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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트겐슈타인의 조카
토마스 베른하르트 지음, 배수아 옮김 / 필로소픽 / 2014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특이한 작품입니다. 문장이 계속 이어집니다. 그런데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흐릅니다. 예술과 철학, 오스트리아의 문화와 인물들이 쉴틈없이 독자를 맞이합니다. 그리고 그 중심에 파울 비트겐슈타인이 있습니다. 그는 오페라에 열광하고 자동차 경주를 좋아하고 얼마든지 베른하르트와 지적인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압도적' 인물입니다. 그리고 익히 알려진 철학자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의 조카이기도 합니다.

 

비트겐슈타인 집안의 철학과 예술을 무시하는 분위기에서 두 천재 '루트비히'와 '파울'이 태어났습니다. 파울은 대개 그가 보이는 '광기' 때문에 미치광이로 여겼지만 어쩌면 천재와 미치광이는 쌍둥이 형제처럼 닮지 않았나 싶습니다. 베른하르트는 그 점을 정확히 잡아냅니다.

 

그러나 사실 우리는 비트겐슈타인 집안의 루트비히가 자신의 광기가 아닌 철학을 종이에 적어 놓았기 때문에 그가 철학자라고 믿는 것이며, 파울은 자신의 철학을 억누르기만 할 뿐 세상에 공개하지 않았고 오직 광기만 내보였기 때문에 그가 미치광이라고 믿는 것일지도 모른다. - 39-40쪽

 

루트비히는 (자신의 철학을) 출간한 자이고, 파울은 (자신의 철학을) 출간하지 않은 자이다. (...)하지만 두 사람 모두는 자신의 시대뿐 아니라 모든 시대가 자랑스러워할 만한, 각자 자신의 방식으로 위대하면서도 언제나 선동적이며 고집스럽고 전복적인 사상가였다. - 90쪽

 

베른하르트의 독백에 저는 어떤 해갈을, 만족감을 느꼈는데요. 그럴 수 있었던 건 아마도 이 때문일 겁니다.

그와 파울은 문명과 떨어진 곳을 경멸

그 일로 나는 깨달은 바가 있었다. 정신이란 걸 가진 인간이라면 노이에 취리히 차이퉁을 구할 수 없는 장소에서 살아서는 안 된다고 말이다. (...)그토록 많은, 그토록 유명하다고 하는 도시들에서 노이에 취리히 차이퉁을 살 수 없었다는 사실, 심지어 잘츠부르크에서조차 불가능했다는 사실에 우리는 분노했고, 지루하고 낙후된 나라, 촌스러운 주제에 역겨운 과대망상이 하늘을 찌르는 이 나라가 참으로 지긋지긋했다. -79쪽

하고, 지치지도 않고 다른 존재들을 헐뜻고,

여름이면 우리는 자허 호텔 커피하우스 테라스의 늘 앉는 자리에서 오직 욕하고 비난하는 일로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우리는 자허 호텔 커피하우스 테라스에서 몇 시간이고 지치는 법도 없이 다른 존재들을 헐뜯었다. 한 잔의 커피를 앞에 두고 앉아 온 세상을 비난했으며, 온 세상을 말로 속속들이 쑤셔대고 처절하게 난도질했다. - 87쪽

권위를 무시합니다.

하지만 장관이 말도 안 되는 연설문을 줄줄 읽어 내려가는 동안 나는 전혀 화가 나지 않았다. 슈타이어마르크 출신의 그 멍청이가 어떤 인간인지 이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 100쪽

작품을 장악하고 있는 베른하르트의 냉소와 비판은 날카로운 동시에 엄청나게 적나라해서 거북하고 회피하고 싶어지기도 합니다. 게다가 솔직한 고백과 강박, 분노, 두려움, 외로움을 읽노라면 그의 강박에 휘말리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하지만 바로 이 지점이 작품을 빛나게 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언젠가 친구와 나눈 대화가 떠오릅니다. 친구는 제게 어떤 소설을 좋아하느냐 물었고, 저는 '불편한 소설, 마음이 불편해지는 책'이 좋다고 답했습니다. 친구는 의아해하며 되물었습니다. 밝은 게 좋지 않냐고. 책을 읽으며 기분이 좋아져야 하는 거 아니냐고.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밝은 이야기, 좋은 내용은 거짓말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아름다움은 거짓말입니다. 현실은 치졸하고, 더럽고, 거추장스러우며, 잔인하고, 어둡습니다. 알면 알수록 물론 불편합니다. 모르고 싶습니다. 하지만 현실을 외면하고 편안함을 추구한다고 해서 그런 현실이 바뀌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눈을 가리면 제가 보이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꿩이 될 수 없는 노릇입니다. 

다음에 소개할 김규항의 글에서 그는 '이상주의자의 단순함'을 지적했는데요, 저는 그런 의미에서 불편하고 솔직한 베른하르트의 이 책을 더 많은 사람들이 읽었으면 합니다.

 

저는 이 작품으로 베른하르트를 처음 만났습니다. 이 작품에는 그와 그의 전부이기도 했던 존재가 가졌던 모든 희로애락이 생생하게 펼쳐집니다. 책으로나마, 이런 지성들과 대화하는 것은 우리에게 얼마나 행운인지 모릅니다.

좋은 작품을 찾아 읽으려 노력하지만 숨은 작품을 찾아내는 능력이 뛰어난 편은 아닙니다. 교양이 엄청나게 깊지도 않고요. 김규항은 어느 글에서 베른하르트가 많이 읽히지 않는 한국 지성 사회에 대해 아쉬움을 토로한 적 있습니다. (글 보기: http://www.pressian.com/news/article.html?no=66869) 그의 글을 읽고 나니, 더욱더 베른하르트가 궁금해졌습니다. 아마 다음 독서는 <옛 거장들>이 되지 않을까 싶어요(절판이라 책 구하는 일이 우선이겠군요).

 

 

 

때는 유월이었다. 저녁이 막 시작된 참이었고 병동의 창문은 열려 있었으며, 마치 천재 작곡가의 음악을 연주하듯 환자들이 정확한 대위법 리듬에 맞추어 기침을 해대는 소리가 창밖으로 들려왔다. - 19쪽

 

내 생각에 그는 아마도 전체적인 실상을 보기를 거부했고, 그런 거부의 태도를 일생 내내 유지해 온 듯하다. 그런 비참한 상황과 마주칠 때마다 피상적인 관찰로 만족해 버린 이유는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서였으리라. - 37쪽

 

솔직하게 얘기하자면 대부분의 경우 우리가 흔하게 마주치는 머리들을 상대하는 것은 다 자란 감자 알갱이들과 대화하는 것처럼 지루할 뿐이다. - 41쪽

 

비록 나에게는 그가 비트겐슈타인 집안에서 나온 가장 사랑스러운 산물이었지만 바로 그 이유 때문에 그들은 그를 더욱 싫어했다. - 62쪽

 

내가 돈이 있을 때만 해도 의사들과 친구처럼 지냈지. 하고 그는 자주 말했다. 하지만 돈이 떨어지고 나면 그들은 사람을 돼지처럼 다루어 버려. - 65쪽

 

그래서 사실상 병자는 항상 혼자이며, 우리도 알다시피 외부에서 다가오는 도움의 손길은 거의 언제나 병자를 방해하거나 도리어 괴롭히는 결과를 가져온다. - 68쪽

 

그래도 아직은 우리 사이에 이상적인 대화가 오갈 수는 있었지만, 에디트의 죽음 이후로 사실상 모든 빛이 꺼져 버린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마치 이전의 세계는 회복불가능하게 산산이 부서져 버린 듯했다. - 75족

 

나는 상의 굴욕에 나를 맡겼다. - 94쪽

 

우리들 스스로가 잘 알고 있듯이 사람은 나이 들어 갈수록 나날이 더욱도 노련한 술책으로 있는 묘안 없는 묘안을 짜내서 적당히 견딜 만한 삶의 상태를 스스로 조성해야 한다. - 114쪽

 

내가 빈의 커피하우스를 증오한 이유는, 거기에서 항상 나와 똑같은 부류의 인간을 마주쳐야 했기 때문이다. (...). 나는 끊임없이 나 자신과 마주하는 상황을 증오한다. - 120쪽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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