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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셋 리미티드
코맥 매카시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1월
평점 :
눈 밑이 자꾸 들썩입니다. 규칙적인가 하면 그렇지도 않아요. 미세한 들썩임이 신경을 갉습니다. 의학적으로는 '철분 부족 증상'이라고 간명하게 진단해버리고 말지만 쇠를 한 움큼 먹는다 해도 이 들썩임은 가라앉지 않을 것 같습니다. 며칠째 계속된 들썩임은 이제 그 자체로 내가 된 듯합니다. 불안을 야기하는 예측 불가능의 불청객에 지배당합니다. 하는 수 없습니다. 그것이 원래 나였던 듯 받아들이는 수밖에요.
흑은 백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백은 흑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저는 내내 불안했습니다. 도저히 섞어들 수 없는 둘, 색의 대비만큼이나 선명한 둘의 태도가 '선셋 리미티드'의 철로처럼 끝까지 만나지 않고 평행선을 달리는 모습이 말이지요. 선이 만난다면 기차는 달리지 못할 테고, 계속 평행을 유지한다면 이 불안도 끝나지 않을 것 같았습니다. 눈 밑이 들썩여 불안이 더욱 커졌는지도 모릅니다. 어째서, 어째서 흑은 백을 놓아주지 못하고, 백은 흑에게 설득당하지 않는 겁니까. 왜 끝까지 둘은 닿는 듯 닿지 못하고. 서로를 발견하나 이해하진 못하고 흩어지는 말들을 늘어놓는 건지.
흑인 목사는 살인자, 전과범이자 마약과 알콜 문제를 가진 지인을 둔 독특한 이력의 소유자입니다. 그는 교도소에서 하나님을 만났(다고 하)고 지옥에서 천국을 설파하겠다는 사명의식으로 살고 있습니다. 그에게 나타난 백인 교수는 어떤 이유에선지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했어요. 흑인 목사는 그를 구해내 자신의 장소로 데려옵니다. 백은 자살을 하려고 했던 자. 처음에는 균형추가 흑으로 기울어있는 듯합니다. 다즌즈 게임("형제들 둘이 서서 서로 욕을 하다가 먼저 열받는 쪽이 지는 거지" -71쪽)을 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흑은 그러나 백보다 먼저 승기를 잡은 듯해요. '골탕 구렁텅이'에 백을 빠뜨릴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백은 어째서 자살하려고 했나, 여기에 첫 번째 질문이 있습니다.
내가 사랑했던 것들은 아주 약했어요. 아주 부서지기 쉬웠지요. 나는 그걸 몰랐습니다. 절대 파괴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지요. 한데 그렇지가 않더군요. -27쪽
세상은 구역질 나는 것 투성이입니다. 그것은 거부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다만 우리는 그 안에서 작은 신호를 발견하거나 발견했다고 생각하며 살아갑니다. 흑인 목사가 자신의 삶을 그런대로 긍정하고 지내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 허름한 외면 안에는 나름의 신념과 자부심이 있어요. 우리는 대체로 그렇습니다. 지옥인지 모를 곳에서 천국의 그림자를 봐요. 그러니 흑은 백의 자살 이유를 꼬치꼬치 캐묻습니다. 어째서 자살을 하려 했는가. 그 의도의 가장 밑바닥을 드러내라고 강요합니다. 그러면 생각을 고쳐먹게 만들어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겠죠. 백 역시 흑의 요구를 거부하는가 하면 일정부분 내놓기도 하는데, 그게 또 심상찮습니다.
백은 영리한 사람이니까요.
두 번째 질문, 흑은 백을 교화할 수 있는가.
이들의 대화는 치열한 게임 같습니다. 서로의 말을 되묻고 자신의 말을 숨기죠. 이들은 중요한 것을 대충 말하거나 사소한 것을 치밀하게 말하죠. 여기서 독자는 혼란을 느낍니다. 어째서 이 모든 대화가 방향조차 짐작할 수 없이 제 멋대로인 듯한 계산된 의도대로 흘러가는가. 특히 저는 결국 흑인 목사에 동화되어, 조금씩 빗장을 여는 듯한 모습을 보이는 백인 교수에 대해 막연한 희망을 감지하기도 했습니다. 이제 긴 마라톤은 끝났다, 드디어 끝이 보인다, 고 말이지요.
하지만 끝내 흑은 이 게임에서 진 것 같습니다. 백은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지만 적어도 그렇게 느꼈습니다)놀리듯이 자신의 고집을 내뱉고는 떠납니다. 다즌즈 게임의 규칙으로 보자면 백이 진 것이겠지만 좌절하는 것은 흑이니 흑이 진 것이 맞겠지요.
그렇습니다. 흑은 좌절합니다. 백을 만나게 하고, 얘기를 듣게 하고, 끝내 그대로 떠나가게 한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당신이 왜 나를 거기 내려보냈는지 모르겠습니다. 이해를 못하겠어요. 내가 저 사람을 돕기를 원하셨다면 왜 나한테 할말을 주시지 않은 겁니까? 저 사람한테는 할말을 주셔놓고. 나더러 어쩌란 말입니까? -138쪽
자살하려고 한 자와 그를 구한 자, 세상을 믿지 않는 자와 신을 대변하려는 자. 이 단순한 소설적 상황에서 작가는 무엇을 말하고 싶었을까요.
한 마디로 정의할 수 없겠지요. 다만 장님이 코끼리 다리를 더듬어 짐작하자면, 신과 세상에 대한 생각을 끝까지 밀어붙여보려 한 것은 아닐까요? 어떤 이에게는 목소리를 직접 들려주기도 하지만 어떤 이에게는 그가 스스로를 져버리려 할 때조차 자신을 증명하지 않는 신. 가장 밑바닥에서 희망을 보는 사람과 많은 것을 이루고도 좌절 속에 사는 사람. 범인의 눈으로 볼 수 없는 게 그런 신과 세상이 아닐까, 짐작해 봅니다. 각자는 제각기 다른 모습의 신을 가지고 있고, 저마다의 세상은 좌절도 희망도 같은 듯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존재하게 마련이라는 것을. 가까스로 더듬어 봅니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