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튼, 명언 - ○○○은 이렇게 말했다 아무튼 시리즈 73
하지현 지음 / 위고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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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아무튼 시리즈!
좋은 구절이 많아 따로 책에 필기해두었다!
행복한 결혼 생활을 위해 남편도 나도 알아두면 좋을 내용들을 여기에 기록해둔다.

첫째, 무엇보다 서로에게 친절하자는 것입니다.
사람과 사람으로서, 독립적 인격체로 서로를바라보세요. 아무리 힘들고 지쳐 있을 때가되어도 놓치지 않아야 할 것은 친절입니다.
친절은 대가를 치르면서도 타인을 도우려는성향입니다. 친절한 행위의 밑바탕은 공감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착한 사람이라도 지치고 힘들면그러기 힘들 수 있습니다. 이제 가장 가까이지내면서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는 사람은배우자입니다. 각자 일을 하면서 지치고 힘들고짜증이 나는 순간에 집으로 돌아옵니다. 이때내 감정을 상대를 향해 퍼부을 수 있습니다.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이때 사랑하는 사람에게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말은 사치스러울 수있습니다. 너무 힘드니까요. 그저 ‘친절해야한다‘는 생각 정도면 족합니다. 그 정도는 할 수있습니다. 그러면 두 사람의 관계에서 불필요한감정의 소모와 갈등을 만들지 않을 것입니다.
둘째, 서로를 바라보되 적절히 외면하십시오.
주례사에서 제일 많이 나오는 속담이 "결혼전에는 두 눈을 부릅뜨고 서로를 바라보지만

결혼을 하고 난 다음에는 한 눈을 감으라"는것입니다. 이제 내 아내, 내 남편은 제일 중요한내 편입니다. 내 편의 작은 허물, 결점, 실수까지고치고 지적해서 더 완벽한 사람이 되게 만들려는욕심보다, 한 눈을 감고 ‘지금 이 정도로도 충분히좋고, 괜찮다‘라는 생각을 하는 게 좋습니다.
제일 끝까지 남을 ‘내 편‘을 지키는 길입니다.
알고도 모른 척, 보이지만 안 보이는 척하면서 지적하고 싶은 마음을 꾹 참는 것이 필요합니다.
실제로 결혼 관련 심리학자 존 가트맨이 부부생활을 오랫동안 영위한 커플과 그렇지 않은커플 총 3천 쌍을 비디오로 분석하고 갈등을해결하는 방법에 대해서 알아본 적이 있습니다.
그 많은 커플이 고민하는 문제의 70퍼센트는실은 해결 불가능한 문제였습니다. 관계에어려움이 있는 커플은 이 문제를 해결하겠다고매달리고, 오래 지속하는 커플은 해결 불가능성을인정하고 받아들이고 피할 방법을 찾았습니다.
즉, 원인을 파헤치기보다는 받아들일 것은 적절히받아들이고, 그게 아닌 부분은 외면하고 거리를둔 채 해결할 수 있는 대처 방안을 각자 찾는 것이 현실적 태도입니다.

셋째, 운의 영역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두사람이 이 자리에 함께 서 있을 것이라고 3년전 오늘에도 예측했을까요? 전혀 아닐 겁니다.
우리는 인생이 계획대로 이어지기를 원합니다.
그렇지만 그건 어려운 일입니다. 세상에는 운의영역이 있다는 것을 인정할 때 숨통이 트이고,
서로와의 만남을 감사하며, 앞으로 일어날 조금아쉬운 상황도 견디고 넘어갈 수 있습니다.
‘행복‘을 의미하는 단어 ‘happy‘와 ‘우연히일어나다‘라는 의미의 ‘happen‘은 같은 어근에서비롯되었습니다. 그렇듯 행복은 우연을 통해일어납니다. 우연히 좋은 일이 일어나 행복하기도하지만 나쁜 일이 생기지 않는 것도 행복입니다.
‘다행‘이란 바로 그것입니다. 불운이 없는 것도행운이 있는 것만큼 좋은 일입니다. 그걸 인정할때 계획대로 되지 않았을 때의 실망, 불행하게느껴지는 일이 생겼을 때의 좌절을 견뎌내고서로를 원망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오늘은 살짝운이 없었지만 내일은 괜찮아질 것이고, 행복은내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라는 겸손하고 관대한마음. 이것을 함께 갖는 것만큼 부부에게 필요한 것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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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내 어릴 적 시절로 돌아간다면 나는 뉴욕제과점에 가장 먼저 가볼 것이다. 이 작가를 그 시절에 알지 못한 것과 뉴욕제과점을 지나쳤지만 알아보지 못한게 못내 아쉽다.

해가 저무는 것을 바라볼 때처럼 순간순간은 더딘 나날이었건만 지금 생각하면 그 시절은 삽시간에 지나가버렸다.

가을이 깊어졌다. 교정에서 뿜어나오는 빛은 완연히 달라졌다.
가까이 심어놓은 키 작은 단풍나무 덕분에 수돗가 그 그늘 아래에서 노란 주전자에 물을 받노라면 물 색깔이 울긋불긋했다. 아, 가을도 한복판이라, 니 낙엽 구불라댕기는 소리가 들리나. 함께 주변을맡은 친구아이가 두 팔을 쫙 펼쳤다. 그 아이의 아름이 그렇게 크다는 사실을 혼자 깨달으면서 나는 가을이 한껏 깊어졌음을 느꼈다.
가을빛은 어디에나 번지고 있었다. 뒷동산 신갈나무 그늘로도, 여고 졸업반이 된 친구들의 목덜미로도, 푸드득 소리내 하늘로 치솟는 까치의 날개로도, 가을은 늦도록 번지고 있었다.

나중에 나는 이 일을 두고두고 후회했다. 인생은 그런 게 아니었다. 점점 자기 그림자 쪽으로 퇴락해가는 뉴욕제과점 구석 자리에서 나이가 스무 살 정도는 더 많은 사람을 앞에 두고 앉아 ‘모더니즘이 아니라 포스트모더니즘‘이라고 바로잡는 그런 게 아니었다.
내가 자라는 만큼 이 세상 어딘가에는 허물어지는 게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게 바로 인생의 본뜻이었다. 아이가 자라나 어른이 되는정도의 시간이면 충분했다. 그사이에 아무리 단단한 것이라도 제아무리 견고한 것이거나 무거운 것이라도 모두 부서지거나 녹아내리거나 혹은 산산이 흩어진다. 그럴 때마다 내 안에서는 부식된 철판에서 녹이 떨어져나가듯이 검고 붉은 부스러기 같은 것들이 죽어서 떨어져나갔다. 밀려드는 파도에 모래톱이 쓸려나가듯이 자잘한빛들이 마지막으로 반짝이면서 어둠 속으로 영영 사라졌다. 내가태어나 어른이 되는 그 짧은 시간 동안에 말이다. 그런 줄도 모르고
‘모더니즘이 아니라 포스트모더니즘‘ 운운하는 바보 같은 말을 서슴없이 내뱉던 때였으니까 나중에 신문을 받아들고는 무슨 신문기사에 ‘역전파출소 옆 뉴욕제과점이 집이기도 한 작가‘ 같은 표현이다 실릴 수 있을까, 하고 생각한 것은 당연했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면 나는 또 누구란 말인가? 지금은 경기도에 사니까. 또 뉴욕제과점은 더이상 존재하지 않으니까 누군가를 만나 나를 소개할 때면
"소설을 쓰는 아무개입니다"라고 말하지만, 아직도 고향에서 나는 역전 뉴욕제과점 막내아들로 통한다. 이제는 죽어서 떨어져나간, 그 흔적도 존재하지 않는 자잘한 빛, 그 부스러기 같은 것이 아직도 나를 규정한다는 사실은 놀랍기만 하다.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사라졌다는 말은 아니다.

사탕을 넣어둔 유리항아리 뚜껑을 자꾸만열어대는 아이처럼 나는 빤히 보이는 그 불빛들이 그리워 자꾸만과거 속으로 내달았다. 추억 속에서 조금씩 밝혀지는 그 불빛들의중심에는 뉴욕제과점이 늘 존재한다. 내가 태어나서 자라고 어른이되는 동안, 뉴욕제과점이 있었다는 사실이 내게는 얼마나 큰 도움이 됐는지 모른다. 그리고 이제는 뉴욕제과점이 내게 만들어준 추억으로 나는 살아가는 셈이다.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뭔가가 나를 살아가게 한다니 놀라운 일이었다. 그 다음에 나는 깨달았다. 이제 내가 살아갈 세상에 괴로운 일만 남은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나도 누군가에게 내가 없어진 뒤에도 오랫동안 위안이 되는 사람으로남을 수 있게 되리라는 것을 알게 됐다. 삶에서 시간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사실을. 그저 보이는 것만이 전부는 아니라는 사실을. 이세상에서 사라졌다고 믿었던 것들이 실은 내 안에 고스란히 존재한다는 사실을 나는 깨닫게 됐다. 그즈음 내게는 아이가 생겼다. 내가이 세상에서 사라지고 나서도 아주 오랫동안 그 아이가 나 없는 세상을 살아갈 것이라는 사실을 나는 ‘상식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됐다.

세상을 살아가는 데 그렇게 많은 불빛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그저 조금만 있으면 된다. 어차피 인생이란 그런 게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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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대부분 다른 사람들을 오해한다. 네 마음을 내가 알아, 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그보다는 네가 하는 말의 뜻도 나는 모른다, 라고 말해야만 한다. 내가 희망을느끼는 건 인간의 이런 한계를 발견할 때다. 우린 노력하지 않는 한, 서로를 이해하지 못한다. 이런 세상에 사랑이라는 게 존재한다. 따라서 누군가를 사랑하는 한, 우리는 노력해야만 한다. 그리고 다른 사람을 위해 노력하는 이 행위 자체가 우리 인생을 살아볼 만한 값어치가 있는 것으로 만든다. 그러므로 쉽게 위로하지 않는 대신에 쉽게 절망하지 않는 것, 그게 핵심이다. ‘작가의 말‘ 중에서

우리는 모두 헛똑똑이들이다. 많은 것을 안다고 생각하지만,
우리는 대부분의 사실들을 알지 못한 채 살아간다. 우리가 안다고생각하는 것들 대부분은 ‘우리 쪽에서 아는 것들이다. 다른 사람들이 아는 것들을 우리는 알지 못한다. 그런 처지인데도 우리가오래도록 살아 노인이 되어 죽을 수 있다는 건 정말 행운이라고말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어리석다는 이유만으로도 당장 죽을수 있었다. 그 사실만으로도 우리는 이 삶에 감사해야만 한다. 그건 전적으로 우리가 사랑했던 나날들이 이 세상 어딘가에서 이해되기만을 기다리며 어리석은 우리들을 견디고 오랜 세월을 버티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맞다. 좋고 좋고 좋기만 한 시절들도 결국에는 다 지나가게 돼 있다. 그렇기는 하지만, 그 나날들이 완전히사라졌다고 말할 수는 없다. 우리가 노인이 될 때까지 살아야만하는 이유는 어쩌면 우리 모두가 일생에 단 한 번은 35미터에 달하는 신의 나무를 마주한 나무학자 왕잔의 처지가 되어야만 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공룡과 함께 살았다는, 화석으로만 남은, 하지만 우리 눈앞에서 기적처럼 살아 숨쉬는 그 나무.

곧 나는 삶의 어느 특정한 순간에 나만이느꼈다고 생각했던 뭔가를 또다른 누군가도 봤으리라고 짐작하게 되는 일이 얼마나 기이하면서도 따뜻한 경험인지 깨닫게 됐다.

"옛날에 충주호에서 부엉이 볼 때 내가 했던 말을 기억하겠지?
사람들이 퇴근한 뒤 편집실에 혼자 앉아서 릴테이프를 이리저리돌려가면서 한 사람의 일생을 편집할 때 그게 어떤 기분인지 내가얘기한 적이 있었잖아. 밤이 늦도록 편집하다보면 어느 틈에 이야기의 내용은 더이상 들리지 않고 목소리의 톤과 빠르기가 들리지그런 목소리에 오랫동안 귀를 기울이고 있노라면 한 사람이 살아온 인생의 빛과 어둠, 열기와 서늘함, 고독과 슬픔마저도 들을 수있을 것만 같아. 그 사람이 어떤 인생을 살아왔는지는 이야기가아니라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그런 미세한 결 같은 것이라는 생각을 많이 했어. 아, 이 사람은 지금 고생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도그 목소리만은 그 시절이 제일 행복했었다고 말하고 있구나. 몇번이고 반복해서 듣다보면 그렇게 혼자 중얼거릴 때가 있어. 편집하면서 내가 제일 안타까웠던 순간은 목소리가 끊어질 때였어. 더말할 수 있는데, 사람들은 어느 순간 말을 멈춰. 한동안 침묵이 이어지고 릴테이프는 혼자서 돌아가지. 침묵과 암흑, 내 귀에는 잡음만이 들려, 몇 번을 반복해서 듣다보면 어쩌면 바로 그 순간이내가 귀를 기울이는 순간일지도 몰라. 거기에 진실이 있을지도 몰라. 1초, 2초, 3초, 4초, 5초. 나는 목소리가 다시 나타나길 기다리면서 없어진 그 목소리의 감정을 읽어."

다시 체호프로 돌아가서 말하자면, 이 ‘세계‘는 하나의 이야기이고 그것은 무수한 ‘나‘들의 이야기가 모여 이루어지는 것이니 ‘우리‘는 모두가 이야기들로 연결돼 있다고, 그래서 한쪽 끝을 건드리면 다른 쪽 끝이 떨리는 법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나는 이것이우리가 문학을 포기할 수 없는 이유 중의 하나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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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 해의 마지막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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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슴을 읽어보아야겠다!

"한 번도 보지 못한 것을 그리워할 수 있는 사람의 눈은 멀다. 이 먼눈이라면 통영의봄길이든 눈 쌓인 혜산선의 길이든 지척인 것이고 백 년쯤 전에 태어났다는 이나이레쯤 전에 세상에 나왔다는 것이나 모두 반갑고 친하고 벅차고 가여운 것이다. 게다가 먼눈을 가진 이가 세상을 먼저 살다 간 다른 먼눈을 가진 이를 살피는 일이라니.
아무래도 이 책은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만나는 것만 같다. 박준(시인)

그때에도 보름이면 이세상은 달빛으로 가득차지 않겠나? 달이야 거기 사람이 있든 없든 찼다가 이지러지는 그 자연의 법칙을 반복하겠지. 그런 무심한것이 자연이라는 것도 모르고 인간들은 거기에 정을 둔단 말이지.
마치 해와 달이 자기 인생을 구원해주기라도 하듯이 말이야. 오호. 우리의 태양이시여, 영원한 달님이시여, 라고 찬양하면서, 하지만 해와 달은 그 누구의 인생도 구원하지 않아. 우리도 그런 자연을 닮아 노래는 들리는 대로 들으면 되고, 춤은 보이는 대로 보면 되는 거지, 좋으니 나쁘니 마음을 쏟았다 뺏었다 할 필요는 없었던 거야."
해와 달의 이야기를 할 때, 상허의 얼굴에서 잠시나마 표정이사라졌다. 기행은 그 무표정이 반가웠다. 잘 모를 때는 그 무표정이 까끈한 성격에서 기인한다고 여겼으나 상허가 조금 이상해지고 난 뒤부터는 그게 얼마나 인간적인 표정인지를 기행은 알게 됐다. 아무런 표정을 짓지 않을 수 있는 것, 어떤 시를 쓰지 않을 수있는 것, 무엇에 대해서도 말하지 않을 수 있는 것. 사람이 누릴수 있는 가장 고차원적인 능력은 무엇도 하지 않을 수 있는 힘이었다. 상허의 말처럼 들리는 대로 듣고 보이는 대로 볼 뿐 거기에뭔가를 더 덧붙이지 않을 수 있을 때, 인간은 완전한 자유를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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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 에센셜 김연수 (무선 보급판) 디 에센셜 The essential 2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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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가 되고 싶을 정도로 좋았다.
좋았던 이야기와 구절들이 잊혀질 쯤 다시 또 읽고 새기고 싶다.

세상에서 첫번째로 신기한 일은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난 일. 이세상에 태어나 수없이 많은, 아름다운 길을 걸은 일. 사물이 두 개만 있어도 그 사이로 길이 생겨난다. 그러니 지금까지 내가 걸은길들은 모두 나무와 나무 사이라든가, 집과 집 사이, 혹은 사람과사람 사이이거나 능과 능 사이였다.
사이로 길이 난다.

그렇게 바라보는 것들 중 하나가 호수 너머로 보이는 저녁 빛이다.
호수 옆에서 산 지도 벌써 십 년이 넘는다. 저녁을 먹고 호수까지 걸어가면 해는 이미 저문 뒤다. 어스름 속의 호수에서는 서쪽의 빛까지가 부속 시설이다. 여름의 빛은 끈덕지다. 쉽게 물러서는 법이 없이 서쪽 하늘을 붉게 물들인다. 이루 말할 수 없이 아름다운 이 잔영은 하지부터 가을이 깊어질 때까지 날마다 펼쳐진다.
나무들 사이에 서서 그들과 함께 어두워지며 올려다보는 저녁의 빛은 세상에 지친 마음을 교정해준다. 모든 것이 다 끝난 뒤에도 우리에게 남은 게 있음을 지켜보는 일. 이것이 저녁 산책의 기쁨이다. 애당초 기쁘게 살고 싶다. 는 아니었다. 아무리 번거롭고힘들더라도, 또 누구도 알아주지 않고 심지어 오해를 한다 해도기쁘게 죽을 수 있도록 살고 싶다, 는 마음이 거기 있었다.
저녁이면 그런 마음을 생각하며 호수 둘레의 길을 오래오래 걷는다.

태풍은 잠시 잊어버리고 카페에 앉아 책을 읽었다. 「가만히,걷는다』라는 책이었다. 프랑스 작가들의 산문이 모여 있었다.
‘파리의 오렌지는 나무 밑에 떨어진 것을 주워온 열매처럼 슬퍼보인다‘고 알퐁스도데는 썼고, 마르셀 프루스트는 나이가 든 뒤에도 산사나무꽃을 보면 그 꽃을 처음으로 봤던 나이와 심장을 되찾는다고 썼다.
그리고 프랑수아즈 사강은 열여섯 살 때 혼자 남은 파리에서 만난 부랑자의 말을 옮겨놓았다.
원래는 그에게도 아내와 아이들과 좋은 차와 재산이 있었다. 그러다가 불현듯 자기 인생이 흘러가고 있는데, 정작 자신의 눈에는그 흐름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게 됐다. 그렇게 살다가는톱니바퀴 같은 것에 물려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한 채 죽어가리라는 것도.

그는 종일 자신이 하는 일이 ‘사는 법‘에 대한 것이라고 말했다.
그건 시간이 흐르고 날이 저무는 걸 보는 일, 자기 손목에서 피가팔딱팔딱 뛰는 소리를 듣는 일, 산책하고 강을 보고 하늘을 볼 뿐.
해야 할 일은 아무것도 없는 일이다.
내게는 무엇이 사는 법‘일까?
코로나19 바이러스로 사회적 거리 두기가 시작되고 식당과 술집이 저녁 아홉시면 모두 문을 닫아야만 했을 때였다. 어떤 풍경일까 궁금해 나가본 적이 있다. 밤새도록 가게마다 손님들로 가득했던 광경은 역사 속으로 사라진 것 같았다. 불 꺼진 번화가는 이미 찾아온 미래처럼 내게 다가왔다.
많은 시행착오를 거친 뒤에야 비로소 나는 어떤 삶을 원하게 됐다. 좋아하는 일을 더 자주, 더 많이 하는 삶, 돋보기로 모은 햇빛처럼 초점이 또렷한 삶이다. 누가 뭐라든 진심으로 좋아하는 일에몰두하고 싶다. 뒤처지는 것 같겠지만 좋아하는 일은 얼마든지,
그러니까 하루종일 할 수 있으니까 사실은 제일 앞서가는 일이다.
내게는 독서와 글쓰기가 바로 그런 일. 나의 ‘사는 법‘이다.

자잘한 파도에도, 큰 파도에도 마음은 부서진다. 조금씩, 혹은 한꺼번에 많이 부서지는 마음을들여다보는 건 무서운 일이다.
물결이 물러나면 밀려온 경계가 서서히 지워지고 그 위로 새로운 물결이 밀려왔다. 매번 다른 파도였고, 새로운 모양의 경계가만들어졌다. 매일 아침 생겼다가 저녁이면 부서지는 어떤 마음들처럼. 그때의 나에게, 혹은 소설 속 할머니에게 그래도 괜찮다고말해주고 싶다. 그게 완벽한 삶이라고. 완벽한 인생이란 완벽하지 못한 것들, 못난 것들, 부서진 것들까지도 모두 아우르는 삶이라고.
어떤 마음은 왜 생겨나는 것일까? 그 이유를 알 순 없지만 생겨난 마음이 부서질 때 삶이 온전해진다는 것은 알 것 같았다.

강릉 같은 곳에서 살아 매일 파도를 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파도를 볼 수 없는 곳에서 사는 나는 바다 삼아 하늘을 올려다본다. 거기에도 파도는 있다. 그것은 날마다 달라지는 날씨다. 맑은 날이 하루라면 궂은 날도 하루다. 바람이 세차게 불다가도 날이 바뀌면 고요해진다.
하루하루가 다른 날씨들이다. 나는 그 날씨들을 살펴보고 생각하고 공부한다. 모든 날씨에는 끝이 있다는 것. 그리고 다음이 있다는 것. 그러니 끝날 때까지는 그날의 날씨를 즐겨야만 한다는 것.
그게 내 날씨 공부의 전부다. 비가 내리면 당분간은 비가 내리는 대로, 햇살이 선명하면 당분간은 햇살이 선명한 대로 살아가는 사람이 되는 것.

그러자 묘한 생각이 들었다. 이 일에 나는 모르는 어떤 의미가있는 게 아닐까? 그걸 모르는 한에는 어떤 결정도 내릴 수 없는게 아닐까? 나는 이백 년 뒤를 상상했다. 이백 년쯤 지나면 나도이 일을 이해하게 될지 모르겠다고. 그렇다면 이해는 나중의 나에게 부탁하고, 일단 가보자. 또 어떤 일이 펼쳐질지 한번 지켜보자.
이해하지 못한다는 건 지금의 내가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뿐일 테니까.
그렇게 나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미래를 향해 문을 열었다.

나보코프는 ‘우리는 책을 읽을 수 없다. 다시 읽을 수 있을 뿐이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마찬가지로 인생에서 벌어지는 어떤 일이 좋을지 나쁜지는 누구도 알 수 없다. 우리는 시간이 지난 뒤에다시 알 수 있을 뿐이다. 다시 아는 것, 그게 이해다. 스물네 살의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때는 알 수 없었다. 그리고 이제는 다시알게 됐다. 인생의 이야기는 먼저사람의 행동과 나중사람의 이해로 완성된다. 서로를 그려가는 두 개의 손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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