

우드에 들어가거나 잡혀간 사람들(동물 포함)오염이란 이름으로 변질되어 죽는다. 그 오염은 전염될 수도 있다. 이 작품에서 오염은 외적으로는 흑마법의 바이러스처럼 묘사되지만, 내적으로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있는 모든 부정한 생각, 마음, 기운 등을 포함한다. 즉 선하지 않은 모든 것들을 총칭한다고 볼 수 있다.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점차 오염의 정체가 드러나지만, 이 글의 첫 부분에서부터 그 내적오염의 조짐이 나타난다. 앞서 언급한 선택된 아그니에슈카와 탈락한 카시아의 관계가 그렇다. 아그니에슈카는 자신이 드래곤의 선택을 받지 않을 거란 생각에 마음 한편에는 안도감이 있었다. 절친인 카시아가 불쌍하지만 불행한 사건에서 자신은 제외된다는 그 무사함을 애써 모른 척한 것이다.

 

상대적으로 카시아는 일찍부터 드래곤의 선택을 운명으로 여기고 그 부당함을 받아들이려는 자세였지만, 그녀 역시 탑으로 끌려가는 것이 마냥 좋지는 않았다. 어찌 좋을 수 있겠는가. 십년 후에 풀려나는 소녀들에 관한 진실들이 드러나지 않는 가운데 억측들만 난무하는 상황에서 탑에 갇히게 된다면 누구라도 두려울 것이다. 그러나 카시아는 당당하고 담담히 받아들이려 했다. 그리고 막상 탈락한 후 나중에 아그니에슈카의 마음을 알게 되면서 큰 슬픔을 느낀다.

 

누구라도 불행이 자신을 비켜나가길 원한다. 아주 가까운 사이라도 자신이 아니라면 조금의 안도감을 느끼는 건 인간의 당연한 본성이다. 아그니에슈카가 애써 외면했던 무사함에 대한 안도감은 충분히 이해될 수 있다. 그러나 카시아의 입장에서라면 매우 큰 서운함으로 작용할 수 있다. 비록 이해는 된다고 해도 말이다.

어떻게 보면 아그니에슈카와 카시아의 감정들이 별거 아닐 수 있다. 당연한 본성으로 치부한다면 말이다. 하지만 작가는 두 소녀의 감정을 교류, 소통시켜 서로에 대한 오해와 불신, 부정한 생각 등을 지워냈다. 이해와 믿음으로 승화시켰다. 이 점이 중요한 건, 왕국에 재앙, 오염을 뿌리는 우드에 대한 해결책이기 때문이다.

 

왜 왕비는 잡혀가게 됐고, 마렉은 왜 그런 성격이 되었을까. 전설의 마녀 야가의 마법은 왜 치유의 마법으로 불리고, 아그니에슈카는 탑에 있는 그 많은 마법서들 중에서 왜 하필 야가의 마법서를 발견하게 됐는가, 폴니아 왕국은 왜 다른 나라와 싸우려드는가 등이 이와 연결된다.

 

이 글에서 오염은 겉으로 드러나는 우드의 재앙을 넘어서, 바로 우리 자신이 언제든 타인에게 가할 수 있는 모든 부정적인 행동의 원인이 될 수 있음을 끊임없이 보여준다. 바로 주인공에서부터 드러나는 우드의 정체까지 말이다. 단순히 악을 물리치고 선이 승리하는 게 아니라, 그 위험성을 경고하고 우리가 사는 세상을 어떻게 지켜나가야 하는지를 작품은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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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사람을 죽여라
페데리코 아사트 지음, 한정아 옮김 / 비채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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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의 책소개에 유럽권 독자들은 영화 [인셉션][메멘토]를 연상케 한다는 서평과 함께...’라는 문장에 동의한다. 개인적으로 인셉션보다는 메멘토와 좀 더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 ‘인셉션이 기억의 모호성, 타인의 기억에 대한 직접적인 개입, 장자의 호접몽 철학, 꿈과 현실의 경계에서 취한 열린 결말 등을 특징으로 한다면, 작품의 구성방식과 한정된 사건, 기억의 실체를 찾아가는 메멘토의 설정이 내겐 더 그렇다.

 

이 작품은 구성방식, 즉 이야기 흐름이 굉장히 중요하다. ‘기억의 반복’.

단기기억상실증에 걸린 메멘토의 주인공처럼, ‘다음 사람을 죽여라의 주인공 테드 또한 한정된 기억을 반복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일들을 떠올린다. 그러나 메멘토의 주인공이 자신의 몸에 문신으로 기억을 남기고 그것들을 바탕으로 사건의 시간을 재구성해 나간다면, ‘다음 사람을 죽여라의 테드는 한정된 기억을 복기하고 구멍 난 부분을 메워나가면서 과거의 실체를 깨달아간다. 점점 복구되는 기억이 드러나면서 진행되는 다음 사람을 죽여라의 이야기 흐름은 문신을 단서로 사건의 실체가 점점 드러나는 메멘토와 달리, 마지막까지 진짜 기억이 무엇인지조차 헛갈리게 만든다.

이 점이 이 작품의 가장 큰 매력인데, 그러니까 복구되는 기억마저 이가 빠져있어 마지막까지 달리지 않으면 전체의 큰 그림을 볼 수 없다는 거다. 4부로 구성된 이 작품의 책소개의 한 구절을 발췌한다.

 

[이를테면 1부의 일부 내용이 2부에서 변형 · 반복되었다가 3부에서 완전히 부정되고 4부에 이르러 진실을 드러내는 식이다.]

 

이야기의 반복과 변형에 이어 다시 부정되고 마지막에 진실에 이르게 된다는 건 흡사 미로에서 길찾기가 연상된다. 출구가 어딘지 몰라 무작정 나아가다보면 막히는 곳에서 돌아가게 되고, 되돌아가면서 다른 곳으로 빠지면 길은 새롭게 변형된다. 다시 막다른 곳에 부딪치면 결과적으로 맞게 왔던 일부의 길마저 부정하게 되면서 큰 혼란에 빠진다.

이때 중요한 건 침착하게 왔던 길을 표시하는 거다. 그러면서 잘못된 굴곡의 길을 하나씩 제거해나가는 것. 이 작품에서 표시를 해 올바른 방향으로 찾아가는 단서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체스. 침착성을 유지하게 만드는 건 테드가 지닌 말편자이고 말이다.

 

[p 424. 망각의 막을 뚫고 들어온 또 다른 기억.]

 

글의 첫 장면인 테드의 자살시도는 제목이기도한 다음 사람을 죽이는사건으로 이어지고 이 부분이 이야기의 변형을 가져와 계속 변주되는데, 이 과정이 언뜻 맥거핀효과처럼 보여 독자를 더욱 혼란스럽게 한다. 작품의 끝을 향해 달리지 않으면 전체를 알 수 없는 복잡한 반복과 변형 속에 이 맥거핀이 속해있으니 결과적으로 맥거핀 효과의 반전이랄 수 있겠다.

 

복구되는 기억이라는, 어떻게 보면 간단할 수도 있을 전체의 사건을 이만큼 변주해낸다는 점에서 작가의 영민함이 느껴지지만, 이러한 이야기 흐름과 방식을 어려워 할 독자도 있겠다. 그러나 흡인력이 강력해 손을 놓지 못하게 만드니 이 또한 작품의 큰 매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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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밀리미터의 혁신 - 5년 안에 50배 성장한 발뮤다 디자인의 비밀
모리야마 히사코.닛케이디자인 지음, 김윤경 옮김 / 다산4.0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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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년 전 7, 그렇지 않아도 부실했던 선풍기가 망가졌다. 웬만한 건 고장이 나기 전까지 쓰는 나이기에 그해까지만 넘기기를 바랐는데, 극성스런 무더워가 선풍기에도 영향을 미쳤는지 발에 걸려 쓰러진 선풍기는 안전망과 분리되면서 팬의 날개 하나가 툭!하고 부러졌다. 선풍기 없인 살 수 없는 날씨라 당장 근처 가전제품샵으로 갔다. 몇 가지 모델이 있었고 딱히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고작 선풍기니까, 선풍기야 거기서 거기니까, 그래봐야 몇 만 원짜리라 그나마 마음에 드는 걸 들고 직원을 보며 이렇게 말했다. 아저씨, 이거 작년 모델인데 만 원만 깎아주세요. 기대 없이, 영혼 없이 습관적으로 말한 건데 직원은 날 삼초 정도 보더니 그러자고 했다. 그렇게 참 기분 좋게 들고 와서 지금도 잘 쓰고 있다. 이 글을 쓰는 내 옆에 그 선풍기가 돌아가고 있는데, 버튼이 있는 하단부의 꽃문양이 지금은 촌스러워 보인다. 그때는 참 세련되게도 그렸다 싶었는데...

 

딱히 가전제품에 흥미를 갖거나 디자인 분야의 일을 하지 않는 이상, 혼자 사는 노총각이 가전제품에 관심을 가질 확률은 별로 없지 않을까. 고로 난 발뮤다라는 가전제품 브랜드 이름을 이번에 처음 알았다. 책을 읽는 중간에 그린팬선풍기를 검색했고, 아무리 수입이지만 고작 선풍기가 이렇게 고가라는 점에서 깜짝 놀랐다. 고작 선풍기 아닌가. 모터에 팬을 달아 인공바람을 날리는, 에어컨이 아닌 이상 선풍기의 성능이래야 거기서 거기일 텐데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렇게 비쌀 수가 있을까?! 명품에 무지한 난 루이비x, x 등의 이름을 들으면서 그것들의 가격 중 반은 남들에게 과시하기 위한 허영비가 포함돼 있다고 생각하고 있기에 발뮤다또한 그렇다고 생각했다. 물론 좋은 재질에, 뛰어난 디자이너의 영감이 들어간 작품이라고 하더라도, 브랜드 값이 포함되어 있다고 해도 소위 말하는 명품백의 가격은 범인이 보기에 황당할 정도가 아닌가. 여튼 명품에 무지한 난 그렇게 생각했다.

 

이 책 앞표지에 이렇게 쓰여 있다. ‘5년 안에 성장한 발뮤다 디자인의 비밀’. 그리고 책 제목은 ‘0.1mm의 혁신’. 그러니까 발뮤다라는 기업이 기술력과 더불어 어떻게 디자인을 활용해 도산 직전에 살아남았는지를, 성장하고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이 얘기가 무엇보다 흥미롭다.

 

[p 5. 2009, 도산 위기에 처한 어느 스타트업 기업이 있었다... 직원 3명에 연매출 4,500만 엔을 벌어들였던 작은 회사 발뮤다는 미국발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와 세계 금융 위기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았다. 판매 중이던 상품은 주문이 뚝 끊겼고 매출 역시 수직으로 낙하했다. 설립자는 생각했다. ‘어차피 망할 거라면 진짜 해보고 싶었던 제품이라도 만들어보고 끝내자.’ 이때부터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궁지에 몰려 개발한 제품이 날개 돋친 듯 팔리기 시작한 것이다... 기적을 불러온 제품은 <그린팬>이라는 선풍기였다. 그 뒤 5년 동안 발뮤다는 혁신적인 가전제품을 잇달아 출시하며 50배 이상 급성장했다.]

 

오래 전, 구멍가게 장사를 한 적이 있다. 물건을 떼어다 파는 수준이었지만 그쪽 일을 잠시 하다 시작한 장사라 루트도 어느 정도 알았고, 이쪽 장사를 하는 사람도 많지 않았으며, 초반에 기대 이상의 매출을 올렸던 터라 조금 더 확장하면 그럭저럭 먹고는 살겠다 싶었다. 그리고 2년 반 만에 접었다. 장사의 유통과정을 아는 게 전부가 아니었다. 제일 중요한 건 자릿세였다. 아마 내 자리만 오랫동안 잡고 있었어도 지금까지 했을지 모르겠다. 수입의 반 이상이 자릿세로 나갔으니까. 돈 없는 사람은 이쪽에서 영원히 호구겠구나 싶었고, 장사 물건도 계속 바뀌지 않는 이상 초반에 빤짝 이상을 넘지 못했다. 이래저래 사정이 겹치면서 스트레스가 늘었고 결국 폐업을 써 붙였다. 이상하게도 홀가분했다. 고민하면서 장사는 아무나, 적어도 내가 하는 게 아니구나,를 절감해서일까, 잠시라도 장사의 스트레스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일까, 그리 큰 적자는 아니어서 일까. 여튼 우리 사회의 많은 자영업자들의 슬픈 상황과 감정을 나 또한 잠시라도 조금 경험했기에, 비록 당시의 발뮤다 같은 입장은 아니더라도 도산, 부도, 폐업이란 단어가 주는 압박감의 무게가 어떤지 알기에 조금은 동감이 갔다.

 

보통 그런 상황이면 재고처리에 열을 올린다. 그런데 발뮤다의 대표는 위 지문처럼 어차피 망할 거라면 진짜 해보고 싶었던 제품이라도 만들어보고 끝내자.’는 생각을 했고 실행에 옮겼다. 어려운 상황에서 돈을 더 들이는 행동을 한 것이다. 그에게 있어 장사는 단지 남들에게 물건을 팔아서 얻는 이익의 행위 그 이상이었던 거다.

 

[p 23. 물론 불황의 영향도 컸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때 비로소 깨달았습니다. 제가 이상적이라 여기며 만든 제품과 소비자가 원하는 제품이 결코 일치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말이죠...

불황의 파도에 휩쓸려 회사가 도산할 위기에 직면하자 테라오 겐 대표는 큰 깨달음을 얻었다. 많은 사람이 필요로 하고 기꺼이 구매할 수 있는 제품을 개발할 때 행복한 삶에 도움이 되는 도구를 만들겠다는 발뮤다의 디자인 경영 원칙 역시 빛을 발하게 된다는 사실을 말이죠.]

 

도산 직전의 발뮤다를 살린 제품은 그린팬이란 선풍기다. 독자적으로 개발한 14장의 이중 구조 날개가 보통의 선풍기와 달리 자연에 가까운 순한 바람을 제공하며 장시간 쐬어도 쾌적한 기분을 느끼게 해주며, 초절전 전력 소비량과 나비의 날갯짓 소리보다 조금 더 큰 13데시벨의 저소음만 낸다고 한다. (내 옆에 있는 4장의 날개가 달린 선풍기 팬이 초라해 보인다...)

고작 선풍기가 아니라는 거다.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선풍기의 기술력을 확 끌어올렸다는 거다.

 

[p 245. 이런 감성과 경험이 기존 관념에 얽매이지 않는 유연한 생각과 만나고, 논리적 사고와 결합할 때 비로소 혁신적인 제품이 탄생할 수 있다. 예를 들어 그린팬에 적용된 획기적인 날개 구조는 공장 장인들이 선풍기를 벽으로 향하게 한 후 부딪혀 돌아오는 바람을 쐬는 장면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 회전하며 부는 바람이 벽에 부딪히며 소용돌이 기류가 파괴되면서 돌아오는 바람이 부드러워진다. 테라오 겐 대표는 이를 이론적으로 검증하기 위해 홀로 유체 역학을 공부했고,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친 끝에 가장 자연에 가까운 바람을 구현해냈다.]

 

기술력이 좋다고 많은 사람들에게 어필할 수는 없다. 오히려 요즘 시대에 제품의 성공은 디자인에서 판가름이 난다고 할 수 있다.

 

[p 19. 하지만 뭐니 뭐니 해도 <그린팬> 시리즈의 가장 큰 경쟁력은 일찍이 선풍기 업계에서 찾아보기 힘들었던 깔끔하고 심플한 디자인이었다. 사람들의 시선을 압도하는 정갈한 디자인은 압도적인 성능과 기분 좋은 바람을 극적으로 부각시켜 주었다.

 

p 76. ‘전에는 모던한 디자인에 집착했다는 테라오 겐 대표의 말에서 알 수 있듯이, 과거의 발뮤다는 주로 멋진 외형과 쾌적한 사용감을 중시하는 디자인에 공을 쏟았다. 그러나 지금은 예전만큼 디자인에 집착하지 않는다. 오히려 의식적으로 디자인적 요소를 억제하려고 노력한다. “집 안에서 선풍기가 가장 빛날 필요는 없습니다. 거주하는 사람이나 테이블, 또는 의자처럼 주인공이 될 수 있는 존재는 아주 많습니다. 어느 순간부터 가전제품이 사람이나 다른 물건에 비해 더 존재감을 가질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반대로 그 존재감을 억눌러야 한다고 생각했죠.

 

p 238. 발뮤다의 심플한 디자인은 그 자체에 목적을 두지 않습니다. 적절하고 간결한 디자인을 통해 사람의 마음에 호소하는 무언가를 담아내는 것이 디자인의 핵심이죠.]

 

난 디자인에 문외한이다. 그럼에도 2010년 출시된 발뮤다의 첫 그린팬과 불과 2년 전에 산 내 옆의 선풍기를 보면 그 차이를 확연히 느낄 수 있다. 물론 가격차가 있고 그 가격차에는 여러 요소가 존재하겠지만, 그래도 어쨌든 내 옆의 꽃무늬 선풍기는 그냥 선풍기라는 느낌 이상을 주지 못한다. (아까부터 계속 꽃무늬가, 도드라지게 튀어나온 버튼들이 신경 쓰인다...)

반면 그린팬은 무심할 정도로 심플함에도 계속 시선을 당긴다. 마치 심플함에 정답이 있다는 것처럼 말이다.

 

[p 45. 작동 상태를 표시하는 전면 인디케이터 부분의 LED 라이트 비침 정도를 조절하기 위해 플라스틱 두께를 0.1밀리미터 단위로 바꿔가며 실험했다. 발뮤다의 제품 개발은 이렇게 세세한 부분까지 꼼꼼하게 테스트를 거치며 이루어진다.

 

p 102. 테라오 겐 대표는 발뮤다의 제품이 집에 전시하는 가전제품 수준에 머물지 않았으면 한다. 그래서 삶에 필요한 도구로써 어떤 형태를 띠면 좋을지, 어디에 두고 어떻게 사용하면 유용할지 고민한다. 사용자가 제품을 구매하고 사용하면서 어떤 가치를 느낄 것인가. 이 사실을 늘 의식하면서 기획하고 개발합니다.” 테라오 겐 대표의 이러한 고집이 기존에 없던 흰 항아리 모양의 가습기를 세상에 나오게 했다.]

 

난 명품에 문외한이지만 명품에 담긴 가치가 얼마나 사람들에게 중요하게 어필하는지는 조금 알고 있다. 남들 눈엔 그저 장난감일 뿐인 피규어가 몇 십만 원 대일 때 그 피규어에 담긴 장난감 이상의 가치를 어느 정도 알아볼 수 있다. 단지 가격이 세다고 명품이 아니다. 그 속에 담긴 내용과 동작의 의미, 표현하고자 하는 영감과 작품의 재질 등에 따라 피규어의 값어치는 크게 달라진다.

 

발뮤다의 역사는 오래 되지 않았고, 도산 직전의 기업을 구해낸 첫 그린팬7년 전에 출시되었을 뿐이며, 발뮤다는 문어발처럼 이것저것을 만들고 또 제품마다 가격대에 맞춰 이것저것을 생산하는 기업이 아니다. 제품 하나를 만들어도 가치를 중심에 둔다. 그 가치를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사람마다 가격을 받아들이는 느낌이 다를 것이다.

 

책에 나온 발뮤다의 제품을 보며 사고 싶다는 생각에 검색을 했을 때의 높은 가격대에 매우 놀랐다. 다른 건 몰라도 발뮤다를 구해낸 그린팬의 가격은 솔직히 황당했다. 고작 선풍기 아닌가. 아무리 기술력이 좋아도 팬이 달린 선풍기란 말이다. 디자인이 마음에 들어도 수집용이 아니라 실제 사용하는 선풍기다. 그 선풍기를 며칠째 계속 보고 있다. 그리고 선풍기가 선풍기처럼 다가오지 않는다. 갖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한다. 필요에 의해 사는 것보다 선풍기를 선풍기처럼 보이지 않게 만드는 그 어떤 가치를 느끼게 한다. 나쁘게 말하면 과소비일 수 있다. 그렇다면 내 옆에 있는 꽃무늬 선풍기를 사면된다. 그러나 제품에 어떤 가치를 느끼고 그것을 살 수 있는 상황이 된다면 그리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내가 피규어를 보는 것처럼 말이다. 물론 명품 핸드백은 여전히 잘 모르겠다...)

 

이 책은 발뮤다의 제품들이 어떤 과정을 거치며 만들어졌는지, 그 과정에서 기업의 어떤 가치를 담았는지, 앞으로 발뮤다가 어떻게 성장하려고 하는지를 담고 있다. 그래서 이번에 처음 알게 된 발뮤다라는 기업에 대해 문외한인 내가 어떻다고 말하는 건 꽤 오버다.

가장 크게 흥미를 끌었던 부분이 제품의 기술력과 디자인에 대한 발뮤다의 열정이었고, 그걸 대표하는 예로 선풍기를 들었다.

모든 기업들이 발뮤다 같을 필요는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 그러나 적어도 확실한 이념과 가치를 담은 열정적인 기업들이 존재할 필요는 분명히 있다. 발뮤다가 그걸 보여주고 있다.

선풍기다. 고작 선풍기다. 고작 선풍기가 아니다. 선풍기 그 이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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