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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평
파트릭 모디아노 지음, 권수연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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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와 함께 영화를 보고 나오는 길, 서로에게 감상을 이야기합니다. "그 장면은 진짜 깜짝 놀랐어"라든지 "주인공 연기 대단하네" 하는 식이죠. 친구 얘기에 맞장구 치기도 하지만 내심 놀랍니다. 같은 공간, 같은 장면을 있었는데 우리가 본 영화는 달랐으니까요. 책도 그렇죠. 정말 좋아하는 책을 추천했는데 상대 반응이 심드렁할 때, 진짜 재미있다는데 '응?'하게 되는 책을 읽을 때, '아.. 역시 사람들은 제각기 다른 시선으로 세상을 살고 있다' 생각하게 됩니다.  

각자의 세상은 자기 외에 누구도 상상할 수 없게, 혹은 자신조차도 상상할 수 없게 편집되어 있습니다. 놀랄 일도 아닙니다. 그러니 어떤 사람은 쉽게 직원을 자르고 어떤 사람은 추운 겨울에 굴뚝 위로 올라가는 선택을 하겠죠. 각자의 세상이 똑같이 않다는 것은 그래서 축복이자 저주일 겁니다. 


데이비드 실즈는 책 <문학은 어떻게 내 삶을 구했는가>에서 "모든 비평은 일종의 자서전"이라고 했어요. 인간에게로 시선을 넓혀봅니다. 모든 (인간에 대한)기억은 비평이죠. 잘 안다고 생각했던 사람은 사실 그런 사람이 아닐지 모릅니다. 당신에게만 그런 사람이었을 거예요. 나라는 인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나는 내가 생각하는 나일까요? 내가 생각하는 내가 내가 아니라면요?


따지고 보면 나는 한 번도 그 페드로 맥케부아였던 적이 없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그 파동들이 때로는 먼 곳에서 때로는 더 세게 나를 뚫고 지나갔었다. 그러다 차츰차츰 허공을 떠돌고 있던 그 모든 메아리들이 결정체를 이룬 것이다. 그것이 바로 나였다.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 130쪽

파트릭 모디아노에게 '나'란 '모든 메아리들이 결정체를 이룬' 존재입니다. 하물며 '나'에게 조각난 채로 남은 '그녀'는 어떻겠어요. 작가는 아예 적극적으로 '조각난 존재'와 '기억하지 못하는 주인공'을 내세웁니다. 잘게 쪼개져 조각난 기억에 의지해 과거를 추적합니다. 기억을 의심하고 떠오른 기억을 점검하면서 차츰 '그녀'에게로 향하는 여정이 바로 <지평>입니다. 


보스망스와 마르가레트는 상처 입은 사람들입니다. 오래된 상처를 안은 대도시의 삶. 공간과 자신을 연결하는 것은 거의 없습니다. 부유하는 익명의 존재들이 서로를 알아본 걸까요. 보스망스는 그녀와 익명의 도시에서 "서로를 보지 못한 채 스쳐지나갔을 것"(93쪽)이라는 사실을 직감합니다. 이제야 안개에서 퍼뜩 깨어난 것 같은 느낌을 받아요. 그는 그녀를 꼭 쥐고 싶습니다. 불가능하리란 예감이 늘 있었지만 말이죠. 보스망스는 마르가레트의 과거를 처음부터 막연하게 느꼈던 것 같거든요. 그는 마르가레트가 "군중 속에 사라질"까봐 "순간순간 그런 두려움을 품었었"죠. "그녀를 처음 만난 날부터 그랬"(20쪽)습니다. 책을 다 읽고 난 지금, 보스망스의 그런 예감이 더욱 애달픈 이유예요. 


사실 그녀를 찾지 못한다 해도 좌절할 이유는 없습니다. 찾을 거라는 희망만 있다면요. 


적어도 의혹이 있는 한 아직 일종의 희망이, 먼 지평을 향한 탈주로가 남은 것이다. (153쪽)

보스망스에게 마르가레트는 과거의 파편이자 미래로 가는 지평입니다. 실제로 마르가레트가 어디 있는지, 그녀가 보스망스를 기억하는지, 기억 한다면 어떻게 기억하는지, 살아있기는 한 건지는 크게 상관 없습니다. 보스망스 안에 그런 조각이 떠돌고 있고 조각을 딛어 조금씩 걸어나갈 수만 있다면 말이죠. 생의 한 교차로에 있는 남자의 모습이 외롭고 고통스럽게만은 느껴지지 않는 이유일 겁니다. 


무엇보다 아름다운 문장들이 짧은 이야기를 풍성하게 합니다. 서글프고, 위협적일 때도 있고, 가만히 미소지을 만큼 평화롭고, 그저 아름다운 문장들이 열심히 과거를 지나오기 때문에 현재가 어디 있는지 또는 미래가 어떤 모양인지 하는 것에 대해서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게 느껴져요. 오히려 지금의 나, 이곳의 내가 이 소설을 만날 때마다 소설은 몇 번이고 변하고 다른 이야기를 건넬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내 기억 속에 있는 <지평>과 타인의 기억속 <지평>이 어떻게 다른지 이야기 해보고 싶습니다. 


파리 같은 대도시에서 모여사는 수백만의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을 긴 시간차를 두고, 그것도 매번 먼젓번 장소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마주칠 수 있다는 사실이 그는 놀라웠다. (중략)그래서 보스망스는 운명이 때로 고집을 부리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같은 사람을 두 번이고 세 번이고 마주치는 것이라고. 그리고 그때 우리가 그에게 말을 걸지 않는다면, 그건 유감스럽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18쪽)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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