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내 어릴 적 시절로 돌아간다면 나는 뉴욕제과점에 가장 먼저 가볼 것이다. 이 작가를 그 시절에 알지 못한 것과 뉴욕제과점을 지나쳤지만 알아보지 못한게 못내 아쉽다.

해가 저무는 것을 바라볼 때처럼 순간순간은 더딘 나날이었건만 지금 생각하면 그 시절은 삽시간에 지나가버렸다.
가을이 깊어졌다. 교정에서 뿜어나오는 빛은 완연히 달라졌다. 가까이 심어놓은 키 작은 단풍나무 덕분에 수돗가 그 그늘 아래에서 노란 주전자에 물을 받노라면 물 색깔이 울긋불긋했다. 아, 가을도 한복판이라, 니 낙엽 구불라댕기는 소리가 들리나. 함께 주변을맡은 친구아이가 두 팔을 쫙 펼쳤다. 그 아이의 아름이 그렇게 크다는 사실을 혼자 깨달으면서 나는 가을이 한껏 깊어졌음을 느꼈다. 가을빛은 어디에나 번지고 있었다. 뒷동산 신갈나무 그늘로도, 여고 졸업반이 된 친구들의 목덜미로도, 푸드득 소리내 하늘로 치솟는 까치의 날개로도, 가을은 늦도록 번지고 있었다.
나중에 나는 이 일을 두고두고 후회했다. 인생은 그런 게 아니었다. 점점 자기 그림자 쪽으로 퇴락해가는 뉴욕제과점 구석 자리에서 나이가 스무 살 정도는 더 많은 사람을 앞에 두고 앉아 ‘모더니즘이 아니라 포스트모더니즘‘이라고 바로잡는 그런 게 아니었다. 내가 자라는 만큼 이 세상 어딘가에는 허물어지는 게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게 바로 인생의 본뜻이었다. 아이가 자라나 어른이 되는정도의 시간이면 충분했다. 그사이에 아무리 단단한 것이라도 제아무리 견고한 것이거나 무거운 것이라도 모두 부서지거나 녹아내리거나 혹은 산산이 흩어진다. 그럴 때마다 내 안에서는 부식된 철판에서 녹이 떨어져나가듯이 검고 붉은 부스러기 같은 것들이 죽어서 떨어져나갔다. 밀려드는 파도에 모래톱이 쓸려나가듯이 자잘한빛들이 마지막으로 반짝이면서 어둠 속으로 영영 사라졌다. 내가태어나 어른이 되는 그 짧은 시간 동안에 말이다. 그런 줄도 모르고 ‘모더니즘이 아니라 포스트모더니즘‘ 운운하는 바보 같은 말을 서슴없이 내뱉던 때였으니까 나중에 신문을 받아들고는 무슨 신문기사에 ‘역전파출소 옆 뉴욕제과점이 집이기도 한 작가‘ 같은 표현이다 실릴 수 있을까, 하고 생각한 것은 당연했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면 나는 또 누구란 말인가? 지금은 경기도에 사니까. 또 뉴욕제과점은 더이상 존재하지 않으니까 누군가를 만나 나를 소개할 때면 "소설을 쓰는 아무개입니다"라고 말하지만, 아직도 고향에서 나는 역전 뉴욕제과점 막내아들로 통한다. 이제는 죽어서 떨어져나간, 그 흔적도 존재하지 않는 자잘한 빛, 그 부스러기 같은 것이 아직도 나를 규정한다는 사실은 놀랍기만 하다.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사라졌다는 말은 아니다.
사탕을 넣어둔 유리항아리 뚜껑을 자꾸만열어대는 아이처럼 나는 빤히 보이는 그 불빛들이 그리워 자꾸만과거 속으로 내달았다. 추억 속에서 조금씩 밝혀지는 그 불빛들의중심에는 뉴욕제과점이 늘 존재한다. 내가 태어나서 자라고 어른이되는 동안, 뉴욕제과점이 있었다는 사실이 내게는 얼마나 큰 도움이 됐는지 모른다. 그리고 이제는 뉴욕제과점이 내게 만들어준 추억으로 나는 살아가는 셈이다.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뭔가가 나를 살아가게 한다니 놀라운 일이었다. 그 다음에 나는 깨달았다. 이제 내가 살아갈 세상에 괴로운 일만 남은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나도 누군가에게 내가 없어진 뒤에도 오랫동안 위안이 되는 사람으로남을 수 있게 되리라는 것을 알게 됐다. 삶에서 시간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사실을. 그저 보이는 것만이 전부는 아니라는 사실을. 이세상에서 사라졌다고 믿었던 것들이 실은 내 안에 고스란히 존재한다는 사실을 나는 깨닫게 됐다. 그즈음 내게는 아이가 생겼다. 내가이 세상에서 사라지고 나서도 아주 오랫동안 그 아이가 나 없는 세상을 살아갈 것이라는 사실을 나는 ‘상식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됐다.
세상을 살아가는 데 그렇게 많은 불빛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그저 조금만 있으면 된다. 어차피 인생이란 그런 게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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