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 발레리 시선 - 바람이 일어난다! 살아야겠다! 아티초크 빈티지 시선 12
폴 발레리 지음, 성귀수 옮김 / 아티초크 / 2016년 8월
평점 :
절판


예전에 에미넴의 인터뷰를 본 적이 있다. 학창시절에 유급을 여러 번 했지만 영어성적만큼은 좋았던 것이 사전을 외웠다고 했다. 한 장씩, 한 장씩 단어를 다 외면 찢어서 먹었다고 그랬던가(약간 이야기가 섞인 것 같지만)…. 그래서 본인은 라임을 만들지 못하는 단어가 없다고, 발음을 구부려서 운을 맞춘다고 그랬었다. 『폴 발레리 시선집』 역자 서문을 읽으면서 시어를 고민하는 발레리를 읽고 있으려니, 시대와 환경이 모두 다른 두 사람의 일화가 겹쳐지는 것이다. 사실 발레리의 시는 그렇게 쉬이 읽히진 않았다. 발레리의 시론을 소개하는 서문에서 겁을 집어먹은 탓이었을까. 8월부터 읽기 시작한 시집은 여지껏 애를 써 가며 읽고 있다.


프랑스어를 할 줄은 알지만 불문학과는 거리가 멀고, 문학의 묘미를 알고 책을 읽기 시작한 것은 고작해야 3년. 보들레르와 랭보, 베를렌의 시를 읽고 약간 으스대기도, 음미해보기도 하였지만 나는 아직 프랑스어로 씌어진 시의 매력을 다 알지 못한다. 그저 좋다, 이 표현은 기가 막힌 걸…, 하며 가끔 원문을 찾아보는 정도이다. 그래도 아주 헛된 시간을 보내진 않았는지 시집에 있는 《텔켈》을 보니 필립 솔레르스라든지, 상황주의 인터내셔널이라든지 기억이 떠오르긴 하였다. 어찌 되었든 폴 발레리 시집이 출간되기를 기다렸으나 한편으로는 두렵기도 하였다. 시인의 이름을 도처에서 맞닥뜨렸으나 정작 작품은 읽은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도 「해변의 묘지」의 문장, 가슴을 울리는 그 명문은 기억하고 있다. Le vent se lève!… il faut tenter de vivre! 바람이 일어난다!… 살아야겠다! ‘tenter de가 들어감으로써 살아야겠다는 ‘의지가 느껴지는 이 문장에 대한 해설은 상세하게 실려 있다…. 아폴리네르 시집에서도 느꼈었지만 성귀수 번역가는 아주 꼼꼼한 분인가 보다. 일단 장점을 먼저 이야기하자면, 번역은 제2의 창작이라 하지 않는가. 성 번역가는 원문에 해당하는 시어를 고민, 또 고민하여 번역하였다는 생각이 많이 떠오른다. 행간에 숨겨진 노고가 읽힌다고 하는 편이 더 와 닿을까. 어느 번역가가 그렇지 않겠냐만, 번역가의 작업으로 두 프랑스인의 시집을 연달아 읽은 감상은 그러하다.


약간 아쉬운 점은 문체가 묘하게 취향을 타지 않나하는 것이다. 결과물을 놓고 평하기는 쉽고- 이게 참 뭐라 꼬집을 수는 없는데, 먼저 평을 남겨주신 다른 분의 표현을 빌리자면 ‘아재 문체’…. 좀 심한가 싶다가도 공감을 부르는 표현이다. 예를 들자면 ‘노다지’가 있다. 노다지란 말을 문학 작품에서 본 것이 처음인지 아니면 너무 오래된 건지 모르겠는데 원문이 궁금해져 찾아봤다. 번역문과 원문 순이다. 「젊은 운명의 여신(La jeune parque)」 중의 한 대목이고, 시집에는 40쪽에 해당한다.


  

  속눈썹 파고드는 무지막지한 금빛 섬광!

  오, 노다지의 밤이 짓누르는 눈꺼풀이여,

  너의 금빛 어둠 속을 더듬어 가며 나는 기도했다.





‘노다지의 밤’은 ‘nuit de tresor’였다. 발레리의 다른 시도, 이 시의 원문을 다 읽지 않아 ‘노다지’가 아닌 다른 표현이 더 취향에 맞을지 모르겠지만….


폴 발레리는 스테판 말라르메의 가르침을 받았고 마지막 상징주의 시인으로 일컬어진다. 하지만 그의 시는 절대시, 순수시를 지향하고 있다. 산문적 요소가 제거된 언어, 완벽한 시어들로 이루어진 건축물이 바로 발레리의 시이다. 발레리 시에 대한 해설을 찾아보면 건축, 음악, 춤에 대한 이야기들이 눈에 띈다. 형태가 이룩하는 조화를 중시하였기 때문에 작품들에서 이런 공통점이 읽히는 것일까. 이 부분에 대해서는 프랑스 현대시에 대한 앎이 부족하여 다른 시인들, 특히 상징주의 시인들과의 비교가 힘들다. 알 듯 말 듯 할 뿐. 그래서 일단 구매를 미뤄둔 프랑스 현대시사 두 권을 구입하기로 마음먹었다. 그 책까지 읽고 리뷰를 썼더라면 더 좋았겠지만 자꾸 미루면 시집 리뷰를 영영 못 쓸 것 같아서….


이 시집은 프랑스 시의 걸작으로 꼽히는 「젊은 운명의 여신」과 「해변의 묘지」가 수록된 것만으로도 충분히 그 가치를 증명하고 있지만 「잠자는 여인」과 「석류」, 「별로 희망 없는 소망」도 무척 좋았다. 「잠자는 여인」을 읽으면서는 프루스트의 《읽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5권, 『갇힌 여인』이 떠올랐다. 마르셀은 잠이 든 연인, 알베르틴을 보며 생각한다. 사랑은 소유, 이 여인을 완전히 가질 수 있는 순간은 알베르틴이 ‘잠’에 드는 시간이다. 깨어 있는 동안 정신을 온전히 소유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기 때문에, 마치 식물처럼 고요히 잠든 그녀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어느 정도 충족되는 것이다. 발레리의 욕망은 잠자는 연인을 바라보며 그 내면도 투사하고자 하지만 말이다.


발레리의 「석류」는 지난 정지용 시선 리뷰에서도 언급했었는데 마티스의 그림을 떠오르게 한다. 전문을 소개한다.



석류


알갱이들의 과잉을 못 이겨

반쯤 벌어진 석류들아,

마치 자신의 발견들로 터져 나간

당당한 이마들을 보는 듯하여라!


오, 어정쩡 입 벌린 석류들,

자긍심으로 과로한 너희가

태양들을 견디다 못해

홍옥의 격막을 찢어,


껍질의 건조한 금빛이

어떤 힘에 부응해

과즙 붉은 보석들로 자폭하면,


그 찬란한 파열은

꿈꾸게 한다, 내 지난 영혼의

은밀한 건축술을.


(82)




「별로 희망 없는 소망」은 발레리의 마지막 연인, 잔 로비통을 위한 작품이다. 2008년에 발표된 시집 『코로나 & 코로닐랴』에 실린 유고작인데, 앞서 소개되는 작품들과 분위기가 아주 다르다. 사랑을 갈구하는 시를 읽으면 발레리도 사람이었네, 하는 생각과 두 사람의 나이 차이가 32살이라는 데서 자연스레 돋는 소름이 공존한다. 사진 자료와 함께 발레리와 교분을 나눈 문인들과 연보를 읽노라면 시인의 생애를 잠시 들여다본 느낌이다. 프랑스 3대 문인으로 꼽히는 앙드레 지드, 폴 클로델, 폴 발레리 세 사람의 관계도 재미있다. 폴 클로델의 누나 카미유 클로델은 로댕의 연인으로, 천재성에 버금가는 비극적 삶으로 알려져 있다. 카미유는 드뷔시와 잠시 약혼관계였는데 발레리와 드뷔시도 서로 알고 지냈다. 당시 파리 사교계가 얼마나 넓고도 좁았는지 알 수 있다. 


앙드레 지드는 발레리를 설득하여 《구시첩》에 「젊은 운명의 여신」을 실을 수 있도록 장려한데다, 〈누벨 르뷔 프랑세즈〉 편집장이기도 하였으니 그 영향력을 짐작할 수 있다. 발레리는 《아티초크 빈티지 시선》으로 소개된 안나 드 노아이유와도 친분이 있었고, 상징주의 그 자체라 할 수 있는 보들레르의 직계 후배라고도 할 수 있고. 또 프랑스 상징주의 시인들과 에드거 앨런 포와의 관계, 이들을 즐겨 읽던 윤동주나 정지용과의 연관성까지 생각하면 아티초크에서 선정한 시인들이 모두 이어져 있지 않나 하는 생각에 미소짓게 된다. 상세한 시 해설과 발레리 연보는 시인의 생애와 작품 세계를 소개하는데 부족함이 없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알찬 시집을 이런 가격에 내놓은 출판사가 대단할 뿐이다. 새삼 아티초크에 감사하는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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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almA 2016-09-23 10: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마르셀 레몽 <프랑스 현대 시사> 책 좋아요/ 책이 두꺼워서 좀 부담스럽지만 건질 게 노다지ㅋ인 책이죠.


˝대부분의 사람들은 눈을 통해서 본다기보다는 훨씬 더 빈번히 지능을 통해서 본다. 그들은 오색영롱한 공간을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개념들을 인식한다. 그들의 눈에는 저 위에 희끄므레하고 유리가 반사하는 구멍들이 뚫린 입방체를 보게 되면 즉각적으로 그것은 `집이다!`하고 생각하는 것이다.˝ (폴 발레리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방법론 서설』)
-제 8 장 상징주의의 고전, 폴 발레리


제가 관심두는 불어권 책 번역을 거의 성귀수 씨가 하는 터라 저는 일단 취향 하이파이브 면에서 신뢰하는 편인데, ˝노다지˝ㅎㅎ 정말 아재스럽긴 합니다; 예스러운 표현으로 시인이 써서 그렇게 번역한 게 아닐까 싶기도 하고...저도 불어를 아는 게 아니니^.ㅜ;

에이바 2016-09-23 11:27   좋아요 1 | URL
네 그 책이랑 아카넷에서 나온 책 두 권 사려고요. 인용까지 해 주시니 더더욱... ㅠㅠ 저는 성귀수 씨 번역 기억나는게 뤼팽 전집 정도이고 제대로 읽은 건 아폴리네르 때부터라서요. 아재라는 표현 좀 그렇긴 한데 정말 그러합니다... 네... 좀 예스러이 번역하려 했나 싶기도 하고요? 근데 또 아티초크의 보들레르 번역은 그렇지 않거든요. 결국 취향인 것 같아요. 노다지 정말... 오랜만에 본 단어라... 한편으론 성 번역가는 이런 느낌으로 발레리를 읽는구나 싶었고 무엇보다 젊은 운명의 여신, 해변의 묘지 새 번역 완전 번역을 보게 되어 즐거웠어요.

cyrus 2016-09-23 16: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민음사판 발레리 시집을 읽어봤는데, 역시 상징주의 시는 어려웠습니다. ^^;;


에이바 2016-09-26 10:23   좋아요 0 | URL
그래서 쉬이 읽히지 않나 봐요. 공부를 하고 읽으면 나아지리라 생각하고 있어요.

2016-09-24 16: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9-24 16: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물고기자리 2016-09-25 13:24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뜬금없는 말이지만 저는 에이바 님의 독서하는 방식을 참 좋아합니다. 최대한 저자의 생각에 귀 기울이고, 에이바 님의 생각도 발전시켜 가는 방식을요. 두루두루 읽는 것도 물론 좋지만 특정 영역을 탐구하는 덕후적 읽기도 참 좋고요.


제가 요즘 이런저런 사정이 있어 자주 접속도 못 하고, 책도 읽질 못 하고 있지만 독서에 대한 대리만족을 느낄 수 있게 해주시는 분들 중 한 분이세요.

특히 요즘 글들 참 좋습니다..


초딩 2016-09-25 13:26   좋아요 3 | URL
에이바님의 독서법에 대한 말씀
완전 공감합니다!
에이바님 물고기자리님 평안한 일요일 되세요~

에이바 2016-09-26 10:27   좋아요 2 | URL
제 만족을 위한 읽기에 불과하다 생각하는데 이렇게 좋게 봐 주시니 감사드립니다. 그렇잖아도 최근 물고기자리님의 글이 올라오지 않아 어찌 지내시는지 궁금하던 차 였어요. 모쪼록 마주하신 일들이 좋은 방향으로 풀려, 책을 읽고 즐기는 여유를 되찾으셨으면 합니다. 감사합니다.

초딩님께도 감사드립니다. 두 분 다 좋은 시간 보내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