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므로 비트겐슈타인의 말처럼, 우리의 ‘사적인 것’은 결코 언어화될 수 없다. 만약 언어화되었다면 그것은 이미 사적인, 자신만의 것‘이 아니게 된다. 이것이 ‘모두의 것이기도하고 누구의 것도 아닌‘ 말의 가장 큰 특징이라고 할 수 있으리라. 이것의 옳고 그름은 별개로 하고 말이다.

그런 말을 들으면 인간 중에도 타인의 감정에 유독 둔감한 사람이 있다. 타인에게 공감할 수 없는 사이코패스라고불리는 사람들이다. 그저 타인과 공감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그것은 터무니없는 착각인 경우가 자주 있을 것이다. 타인의 감정을 이해한다 하더라도 결국은 자신의 감

정을 그대로 연장하는 것일 뿐(그저 착각)인 일은 자주 일어난다. 마음을 쓴다고 할 때의 ‘마음‘은 자신의 마음에 지나지 않는 것이고, 어떤 방법을 쓰더라도 인간의 구조상 타인의 감정을 내면에서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생각해가다 보면 인간도 로봇도 그다지 다르지 않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결국 ‘타인(로봇을 포함한)은 이해할수 없다.
그런 상태에 있는 우리는 타인(혹은 로봇)과 교류할 때 어떻게 하면 될까. 무언가 지침 같은 것이 있다면 좋겠는데. 절대로 타인(혹은 로봇)의 감정은 알 수 없으므로 그 헤아릴수 없는 영역(타인이나 로봇의 마음)은 일단 놔두고, 하루하루 생활에서 타인(혹은 로봇)과 어떻게 관계 맺으면 되는지는 그다음 문제다. 그 지침 같은 것이야말로 비트겐슈타인의 다음 말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누구나 자신에 대해 "고통‘이란 무엇인지, 오로지 자신에 관해서만안다"고 나는 말한다! 누구나 상자를 하나 가지고 있다고 생각해보자. 그 안에는 우리가 ‘딱정벌레‘라고 부르는 것이 들어 있다. 가정해보자. 누구도 다른 사람의 상자 속을 들여다볼 수는 없다. 그리고 누구나 ‘자신의 딱정벌레를 본 것뿐이면서 딱정벌레가 무엇인지안다‘고 말한다.

우리는 우리만의 세계("단칸방)안에 있고, 타인은 그 안에 있는 등장인물에 불과하다는 것을 앞에서도 이야기했다. ‘나‘와 ‘타인‘은 그 모습이 완전히다른 법이다. 물론 ‘타인‘도 나와 비슷한 모습인 듯 보인다.
그러나 그것을 확인할 방법은 아쉽게도 없다. ‘타인‘은 ‘나’라는 유일무이한 세계의 등장인물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이 ‘나‘라는 것은 그런 모습을 취하는 만큼, 무척성가시게도 자기 자신의 모습을 확인할 수가 없다. 하나의무대이자 하나의 세계의 얼개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나는 신기하게도 언제나 앞면만을 향한다. 그렇게 세계라는 무대를꾸미느라 아침부터 밤까지 분주하기 때문이다. 영화관의 스

크린에 영화 자체를 쏘는 영사기가 스크린 뒷면을 보는 것(뒷면에 빛을 쏘는 것)이 불가능하듯, 언제까지고 앞면만을향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전면의 무대에 아무리 봐도 나와 비슷한 존재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 무대에는 다양한 존재가 있고, 다양한 움직임을 보이는데, 그중에 나에게 말을 거는 존재자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것이 인간이다. 우리는세계라는 무대를 항상 만들어나간다. 그 무대에서 삼라만상이 전개되는데, 그중에 자꾸만 나를 빤히 쳐다보며 말을거는 존재, 곧 다른 인간이 있는 것이다. 고맙게도.
그리고 나도 점점 그 존재들이 사용하는 음성을 자연스럽게 (혹은 싫든 좋든) 습득하고, 그 존재들과 마찬가지 소리를 내고, 그 존재자들과 공동으로 생활한다(억지로 그렇게되어버린다고 말하는 편이 좋을지도 모르겠다). 그런 존재들이있음으로써 어떤 의미에서 나는 자기 자신의 모습을 비로소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무척 이상한 모습을하고 있다고 할 수 있으리라 나와 타인은 전혀 차원이 다른격리된 모습을 하고 있다(자타의 비대칭). 그런데 동시에 나자체의 모습을 가르쳐주는 것도 그 격리된 타인인 것이다.

자기 세계의 등장인물이 이쪽(나세계)의 가장 밑바탕을 이루는 정보를 제공해준다. 무척 복잡하고 이상한 관계다.
타인이 없다면 자신의 모습을 확인할 수 없다. 이것은 말하고 보면 ‘자타의 상호보완성‘(자신과 타인이 서로 보충하여완전한 것)을 이루어 존재하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는 모습이다. 물론 타인이라는 존재는 나에게는 발붙일 곳조차 없는 심연이므로, 타인이 어떤 구조를 이루고 무엇을 생각하고 어떤 느낌인지 전혀 알 수가 없다. 그러므로 ‘상호‘라는말을 붙이는 것은 조금 내키지 않지만 아마도 그런 상호적인 모습을 할 것이라고 예상하여(타인 대부분과 지금까지 나눈 대화 등을 참고하여 예상했다), 자타의 상호보완성이라고말해주고 싶은 것이다. 물론 확신을 가지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게 되면 요컨대 우리는 ‘자타의 비대칭성‘이라는 근원적인 모습을 하고 있고(이는 나 안에서 확인 가능하다) 동시에그것과는 완전히 모순되는 모습, 이른바 ‘자타의 상호보안성‘이라는 모습도 가지고 있다는 말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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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는 것은 바뀌는 것이며, 성장하는 것이기도 하다. 배움 없는 성장은 없으며 성장 없는 배움은 없다.
성장한다면 미지의 것을 만남으로써 자신의 세계가 확장되어 풍요로워진다. 그것이 즉 즐거움이다. 인간은 ‘배우는기쁨을 맛보기 위해 태어난다‘고 말해도 좋으리라.

우리는 무엇을 위해 배우는 것일까? 경제적으로 풍요로워지기 위해서만은 아니다. 무엇보다 풍요로운 성장을 위해서다. 배움에는 성장의 기쁨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배움의 길을 발견할 수 있다면 붓다처럼 유쾌한 삶의 방식에 가까워질 수 있다.

지금까지 좌선에 관해 말로 설명했는데 ‘행‘이라는 것은실은 ‘말로 하려 해도 할 수 없는 것‘이다. 말로 이해할 수있는 것이라면 굳이 몸과 마음을 걸고 수행할 필요가 없다.
말로는 표현할 수가 없고 논리로는 생각할 수 없는 것을, 수행을 통해 실제로 체득하자는 것이 선의 메시지다.
냉난자지선어가 있다. 물이 차가운지 뜨거운라는지는 직접 마셔 보고 스스로 아는 방법 말고는 없다는 뜻이다. 이것이 바로 선에서 배우는 방식이다.
예전에 어떤 초등학교 선생님이 이런 이야기를 했다. 소풍을 갔는데, 선생님이 길가에 핀 꽃을 가리키면서 "이건 00초예요. 알고 있나요?"라고 묻자 "네, 도감에서 봐서 알고 있어요"라고 대답하는 아이가 많았다고 한다. 그렇지만 가까이 다가가서 보거나 손으로 만지거나 냄새를 맡으려고는 하지 않았다. 그 꽃을 도감에서 본 것만으로 이미 알았다고생각하는 것이다. 지금은 앎이 그만큼 머릿속 이해에 치우쳐 있는 듯하다.

이 앎이라는 것에 관해 철학자인 니시타니 게이지,
1900~1990)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과학적인 앎은 그것을 얻은 과학자 자신에게도 어떠한 영향을 미치겠지만, 그렇다고 자기를 아는 것이 되지는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자지라는 방향에서는 오히려 과학자가 일반인보다도 더 어두운 경우도 드물지 않다. 그가 자신의 과학적인 삶에 속아서 더욱 자지에 어두운 일도 일어난다. 그것은 모두 과학적인 앎이 전심신적인 앎을 필요로 하지 않는 앎, 신체적인 행위로부터 따로 떨어진 앎이기 때문이다.
니시타니 게이지 종교와 비종교 사이이 지적에 따르면 ‘도감에서 봐서 아는‘ 삶은 그야말로 ‘신체적인 행위에서 따로 떨어진 앎‘이다.
좌선은 이러한 방식으로는 절대 알 수 없다. 좌선을 알기위해서는 머릿속 이해뿐 아니라 몸과 하나가 된 수행적인삶의 방식(지행합일)을 배워야 한다. 그리고 그것은 ‘이미 충분히 알았으므로 이제 됐다‘는 완성이나 졸업이 있는 것이 아니다.

선은 자기(自己, 진실한 자기를 밝히는 일)의 길이라고 하는데 그 자기가 시시각각 신선하게 생성되는 이상 즐거운 탐구가 끝없이 이어질 뿐이다. 이것이 바로 수행에는끝이 없다고 하는 이유다.

불교를 배운다는 것은 자기를 배운다는 것이다.
도겐 『정법안장』
거듭 말하지만, 우리는 연기에 의해 존재한다. 그러한 세계에서 우리는 항상 지금의 상황을 만들어내면서 동시에 상황에 휘말려 계속 새로이 생성되고 있다. 자기란 상황에서 따로 떨어져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상황까지 전부 합친 것으로 존재한다. 그러한 생생한 자기를 전심신적으로 그리고 직접적으로 배우는 것이 좌선의 안목이며 불도 수행인 것이다.
붓다는 그러한 자기의 배움을 평생 이어온 단단한 신념을지닌 학생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누구보다 즐긴 사람이다. 우리가 붓다에게서 배울 점은 유쾌하게 계속 배우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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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자, 차이를 횡단하는 즐거운 모험 리라이팅 클래식 4
강신주 지음 / 그린비 / 2007년 8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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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고 보는 작가 책이기에 바로 빌려 읽었다.
장자를 새롭게 바라볼 수 있는 관점을 제공하는 책!

타자와의 관계는 공동체와의 전원적이고 조화로운 관계가 아니며,
우리가 타자의 입장에서 봄으로써 우리 자신이 그와 유사하다고인식하도록 만드는 공감도 전혀 아니다. 타자와의 관계는 우리에대해 외재적인 것이다. 타자와의 관계는 하나의 신비와의 관계이다. 그것이 바로 그의 외재성이며 혹은 그의 타자성이다. 레비나스, 『시간과 타자-

『방드르디』에서 투르니에는 타자와의 마주침과 소통이 우리에게긍정적인 삶의 전망을 준다는 점을 이야기하고 있다. 처음 무인도에표류했을 때, 그리고 방드르디에 의해 조롱받았을 때, 로빈슨은 탄식했고 또한 분노했다. 그러나 이것은 결국 로빈슨을 지배하고 있던 국가주의와 종교주의의 관념 자체가 드러낸 탄식과 분노가 아니었을까? 투르니에와 마찬가지로 장자는 "마음으로 하여금 타자를 자신의수레로 삼아 그것과 노닐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타자와마주치지 않는다면, 우리는 자신이 맹목적으로 따르던 삶의 규칙에

대해 전혀 반성할 수 없을 것이다. 타자와 소통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새로운 삶의 양식을 상상하고 만들어낼 수도 없을 것이다. 기존의삶의 규칙이 지닌 문제들은 오직 새로운 삶의 규칙을 통해서만 대상화되고 해소될 수 있는 법이다. 그러나 이 과정은 또한 얼마나 많은시간과 인내를 요구하겠는가? 로빈슨이 자신의 삶을 긍정할 때까지자그마치 28년이란 긴 시간이 필요했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결코 (무로부터 출발한다는 의미에서) 시작하지 않는다. 우리는 결코 백지(tabula rasa)를 가지고 있지 않다. 우리는 중간(milieu)으로 미끄러져서 들어간다. 우리는 리듬들을 취하거나 아니면 리듬들을 부여하기도 한다. ………… 스피노자가 다음과 같은 진

정한 외침을 던졌던 것도 바로 이런 이유에서이다. "당신들은 좋은의미에서건 나쁜 의미에서건 자신들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알지 못한다. 당신들은 신체 혹은 영혼이 이러저러한 마주침(rencontre), 배치(agencement), 결합(combinaison) 속에서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미리 알지 못한다." -들뢰즈, 스피노자의 철학』장자가 말했던 노나라 임금 역시 바닷새를 완전한 백지상태로마주한 것이 아니었다. 그에게는 이미 인간사회의 규칙이 내면어 있었기 때문이다. 들뢰즈의 표현을 사용한다면, 노나라 임금에게도 이미 구성된 "배치와 결합이 존재했다. 우리들은 누구나 예외 없이 이미 구성된 "배치 그리고 결합으로부터 출발하지 않을 수 없다.
들뢰즈와 마찬가지로 장자에게서도 인간은 "중간으로 미끄러져 들어가는‘ 존재로 설명될 수 있다. 그런데 아비투스라고도 불릴 수 있는기존의 "배치와 결합은 그 자체로는 아무런 문제도 불러일으키지 않는다. 이것이 문제로 부상되는 것은 자신이 전제한 아비투스와는 완전히 이질적인, 새로운 "배치와 결합"을 가진 타자와 마주치는 순간이다.
장자의 성심은 들뢰즈에 따르면 특정한 ‘배치와 결합‘ 이라고도규정될 수 있다. 물론 이 대목에서도 특정한 배치와 결합을 낳는 우발적인 "마침" (rencontre)이 역시 중요하다. 이를 통해 우리는 자신 내부에서 무의식적으로 작동하고 있던 성심이라는 아비투스를 자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타자와 마주친 그 순간, 우리는 자신

이 앞으로 어떤 배치와 결합을 생성하게 될지 미리 예측할 수 없다.
스피노자가 우리는 "좋은 의미에서건 나쁜 의미에서건 자신들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알지 못한다"고 했던 것도 바로 이런 이유에서이다. 단지 예기치 못한 마주침이라는 사건을 통해서 새로운 배치와 결합을 구성하게 될 때에만, 우리는 사후적으로 자신의 역량을 회고할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특히 중요한 것은 ‘배치‘를 의미하는 ‘아장스망" (agencement)이란 개념이다. 이 개념은 장자의 성심이 타자와 소통하는 과정에서 얻어지는 일종의 흔적 혹은 주름이라는 것을 명확히 보여 주기 때문이다. 따라서 장자가 말하는 성심의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아장스망‘ 개념을 좀더 살펴볼 필요가 있다.
아장스망은 무엇인가? 그것은 다양한 이질적인 항들로 구성되어있으며, 나이의 차이, 성별의 차이, 신분의 차이, 즉 차이 나는 본성들을 가로질러서 그것들 사이에 연결이나 관계를 구성하는 다중체(multiplicité)이다. 따라서 아장스망은 함께 작동하는 단위이다.
그것은 공생이며 공감이다. ‘인간‘ - ‘동물‘ - ‘제작된 도구 유형의 아장스망, 즉 인간-말-등자(子)를 생각해 보자. 기술자들은 등자가 기사(騎士)들에게 옆 방향으로 안정성을 제공해 줌으로써 새로운 군대 조직, 즉 기병을 가능하게 했다고 설명한다.
이 경우 인간과 동물은 새로운 관계에 들어간 것이고, 전자나 후자모두 변화하게 된 것이다.-들뢰즈, 『대학』

수영의 비법에 궁금증을 가진 공자에게 수영의 달인은 다음과같이 겸손하게 이야기한다. "물이 소용돌이쳐서 빨아들이면 저도 같이 들어가고, 물이 나를 물속에서 밀어내면 저도 같이 그 물길을 따라 나옵니다. 물의 도를 따라서 그것을 사사롭게 여기지 않습니다.
결국 땅에서 얻어진 성심을 스승으로 삼지 않고, 지금 직면한 물의흐름에 몸을 맡기라는 이야기이다. 땅과는 전혀 이질적인 물의 흐름에 저항하지 않고 그 흐름에 순응해야만 한다는 말일 것이다. 그러다보면 어느 순간 의식하지 못한 사이 땅보다는 물이 편안해지는 느낌을 얻게 될 것이라고 말이다. 들뢰즈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것은 새로운 ‘배치와 결합‘을 완성했다는 것이며, 장자의 표현을 빌리자면 새로운 ‘성심‘을 구성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제 우리는 장자에게서 성심이란 개념이 가지고 있는 위상을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아비투스와 마찬가지로 성심은 우리가 특정한 공동체 속에서 살 수밖에 없는 불가피한 사실로부터 유래하는 것이다. 문제는 타자를 만났을 때, 다시 말해 이질적인 공동체와 조우했을 때 발생한다. 우리는 기존의 성심을 절대적 기준으로 삼아 타자와 관계할 수도 있고, 아니면 새로운 성심을 구성하려는 모험을 감행할 수도 있다. 물론 후자를 선택한다고 해서, 이 모험이 항상 성공하리라는 보장은 전혀 없다. 모험의 성공에는 나의 역량만이 아니라,
내가 마주친 타자의 역량도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하기 때문이다. 아마 수영의 달인도 숱하게 죽음의 고비를 넘겼을 것이다. 이 점에서그가 새롭게 만든 주름 혹은 그의 성심은 일종의 비약이나 축복 속에서만 가능했던 것이었다고 회고할 수 있다. 수영의 달인이 결국 "내가 어떻게 그럴 수 있었는지 모르지만 그렇게 되었다"고 고백했던 것도 다름아닌 이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불행히도 지금까지 장자를 연구했던 많은 연구자들은 심재 이야기‘ 의 전반부, 즉 망각이란 테마에만 관심을 집중시켰다. 그러나이런 시선 속에서라면 심재는 우리의 모든 삶을 행복하게 만들어 주는 만병통치약인 것처럼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장자는 우리의 삶이 유한하다는 것, 그리고 타자와 마주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누구보다도 분명하게 통찰했던 사람이다. 그런 그에게 있어 심재란잘 말해야 유아론적 형이상학, 즉 꿈으로부터 깨어난 상태에 지나지않는 것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심재라고 불리는 망각의 수양론이 중요하지 않았다는 말은 결코 아니다. 심재라는 수양 과정을 성공적으로 완수한다면, 우리는 타자의 소리를 민감하게 들을 준비를 갖춘 셈이기 때문이다.

결국 장자는 우리에게 타자를 읽으려는 섬세한 마음을 가지고타자에 몸을 맡기는 방법 이외에 별다른 방법이 없다고 이야기한다.
장자의 방법이 ‘목숨을 건 비약 (salto mortale)일 수밖에 없는 이유가 바로 이런 데 있다. 사실 그가 제안한 방법은 방법 아닌 방법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이렇게 하면 되겠지‘ 라고 섣부르게 생각했던 모든 방법들을 부단히 제거해야만 하고, 어떤 매개도 없이 그냥 타자에게로 비약해 가는 위험을 감수해야만 한다. 그래서 장자는 공자의 입을 빌려 자신의 최종적인 조언을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날개가 없이 날아라!" 타자와의 연결을 보장하는 미리 설정된 어떤 매개도 우리에게는 존재하지 않는다. 사실 타자와 연결될 수있는 매개가 미리 존재한다면, 그 타자는 사실 진정한 의미의 타자일수 없는 법이다. 이미 그는 나와 동일한 공동체의 규칙을 공유하고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알튀세르의 지적처럼 마주치지 않고 평행으로 진행하는 개체들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다. 비록 이 개체들에게 코나투스, 즉 삶의 힘이 내재되어 있다고 할지라도 말이다. 일단 개체들은 마주쳐야만 한다. 스피노자에 따르면 이런 개체들 사이에 이루어지는 우발적인 마주침에는 이론상 두 가지 종류가 있을 수 있다. 하나는 우리의코나투스가 억제되는 마주침이고, 다른 하나는 반대로 우리의 코나투스가 증진되는 마주침이다. 스피노자에 따르면 우리는 전자에서
‘슬픔‘을, 그리고 후자에서 기쁨을 느끼게 된다. 결국 장자와 마찬가지로 스피노자에게도 기쁨이란 마주침으로부터 유래하는 삶의 고양에서 발생하는 것이었다.
우리는 스피노자라는 다리를 거쳐 장자가 모색했던 소통의 철학, 즉 그가 꿈꾸었던 삶과 연대의 모습을 이해할 수 있었다. 스피노자와 마찬가지로 장자 역시 기쁨의 윤리학을 지향했던 삶의 철학자였다. 기쁨의 윤리학이 가능하기 위해서, 다른 무엇보다도 자유로운개체들의 마주침과 연대가 필수적이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에게 남은 일은 장자가 권고한 즐거운 연대의 기능성을 실천하는 일일 것이다. 그러나 이 과정은 얼마나 멀고도 힘든 길일까? 자신을 포기할 정도로 치열해야만 하는 망각의 수양론, 날개 없이 비약하는 새처럼 타자로 뛰어들어야만 하는 용기와 결단, 그리고 나의 손을 잡아 줄 타자를 마냥 기다려야 하는 초조함. 이 모든 시련을 지혜와 용기를 가지고 통과할 때, 우리에게는 어느 순간 장자가 이야기한 봄이 분명 도래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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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보통의 행복이라 했지만, 행복을 찾기가 이토록 힘들줄이야.
보통만큼 사는 게 가장 힘든 일이라는 걸 최근에 깨달아서 그런가.
그 중 인상 깊었던 방법을 꼽자면,
행복한 사람은 좋아하는 것이 많다.(그것도 디테일하게)
그냥 음악 듣기를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한적한 버스나 기차에서 노래들으며 책읽기
행복한 사람은타인의 삶에 무관심 하지 않으며 누구보다 이타적이며 공동체적이다. 다만 그 경계를 지킨다.
삶의 태도가 180도 바뀐 사람은 어쩌면 결정적 사건이 있었을지도 모르겠지만 ‘어떤 사람과 어떤 장소’의 조합을 경험하면서 새로운 습관이 생겨났을 가능성이 크다고 한다.
자원봉사를 하는사람들에게 봉사의 계기를 물으면 가장 흔한 대답은 권유를 받았다이다.누군가가 함께하자고 제안했기 때문이지 인류애가 갑자기 생겨났기 때문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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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지고 싶은 기분 - 요조 산문
요조 (Yozoh) 지음 / 마음산책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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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고 요조의 음악을 들었다.
조금 난해하여 읽다만 책에 나오는 [타인의 자유]를 다시 폈다.
얼마전 내 고향의 서점에 다녀갔다는 기사를 읽었다.
작가의 일기를 읽으며, 이런 언니랑 친해지면 참 좋은 영향을 받을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마음의 결이 고운 사람이 쓴 글을 읽으니 나도 고와지고 싶다.
어쩌면 나도 이정도의 글을 쓸 수 있지 않을까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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