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책 읽기 모임에 처음 들어갔을 때, 내가 좋아하는 SF 작가(혹은 그냥 작가) 이름을 말하는 시간이 있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당시에도 거의 아는 게 없어서 코니 윌리스와 테드 창 이름을 적당히 댔던 게 기억이 난다. 그때만 해도 그 이름들은 그냥 이름이었다. 그에 비하면 지금은 얼기설기라도 머릿속에 내가 좋아하는 작가들의 집이 지어진 기분이 든다. 그 속에는 그 이름들을 떠올리면서 덧그려간 때론 구체적이고 때론 아주 추상적인 그림들이 모여 연상 작용을 일으킨다. 그리고 이후 몇 년 간 집의 수가 좀 더 늘어났다. 《쇼리》는 비교적 최근에 자리를 잡은 '옥타이바 버틀러'라는 이름의 집에 속한 작품이다.

《쇼리》를 읽기 전까지 나는 옥타비아 버틀러가 굉장히 오래 전, 이를 테면 19세기 후반?에 태어나 20세기에 사망한 작가라고 어렴풋이 짐작했다. 이유는 모르겠는데 그냥 그 이름에서 막연한 먼지 냄새를 느꼈다. 게다가 '작가들의 작가' 같은 수식도 보통 굉장한 원로에게 돌아가니까. 《쇼리》를 다 읽고나서 그가 생각보다 나와 동시대(?) 사람인 걸 알고 조금 놀랐다. 옥타비아는 1947년에 태어나 2006년에 사망했으니 우리 둘 다 20세기에 태어나 21세기에 사라질(혹은 이미 사라진) 사람인 것이다.

내가 읽은 그의 첫 작품은 《야생종》인데 현재는 《와일드 시드》라는 제목으로 개정판이 출간되어 있다. 도서관에서 아마 3번쯤은 빌렸다가 거의 책장도 펴지 않고 반납하기를 반복하다가 올해가 되어서야 겨우 완독했다. 그 두께에 비해 술술 잘 읽히는 책이다. 한편으로는 《쇼리》 번역본이 나올 걸 미리 알고(?) 어떤 우주의 신묘한 힘이 나를 이 책으로 이끈 게 아닐까 하는 재밌는 생각을 해보기도 했다.

20세기를 치열하게 보내온 여성 SF 작가들에게는 저마다 꿈꾸는 이상 혹은 현실의 상이 작품 속에 깊숙이 녹아들어 있다. 내가 느낀 옥타비아 버틀러의 이상은 조금 슬프다. 여성이면서도 인간은 아닌 전지전능한 주인공들은 여성으로서 자신의 정체성과 남들(백인)과 같지 않은 피부색으로 갖은 시련에 시달린다. 이런 현실의 고난을 감싸는 그들의 멋들어진 초현실적 능력은 이야기를 아주 조금 공중으로 붕 띄워준다. 작가의 상상은 아름답고 현실과의 적정 거리를 유지한다. 너무도 명백하게 그 존재를 알고 있는 대상(현실의 여성 차별과 인종주의)을 적당히 각색하거나 심지어 생략한 무대 속을 헤매다 보면 나는 조금 어리둥절한 기분을 느끼게 되는데(이런 기분을 처음 느낀 건 영화 <소공녀>를 보고서였다) 옥타비아 버틀러의 세계관은 그 어리둥절함을 넘어서 왠지 슬픔을 느끼게 하는 곳이었다.

현실이 괴로운만큼 그 괴로움을 사실성 있게 똑같이 그려야지! 같은 주장을 하려는 건 아니지만, 그냥 내가 느낀 이 묘한 감정을 꼭 한 번 언급하고 싶었다. 조만간 《킨》이나 《블러드차일드》까지 마저 읽고 현재의 내 생각이 어떻게 달라지게 될지 점검(?)해보는 시간을 가져도 좋을 것 같다.

이 작품에는 '이나'라는 인간과는 다른 초능력을 가진 존재가 등장한다. 작가가 기존에 존재하는 '뱀파이어' 등의 컬트적 요소를 가져다 재가공을 한 개념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나는 인간에 비하면 거의 영원에 가까운 수명을 가졌으며 심지어 그 생애 대부분을 아주 건강하게 보낼 수도 있다. 하지만 인간이 혼자 살아갈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나 역시 인간과 공생해야 한다. 그리고 그 공생의 방식은 오랜 세월을 거쳐 양쪽의 평화를 지키는 방향으로 다듬어져 왔다. 기억이 전혀 없는 인물 '쇼리'의 시선에서 독자들은 비교적 편안하게 이 세계관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를 쇼리와 함께 습득하게 되는데 그 전개 방식이 개인적으로는 마음에 들었다. 아무리 촘촘하고 정교한 세계여도 그곳을 비추는 카메라워킹에 따라, 독자는 그 세계 전부를 속속들이 알게 되어 그 속으로 빨려드는 경험을 할 수도 있고, 반대로 한 번에 너무 많은 정보값이 밀려들어 어느 하나 제대로 소화하지 못하고 책장을 덮게 될 수도 있다. 내게 《쇼리》는 전자의 경험을 하게 해준 작품이었다.

하나 재밌는 건, 최근에 본 생체 3D 프린트 기술 관련 테드 영상 때문인지 한동안 21세기에 인간이 영생의 기술을 얻게 돼버리면 어쩌지? 하는 고민을 매우 진지하게 했는데, 《쇼리》를 읽고는 억겁의 시간이 주어진대도 결국 인간은 끝내 인간으로 남겠구나(살던대로 살겠구나), 하는 결론을 내리는 것으로 고민을 마무리 지었다.

보통 번역 일을 할 때도 그렇고, 단순히 다른 사람의 작업물을 소비할 때도 그렇고 고유 명사는 대수롭지 않게 넘길 때가 많은데(그러면 안되지만), 책 표지를 본 동생이 갑자기 '쇼리' 철자를 묻길래 우연히 사전을 찾아 봤다. 남부식으로 발음하는 'Shorty'를 'Shawty'로 표기하는데 어린/젊은 여자를 부를 때 쓰는 표현이라고 한다(뭐 그리 유쾌한 어감은 아닌 것 같다). 주인공의 이름이 쇼리인데, 그 이름처럼 체구가 크지 않다. 이 소설의 원제는 《Fledgling》인데 쇼리와 비슷하게 애송이, 풋내기 같은 뜻이다.

옥타비아 버틀러의 시리즈물도 한국어로 얼른 번역 출간이 좀 되었으면 좋겠다. 왠지 유독 국내 발간이 잘 안 되는 작가라는 느낌. 《쇼리》는 결말도 아주 좋았는데, 1권짜리라기 보다는 앞으로 쇼리와 그의 공생인들이 함께 펼쳐나갈 모험이 기대되는 어떤 시리즈의 서막처럼 느껴지는 작품이라 여기서 더 이야기가 이어지지 못한 것이 너무 아쉽다. 옥타비아 버틀러는 《쇼리》 출간 1년 후 58세의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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