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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을 쌓는 마음 ㅣ 마음의 지도
윤혜은 지음 / 오후의소묘 / 2024년 3월
평점 :
십 년 동안 일기를 쓴 사람.
사실 기간만 봐서는 일기를 쓴 것을 넘어 기록에 가깝다고 생각했다.
완성된 책의 형태로만 보던 글을, 펼쳐진 채로 두꺼운 종이 상태의 교정지로 만나는 경험은 처음이었다. 표지가 없고 편집이 덜 되긴 했어도 내가 아는 책의 형태로 된 가제본은 몇 번 마주한 적이 있었는데 교정지는 생소했다.
아직 책으로 만들어지기 전의 교정지를 두 손에 받아들고 내가 특별한 사람이 된 양 여겨지던 알 수 없는 기분이 좋았다. 종이의 순서를 흐트러지지 않게 볼 자신이 없어서 아이들과 자주 가던 집 앞 문구사에 교정지를 들고 갔다. 이만한 종이를 집을 수 있는 크기의 튼튼하고 넓고. 깊은 집게를 살 수 있냐고 물으면서 내 표정은 사뭇 비장했을 것이다.
<매일을 쌓는 마음>은 어떤 순간이 한 번뿐이라고 생각하면 어쩔 줄을 모르겠다는 저자가 쓴 책이다. 노력한 만큼 오지 않는 것에 대해 억울한 심정이 없는 사람. 일단 시도하면 무엇이든 남는다는 인과에 조금 더 감격하는 편이라는 사람.
스스로에 대해 여러 가지 이유로 관대한 사람들을 자주 보았다. 대신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이상하리만치 타인을 이유로 들던 사람들을. 오히려 나는 그 반대라 스스로한테 관대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들이 부럽기도 했고 불편하기도 했던 것 같다. 무언가를 좋아하는 마음은 하나에서 비롯된다고 했는데 저자가 자신의 성향을 덤덤하게 써 내려간 문장이 이상하게 좋았다. 그동안 정성을 쏟은 관계나, 일에 있어서 노력한 만큼의 결과를 얻지 못하면 수 없는 이유로 자신을 힐난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p.11
세상에는 정말 많은 일이 일어난다. 내가 나의 기억들 속에서 안온하다는 게 이상하게 느껴질 정도로. 이제는 잘 쓰는 사람이 아니라, 잘 기억하는 사람이면 좋겠다. 기록보다 기억하려는 노력에 더 시간을 쓰는 밤을 보내고 싶다. 기억의 부피를 내 안에서 키울 수 있도록.
단단하게 살아낸 십 년의 기록을 꺼내 읽어보는 느낌의 책.
무엇이 되지 않더라도, 무언가를 마음에 품고 오래 노력하고 시간을 보낸 사람은 결국 원하는 것에 조금씩 닿고 있었다는 것을 책을 읽으며 나는 알았다.
2년 동안 두 편의 장편과 한 편의 단편 소설을 완성한 저자의 노력은 책이 되어 독자를 마주하게 된 이야기도 있다고 했다. 하루를 기록하는 일에도 진심인 사람의 소설은 어떤 글일지 궁금하고 기대되는 마음이 들었다.
‘쌓는 마음은 기다리는 마음과 닮아있다.’라는 글을 보면서 나는 어떤 것을 쌓고 있는지, 닿아있는 마음은 어떤 것일지 궁금하기도 했고, 떠오르는 간절한 무언가를 오래 생각했다.
책 속에서 글을 쓰는 사람으로 살며 빚어낸 마음에 관해 쓴 단락은 최근 글쓰기 수업을 듣게 된 내게도 낯설지 않게 다가왔다. 길지 않은 글을 쓸 때마다 타인을 바라보는 나의 시선이 문장으로 연결되는 것을 볼 때면 글은 결국 내 생각과 시간을 담는 이야기구나 싶다. 주변의 말에 휘둘리는 사람으로 살지 말고 내가 기준이 되어 살아야겠다고 다짐하게 되는 순간을 자주 만난다. 글을 쓰는 사람의 첫발은 주제가 아닌 양이 되어야 한다는 어느 작가님의 말이 떠올랐다. 매일 주어진 양을 쓰다 보면 글을 쓰는 일에 자신감을 가지게 될 수도 있다는 말이.
그리고 무엇이 되지 못하더라도, 오래전부터 쓰고 싶었던 이야기를 하나씩 풀어내는 삶도 꽤 근사할 거라는 기대가 들었다.
p.103
한 번씩 찾아오는, 특정 시절로부터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했다는 자괴감도 걷다 보면 희미해졌다. 어떤 하루엔 그 모든 일을 통과하고 웃는 오늘을 맞이했구나, 하고 내가 건너온 시간의 길이를 체감하며 앞으로 나아갔다.
p.177
나는 몇 시간이고 가뿐히 걸을 수 있으며 햇볕을 충분히 쬐면 기분이 즉각적으로 좋아지고, 그런 순간엔 늘 혼자라는 사실에 당혹스러워하는 대신 내가 때때로 그 외로움이 필요하다는 것을 빠르게 깨달았다.
오늘은 봄맞이 혼자 산책 겸 호수 공원을 한 바퀴 돌았다. 호수가 바다같이 느껴져서 멀리 있는 고향 바다와 아빠를 생각했다. 섬의 바다에서 어부의 하루를 충실히 수행하고 있을 아빠의 오늘은 어떤 생선으로 채워졌을까. 몇 시간이고 가뿐히 걸을 체력은 없지만, 부실한 발목과 무게가 많은 몸을 탓하지는 않았다. 대신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에너지를 얻을 만한 것이 내겐 무엇일까 생각하면서 걸으니 호수가 예전처럼 멀고 넓지만은 않았던 것 같다.
매일을 쌓는 마음으로 몇 시간이고 걷고 쓰는 사람이 써 내려간 기록을 한 권의 책으로 마주할 수 있어 반가웠다. 차가운 공기가 볼에 스칠 때마다, 손끝을 아리게 만들 때마다 봄을 기다렸는데 오래 기다린 만큼 반가운 봄을 닮을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