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는 기분
박연준 지음 / 현암사 / 2021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아직은 내 수준이 박연준 작가의 작품의 깊이까지 가진 못한 상태라 그런지 쉽게 내 곁에 와닿기보단 어색하게 거리를 두는 듯한 느낌
시를 쓰는 데 진심인 작가와 시에 관심이 있는 독자 사이의 간극
언젠가 나도 시를 써볼 수 있을까, 그 때 다시 읽어보고 싶다.

천 명의 사람이 빵을 만든다고 상상해보자. 천 명의 사람들은 어떤 식으로 빵을 만들까? 그들에게 동일한 재료를제공하고 동일한 조건에서 빵을 만들게 한다고 해도 천 개의 빵은 천 개의 맛이 날 거야. 맛은 비슷하지만 촉감이 다를 수도 있고, 촉감이나 생김은 비슷해도 향이나 굽기의 정도가 다를 수도 있지. 처음엔 비슷해 보이지만 시간이 흐른뒤 맛이 얼마나 잘 유지되는지, 다시 데웠을 때 처음의 맛처럼 신선해지는지 살펴볼 수도 있겠지.
이제 빵을 ‘시‘로 바꿔 생각해보자.
애정이 곧 노력이다.

수업도 마찬가지 아닐까
천 명의 교사가 만든 수업
저마다의 맛있는 레시피를 만들어가는 교사
나도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데카르트는 《방법서설》을 다 쓰기까지 41년의 인생을 살았다. 착상은 더욱 젊을 때 했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시간을 들여 확인했다.
현대인에게는 수많은 것을 빨리 알고자 하는 성향이 있다. 하지만 데카르트가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것은 ‘빨리 아는 것‘보다는 ‘확실히 하는 것‘, ‘깊이 아는 것‘이다. 곧 알아야 할 것을 알아야 할 때 아는 것이 중요하다는 이야기다.
aestmapisonscoves가령 눈앞에 지팡이가 있어야 걸을 수 있는 노인이 있다.
고 치자. 그 앞에서 50대의 내가 ‘늙음‘에 관해 아는 척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지금은 모르겠다‘와 ‘지금 알고 있다‘는인식을 깊게 해야만 한다.
더욱 위험한 것은 잘 모르면서 아는 척하는 일이다. 나아가 자신이 알지 못하는 것에는 의미가 없다고 단정하는 일이다.
현시점에서 모른다고 해서 반드시 그것에 의미가 없지는 않다. 때가 차지 않으면 도저히 알 수 없는 것이 있다.

학업의 전 과정을 끝내자, 나는 생각이 완전히 바뀌었다. 왜냐하면나 자신이 수많은 의심과 오류로 고민에 빠졌음을 깨닫게 되었고, 면학에 힘쓰면서도 점점 스스로 무지하다는 사실을 깨닫는 일 외에 아무것도 얻을 수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학자가 되리라 마음먹었으나 공부를 다 끝냈을 때 마주한 풍경은 자신이 상상하던 것과 달랐다. 데카르트는 자신이 알려고 한 것, 알고자 한 것은 실은 공부로는 알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아버린 것이다.
여기에서 데카르트가 말하는 것은 다른 이에게 배운 것을 모두 이해했을 때 비로소 얻을 수 있는 실감感이다. 그것은 공부를 지속하여 지식을 모두 얻었는데도 더욱이 꼭스스로 찾아야 하는 것을 찾지 못한 느낌이다.

공부는 물론 훌륭한 일이다. 그러나 아무리 공부해도 우리는 그것에서 다른 사람이 가르쳐준 것 외에는 배울 수가없다. 스스로 찾아야 하는 것은 결국 제 손으로 찾아야 한다. 데카르트는 그 사실을 깨달았다. 진정한 배움이란 공부바깥에서 자신이 만나야 하는 것을 발견하는 일이 아닐까.
데카르트는 그렇게 생각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러한 일은 누구나 경험하는 것이리라. 가령 지금부터내가 ‘사랑이란 이러한 것이다‘라는 강의를 한다고 치자. 이때 내가 사랑이라는 문제에 대해 동서고금의 명저가 말하는 것을 소개하면 여러분은 그것에 관해 ‘배우는 일‘이 가능하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진정한 사랑을 ‘사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것은 자신이 누군가를 좋아하게 되었을 때 비로소 알수 있기 때문이다. 타인의 설명으로 ‘사랑‘에 관해 이해했다고 생각한다면 진정한 배움이라 할 수 없다.

데카르트는 우리에게 무언가를 ‘배우는 일‘과 무언가를
‘사는 일은 다르다고 말한다. 나아가 무언가를 ‘배우는 일‘
과 ‘사는 일‘양쪽의 길이 있다고 전한다. 우리는 어느 한쪽이 아니라 양쪽을 동시에 살아야 한다는 사실을 데카르트는 밝혀낸 것이다.

해답을 찾을 수 없을 때 우리는 불안을 느낀다. 곧 아렌트는 답 없이 흔들리는 현실을 배경으로 자신의 철학을 수립하려 한다. 무언가 확고한 견해와 경험을 배경으로 삼는것이 아니라 배가 크게 흔들리는 듯한 불안정한 상태로 계속 생각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이다.
of산다는 것은 작은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가는 것과 닮았다.
바다에는 파도가 있다. 그러므로 언제나 흔들린다. 흔들리는것이 바다에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그러나 수영장은 다르다. 수영장에서는 배가 거의 흔들리지 않지만 우리는 그곳에서 살아갈 수는 없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대화란 자기의 인식을 확인하는 방법이 아니며 상대방의 인식을 아는 일도 아니다. 두 사람 사이에 명백히 모습을 드러낼 무언가를 받아들이려고 준비하는 것 자로 그 자체다.

학교에서는 교사가 자신이 이해한 대로 가르친다. 그러나80우리 개개의 인생에서 중요한 것은 다른 사람의 생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다. 바로 다른 사람의 생각과 대면함으로써 자기 생각의 깊이를 더하는 일이다.
독서는 여행과 닮았다. 가령 <소크라테스의 변명>을 읽는다는 것은 소크라테스가 있는 장소로 향하는 일이기도 하다.
18세기 독일 소설가 노발리스Novalis는 대표작 《파란 꽃》에서 ‘여행이란 자신이 있던 장소로 돌아오는 행위‘라고 말했다. 여행이란 어딘가로 가기 위한 행위가 아니라 출발 지점으로 돌아오기 위해 떠나는 행위라는 말이다.
그러고 보면 독서는 확실히 자신을 알기 위한 여행이다.
아니, 자신을 만나기 위한 여행이라고 해야 할까. 다만 점점멀리 가버리면 제 힘으로 돌아올 수 없게 된다. 멀리 가면세상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는 잘 알아도, 자신이 누구였는지 알 수 없게 되니까. 그러므로 읽기를 통해 자신을 단련하는 것은 좋지만, 항상 ‘지금 여기‘로 돌아와야 한다. ‘지금 여기, 곧 자신의 인생을 파헤쳐야 한다. 이것이 독서라는여행을 떠날 때 주의해야 할 점이다.

소크라테스는 ‘그럴듯한 말‘과 ‘진실의 단면을 비추는 말‘은 다르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우리도 세상에서 말하는 ‘진짜‘와 ‘진실‘에는 어떤 차이가 있는지 생각해보아야 하지 않을까?
똑 부러지게 말한다고 해서 다 ‘진실‘은 아니리라. 오히려더듬더듬 이어나가는 말에 ‘진실‘이 담길 때도 있다.
나는 수긍이 가는 말을 ‘진실‘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언뜻 보면 평범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보면명확하게 구분 지을 수 없는 경우도 많다. 특히 소크라테스가 생각한 철학적 문제가 그렇다. 선이란 무엇인가, 정의란무엇인가, 혹은 경건이란 무엇인가. 소크라테스는 이 책에서묻고 또 묻는다.

러나 나는 나로 살면서 터득한 말로 이야기하게 된다. 그것은 어쩌면 ‘무작위로 들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 말고 방법은 없다. 그것이 소크라테스가 서 있는 위치였다. 곧 ‘무엇을 말할 것인가보다는 ‘어떻게 말할 것인가‘가 더욱 중요하다. 오히려 ‘어떻게‘가 정해지면 ‘무엇을‘은 자연히 정해진다.
보통 우리는 무엇을 말할지 생각한 다음에 어떻게 말할지생각한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다른 길을 간 것이다. ‘어떻게‘는 ‘무엇을‘보다 못하지 않다고 그는 확신했다.
현대에는 학설이나 견해 등을 말할 때 ‘무엇을‘에 중점을둔다. 그러나 그러한 것은 대부분 요약할 수 있다. 요약할 수있는 것은 누가 읽어도 같은 내용으로 읽힐 수 있음을 의미한다.
한편 ‘어떻게‘는 요약할 수 없다. 곧 그 사람의 ‘말투는 요약할 수 없다. 게다가 치환 불가능하다. 그렇듯 요약하거나대체할 수 없는 것 중에서 ‘진실‘된 것을 발견해나가는 일이 중요하다. 바로 이것이 소크라테스의 생각이다.
말이 아니라 사건을 경험하기 위해서는 그곳에 몸을 던져야만 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렇듯 『우연성, 아이러니, 연대』는 우연한 개인들의 사회를 위한 철학이다. 한마디로 말해, 우리는 우연한 존재다. 우리의 언어도 자아도 양심도공동체도 발견되어야 할 본질 같은 것은 없다. 우리는 철저히 역사적인 산물이며 스스로를 만들어가야 할 아이러니한 존재다. 독특하고 특이한 개인들의 사회에서 전통 철학이 추구해 왔던 보편적인진리는 더 이상 연대의 근거가 될 수 없다. 오늘날인간의 연대는 공통의 진리보다는 오히려 각자의세계가 파괴되지 않을 거라는 이기적인 희망을 공유하는 데 달려 있다.

분명 오늘의 교양은 더 이상 지식의 나열에만 머물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런 것이라면 지식 콘텐츠가 더 잘할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과학자 이정모는 오늘의 과학적 교양이 지식이 아니라 태도,
즉 "함부로 믿지 않고 질문하는 것 그리고 나를 포함한 모든 사람이 언제든 실수할 수 있고 틀릴 수있다고 인정하는 태도에서 시작된다고 말한다."
그는 이런 태도를 ‘과학적인‘ 태도라고 부르는데,
흥미롭게도 물리학자 김상욱 역시 이구동성으로
"과학이란 논리라기보다 경험이며, 이론이라기보다 실험이며, 확신하기보가 의심하는 것이며 과학은 지식이 아니라 태도"라고 말한다.

철학이 삶을 살아가는 방법이라면 혹은 고대철학자들이 말하듯 삶을 살아가는 삶의 양식 그 자체라면, 오늘날 철학자들이 직면해야 할 현실은 삶을 살아가는 좋은 방법이 단 한 가지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명백한 다원주의적 사실이다. 그러한 사실에 늘 강한 관심을 기울였던 철학자 니체는 1881년 가을에 쓴 유고에서 이렇게 말한다. "모든 학파들과19그들의 경험은 우리의 정당한 소유물이다. 우리가전에 에피쿠로스학파의 철학적 해결책을 통해 유익을 구했다고 해서 스토아학파의 해결책을 차용하지못하란 법은 없다." " 좋은 삶의 방식이 다양하고 무수히 많다면, 철학은 유일무이한 삶의 진리를 전달하는 것을 자신의 과제로 삼을 수 없다. 오히려 그다양하고 무수한 삶의 방식들을 포괄적으로 긍정할수 있는 매몰되지 않는 시야가 필요하다.

"우리는 무엇인가를 말하지만, 우리가 무엇을 말했고 말하지 않았는지를 되묻고, 다시 그 물음에 관해 묻다가 다른 관점을 가지고 그리로 되돌아가고, 그것을 규정짓다가 다시 규정짓지 않고 기타 등등………… 무한에 이르도록 미주에 각주를 달고 각주에 미주를 단다."(52쪽)이 점에서 월리스는 현대적 삶에서 발생하는문제는 의미 있게 사는 법을 모른다는 데 있지 않다고 말한다. 진짜 문제는 의미 있게 산다는 과제에 대해 충분히 오래도록 초점을 맞출 수 없는 데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월리스는 의미 있는 삶을영위하기 위해서는 현대적 실존에 부가되는 다양한 형태의 유혹들, 즉 정신 이탈증, 주의 산만함,
TV, 고독, 마약, 섹스, 인터넷과 맞서 싸울 뿐 아니라 그것들과 멀어져서 자신의 권태를 있는 그대로 직시하고 그 권태의 바다 속에서 묵묵히 자신의일을 해내는 영웅적인 투쟁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이처럼 개인의 자아가 선택의 부담을 많이 가지게 될수록 선택의 자유는 축복이 아니라 오히려저주가 된다. 그런 까닭에 개인주의의 시대가 부상할수록 그 이면에는 각종 심리적 문제들 또한 부상할 수밖에 없다. 이것이 오늘날 그 많고 많은 심리학서와 에세이 문학이 번성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과거에는 신과 공동체가 부담했던 것들이 모조리자율적 개인에게 떠맡겨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렇게 될 때 모든 의미 추구는 실상 그것이 순전히개인적이라는 점에서 자의성에서 벗어날 수가 없게 된다. 내가 왜 이것을 하고 있는지에 대한 어떤확실하고 절대적인 근거도 개인으로부터는 나올수 없기 때문이다.

"제가 대단한 일을 했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단지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보았을 뿐입니다."(17쪽)T
드레이퍼스와 켈리는 이 지하철 영웅의 말과행동에서 철학적 의미를 찾아낸다. 중요한 점은 오트리가 스스로를 행동의 원천으로 여기지 않았고,
어떤 자율적 의지에 따라 행위를 하려고 했던 것이아니라 상황 자체에 부응해 행동했다는 사실이다.
그 어떤 일말의 불확실함이나 주저함도 없이 말이다. 여기에서 저자들은 현대인의 허무주의적 불안함과 대조되는 확실성의 느낌을 발견한다. 웨슬리오트리는 선택의 무자비한 파도 사이에서 고민하지 않았다. 그는 그저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보았고 곧바로 행동했다.

상황이 주는 의미와 기분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이미 주어져 있는 세계와 공명하고 그로부터 행복과 의미를 재발견하는 삶의 방식이다.

저자의 주장을 한마디로 말하자면 이렇다. "우리는 환대에 의해 사회 안에 들어가며 사람이 된다.
사람이 된다는 것은 자리/장소를 갖는다는 것이다.
환대는 자리를 주는 행위이다."(26쪽) 다시 말해 우리는 사람이기 때문에 이 사회에 받아들여진 것이아니라, 오히려 이 사회에 받아들여졌기 때문에 사람이 된다는 것이 기본 생각이다. 환대 없이는 사람이 될 수도 없고 사회가 성립될 수도 없는 셈이다.

결국 모든 우정과 환대가 언제나 선이라고 말할 수 없다. 모든 사람들에게 동등하게 제공할 수없는 이상 우정과 환대는 늘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모든 곳에 아무런 성찰 없이적용될 수 있는 순수한 도덕 이념만을 부르짖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누가 포함되고 누가 배제되고 있는가를 구체적으로 살펴보면서 자신의 위치를 자각하는 데 있다. 모든 환대의 문제는 나로부터 다시 시작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절대적 환대보다 오히려 작은 연대가 우리에게 더 필요한 동시대적 환대의 감각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작은 연대의 시작은 철학자 리처드 로티가 말했듯 이미 기다리고 있는 어떤 것을 철학적 반성으로 재발견하는 일이 아니라, 낯선 사람들을 우리와 같은 사람들로 여기는 상상적 동일시를 통해우리를 재창조하는 일이다. 그 점에서 모든 환대의순간, 쉬운 환대를 넘어서는 어려운 환대의 순간은그것이 아무리 규모가 작다고 하더라도 사회가 재창조되는 순간이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른다. 사회학자 가브리엘 타르드가 말했듯 "우리가 무한소라고 말하는 이 작은 존재들이야말로 진정한 동인일 것이며, 우리가 무한히 작다고 말하는 이 작은 변화야말로 진정한 행위일 것"이다.

사이보그는 단번에 통합될 수 없는 상이한 관점들을 품고 있는 인류학자를 위한 가장 적절한 이미지다. 정확한 인류학적 재현이 항상 가능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인류학자들이 서로 이질적인 문화들을 연결하고 소통시키려는 노력을 지속하는 것이 무의미하지는 않다. 비록 그 연결과 소통이 부분적이더라도 인류학자-사이보그는 통합하지도파편화하지도 않은 채 서로 다른 두 문화들을 어떠한 방식으로든 연결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인류학자-사이보그는 여행하지 않고 이동한다. 인류학자는 귀환하기 위해 여행하는 관광객이아니라 서로 다른 관점들과 서로 다른 사회들 사이를 이동하면서 "사라지지도 않으며 자기 속에 융합되지도 않을 구체적이고 특정한 타자들과" 구체적관계를 맺는 사람이다.(스트래선, 112쪽) 이 구체적관계 속에서 인류학자는 익숙한 자리로 되돌아오는 귀환의 경험을 성취하지 못할 수 있다. 그러나적어도 연결과 확장의 경험은 남는다.
인류학자의 연구 작업은 타자를 재현하는 것도 타자를 환기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무엇보다타자와 연결되는 것, 반쯤은 이해할 수 있지만 여전히 반쯤은 이해할 수 없는 타자들과 마주해 그들과 부분적으로 연결되기를 선택하는 것이다. 타자와의 어색한 관계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그어색한 관계를 통해 우리자신을 낯설게 만드는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때로는 이런 어색한관계가 주는 교훈이 우리를 성장시키고 우리의 사고를 도약시키며 우리의 경험을 확장하게 만들 것이다. 이때의 우리는 이미 하나도 둘도 아닌 기묘한 관계 속에 들어가 있기 때문이다.
이렇듯 스트래선은 해러웨이의 사이보그를인상적으로 차용해서 인류학적 글쓰기를 바라보는 전혀 다른 시각을 내놓는다. 해러웨이의 「사이보그 선언」에서 스트래선의 『부분적인 연결들』로이어지는 이동과 확장의 궤적은 서로 어색한 관점들, 서로 어색한 학문들 사이에서도 어떻게 창조적인 관계가 가능할 수 있는지에 대해 우리에게 여러 힌트를 던진다. 분명항 것은 타자에 대한 완전하고 객관적인 재현이 불가능하다고 하더라도 서로에게 배울 점이 없는 것은 아니며, 우리끼리 소통하고 연결될 수 있는 가능성이 사라진 것도 아니라는 점이다.

우리가 비인간 존재들과 기호적 성향을 공유한다거나 숲이 생각한다는 이야기는 대체 어떤 함의가 있을까? 인간적인 것을 넘어선 인류학은 우리에게 어떤 교훈을줄까? 우리는 재규어나 양털원숭이의 생각을 정말로 알 수 있는 것일까?
회의적인 관점에서 바라보면 우리는 그들의생각을 결코 알지 못할 거라고 말할 수도 있다. 철학자 토머스 네이글은 "박쥐가 된다는 것은 어떤것일까?"를 물으면서 우리와 박쥐는 너무나 다르기 때문에 결코 그 내밀한 경험을 완전히 이해할수 없다고 단언한다. 아마도 그럴 것이다. 우리가그들의 생각과 느낌을 확실히 알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확고한 앞에서 출발하지 못하고 또 그러한 삶에 도달하지 못한다고 해도 우리는 ‘알지 못한 채 알아가기‘라는 실용적인 방법을 통해서 서로를 서서히 알아갈 수 있다. 우리와 그들 사이에는 절대적 타자성, 환원불가능한 차이, 통약 불가능성 같은 뛰어넘을 수 없는 존재론적 차이가 있는것이 아니다. 우리 모두가 기호를 공유하는 존재라는 공통점이 밑바탕에 자리하고 있다.
콘은 간단한 예시를 통해 이 점을 입증한다.
루나족은 옥수수밭에 출몰하는 흰눈잉꼬를 겁주기위해 매년 허수아비를 만든다. 그런데 루나족이 만드는 허수아비는 인간의 관점에서 맹금류를 사실에 가깝게 표상하려는 시도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잉꼬의 관점에서 맹금류가 어떻게 보이는지를나름대로 추측하고, 잉꼬가 보기에 맹금류와 닮아보일 법한 허수아비를 만들려는 시도다. 그래서 루나족의 허수아비는 우리 눈에는 어딘가 기묘해 보인다. 하지만 실제로 이 기묘한 모양의 허수아비는 곧잘 잉꼬를 멀리 쫓아내고 있으며, 그래서 아빌라 마을에서는 매년 이 허수아비를 만들고 있다.
이렇듯 루나족은 잉꼬가 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허수아비라는 기호를 통해서 ‘알지 못한 채‘ 알아간다. 잉꼬가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대한 자신들의 추측이 잉꼬에 미칠 수 있는 기호적 효과를 통해서 잉꼬가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알게 되는 셈이다.(156~158쪽)

이때 앎이란 고립된 자아가 나와 전혀 다른 외부 세계를 단번에 인식하는 식의 관조적 경험이 아니다. 인간 특유의 사고와 숲의 사고는 기호작용의산물이라는 점에서 서로 연속적으로 이어져 있으며, 우리는 기호적 상호작용을 통한 시행착오의 과정 속에서 서로를 서서히 알아간다.

『숲은 생각한다』에서도 성장은 중요한 인류학적의미를 지닌다. 콘에 따르면 "세계의 습관과 우리의 예측이 충돌할 때에만 비로소 세계의 다른 모습이, 현재 우리의 생각과는 다른 세계의 실존적 현실성이 드러난다. 이 붕괴 다음에 이어지는 시련이성장이다."(116쪽) 살아 있다는 것과 안다는 것은어떤 정태적이고 고정적인 상태가 아니다. 하나의습관이 붕괴되고, 낯선 사건을 포괄할 수 있는 새로운 습관을 배우는 과정속에서 우리는 산다는 것과 안다는 것 혹은 산다는 것과 일한다는 것이 별개의 과정이 아님을 깨닫게 된다.
실제로 『숲은 생각한다』는 내게 책을 만드는일과 그를 통한 삶과 앎의 과정이 "아무리 순간적이라 해도 우리를 둘러싼 세계와 함께하도록 우리자신을 새롭게 만들어가는 것"(116쪽)임을 깨닫게해 주었다. 책의 번역 과정, 편집 과정, 출간 후 독서 모임의 과정들까지 내가 참여했기에, 그리고 그속에서 매번 새로운 시련과 만나며 성장을 거듭했기에 얻을 수 있었던 깨달음이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우리란 무엇인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