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여전한 브뤼주의 회색빛 거리!
위그는 자신의 영혼이 이 회색빛에 점점 더 많은 영향을 받고 있음을 느꼈다. 그는 흩어져 있는 이 침묵에, 오가는 사람 없는 이 공허함에 감염되고 있었다. 검은 외투를 걸치고 머리에는 옷에 달린 모자를 쓴 그림자를 닮은 몇몇 노파들만이 성혈 예배당에 가서 촛불을 켜고 난 뒤 돌아오고 있었다. 신기한 것은 오래된 도시에서만큼 그렇게 많은 노파를 본 적이 없다는 것이다. 나이가 든 그들은 말을 이미 모두 다 소진해버린 듯 흙빛을 띤 채 침묵하며 천천히 나아가고 있다···. 예전의 고통과 지금의 걱정거리에 열중하여 무턱대고 걷던 위그는 겨우 그들을 알아보았다. - P102

그는 빠른 걸음으로 오래된 동네를 떠나 반대 방향으로 나아갔고, 막연하게, 비통한 마음으로 어디로 향하는지 모른 채 진흙탕 속을 거닐었다. 비는 더 서둘러 내렸다. 실을 뽑아내듯 빗줄기를 풀어내며 서로 얽혀 그 짜임은 점점 더 촘촘해졌고, 보이지 않는 그 축축한 그물 아래 위그는 점차 부드러워지는 자신을 느꼈다. 그는 다시 회상하기 시작했다···.


도시가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지! 이제 도시는 모든 것을 휩쓸어버린 빗속에 녹아버리고 잠겨 더는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이토록 걸맞은 슬픔이라니! 바로 이 죽음의 도시 브뤼주에 비로부터 살아남은 가장 큰 높이의 종탑에서 들려오는 본당의 종소리가 여전히 쏟아져 내리며 슬퍼하고 있다! - P103

도시가 그에게 다시 영향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숭고한 백조의 존재로 인해 고귀해진 흐르지 않는 운하로부터 얻은 교훈, 과묵한 둑길이 보여준 체념이라는 본보기, 특히 언제나 멀리서 보이는 노트르담 성당과 성 살바토르 성당의 높은 종탑에서 나오는 경건하고 엄격한 충고. 위그는 그곳에서 피난처를 찾으려는 듯 본능적으로 눈을 들었다. 하지만 종탑은 그의 불행한 사랑을 하찮은 것으로 만들었다. - P107

도시들은 특히 개성과 독자적인 기질을 지니고, 기쁨, 새로운 사랑, 금욕, 사별한 사람의 생활에 상응하는 거의 외재화된 특징을 지닌다. 모든 도시는 마음의 상태이며, 이곳에 머무르게 되면 이내 마음의 상태가 공기의 미묘한 변화와 함께 뒤섞여 감염되는 액체로 우리에게 전해지고 퍼진다. - P110

그는 결국 조금씩 의심을 하기 시작했다. 그는 그녀를 몰래 감시했다. 저녁에는 집 주변으로 가서 잠든 이 도시 브뤼주에서 밤에 돌아다니는 유령처럼 어슬렁거렸다. 그는 숨어서 살피고, 조마조마하게 멈춰 서고, 침묵이 흐르는 통로에서 사라져가는 귓가를 간지럽히는 짤막한 초인종 소리를 듣고, 불이 켜진 창문 앞에서 밤늦도록 바람을 맞으며 밤을 지새우고, 블라인드에서 매초 두 개인 것처럼 보이는 실루엣이 중국 그림자놀이를 하듯 지나다니는 것을 보았다.
이제는 죽은 아내가 문제가 아니었다. 제인의 매력이 점차 그를 사로잡았고, 그녀를 잃을까 두려움에 떨었다. 이제는 그녀의 얼굴뿐만이 아니라 그녀의 육체까지도 문제였다. 커튼의 주름에 떠다니는 그림자밖에는 보이지 않았지만, 그에게는 그녀의 온몸 이미지가 밤의 반대편에서 불타오르는 것처럼 그려졌다···. - P130

그렇다! 그는 그녀 자체를 사랑하고 있었다. 그는 저녁마다 한밤중의 종소리에, 이 북쪽 지역에서 구름이 끊이지 않고 이슬비로 흩어져버려 계속해서 내리는 가는 비에 미칠 것 같으면서도 그녀를 지켜보며 고통을 느끼고 슬퍼할 정도로 질투를 하고 있던 것이었다.
그는 비가 점점 거세지는 와중에도 겨울이 끝날 무렵의 흐린 하늘 아래 녹아내린 눈, 진흙, 가슴이 저리는 온갖 슬픔 속에서 그녀를 엿보고, 안마당에서처럼 짧은 거리를 이리저리 오가고 몽유병 환자처럼 모호한 말들을 큰 소리로 내뱉으며 그곳에 머물러 있었다···.
그는 알아내고, 밝혀내고, 보고 싶었다···. 아! 얼마나 고통스러운가! 대체 이 여인은 어떤 영혼을 지녔길래 그를 이렇게 아프게 하는 걸까. 이와 다르게 그녀와 다른 영혼, 그러니까 너무나도 착한 죽은 아내의 영혼은 그의 고뇌가 극에 달한 이 순간, 한밤중에 일어나 달처럼 그를 측은하게 바라보는 것 같았다. - P131

그는 여전히 있는 그대로의 그녀를 원했다. 위그는 자신의 비겁함 때문에 마음속으로 수치심을 느꼈다. 그러나 이제는 그녀 없이 살 수는 없었다···. 게다가 누가 알겠는가? 세상은 너무나도 악의로 가득하다! 그녀는 심지어 자신의 결백을 증명하길 원하지도 않았다.
그러자 극심한 고통을 느꼈던 꿈이 끝나버린 순간 앞에서 그는 갑자기 엄청난 고뇌에 사로잡혔다(사랑이 깨지는 건 마지막 인사도 없이 떠나는 작은 죽음과도 같다). 그런데 이 순간 그를 가장 고통스럽게 하는 것은 제인과 이별 을 하고, 닮은 모습을 비추는 거울이 깨져버렸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는 특히 이 도시와 마주했을 때, 그와 그 도시 사이에 더는 아무도 없이 자신만 홀로 남게 될 위기에 처했다는 생각 때문에 불안해하고 있었다. 물론 이 돌이킬 수 없는 브뤼주, 그 회색빛 우울한 분위기는 그가 직접 선택했다. 그렇지만 종탑의 그림자가 지닌 무게가 너무나도 무거웠다! 그리고 제인은 그녀에게 구속된 그의 영혼이 그 그림자를 느끼는 데 익숙해지도록 만들었다. 이제 그는 그 도시의 모든 것에 어쩔 수 없이 따를 것이다. 그는 종에 사로잡혀 홀로 남게 될 것이었다! 두 번째 사별을 겪는 것처럼 더욱더 혼자가 될 것이었다! 도시 역시 그에게는 한층 더 죽은 듯 여겨지리라. - P136

그녀는 말없이 내려갔다. 그리고 1층에 도착했을 때 생각이 바뀌었다는 듯, 아니면 호기심에 사로잡혔다는 듯 입구에서 문이 이미 열려 있는 응접실들을 바라보았다.그녀는 몇 발자국 걸음을 내디뎠고 서로 연결된 두 개의 널따란 방으로 들어갔는데, 그 근엄한 모습이 자신을 책망하는 듯했다. 방도 얼굴을, 표정을 갖고 있다. 방과 우리 사이에는 순간적인 우정, 반감이 존재하는 것이다. 제인은 푸대접을 받는다고 느꼈고, 자신이 그곳에서 비정상적이고 이방인인 것처럼 느껴졌으며, 거울과 대립하고 있는 것 같았고, 그녀의 존재로 인해 그 변함없는 태도에 위협을 받는 낡은 가구에 적대감을 느꼈다. - P1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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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속과 물 밖. 시끄러움과 고요함. 오늘은 끝까지 가볼래요? 아니요. 저는 안 갈래요. 왜 안 가요. 희주와 주호는 실랑이를 한다. 희주가 먼저 간다. 주호가 뒤따른다. 물이 흔들리고 물이 다. 딱 그만큼 몸이 흔들리고 몸이 흰다. 떠오르는 몸. 가라앉는 몸. 물을 밀어내는 만큼 밀려가는 몸. 밀어내는 만큼의 무게. 딱 그만큼 두 사람은 손안에 들어오는 물을 만진다. 움켜쥔다. 갈 수 있는 만큼 간다. - P98

오아시스가 인터뷰에서 "우리는 예전에 끝났어"라며 위악적으로 남긴 말은 재미있었다. 그걸 이렇게 바꿔서 속으로 읊기도 했다.
‘교육은 예전에 끝났어. 그러니까 엿같은 월급이나 내놔.‘
냉소는 독이었지만 적당히 쓰면 자기 연민을 경계하는 데에 유용했다. 머그잔에는 『노인과 바다』의 문장이 새겨져 있었다. A man can be destroyed but not defeated. 인간은 파괴될지 언정 패배하지 않는다. 탕비실에서 향 좋은 커피를 내리며 그 문장이 자신에게 사치라는 걸, 자신은 패배는커녕 파괴되지도 않았다는 걸 분명히 해두었다. - P115

"교사는 감사한 직업이고, 가끔은 아주 감사한 직업이에요. 학생에게 뭘 가르치려고 하지 않는다면 말예요." - P116

곽은 스무 살도 안 된 아이를 밤마다 거리로 내모는 사회가 새삼 무서웠다. 각자의 삶에서 이 수업이란 전혀 중요하지 않으며, 차라리 오십 분의 숙면이 더 귀할 수도 있 지 않을까. 그들을 교실에 가두는 것은 어른들의 욕심이 아닐까. 엎드린 이 학생, 그리고 저 학생도, 억압적인 제도 교육에 대하여 멜빌의 「필경사 바틀비」 속 바틀비처럼 "하지 않겠습니다"라는 메시지를 온몸으로, 그러니까 잠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 아닐까. - P123

수업에서 소개하는 고전에 귀를 기울이는 게 장기적으로는 더 뛰어난 성취와 풍요로운 삶으로 이어질 거라고 믿었다. 그러나 그 학생의 문제집 아래 깔린 학습지에 곽 스스로 적어둔 것이 있었다.
‘밀은 『자유론』에서 개인의 행동이 설사 그 자신의 이익과 상충되는 듯 보이더라도, 그러할 자유를 보장하는 게 포괄적 공리에 부합한다고 여겼다.‘ 좋은 수업이란 훌륭한 예술품이 그러하듯 내용과 형식이 일치해야 했다. 충분히 이성적이지 못한 미성년자의 자유는 제한할 수 있다는 구절도 기억났으나, 밀이 같은 논리로 당시 식민지인에 대한 지배도 정당화했다는 점에 주의해야 했다. 3월이 끝나갈 무렵 곽은 주체, 타자, 대상화, 전유, 포섭, 폭력 같은 단어들이 섞인 일기를 이렇게 끝맺었다.

‘······하지만 학생들은 나의 식민지가 아니다.‘ - P124

왜 마르크스만 문제가 되나. 마르크스를 읽고 사회주의자가 되는 게 공자를 읽고 유교 원리주의자가 되는 것보다 위험한가. 따지자면 추천 도서 중에서 카뮈의 『이방인』이 제일 위험하지 않나. 학생이 자기 어머니의 기일을 기억하지 못하거나 대낮의 태양에 눈이 부셔서 아랍인을 총으로 쏠지도 모르니까. - P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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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숙함과 새로움. 익숙함은 인간 존재의 규칙이자 리듬 그 자체다. 위그는 손쓸 도리 없이 그의 운명을 결정지은 그 익숙함을 뼈저리게 경험했다. 그는 언제나 소중한 여인의 곁에서 십 년을 보냈기 때문에 그녀를 더는 끊어낼 수 없었고, 그의 곁에 존재하지 않는 그녀에게 계속해서 몰두하고 다른 얼굴에서 그녀의 모습을 찾은 것이다.
또 다른 한편, 새로움에 대한 욕구는 익숙함에 못지않게 본능적이다. 사람은 똑같은 행복을 소유하는 것에 싫증을 낸다. 건강과 마찬가지로 사람들은 오로지 그 반대의 것을 인식함으로써 행복을 누린다. 사랑 역시 간헐적으로 이루어지며 존재한다.
유사성은 분명 익숙함과 새로움을 우리 안에서 조화시키고 균등하게 하여 어떤 불확실한 지점에서 두 가지를 결합한다. 그것은 익숙함과 새로움의 지평선인 것이다. - P63

매일같이 만성절의 분위기를 띠는 브뤼주의 회색 빛 길거리가 지닌 우울함이란! 수녀들의 머리쓰개의 흰색과 신부가 입는 수단의 검은색으로 만들어진 듯한 이 회색이 이 도시에서 끊임없이 전염되고 있었다. 회색의 신비, 영원한 약식 상복의 색깔! - P65

위그가 제인을 만난 몇 달 동안 그 어떤 것도 그가 다시 겪고 있는 거짓말 같은 상황에 영향을 주지 못했다. 그의 삶이 얼마나 변했던가! 그는 더 이상 슬프지 않았다. 거대한 공허 속에서의 외로움을 더는 느끼지 않았다. 예전의 그가 했던 사랑은 너무 멀리 있어 영원히 닿을 수 없을 것 같았지만, 이제는 제인이 그것을 위그에게 되돌려주었다. 그는 제인에게서 그 사랑을 다시 발견했고, 물에 그 모 습이 그대로 비친 달을 보는 것처럼 제인에게서 그 사랑을 보았다. 그리고 지금까지 그 모습 전체를 일그러뜨리는 고약한 바람이 불어도 이 사랑의 그림자에는 어떤 물결도, 어떤 떨림도 생기지 않았다. - P70

위그는 불안감이 점점 커지는 것을 느꼈다. 슬픈 무도회에 온 것 같았다. 유사한 신체적 매력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걸 처음으로 깨달았다. 매력은 여전했지만, 왜곡된 방식으로 작용했다. 닮은 모습을 빼고는 제인은 그에게 저속해 보일 뿐이었다. 닮았다는 이유로 잠시 제인은 그에게 죽은 아내를, 같은 얼굴을 하고 같은 드레스를 입고 있지만 타락해버린 아내를 다시 만나는 듯한 끔찍한 느낌을 주었다. 이런 감정은 예배행렬이 벌어지는 동안, 저녁에 성모 마리아나 성녀들의 복장을 한 행렬을 만났을 때나 느껴지는 감정이었다. 행렬은 어둠 속에서 피가 흐르는 상처를 지닌 가로등 아래에서 외투와 성스러운 제복을 입고 있지만, 한층 더 우스꽝스러워 보이고 약간은 취한 채 신비스러운 가장행렬에 휩쓸려 가는 것이다. - P79

성인이나 신의 축복을 받은 사람들 이름을 딴 길들이 구부러지고, 비스듬히 돌아가고, 얽히고, 또 길게 뻗으며 중세풍의 작은 마을을, 다른 도시 안에 작게 분리되어 있고 한층 더 생기가 없는 도시를 형성하고 있었다. 너무나도 텅 비어 있어 적막한 그 도시에서는 고요함이 전염성을 지녀 환자가 있는 곳에서처럼 조용히 걷고 작은 목소리로 말한다. - P87

두 사람 사이의 유사성은 결국 몸매와 전체적인 모습에 서 나타날 뿐이다. 세세한 부분에만 신경을 쓰다 보면 모든 것이 다르다. 그러나 위그는 자신의 바라보는 방식이 바뀌었다는 사실은 알아차리지 못한 채 아주 꼼꼼하게 비교하면서 이를 제인의 탓으로 돌리고 그녀 자체가 완전히 변했다고 생각했다. - P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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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교에서의 친구들

낡은 육교를 지날 때 둘은 손가락을 걸쳤다가
층계의 마지막 칸에 와서야 깍지를 끼었다
그리고 다시 지상이었다 눈이 오네,
눈을 보며 우린
모두 친구였는데 지금은
페이스북 친구다 눈이 오면 눈이 온다고
사진을 찍어 남긴다 눈 오는 날 먹기 좋은 메뉴를 파는 식당의 위치가 핀 고정 되어 있고 너는 고향에 그대로고
나로서는 다행이다 우리는
입시를 치르며 싸락눈처럼 뿔뿔이 흩어졌지 서로를 첫사랑이라 착각하거나
초콜릿을 나눠 먹거나 했지만
무엇 하나 남기질 못했지
사진 한 장
태그 한 개
없지
눈이 왔었는데, 그날의 눈발이 같은 기억인지 다른 기억인지
육교인지 지하상가인지 알 도리가
그중 내가 착각했던 친구는 페북도 하질 않아
도통 소식을 알 수가 없고 조금은 섭섭해서 양손을 모아 깍지를 낀다
사진을 찍거나 핸드폰을 만질 손이 없어지고 그을리는 기억
낡은 육교 아래를 전철은 흘러간다
마지막 역에 와서야 깍지를 풀었다
그리고 다시 지상이었다 날이 좋네,
매 순간 최선을 다하지 못해
다행스러웠다
아무것도 연결되어 있지 않아서
아무것도 기억하지 않아서
아무것도 보여주지 않아도 되어서
눈을 보며 우린
모두 친구였지만 - P40

전화를 끊지 않은 우리 어머니, 엄마 아직도
생각이 난다 보드라운 슬픔이
학습지처럼 배달된다 해답을 보는
순간

엄마는 층계참에 주저앉아
소리 죽여 울고 있었지
아파트의 모든 벽에 소리가 부딪쳐 타올라
재가 되었다 나는 기침을 하였다 익은 면에 재를 뿌리며
오늘은 내가 요리사인데 어머니는
울고 우리 아이는 이제 곧
늦은 조기 교육을 시작하기로
아직 - P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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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는 물속에 얼굴을 집어넣었다가 빼기를 반복했다. 주호는 잘 떠 있고 싶었다. 더 둥둥 떠 있고 싶었다. 주호는 수영장에 나와 종일 호흡법을 연습했다. 물속에서는 물 밖에서와 반대로 숨을 쉬어야 한다. 물속에서 코로 숨을 뱉고, 물 밖에서 입으로 숨을 들이마신다. 그 숨이 간절해진다. 숨쉬기가 자연스러운 일이 아니라 아주 부자연스럽고 절실한 일이 된다는 점. 그 점이 주호는 마음에 들었다. - P87

그렇게 두 사람은 수영이 끝나고 나면 분식집 앞에서 대화를 했다. 대화의 내용은 비슷했다. 늘 주호는 희주의 장바구니를 궁금해했고, 희주는 재료 하나하나에 대해 진지하게 말했다. 중요한 건 두 사람이 나누는 대화가 중요하지 않은 말들이라는 사실이었다. 집으로 돌아가서 떠올리더라도 후회하지 않아도 되는 말들. 그 자리에서 흩어지고 휘발되어버리는 말들.
그런 말들이 오가다보면 아무 말이나 하고 싶은 순간이 왔다. 그런 순간에는 너무 깊은 이야기를 불쑥 하게 된다. 그 순간을 조심해야 한다고 희주는 생각했다. 우울한 이야기는 사람들이 싫어하니까. 우중충한 사람은 매력적이지 않으니까. 희주는 자기도 모르게 내밀한 이야기를 할까봐 조심했다. - P90

"전 죽고 싶다거나 죽으려고 생각한 적은 단 한 번도 없거든요. 그런데도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게 이상해요. 그럴 수가 있는 걸까요."
주호는 살고 싶다는 강한 충동이 밀려오는 자신이 이상했다. 그런 충동은 죽음에 대한 충동과 짝을 이루는 것 아닌가. 삶이, 살아 있음이 자연스럽다면 살고 싶다는 충동 자체를 느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주호는 최근 들어 죽음에 대한 충동이나 갈망 없이도, 살고 싶다는 충동에 절실하게 시달렸다. 살고 싶다. 더욱 살고 싶다. 그리고 그런 말들을 때로 장바구니를 든 희주 앞에서 흩뿌렸다. - P90

두 사람은 각자 다른 시간에, 다른 장소에서, 다르지만 비슷한 다큐멘터리를 보았다. 다큐멘터리는 오십 년 뒤, 빠르면 삼십 년 뒤에 지구가 완전히 물에 잠긴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희주는 반짝이던 도시가, 사람들이, 색색의 거리들이 물에 잠긴 모습을 상상했다. 무서운 것이 아니라 이상하게 위안이 됐다. 같이 떠내려 가는 것. 같이 잠기고 같이 사라지는 것. 그런 것도 사랑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희주는 생각했다. - P91

희주는 이따금 전 남자친구가 마지막으로 뱉고 갔던 말을 떠올렸다. 여러 번 떠올릴수록 화가 나지 않았다. 싸늘하다고 기억했던 그의 마지막 얼굴이 쓸쓸하게 느껴질 뿐이었다. 희주는 화내야 하는 일과 화낼 필요가 없는 일을 정했다. 고래와 펭귄과 물고기 들이 죽음을 당하고 지구가 죽어 가는 일에 화를 내자. 어차피 인간은 죽는데. 다 같이. 희주는 괴롭힘을 당하는 아이들과 괴롭히는 아이들에게도 이 사실을 빨리 알려주고 싶었다. 어차피 우리는 모두 물에 잠길 거다. 빠르면 삼 십 년 뒤에. 다 같이 죽는 거지. - P93

인간은 물속에서 살기 적합한 동물이 아니다. 수영을 배우면서 주호는 그 점이 새삼 신기했다. 인간은 물고기로부터 진화한 것이라는 말을 어디선가 들었다. 인간의 귀는 아가미가 진화한 것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인간의 진화는 실패한 게 아닐까, 주호는 생각했다. 인간은 물속에서도 공중에서도, 그러니까 너무 깊은 곳에서도 너무 높은 곳에서도 살 수 없다. 숨을 쉴 수 없다. 그러니 너무 깊은 곳으로도, 너무 높은 곳으로도 가서는 안 된다. 주호는 그렇게 살아왔다. 그런데 왜 그래야 하지? 주호는 억울했고, 슬펐다. - P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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