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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제일 힘센 수탉
이호백 글, 이억배 그림 / 재미마주 / 1997년 2월
평점 :
가족의 사랑이 가득 담긴 불후의 명작
내가 그림책을 처음 접한 것은 아이가 태어나기 전이다. 풋풋한 20대 대학시절이었으니까 말이다. 물론 그 땐 그냥 그림책이구나 이런 정도. 재미있기도 하고 내가 어릴 땐 이런 그림책은 없었던 것 같은데... 이정도. 또 전공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기에 유명한 동화책들을 읽고 평가하는 정도였으니까.
그리고 조카가 태어난 후엔 조카에게 그림책을 정말 많이 읽어주었다. 대학 4학년에서 졸업한 후 몇 년 동안 하루에 꽤 오랜 시간 조카에게 투자해서 책을 읽고 놀아주곤 했으니까 말이다. - 같이 살아서... ㅎㅎ
졸업하고 취직을 하고 난 후에도 난 그림책과 가까웠다. 교사가 직업이었으니까 당연한 결과. 하지만 지금과 같이 이만큼의 애정은 그 당시에도 없었던 것 같다.
드디어 결혼을 하고 내 아이가 태어난 후엔, 좋은 책들을 늘상 찾아다녔다. 아이가 어릴 땐 인터넷으로 주문을 했고, 조금 커서 아장아장 걸어다니기 시작한 후엔 서점과 도서관 나들이를 함께 즐겼다.
늘상 더 좋은 책, 더 재미있는 책,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주옥같은 내용과 그림이 담겨있는 작가들의 작품을 찾는 것은 너무나 즐거운 일어었다. 아이와 함께 같은 작가의 그림책을 나란히 놓고 읽는 것 역시 또 아이의 생각을 함께 나누는 것 또한 행복한 일상이었다.
처음엔 외국의 번역작품이 주였지만, 점점 아이가 자라면서 그리고 나 역시 그림책과 동화책을 많이 접하면서 우리의 멋진 그림책을 찾기 시작했다.
상대적으로 적은 우리나라 동화작가. 하지만 세계에서도 알아주는 멋진 그림과 이야기가 숨겨져있다. 그리고 이호백 선생님의 동화 역시 정말 멋지다. 아니, 멋지다는 말로는 뭔가 2% 부족한 나의 표현의 한계를 느끼게 된다.
특히나 이 책은 가족의 사랑 - 가족들을 위해 헌신한 할아버지의 일생과 그 옆에서 든든히 내조하는 할머니의 모습이 담겨져 있는 것이다.
지난 겨울 아이의 할아버지 그러니까 나의 시아버지께서 운명을 다하셨다. 워낙 고령이셨고, 몇 년 누워계시며 몇 번 중환자실에 실려가시며 고비를 넘기시곤 했기에, 다들 언제일까 각오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내심 충격이었고 마음이 아팠다.
우리 남편은 칠남매 중 막내이다. 식구들이 명절에 다 모이면 정말 많다. 이 책의 수탉을 연상케하는 시아버시셨기에 또한 이 책은 내게 그냥 평범한 그림책 이상이 되었던 것이다.
젊어서는 천하장사였지만, 늙어서는 이빨 빠진 호랑이 - 아니 수탉이 된 주인공과 그 옆에있는 멋지고 현명한 부인. 그리고 다양한 인생사를 보여주는 듯한 전개와 유쾌한 그림이 돋보이는 책이다. 지금은 시아버지를 떠올리며 아이와 함께 책을 읽었지만, 혹시 수 십년이 지난 후엔 내 남편의 일이 될지도 모르는 이야기.
나는 과연 나중에 수탉의 아내처럼 남편의 등을 토닥토닥해줄 수 있을까? 우리 남편은 나중에 어떻게 변할까?
대한민국의 40대는 불쌍하다. 가장으로서 돈을 벌어야하는 그들의 어깨는...... 먼 훗날 다시 웃으며 볼 수 있는 멋진 그림책이 되었으면 좋겠다. 나는 달랑 외동아들만 있기 때문에 이렇게 수탉처럼 대가족이 모여 잔치를 벌일 수는 없겠지만, 살면서 무엇인가 더욱 소중한 것을 놓치지 않고 많이 이뤄가면서 살 수 있도록 충실한 삶을 살고 싶다.
그리고 내 삶이 초라해지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 아니 더욱 풍부한 삶을 살 수 있도록 나이가 들면서 현명해지도록 기도하련다. 돈이며 물질, 명예가 아닌 사랑으로 더 풍부해지는 노후가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아이의 독후감을 덧붙인다. 우리 아이 초등 1학년 때 독후감이며, 그 땐 누워계시던 할아버지께서 추석에 조금 쾌차하시어 함께 모였던 마지막 명절이었던 것이다.
[세상에서 제일 힘센 할아버지]
우리 할아버지는 나이가 아주 많으시다. 천 살도 넘어간다. 사실은 84세이다.
옛날에 증조할머니는 94세 때 돌아가셨다. 난 100살까지 살았으면 좋았을텐데 하고 생각했다.
그런데 요즘 할아버지가 많이 편찮으시다. 아빠의 아빠라서 돌아가시면 아빠는 더 슬퍼할 것 같다. 그래서 난 아빠의 기분을 좋게 만들고 싶다.
책을 읽다보니 할아버지 생각이 났다. 수탉이 꼭 우리 할아버지 같다. 아빠는 어렸을 때 할아버지가 천하장사라고 했다. 나는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다. 할아버지는 크지도 않고 누워계시기 때문이다.
수탉도 처음엔 제일 힘센 병아리였다. 그리고 점점 제일 힘센 수탉이 되었다.
하지만 우리 할아버지처럼 나이가 많아져서 힘이 빠졌다. 수탉은 늙고 슬펐다.
그런데 수탉의 생일 날 식구들이 몽땅 모였다. 암탉의 말대로 정말 많았다. 귀여운 병아리들이랑 달걀까지 있었다.
이제 수탉은 다시 행복해졌다. 세상에서 제일 힘센 수탉은 아니지만 제일 많은 아이들이 있었다.
우리 할아버지도 가족이 많다. 추석에 세어봤더니 25명이나 되었다.
우리 할아버지도 세상에서 제일 힘이 세고 제일 행복하다.
할아버지, 사랑해요.
오래 사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