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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는 인간 -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오에 겐자부로의 50년 독서와 인생
오에 겐자부로 지음, 정수윤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15년 7월
평점 :
절판
일본이 참 부러운게 풍부한 번역이다. 외국문학을 공부함에 있어 모국어로 먼저 접할 수 있다는 게 얼마나 큰 축복인지.. 일본문학이 세계문학 속에서 높이 평가받는 것은 이러한 문학적 토양에서 성장한 덕도 있다고 본다. 1950년, 오에 겐자부로 선생이 열여섯 되던 해에 서점에서 만난 문학작품들만 해도 말 다했다. 윤동주 시인도 문학 공부를 위해 도쿄로 갔다지 않았나. 당시 서양 문물을 받아들인 일본의 문화가 얼마나 다채로웠는가 예상해본다. 그 시기 우리의 과거를 생각해보면 화도 난다.. 어쨌든 일본문학이라고는 문화 해금 이후로 한창 유행이던 몇 작품을 읽은 것이 다다. 일문학 특유의 탐미주의, 신경 하나하나를 분석하는 그 예민함은 거북할 따름이라 장르소설을 제외하고는 멀리해왔다. 그래서 오에 겐자부로 선생의 명성에도 불구하고 그 작품은 읽은 적이 없다. 강연을 모은 이 에세이가 첫 만남인 셈이다.
결론적으로, 《읽는 인간》을 읽는 도중에 조금 울었다. 최근 속상해하던 내 마음을 어루만져 주는 것 같았다. 그깟 일로 속상해하지마, 그런 목소리가 들린 건 아니었다. 나보다 더 힘든 일들로 가득한 팔십 노인의 옛 이야기에서 위로를 느낀 것도 아니었다. 그렇다면 왜 울었냐고? 오에 겐자부로가 정말 치열하게 노력하는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읽고, 또 읽고. 색깔별로 줄치면서 읽고, 원서와 대조하며 읽고. 연구서를 찾아 읽고, 배우고, 읽고, 외우고 또 읽고.. 그쯤 읽고 고민했으면 전문가다 생각해도 될 텐데, 선생은 자신을 아마추어라 한다. 1950년, 《프랑스 르네상스 단장》이라는 책을 만나고 〈에드거 앨런 포〉의 시집을 읽으며 문학에 눈을 뜬 소년.. 어떻게 보면 《읽는 인간》은 오에 겐자부로의 자서전이라 할 수 있다. 그의 작품에 영향을 끼친 그 많은 문인과 작품들, 인생의 사건들이 함께 소개되기 때문이다. 일일이 소개할 수는 없다. 오에 선생의 문장에서 느껴지는 깊이를 내 말과 글로 옮길 수 없음이 하나요, 직접 읽으며 오에 겐자부로의 〈작가들〉을 만나보기를 권하고 싶기 때문이다. 하지만 선생이 나열하는 작가와 작품들, 외는 원문과 해석들을 보며 잠시나마 꿈을 꾸었다. 언제나 고전은, 시대를 막론하고 전해지는 힘이 있는 법이다. 최근에 읽은 작품들이 더러 있어 아주 공감했다.. 오에 선생처럼 책에 밑줄을 치고 외지는 않지만, 원문과 번역을 비교해 읽기 때문이다. 요즘은 인터넷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정보도 많고, 논문 검색도 쉽다. 번역 노트는 없지만 따로 워드에 감상과 번역을 저장해둔다. 원문을 읽고 얻는 감상은 아무리 잘된 번역에도 비교할 수 없는 법이다.
오에 겐자부로는 정말 치열하게 읽는 사람이다. 이렇게까지 해야하나 싶을 정도로 읽는데 여기에도 나름의 패턴이 있다. 재독, 삼독은 기본이고 모르는 단어에 색깔별로 박스를 입히는 등 그 나름의 방식(책에 자세히 소개)에 따라 읽는다. 3년마다 작가를 바꾸어가며 읽는데, 한 작품에 발을 들이면 그 작가의 모든 작품을 읽는다고 한다. 또 틈틈이 저작활동을 하는데, 당시 읽는 작가의 영향으로 문체가 달라진다고 한다. 이것은 오에 선생이 의도하는 것이기도 하며 말 그대로 흡수하여 내 것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정말 놀라울 뿐이다. 소개되는 작가와 작품은 아주 많아서 모두 소개할 수 없다. 간단하다면 리뷰에 써보겠는데, 꼬리에 꼬리를 무는 터라 오에 선생의 의도 그대로 옮길 수가 없다.. 그래도 조금만 소개해보자면, 오에 겐자부로가 쉰 살이 되던 해에 지나간 고전을 다시 읽기로 마음먹은 것이 단테의 《신곡》이다. 특히 이 작품을 얘기하면서 오에 선생은 고전을 젊은 시절에 많이 읽어둘 것을 권한다. 살다보면 아니 열심히 읽다보면, 인생의 고전이라 할 만한 작품이 다가온단다. 고전을 통해 얻는 풍부함과 심오함은 어디에도 비할 바 없으니 여유가 있을 때 많이 읽으라 한다..
《신곡》의 연옥, 자살한 사람들의 가시나무를 소개하면서 등장하는 이타미 주조는 선생의 오랜 친구이다. 그의 여동생이 선생의 부인이 되었으니 가족이기도 하다. 이타미는 오에 선생에게 랭보의 시- 프랑스어 원문을 소개하고, 후에 《프랑스 르네상스 단장》이라는 책의 저자가 도쿄대 교수라는 것을 알려줌으로써 〈문학〉의 길에 접어들게 한 장본인이다. 학창 시절, 문학보다는 답이 정해진 수학이 좋았다니, 이타미의 역할이 아니었다면 오에 겐자부로의 작가 인생은 조금 늦어졌을지도 모른다. 선생의 작품 속 분신인, 코기토(Cogito)의 또 다른 반쪽 역할을 하는 것도 이타미이다. 그는 2007년 《수상한 이인조》라 이름붙인 3부작에서 등장한다.. 그의 자살로 괴로워하던 선생이 술을 마시고 바다에서 수영하면 힘이 빠져 죽겠지하는 생각에 물 속으로 들어가는데 이타미의 꾸짖음이 들렸다 하니.. 오에 겐자부로의 인생에 또 다른 면을 차지하고 있는 친우는 에드워드 사이드. 팔레스타인 출신의 세계적인 석학으로, 〈오리엔탈리즘〉에 녹아든 편견을 지적한 학자다. 제국주의를 염려한, 오에 선생과 오랜 우정을 나누며 옳다고 생각한 일을 위해 앞장선 지성인이었다. 사이드와의 서간, 일화는 책에 자세하게 소개되고 2부 8장은 그를 위한 강의다..
어떤 책은 리뷰를 쓰기 힘들다. 정말 좋은 책인데.. 이 책을 통해 더 많이 얻으려면, 오에 선생이 소개하는 작품들을 모두 읽어야하지 않을까 한다. 다행히도 번역가가 우리나라에 소개된 책들을 뒤에 실어주었다. 안타깝게도 1950년의 일본에는 있었던 모 작가의 번역본이 2015년 한국엔 없다.. 목록의 다른 작품을 읽고나서도 번역이 안 되었다면 원문으로 도전해야지 별 수 있겠는가.. 오에 선생의 육십년 《읽는 인생》은 강연을 글로 옮긴 것이기 때문에 내용의 깊이에도 불구하고 전혀 딱딱한 글이 아니다. 문학을 사랑하는 문학소녀, 문학소년(언제나 우리 마음 속엔 소년과 소녀가 살고 있지 않는가?)의 마음을 흔들어놓을 글들이다. 문학과의 첫만남, 인생이 힘든 고개에 접어들 때 만난 작품들, 장애가 있는 장남과 소통하고 노력하는 일화들.. 〈문학이 그를 어떻게 구원하였는가〉를 섬세하고 겸손하게 풀어내는, 팔십의 나이에도 배우려는 노력을 가진 노작가는 대가라는 말로도 부족할만큼 존경스럽다.. 오에 겐자부로의 글을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건강하셔서 오랫동안 활동하시면 좋겠다.
*《신곡》얘기에 나오는 존 라스킨은 존 러스킨John Ruskin이다. 번역가가 맨 처음에 일본어 발음을 그대로 옮긴다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