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지금까지 미래만을 염두에 두고 살아왔다. 그래서 현재는 늘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버리고 말았다.
그는 의미없는 삶의 무수한 사실들로 복잡하고 아름다운 무늬를 짜고 싶었다.
필립은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손을 꼭 쥐었다. 햇빛이 빛나고 있었다.
다감한 필립이 꼭 행복을 찾았으면 했다. 크론쇼가 준 양탄자에서 스스로 답을 얻고, 삶의 무늬를 직조하는 필립을 응원한다. 그리고 나를 응원한다.
아는 것을 실천하는 것의 중함.
아는 것이 아니라 실천하는 것이 곧 그의 인생이라는 말과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는 말을 다시 되새기게 된다.

도대체 살아서 뭐 한다는 말인가? 필립은 절망적인 기분으로 자문해 보았다. 산다는 게 온통 허망하게 여겨졌다. 크론쇼도마찬가지였다. 그가 세상에 태어나 살았다는 것에 어떤 의미가있겠는가. 그는 죽어 잊혀지고 말았다. 팔리다 만 그의 시집이헌책방에 놓여 있을 뿐. 주제넘은 저널리스트로 하여금 한 편의서평을 쓰게 만든 것뿐, 그의 삶은 어떤 것에도 이바지한 게 없어보였다. 필립은 속으로 소리질렀다. 「도대체 살아서 뭐 한단 말인가?」노력과 결과는 전혀 맞아들지 않았다. 젊은 시절 빛나던 회망을 가졌던 대가는 쓰라린 환멸뿐이었다. 고통과 병과 불행의비중이 너무 무겁다. 이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그는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았다. 인생을 시작할 무렵의 그 드높았던 회망, 그의 육체에서 비롯했던 어쩔 수 없었던 한계, 친구다운친구가 없어 느꼈던 외로움, 청년기 내내 견뎌내야 했던 애정의 결핍 등을 생각해 보았다. 그는 늘 최선이라고 생각되는 일만 해왔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왜 이런 비참한 실패를 맛보아야 한단 말인가, 어떤 사람들은 자기보다 못한 조건으로도 성공을 거두고, 또 어떤 사람들은 훨씬 유리한 조건을 가지고도 실패한다. 만사가 순전히 우연이란 말인가. 비(雨)는 착한 사람에
게나 악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내린다. 5) 그런데 인생에서는 어느 것에도 이유나 까닭이 없다. 크론쇼를 생각하며 필립은 그가 주었던 페르시아 융단을 떠올렸다. 인생의 의미가 무엇이냐고 묻자, 그것이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줄 것이라고 했었다. 갑자기 그 해답이 떠올랐다. 그는픽 웃었다. 답을 알고 나니 수수께끼 문제를 받았을 때와 같은기분이 들었다. 답을 알아맞추기 위해 골머리를 앓다가 답을 듣고 나면 왜 그것을 생각하지 못했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법이다. 해답은 분명했다. 인생에는 아무런 뜻이 없다. 우주를 돌고있는 별의 한 위성 지구 위에서, 이 유성의 역사의 한 부분을이루는 조건에 영향을 받아 생물이 발생했다. 지구상에서 생명체가 탄생했듯이 그것은 다른 조건 아래에서는 끝장을 볼지도모른다. 다른 생명체보다 하등 중요하다고 할 수 없는 인간, 그인간도 창조의 절정에서 생겨난 것이 아니라 환경에 대한 물리적 반응으로 생겨난 것에 지나지 않는다. 필립은 동방의 어떤임금 얘기가 생각났다. 인간의 역사를 알고 싶었던 이 임금은한 현자를 시켜 오백 권의 책을 가져오게 했다. 나라 일로 바빴던 왕은 책들을 간단히 요약해 오라고 했다. 이십 년 뒤, 현자가 돌아와 오십 권으로 줄인 역사책을 내어놓았다. 하지만 임금은 이제 너무 늙어 그 수많은 묵직한 책을 도저히 읽을 수 없어그것을 다시 줄여오도록 명령했다. 또 이십 년이 흘렀다. 늙어백발이 된 현자가 임금이 원한 지식을 한 권의 책으로 줄여가•지고 왔다. 하지만 임금은 병상에 누워 죽어가고 있었다. 한 권의 책마저 읽을 수가 없었다. 그러자 현자는 임금에게 사람의
역사를 단 한 줄로 줄여 말해 주었다. 그것은 이러했다. 사람은태어나서, 고생하다. 죽는다. 인생에는 아무런 뜻이 없었다. 사람의 삶에 무슨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람이 태어난다나 태어나지 않는다거나, 산다거나 죽는다거나 하는 것은 조금도 중요한 일이 아니다. 삶도 무의미하고 죽음도 무의미하다. 필립은 벅찬 기쁨을 느꼈다. 소년 시절, 신(神)을 믿어야 한다는 무거운 신앙의 짐을 벗어버렸을 때 느꼈던 것과 같은 기쁨이었다. 이제 책임이라는 마지막 짐까지도 벗어버린 듯한 기분이였다. 처음으로 완전한 자유를 누리게 되는 셈이었다. 자기 존재의 무의미함이 오히려 힘을 느끼게 해주었다. 이제까지 자기를 박해한다고만 생각했던 잔혹한 운명과 갑자기 대등해진 느낌이 들었다. 인생이 무의미하다면, 세상도 잔혹하다고 할 수없기 때문이다. 그가 무엇을 하고 안하고는 이제 중요하지 않았다. 실패라는 것도 중요하지 않고 성공 역시 의미가 없다. 그는우주의 역사에서 아주 짧은 순간, 지구의 표면을 점유하고 있는 바글대는 인간 집단 가운데 아주 하찮은 생물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동시에 혼돈 속에서 허무의 비밀을 찾아냈으니 그는전능자라 할 만했다. 필립의 벅찬 상상 속에는 온갖 생각들이얽히고설키며 잇따라 떠올랐다. 그는 뿌듯한 만족감을 느끼며길게 심호흡을 했다. 펄쩍펄쩍 뛰며 노래라도 부르고 싶었다. 지난 몇 달 동안 이렇게 행복했던 적은 한번도 없었다. 「아, 삶이여!」 그는 마음속으로 외쳤다. 「아, 삶이여, 그대의 독침은 어디 있는가?
삶에 아무런 뜻이 없음을 마치 수학 공리의 증명처럼 힘있게입증해 준 상상의 분출과 함께 또 하나의 사상이 용솟음쳤다. 크론쇼가 페르시아 양탄자를 선물했던 것은 바로 그것을 말해주려 했던 듯하다. 직조공이 양탄자의 정교한 무늬를 짜면서 자신의 심미감을 충족시키려는 목적 외에 다른 목적을 갖지 않았듯이, 사람도 그렇게 살 수 있을 것이다. 또 사람의 행동이 사람의 선택을 넘어서는 곳에 있다고 믿어야 한다면, 우리는 우리의 삶도 그렇게 볼 수 있을 것이다. 그 삶도 나름의 무늬를짜고 있다고. 어떤 행위는 쓸모가 없는 만큼 꼭 해야 할 필요가없다. 자신의 즐거움을 위해서 하는 것뿐이다. 살아가면서 겪는온갖 일들과 행위와 느낌과 생각들로써 그는 하나의 무늬를 다시 말해, 정연하거나 정교한, 복잡하거나 아름다운 무늬를 짤수 있다. 선택의 능력이 있다는 것은 환상에 지나지 않을지 몰라도 또한 현상과 달빛을 함께 얽어 짤 수 있는 환상의 속임수에 지나지 않을지라도,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그에게 그렇게여겨지면 그런 것이다. 아무런 의미도 없고,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다는 생각을 배경으로 하여, 삶의 거대한 날실에 (알지 못할 샘에서 흘러나와 알지 못할 바다로 끊임없이 흘러가는 강물과도 같은), 사람은 다양한 실가닥을 선택하여 무늬를 짬으로써•자기만의 만족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가장 뚜렷하고, 가장 완벽하고, 가장 아름다운 무늬가 하나 있다. 태어나, 성장하여 결혼하고, 자식을 생산하고, 먹고 살기 위해 일하다 죽는다는 무늬가 그것이다. 하지만 복잡하고 훌륭한 다른 무늬들도있다. 행복이 없는 무늬, 성공을 추구하지 않는 무늬가 그것이다. 그것들에서도 한결 착잡한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다. 어떤 삶들은 -헤이워드의 삶도 그중 하나이지만. -우연이라
그래서 그것도 중요하지 않다는 위안이 편하다. 크론쇼와 같은는 눈먼 무관심에 의해 디자인이 완성되기도 전에 끊겨버린다. 삶은 이해하기 어려운 무늬다. 그러한 삶도 그 나름대로 정당하다는 것을 이해하려면 관점이 바뀌고 옛 기준은 바뀌어야 한다. 필립은 행복을 얻고 싶은 욕망을 버림으로써 그의 마지막 미망()을 떨쳐버릴 수 있다고 생각했다. 행복이라는 척도로 삶. 을 잰다면 이제까지 그의 삶은 끔찍했다. 하지만 이제 다른 척도로도 잴 수 있음을 알고 나니 절로 기운이 솟는 듯했다. 고통도 문제가 아니듯 행복도 문제가 아니었다. 살면서 만나는 행복이나 고통은 모두 삶의 다른 세부적인 사건들과 함께 디자인을정교하게 만들어줄 뿐이다. 한순간 그는 삶의 우연사들을 넘어서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것들은 전처럼 그에게 영향을미치지 못할 것만 같았다. 그에게 일어나는 일은 무슨 일이든이제는 삶의 무늬를 더 정교화하는 데 보탬이 되는 동기가 될뿐이다. 종말이 다가오면 그는 무늬의 완성을 기뻐할 것이다. 그것은 하나의 예술품이리라. 그 예술품의 존재를 알고 있는 사람이 자기뿐이라 한들, 자신의 죽음과 함께 그것이 사라져버린다 한들 그 아름다움이 결코 덜하지는 않을 것이다. 필립은 행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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