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심과 불안 때문에 사람들은 보고 파악하고 규정하려 한다. 어떻게든 자기 눈앞에 두려고 한다.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가 신의 법을 받고 있을 때 산 아래서는 사람들이 금송아지를 만들었다.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신으로 만족할 수 없어서, 불안해서 보이는 우상을 만든다. - P172
신성과 경이는 느낄 수는 있으나, 느낄 수 있을 뿐 손에 잡히지 않기 때문에 불편하다. 압도적이면서 매혹적인데 실체를 알 수 없기 때문에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모르는 상황에 빠진다. ‘성스러움‘의 의미에 대해 루돌프 오토는 그것이 두렵기만 한 것이 아니라, "독특한 힘으로 끌어당기며, 매료하며, 매혹하는 어떤 것"이라고 했다. "그것은 우리를 겸허하게 만드는가 하면 동시에 우리를 고양시키며, 우리의 마음을 제약하는가 하면 또 스스로를 초월하게 하며, 공포와 유사한 감정을 유발시키는가 하면 다른 한편으로는 행복한 감정을 자아내기도 한다."(『성스러움의 의미』) 두려움과 매혹, 이 상반된 감정의 동시적 습격을 인간은 감당할 수 없다. 수용할 수 없으므로 추방하거나 수용하기 위해 축소한다. 손에 잡히게 바꾼다. 생각의 범주나 시력이 미치는 범위 안에 두려고 한다. 불가사의와 불가시는 밀려난다. - P172
이해할 수 없이 크고 파악할 수 없이 큰 것을 이해하고 파악하기 위해서는 이해와 파악의 범주 안으로 욱여넣어야 한다. 그러면 이해 할 수 없고 파악할 수 없는 것은 빠지고 이해할 수 있고 파악할 수 있는 것이 담긴다. 훼손과 손실이 불가피하다. 훼손되지 않아야 할 것들이 훼손되고 손실되면 안 되는 것들이 손실된다. 집어넣을 수 없는 것은 집어넣을 수 없다. 보이지 않는 것은 보게 할 수 없다. 우주를 집어넣으려면 우주보다 큰 자루가 필요하다. 신을 집어넣으려면 신보다 큰 자루가 있어야 한다. 그런 것은 없다. 그러니까 집어넣을 수 없는 것은 그대로 두어야 한다. 보이지 않는 것은 보이지 않는 채로 보아야 한다. - P174
예배는 이벤트가 된다. 경이와 신비 대신 형식과 순서와 기능이 중요해진다. 보이는 것이 중요하고 보여주는 것이 중요하다. 견고한 교리와 세련된 형식을 갖춘 종교는 종교인을 예배라는 이름의 잘 기획된 행사에 참여하는, 동원된 일원으로 만든다. - P175
존재는 인식에 우선한다. 우리의 앎과 모름에 따라 어떤 존재가 있거나 없는 것은 아니다. 누구, 혹은 무엇의 있고 없음은 우리의 앎, 혹은 모름에 좌우되지 않는다. 있는 것은 우리의 앎과 상관없이 있고, 없는 것은 우리의 모름과 상관없이 없다. - P179
제도화된, 굳은, 안전한 종교 안에서 많은 경우 신은 인간이 추구하는 욕망(이를테면 권력이나 출세나 부의 축적 같은)의 대체재, 혹은 그 욕망을 이루기 위해 사용하는 지렛대가 된다. 신은 쉽게 이용당한다. 몸은 예배당에 있지만, 권력이나 출세나 부의 축적 같은 욕망과 접속해 있다면, 그 욕망을 위해 병 속에 들어가 웅크린, 축소된 신을 이용하고 있다면, 그것을 예배라고 할 수 있을까. 물리적 공간에 제한되지 않는 신과의 만남이 물리적 공간의 참여를 통해(서만) 이루어진다는 주장만큼 이상한 것도 없다. - P182
공동체는 집단이 아니라 고유한 ‘한 명‘들의 모임이다. 몰입과 흡수, 예속이 신앙의 지표가 되는 순간 인간은 고유성을 잃고 사유할 줄 모르는 기계, 프로그래밍된 내용에 따라 열광할 뿐인 기계가 된다. 기계의 부품이 된다. 제도화된, 굳은, 안전한 종교가 신 앞의 유일한 존재인 사람의 지위를 빼앗는 일이 무의식, 무의지중에 발생한다. 집단은 ‘개별성을 삼키는 육체의 집합체‘이다.(알랭 핑켈크로트, 『사랑의 지혜』) 맹신은 믿음의 최상급이 아니라 믿음의 반대말이다. - P1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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