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편집자가 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가볍게 해본 적이 있었다. 나는 뭐든 읽고 있는 대상을 머릿속으로 끊임없이 교정/윤문하는 버릇이 있는데 내 입맛대로 문장의 구성을 주무르는 것에 가까우니 사실상 이걸 제대로 된 교정으로 보기야 어렵겠지만, 아무튼 이런 걸 하는 편집자가 되고 싶어 한동안 열심히 북에디터를 드나든 시기가 있었다. 저자의 표현에 따르면 내가 소위 '머글'이던 때의 이야기다.

편집자만큼 그 역할을 단편적으로 규정하기 어려운 포지션이 또 있을까 싶은 생각이 든다. '어떻게 하면 편집자가 될 수 있을까?'를 고민해 보는 동안 미디어를 통해 구현된 다양한 편집자상을 접했다. 사실 20세기 말 한국 어린이들이 가장 먼저 접하게 되는 편집자(혹은 편집장)의 모습은 아마 <짱구는 못말려>에 종종 등장하곤 하던 만화가 혹은 소설 작가의 원고를 독촉하는 이들이 아니었을까 하는 짐작을 해 본다(만화적 재미를 위해, 극중에서 이들은 제대로 원고를 받는 일이 없으며 늘 울상이 된 채로 해당 에피소드의 대미를 장식한다). 세상에는 이런 서글픈 어른의 자화상 같은 모습을 한 편집자들도 있을 테고, 전기 영화가 만들어질 만큼 널리 이름을 날린 맥스 퍼킨스 같은 편집자도 실존한 바 있으니 아마 현실 세계 편집자의 모습도 그 사이 어딘가에 좌표를 두고 있다고 두루뭉술하게 말해도 좋을 것이다.

《편집자의 마음》을 읽고 내 안에 그려 본 편집자의 상은, 한 권의 책이라는 미지의 모험을 향해 담대히 나아가는 함선의 함장 같은 모습이다. 최초의 모티프를 제공하는 건 저자이지만, 그걸 책이라는 물성으로 완성해 독자와 만나게 하는 여정을 가장 속속들이 알고 선두에서 그 과정을 이끄는 편집자의 모습은 <스타트렉>의 한장면에 빗대어도 모자람이 없겠다는 생각이 든다. 더욱이 그 모험이 모든 승무원의 협업으로 완성된다는 점에서 특히 그렇다. 함장 즉 편집자란, 말하자면 이 모험의 대표자격인 사람인 것이다. 그래서 편집자가 저자라는 이름의 신발로 바꿔 신고 자신의 경험을 전하는 책은 어떤 느낌일까 궁금했는데, 자신의 문장과 타인의 문장 인용을 명확히 구분해 서술하는 대목에서 그의 편집자적 정체성(?)이 선명하게 드러나 섬세하고도 독특한 읽는 재미가 있었다.

이 책은 저자가 다년간의 경험으로 몸소 겪어낸 깊은 통찰을 바로 그 경험의 산출물 중 하나일 글쓰기를 도구 삼아 유려하게 엮어낸 이야기로 목넘김이 좋은 반면 뒷맛이 쓰다는 점에서 맥주를 닮았다. 내가 맥주를 본격적으로 좋아하게 된 건 30대가 막 된 시점부터였는데 처음 내게 맥주를 마시게 한 게 부드러운 목넘김이었다면, 꾸준히 맥주를 사랑하게 만든 건 씁쓸한 뒷맛과 알딸딸하게 이어지는 취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이 책의 정수 역시 단연 본문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4부 '나를 지키며 일하기'에 있다. 이 부분이 빠졌더라면 알찬 실용서로서 기능이야 했을지언정 이 책의 기획 의도 '출판의 미래'는 완전히 빠진 이야기가 됐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여기서 저자는 자신의 경험을 단순히 개인적 운으로 치부하는 대신 시야를 더 넓혀 근원적인 구조의 문제점을 고민한다. 저자가 출판 노동자로서 쌓아온 경험이 내가 정보산업 노동자로서 겪은 일과 여러모로 접점이 많았다는 점에서는 안타까움과 묘한 반가움이 뒤섞인 감상이 들었다.

누구도 내게 '출판의 미래' 같은 걸 궁금해 하지야 않겠지만, 독자의 한 사람으로서 나는 이 책에서 출판 시장의 미래 한 폭을 본 듯한 기분이 든다. 그리고 여러 경우의 수로 뻗어나가는 평행 세계 시나리오 중 저자가 소망한 것처럼, 우리가 같이 만들고 같이 읽고 때론 같이 울며 그렇게 결국에는 같이 웃는 미래를 현실로 맞이할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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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관련 공부나 일을 하는 분들과 만나면 심심찮게 듣는 말이 있다. "시중에 나온 번역 관련 책은 거의 다 읽어봤다" 혹은 검색해서 관련 글은 전부 읽었다 등등. 그런 이야기를 한창 듣던 시기에는 나도 그저 '대단하다' 생각하고 말았는데 그 이후 시간이 좀 더 흐르고 새삼 돌이켜 보니 나도 이제는 시중에 나온 웬만한 번역 실용서는 거의 다 읽은 기분이 든다. 예전에 영국 워킹홀리데이 출국 전에는 블로그 포스트는 물론이고 유튜브에 올라온 워홀러들 영상은 국가를 가리지 않고 거의 99% 다 본 기억이 난다. 다른 이의 경험을 간접 체험하면서라도 어떻게든 불안을 달래고 싶었던 인간의 묘한 심리였을까? 이미 다 지나왔으니 하는 말이지만, 다른 사람들의 경험을 멍하니 구경한 시간에 뭐든 구체적인 공부나 준비를 했으면 훨씬 더 직접적인 도움이 됐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 오랜 습관을 여전히 없애지는 못했지만 대신 요즘은 남의 경험을 구경할 때면 이걸 어떻게 나의 행동으로 옮길 수 있을까, 그 방법을 함께 고민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 책 《번역가 K가 사는 법》을 읽게 된 타이밍이 제법 절묘해서 책을 받자마자 부록으로 숙제를 하나 끼워넣자고 마음 먹었다. 7월말엔가 쓰기 시작해서 내내 다른 일을 핑계 삼아 지지부진 미뤄오던 (애초에 아무도 시키지 않은) 출판기획서를 마무리해서 에이전시와 출판사에 열심히 돌리고, 이 포스트에 꼭 그 후기까지 함께 실어야지 다짐한 것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제법 이 책의 주제와 잘 어울리는 취지의 숙제였고 다행히 완성은 했다. 아직 돌리지는 못했지만. 이건 순전히 이 책을 읽은 덕분에 얻은 성취다.

http://ch.yes24.com/Article/View/35653


나는 주로 영한 번역서를 즐겨 읽고/사는 탓인지 저자인 김택규 번역가/작가의 이름은 좀 낯설었다. 그래서 처음 이 책의 출간 소식을 알게된 후 검색을 좀 해봤는데 위의 인터뷰를 읽고 저자가 좀 더 궁금해졌다. 거의 광풍급(?)으로 국내를 휩쓴 《부의 추월차선》의 저자 엠제이 드마코가 자신의 책에서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부자가 된 사람들이 자기의 진짜 경험으로 책을 쓰는 대신 책을 위해 가짜 경험을 서술하고 더 나아가 그 책을 부를 축적하기 위한 수단으로 삼는 사례가 적지 않지만 자신은 정말 자신이 부자가 된 방법만을 진실되게 책에 실었다고. 《번역가 K가 사는 법》을 읽고 나니 엠제이 드마코의 이 말이 불쑥 떠올랐다. 이 책은 현역 번역가(이 단어는 저자의 직업과 관심사를 아우르기에 너무 한정된 수식이지만)인 저자가 번역으로 시작해 점점 더 깊숙이 연루하게 된 책 만들기의 여정을 술술 읽기 쉽게 정제하면서도 어디에서도 흔하게 듣지 못할 아주 개인적인 경험을 기꺼이 나눈, 번역가의 진솔한 기록이다.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당시 저자의 경험과 이후 이 책을 발판 삼을 독자들의 고군분투가 한 데 모여 완성되는 합동 프로젝트(?)같은 느낌이 들기도 한다. 그 가운데 가장 쉽고 간단한 건 아마 첫 단계인 '읽기'일 것이다. 읽지 않으면 아무것도 시작되지 않으니 어쩜 가장 중요한 단계라고도 말할 수 있겠다.

앞서 언급한 숙제 때문에 서평 쓰기가 다소 늦어지기는 했지만 사실 빠르고 쉽게 잘 읽히는 책이라 나도 하루이틀만에 후딱 읽었다. 내가 꼽고 싶은 이 책의 핵심 키워드는 '문화 백수'다(이걸 중심 주제라고 보기는 어렵겠지만). 나는 꽤 오래 내 성향이 유별나다는 생각을 하며 지냈다. 관심사가 잡다하고 문화 생활 전반에 지출을 많이 했으며, 영화든 공연이든 전부 혼자 훌쩍 가서 봤다(이건 물론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그 과정 내내 느낀 건 여러가지 의미로 내가 좀 다르다는 거였다. 학교에서도 회사에서도 이 재밌는 감정을 공유해줄 상대를 좀처럼 찾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재밌지만 좀 울적했고 외로웠지만 그나마 재밌어서 버텼다.

번역이 그런 내 삶에 개입한 건 순전히 우연이었지만, 그걸 선명한 개념이자 언어로 받아들이자마자 바로 몸으로 알았다. 아, 나는 이런 걸 좋아하는 사람이구나, 하고. 이후로 몇 년 간 나는 내가 느껴온 재밌음의 대상 즉, '이런 것'의 정체가 무엇인가를 열심히 탐구하며 보냈다. 그러는 동안 IT 업계 종사자 혹은 공대생뿐이던 내 주위는 이제 영화와 드라마, 책과 같은 예술과 창작을 좋아하고 향유하는 이들로 채워지게 되었다. 굳이 같은 걸 보고 읽지 않아도 서로의 감정을 나눌 수 있는 상대를 여럿 곁에 둘 수 있게 된 게 새삼 행운이라는 생각이 든다. '백수'가 쓰이는 뉘앙스나 용례를 선호하지는 않지만 '문화 백수'라는 단어는 처음 발견하자마자 좋아하게 됐는데, 내게 이 단어는, 문화 생활을 좋아하고 우선시하며 순전히 이런 생활을 지속하는 삶을 살기 위해 결국 좋아하는 일의 범주에서 생업을 이어나가는 이들을 연상케한다. 그리고 '좋아하는 일을 한다'는 문장의 실질적 의미는 시소처럼 자주 이쪽저쪽으로 기운다. 어느 날은 '좋다'는 감정이 크기도 하고, 다른 날은 '일'이어서 느끼는 괴로움이 더 크기도 하고, 그 균형을 스스로 꾸준히 잘 맞추지 않으면 결국에는 좋아하던 감정이 사라지고 일로만 남게 되거나, 좋아하는 감정만을 겨우 남기고 다른 일을 찾는 선택을 하게 될 수도 있다. 책 속의 다음 문장도 비슷한 맥락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다른 일은 도저히 하고 싶지 않고,

또 할 수 없는 분만 출판번역을 했으면 해요."

《번역가 K가 사는 법: 이대로 죽을 수는 없다》

1부 나의 이야기 중

이 말은 쉽게 읽히지만 사실 어렵게 쓰인 문장이다. 적어도 내게는 그렇게 느껴진다. 보너스로 내게는 '문화 백수'의 동의어나 마찬가지인 제목의 팟캐스트 <예술 방면 활동가들>이 떠올라 함께 소개해본다.

https://www.podty.me/cast/177164?gnbDidAdultAuth=false


관심 분야가 넓으면 때론 그걸 줄줄 늘어놓기보다 그 관심사의 집약체인 사람 자체로 하는 설명이 더 빠를 때가 있다. 마찬가지로 시간을 들여 나름의 질서에 기반해 쌓은 내 문화적 정체성(?)은 번역 일을 할 때 생각보다 도움이 된다. 특히 번역가/프리랜서의 입문 시기를 어느 정도 안정적으로 잘 넘어온 이들이라면(나는 아직 이 수준까지는 이르지 못했지만) 더욱 그렇다. 혼자 하는 작업 자체는 물론이고 어떤 작업을 할 것인지 하는 전반적인 고민 역시 넓은 의미에서는 일에 포함되고, 결국에는 번역이라는 바다(?) 위에서는 내가 온전히 이 항해의 조타수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물론 함장도, 항법사도 전부 내가 해야 한다). 문화적 정체성은 그런 나의 동력이자 근간이 되어준다. 그래서 사실 이 책 역시 이제 막 번역에 관심을 가지게 된 분들보다는 짧게든 길게든 번역 일을 시작해 보려 여러 시행 착오를 조금이라도 겪어본 분들 혹은 경험을 통해 쌓은 문화적 정체성이 비교적 분명한 분들께 더 유용한 쓸모가 있으리라는 짐작을 해본다.

나는 재밌게 일하고 싶어서 번역을 선택했다. '재밌는'이라는 수식은 '번역'이라는 너른 분야를 개인적이고도 주관적인 기준으로 한정한다. 이 문장의 구조를 비틀어 보면 '모든 번역이 재밌지는 않다'는 뜻과 같아진다(원 명제의 대우). 게다가 말했듯이 '재밌다'는 수식부터가 일찍이 스스로 차근차근 정립해나가지 않으면 나도, 남도 알 수 없는 모호한 의미라서, 내가 재밌는 번역을 하려면 나부터가 '나에게 재밌는' 것이 무엇인지를 잘 알고 그런 일감을 맡을 수 있도록 방향(커리어 패스)를 잘 설정해 항해해야 한다.

단적인 예로, 내가 자발적으로 재밌어서 하는 이런 서평을 쓰는 일이나, SF 판타지 소설을 발굴해 아무도 의뢰한 적 없는 기획서를 쓰는 일도 누군가에게는 전혀 이해할 수 없는 행동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인간은 모두 다르니까. 처음 영국에 갔을 때도 비슷한 생각을 한 기억이 난다. 반겨주는 이 하나 없는 타국에서 한껏 눈치를 살피며 다니는 동안은 나조차도 애초에 왜 내가 이곳까지 왔을까 이유를 찾지 못하고 길을 잃은 기분에 잠겨 있었다. 하지만 그 경험 덕분에 내가 좋은 일을 하려면 결코 그 명분을 바깥에서 찾아선 안된다는 교훈을 얻었다. 모두가 반대하더라도 그 일을 밀고나갈 분명한 이유가 내 안에 뿌리 깊게 존재한다면 머리를 비우고 그냥 그렇게 살려고 노력하면 된다. 내 삶의 자유가 온전히 내 손에 있는 삶을 사는 법을 나는 어쩌면 번역을 통해 배우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번역을 공부하면서 알게된 또 다른 내 취향 하나는 내가 언어를 좋아한다는 거였다. 번역을 영어 공부로 알고 시작했지만 이젠 한국어를 더 좋아하게 되었고, 얄팍하게나마 각 언어의 특성을 알아가는 과정이 참 재밌다. 예전에 어느 문화권 출신이 중국어를 배우기에 더 수월할까 고민해본 일이 있는데, 당연히 입문 단계라면 일본이나 한국 같이 지리적으로 더 가까운 언어권 출신들에게 유리한 측면이 있기는 할 것이다. 더 멀고, 더 낯설수록 더 기초적이고 당연한 것부터 인위적으로 학습해 나가야 하니까. 그런데 이 책을 통해 내가 만나본 글말로써의 중국어는 사실 한국어보다는 영어와 접점이 많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장 구조부터, 구두점을 쓰는 방식까지도 말이다. 하지만 이러한 언어의 속성과 상관 없이 이 책을 읽으면서 다시금 깨우친 사실이 하나 있다. "중국어 자체를 좋아하는 사람이 결국엔 가장 탁월하게 중국어를 구사할 수 있게 된다." 사실 이렇게만 쓰면 이 명제를 참이라고 보기는 어려운데, 그래서 여기에 전제를 하나 붙이겠다.

"적어도, 중국어를 배우기에 누가 더 수월할지 고민하는 사람들 가운데에

중국어를 가장 탁월하게 구사할 수 있을 사람을 꼽으라면

그건 중국어 자체를 좋아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번역 일을 하기에 누가 더 수월할지를 고민하는 사람들 가운데에 그 일을 가장 오래 안정적으로 해나갈 수 있을 사람을 꼽으라면 그건 번역 자체를 좋아하는 사람들일 것이다. 다른 분야는 잘 모르겠지만, 이상하게도 번역은 정말 그렇다. 논리적으로 잘 설명할 수는 없지만, 아무튼 번역은 억지로 누가 시킨다고 할 수 있는 일도 아닌 것 같고, 시키지 않아도 누군가는 어쩐지 홀린 듯이 하고 있는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번역가 K가 사는 법》은 독서라는 행위 자체의 특성상 모든 이가 같은 감응을 받을 수야 없겠지만, 일부 독자들에게는 어쩌면 삶을 완전히 뒤흔드는 경험을 선사할지 모르는 책이다. 무엇보다 이 책을 통해 '번역'이라는 단어가 그 의미를 좀 더 입체적으로 확장한 것 같아 뿌듯한 책임감을 느끼면서도, 한편으로는 '코딩할 줄 아는 디자이너'처럼 '기획할 줄 아는 번역가'가 업계의 보편적인 표준으로 자리잡게 될까 살짝 두려운 기분도 든다.

어쩐지 다음 편의 존재를 암시하는 듯한 공포 영화의 엔딩 같은 마무리가 되었다. 띠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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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책 읽기 모임에 처음 들어갔을 때, 내가 좋아하는 SF 작가(혹은 그냥 작가) 이름을 말하는 시간이 있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당시에도 거의 아는 게 없어서 코니 윌리스와 테드 창 이름을 적당히 댔던 게 기억이 난다. 그때만 해도 그 이름들은 그냥 이름이었다. 그에 비하면 지금은 얼기설기라도 머릿속에 내가 좋아하는 작가들의 집이 지어진 기분이 든다. 그 속에는 그 이름들을 떠올리면서 덧그려간 때론 구체적이고 때론 아주 추상적인 그림들이 모여 연상 작용을 일으킨다. 그리고 이후 몇 년 간 집의 수가 좀 더 늘어났다. 《쇼리》는 비교적 최근에 자리를 잡은 '옥타이바 버틀러'라는 이름의 집에 속한 작품이다.

《쇼리》를 읽기 전까지 나는 옥타비아 버틀러가 굉장히 오래 전, 이를 테면 19세기 후반?에 태어나 20세기에 사망한 작가라고 어렴풋이 짐작했다. 이유는 모르겠는데 그냥 그 이름에서 막연한 먼지 냄새를 느꼈다. 게다가 '작가들의 작가' 같은 수식도 보통 굉장한 원로에게 돌아가니까. 《쇼리》를 다 읽고나서 그가 생각보다 나와 동시대(?) 사람인 걸 알고 조금 놀랐다. 옥타비아는 1947년에 태어나 2006년에 사망했으니 우리 둘 다 20세기에 태어나 21세기에 사라질(혹은 이미 사라진) 사람인 것이다.

내가 읽은 그의 첫 작품은 《야생종》인데 현재는 《와일드 시드》라는 제목으로 개정판이 출간되어 있다. 도서관에서 아마 3번쯤은 빌렸다가 거의 책장도 펴지 않고 반납하기를 반복하다가 올해가 되어서야 겨우 완독했다. 그 두께에 비해 술술 잘 읽히는 책이다. 한편으로는 《쇼리》 번역본이 나올 걸 미리 알고(?) 어떤 우주의 신묘한 힘이 나를 이 책으로 이끈 게 아닐까 하는 재밌는 생각을 해보기도 했다.

20세기를 치열하게 보내온 여성 SF 작가들에게는 저마다 꿈꾸는 이상 혹은 현실의 상이 작품 속에 깊숙이 녹아들어 있다. 내가 느낀 옥타비아 버틀러의 이상은 조금 슬프다. 여성이면서도 인간은 아닌 전지전능한 주인공들은 여성으로서 자신의 정체성과 남들(백인)과 같지 않은 피부색으로 갖은 시련에 시달린다. 이런 현실의 고난을 감싸는 그들의 멋들어진 초현실적 능력은 이야기를 아주 조금 공중으로 붕 띄워준다. 작가의 상상은 아름답고 현실과의 적정 거리를 유지한다. 너무도 명백하게 그 존재를 알고 있는 대상(현실의 여성 차별과 인종주의)을 적당히 각색하거나 심지어 생략한 무대 속을 헤매다 보면 나는 조금 어리둥절한 기분을 느끼게 되는데(이런 기분을 처음 느낀 건 영화 <소공녀>를 보고서였다) 옥타비아 버틀러의 세계관은 그 어리둥절함을 넘어서 왠지 슬픔을 느끼게 하는 곳이었다.

현실이 괴로운만큼 그 괴로움을 사실성 있게 똑같이 그려야지! 같은 주장을 하려는 건 아니지만, 그냥 내가 느낀 이 묘한 감정을 꼭 한 번 언급하고 싶었다. 조만간 《킨》이나 《블러드차일드》까지 마저 읽고 현재의 내 생각이 어떻게 달라지게 될지 점검(?)해보는 시간을 가져도 좋을 것 같다.

이 작품에는 '이나'라는 인간과는 다른 초능력을 가진 존재가 등장한다. 작가가 기존에 존재하는 '뱀파이어' 등의 컬트적 요소를 가져다 재가공을 한 개념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나는 인간에 비하면 거의 영원에 가까운 수명을 가졌으며 심지어 그 생애 대부분을 아주 건강하게 보낼 수도 있다. 하지만 인간이 혼자 살아갈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나 역시 인간과 공생해야 한다. 그리고 그 공생의 방식은 오랜 세월을 거쳐 양쪽의 평화를 지키는 방향으로 다듬어져 왔다. 기억이 전혀 없는 인물 '쇼리'의 시선에서 독자들은 비교적 편안하게 이 세계관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를 쇼리와 함께 습득하게 되는데 그 전개 방식이 개인적으로는 마음에 들었다. 아무리 촘촘하고 정교한 세계여도 그곳을 비추는 카메라워킹에 따라, 독자는 그 세계 전부를 속속들이 알게 되어 그 속으로 빨려드는 경험을 할 수도 있고, 반대로 한 번에 너무 많은 정보값이 밀려들어 어느 하나 제대로 소화하지 못하고 책장을 덮게 될 수도 있다. 내게 《쇼리》는 전자의 경험을 하게 해준 작품이었다.

하나 재밌는 건, 최근에 본 생체 3D 프린트 기술 관련 테드 영상 때문인지 한동안 21세기에 인간이 영생의 기술을 얻게 돼버리면 어쩌지? 하는 고민을 매우 진지하게 했는데, 《쇼리》를 읽고는 억겁의 시간이 주어진대도 결국 인간은 끝내 인간으로 남겠구나(살던대로 살겠구나), 하는 결론을 내리는 것으로 고민을 마무리 지었다.

보통 번역 일을 할 때도 그렇고, 단순히 다른 사람의 작업물을 소비할 때도 그렇고 고유 명사는 대수롭지 않게 넘길 때가 많은데(그러면 안되지만), 책 표지를 본 동생이 갑자기 '쇼리' 철자를 묻길래 우연히 사전을 찾아 봤다. 남부식으로 발음하는 'Shorty'를 'Shawty'로 표기하는데 어린/젊은 여자를 부를 때 쓰는 표현이라고 한다(뭐 그리 유쾌한 어감은 아닌 것 같다). 주인공의 이름이 쇼리인데, 그 이름처럼 체구가 크지 않다. 이 소설의 원제는 《Fledgling》인데 쇼리와 비슷하게 애송이, 풋내기 같은 뜻이다.

옥타비아 버틀러의 시리즈물도 한국어로 얼른 번역 출간이 좀 되었으면 좋겠다. 왠지 유독 국내 발간이 잘 안 되는 작가라는 느낌. 《쇼리》는 결말도 아주 좋았는데, 1권짜리라기 보다는 앞으로 쇼리와 그의 공생인들이 함께 펼쳐나갈 모험이 기대되는 어떤 시리즈의 서막처럼 느껴지는 작품이라 여기서 더 이야기가 이어지지 못한 것이 너무 아쉽다. 옥타비아 버틀러는 《쇼리》 출간 1년 후 58세의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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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에 벌써 매달려 있는 열매를 다르게 바꿀 수 없다. 하지만 다음 해에 나올 열매는 다르게 만들 수 있다. 그렇게 하려면 땅속을 파서 뿌리를 튼튼하게 만들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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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의 기술》 리뷰에 남긴 것처럼 이 제목의 원제에도 f*uck이 들어간다. 길게 늘여쓴 원제 'The Subtle Art of NOT GIVING A F*CK'을 한국어로 옮기면 '신경 끄기의 기술'로 아주 깔끔하게 줄여진다는 게 좀 신기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not to give a f*uck/shit/damn 전부 '신경을 쓰지 않음'을 뜻하는 표현이다. 주로 I don't give a f*uck/shit/damn! 같은 느낌으로 많이 쓴다. I don't care.가 '신경 안 써.'로 해석된다면, I don't give it a shit.은 '(순화하자면) 됐다 그래!' 같은 느낌으로 미묘한 뉘앙스의 차이가 있다.

제목 이야기는 이쯤 하고, 이 책의 존재를 알게 된 건 꽤 몇 년 전인데(원작은 2016년에, 한국어판은 이듬해 2017년 출간됐다) 실제로 읽기까지 3년이나 걸렸다는 게 좀 묘한 기분이 든다. 올해는 부쩍 아는 것과 실천하는 것의 차이와 괴리에 관해 자주 재고해 보게 된다. 《신경 끄기의 기술》 역시 이 주제를 다루고 있다.

비슷한 주제의 책을 연달아 읽다 보면 저자들이 하는 이야기들 속에서 어떤 공통된 흐름을 찾게 된다. 이 사람들을 따라하려면 이런저런 루트를 좇으면 되겠구나 하는 통찰을 얻게 되는데, 문제는 대다수의 독자들에게 독서란 그저 아는 것이 최선인 채로 남는다는 데 있다. 나부터도 그렇다. 어떻게 하면 지금의 경제적 상황을 돌파하고 새로운 삶을 시도해 볼지를 여러 책을 통해 수없이 학습하면서도 그저 이러한 과정이 책 앞에서 수동적으로 이루어지는 단순한 앎에 그치고 마는 것이 때로는 신기한 기분마저 든다. 인간에게 지식과 실천은 철저히 분리된 영역에 존재하며 그 사이에 다리를 놓아 연결고리를 만드는 일은 무의식에 기대어 절로 일어나지 않는 것이다. 애석하게도.

이렇게 곤경에 빠진 독자들에게 저자 마크 맨슨이 제시하는 통찰은, '신경을 끄라는 것'이다. 부연하자면, 우리가 지금 온정신을 빼앗기고 있는 여러 자극 요소들 중 각자에게 필요한 극히 일부만을 선별해서 선택과 집중을 하자는 것인데 이렇게 단순하게 요약된 아이디어만 놓고 보자면 그다지 특별할 것도 없지만, 사실 대다수의 자기계발서라는 게 비슷한 속성을 띤다. 중요한 건 대단히 새롭고 특별한 이야기가 아니라, 그 독서 행위의 한복판에서 우연히 자신과 주파수가 맞닿는 누군가의 문장을 만나는 일이다. 때론 이런 사소한 말들이 모여 우리의 무거운 엉덩이를 일으키고 우리를 움직이게 하는 걸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러한 순간은 결코 사소하지 않다.

전반적으로 술술 읽기 쉽고, 거듭 말하지만 초중반은 내용면에서 대단히 특별하달 게 없다. 하지만 마지막장 '결국 우린 다 죽어' 대목을 읽고 이 책에 높은 점수를 주고 싶어졌다. 이 책은 우리가 왜 삶을 열심히 살면 좋은지, 그 근원적인 동기를 다룬다. 죽음은 도처에 널려 있지만 전면에 나서는 일이 잘 없다. 우리는 죽음을 알고 있지만 죽음을 진짜 알고 있지는 못하다. 살아있기 때문에. 그리고 우리는 아직 살아있기 때문에 계속해서 살아가야 하고, 이왕 살아갈 거라면 그 시간을 좀 더 의미 있게 쓰고 싶어지게 되는데(나는 바로 이 지점에서 이 책을 만났다) 그러기 위해서는 죽음을 생각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그제야 알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선형의 시간이 아니라 삶과 죽음의 어떤 순환 고리 속에 놓여 있음을. 전부 쓰고 보니 굉장히 철학적인 이야기처럼 느껴진다. 사실 나도 마지막장에서 저자가 희망봉에 오르는 대목을 만나기 전까지는 이 책이 이렇게나 깊은 내면의 감정을 건들 줄 전혀 예상하지 못 했다.

왠지 2020년과 어울리는 책이라는 생각이 들어, 지금에야 이 책을 읽게 된 것이 재밌고 하찮은 우연처럼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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