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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개츠비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75
F. 스콧 피츠제럴드 지음, 김욱동 옮김 / 민음사 / 2010년 12월
평점 :
《위대한 개츠비》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닉의 주선으로 개츠비와 데이지가 재회하는 장면이었다. 짐짓 편안한 척 허세부리며 벽난로 장식에 기대었다가 옆으로 떨어지는 시계를 붙잡는 모습은, 장식으로 남은 지난 추억과 시간을 되돌리고자 하는 마음이 반영된 장면 같았다. 오랫동안 기다려온 재회의 순간이니 멋있고 여유로워 보이고 싶은데 그게 잘 안 되는, 하지만 속마음이 모두 드러나는 그런 모습 말이다. 개츠비는 유독 데이지 앞에서 서툴러 보인다. 닉과의 대화에서는 시간을 돌릴 수 있다며 자신만만했다.
옥스퍼드 출신의 부자인양 행세하지만 사랑하는 이 앞에서는 벌거숭이가 되는 남자. 여유로운 모습은 오간데 없이, 그는 순정만이 남은 그 시절 청년으로 돌아간다. 그것은 아마도 개츠비가 데이지를 숭배하기 때문일 것이다. 데이지는 어떤 사람인가. 톰은 아내를 가리켜 웃음소리에서도 짤랑거리는 소리가 난다고 한다. 걸음걸음 돈이 연상되는 데이지는 부유한 환경에서 배양된 순수함이다. 개츠비가 사랑하고, 욕망하지만 결코 가질 수 없었던 그리고 여전히 가질 수 없는 존재. 그녀는 과연 개츠비의 순정을 받을만한 인물일까? 아니 애당초에 개츠비가 사랑한 것은 데이지의 영혼, 그 존재였을까, 아니면 부유한 배경을 포함한 그 모두였던가?
불법, 험한 일들을 통해 부를 쌓은 개츠비는 왜 데이지를 되찾으려고 했을까. 순전히 옛 사랑을 위해서 그 모든 일을 했단 말일까? 자신이 생각하는 성공에 부족했던 조각이자 트로피였던 것은 아닐까? 남편에게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하라 종용하는 모습은 이제껏 데이지를 대한 태도와 다르다. 공들인 시간의 탑을 무너뜨리는 미숙한 모습이다. 어째서 그런 선언을 하려 했을까. 왜 그리 자신만만했을까. 개츠비는 톰을 이겼다고 생각한 건 아닐까. 가난했던 과거 때문에 그리워만 했던 옛 연인을 가진 톰 뷰캐넌은 ‘진짜’다. 외모와 지위를 모두 가진, 하다못해 스노비즘마저 그가 속한 집단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데이지가 사랑했던 개츠비의 조건들은 허상에 불과했고,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톰을 이기고 데이지를 되찾는 것은 진정한 성공이다.
관계에서 톰은 데이지의 우위에, 데이지는 개츠비의 우위에 있다. 톰이 개츠비에게 데이지와 함께 차를 타고 가도 아무 일이 없을 거라며 자신만만해 하는 것도 괜한 것이 아니다. 외롭고 화가 났던 데이지의 마음을 제대로 살피지 못하고 예전의 모습만 찾으려했던 개츠비의 비극은 예견된 것이었다. 개츠비가 사랑했던 데이지는 현재 모습의 일부일 뿐이다. 남편의 부정에도 그를 떠나지 못하는 것은 익숙한 토양을 떠나 살 수 없기 때문이다. 딸이 ‘아름다운 바보’로 자라길 바라는 모습에서 묻어나는 수동성과 체념을 보라. 데이지를 갖는 데에는 돈이 다였을까.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오랜 시간 동안 준비하고 노력했던 것에 비해 개츠비는 연인의 마음을 보살피지 못했다. 그는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순진했다. 꿈을 좇는 열정은 이리도 순수한 걸지도...
그에게 데이지는 다른 세계에 속한 별이다. 너무도 멀리 있는 별, 신기루 같은 별에 가까이 가기 위해 더러운 일에 손을 담근 숭배자는 몰락한다. 별은 숭배자를 보살피지 않는다. 비참했던 현실 속에 과거의 연인은 얼마나 미화되었을까. 시간을 되돌려 인생을 다시 시작할 수 있다고 믿은 개츠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목표를 향해 달리기만 한 개츠비. 건너편 저택의 초록색 불빛, 은빛 후춧가루를 뿌려놓은 듯한 별들을 바라보던 개츠비. 짧은 여름을 함께 보낸 닉만이 그를 기억할 뿐이다. 흘러간 시간을 잡지 못한 남자. 오지 않을 전화를 영원히 기다리게 된 그 남자의 순정은 갈 곳을 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