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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모를 것이다 ㅣ 정보라 환상문학 단편선 1
정보라 지음 / 퍼플레인(갈매나무) / 2023년 1월
평점 :
어이없이 조그맣고 미약한 사건에서 시작되어 돌이킬 수 없이, 걷잡을 수 없이 번져나가버린 삶의 흐름과 죽음의 불꽃 앞에 너무나 무력한 자신에게 분노하며 그는 울었다. 나무, p.50
2022 부커상 최종후보에 오른 <저주토끼>를 쓴 정보라가 있기 전에 정도경이 있었다. 정도경이란 필명으로 20년 넘게 다양한 장르를 넘나들며 쌓아온 폭 넓고 깊은 정보라의 환상 문학의 근원!!
정도경이 정보라 되기까지 그녀의 초기작들을 만날 수 있는 기회. 장르를 혼합하고 실험하는 과정 가운데 탄생한 많은 작품 가운데 환상세계 속에 절묘하게 냉엄한 현실 인식을 드리운 작품 10편을 담은 “아무도 모를 것이다” 를 만나 보았다.
나무, 머리카락, 가면, 금, 물, 산, 비오는 날, 휘파람,
Nessun sapra, 완전한 행복
9편의 초기작과 1편의 미발표작으로 이루어진 단편들에는 인간의 소외, 차별, 외로움, 욕망, 복수, 쾌락, 살인 등 인간의 원초적인 감정과 두려움이 담겨있다. 아주 사소하고 작은 사건에서 시작된 일이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되는 과정을 보면서 삶의 허무함을 느꼈달까? 인간의 연약함을 느꼈달까?
특히나 단편집의 첫 문을 열어준 “나무”의 이야기는 굉장한 흡입력을 갖고 있었다. 작은 사건을 발단으로 시작된 복수의 끝. 그 복수가 얼마나 허망한 것인지.. 잘 보여주는 듯 하다. 집의 얼룩에서 나온 여성과의 정사를 통해 극한의 쾌락을 맛본 사내가 서서히 죽어가는 ”가면“, 물과 비슷한 생명체를 무기화하려는 인간의 욕망을 보여주는 “물”, 어디서 날아온지 모르는 “머리카락” 씨앗이 온 세상을 덮어버리는 이야기.
소설을 다 읽어야 제목의 뜻을 알게 되는 “Nessun sapra”. 레닌그라드 포위전으로 도시가 봉쇄됐던 시절, 정신병동의 간호사가 자신이 담당하고 있던 천재적인 소설가가 죽자 그의 시체를 먹었다는 내용이다.
러시아어를 전공하고 러시아 문학으로 박사를 받은 그녀의 힘과 기발함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정보라 작가의 글은 처음이다. 언니로부터 저주토끼 내용은 살짝 들어 조금 알고 있는데 들으면서 생각한 것은 무섭다라기 보다는 쓸쓸하다, 허무하다였다.
이번 책도 역시 쓸쓸하고 애잔하고 안쓰럽다. 그런 느낌을 주려는 의도는 없어 보인다. 때론 굉장히 비정하고 냉철하고 추악한 모습을 그대로 쓴 느낌이 드는데 그 후에는 이상하게 쓸쓸함이 남는다. 판타지도 괴기스러운 이야기도 썩 좋아하지 않는데 이 작품은 마음에 든다. 사회의 어두운 면을 드러내는 책을 좋아하기 때문인 것 같다. 차마 말하지 못하는 진실을 말하는 힘! 정보라 작가의 펜이 어디를 향할지 지켜보고 싶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