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글자도서] 슬픈 세상의 기쁜 말 - 당신을 살아 있게 하는 말은 무엇입니까
정혜윤 지음 / 위고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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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에 대한 무한한 애정을 담아 쓴 이야기
그녀의 섬세한 시선으로 읽어낸 사람들은 사정 많은 드라마의 주인공이 된다.
나또한 그런 이야기로 읽혀질 수 있을까?
나를 살아있게 하는 말을 찾아봐야겠다.

나는 언제 어디서고 그날 밤의 반딧불이와 뱃사공을 쉽게 떠올릴 수 있다(반딧불이가 사라지면 그도 연기처럼 사라져버릴 것만 같은데 내게는 이 생각이 전혀 이상하지 않다). 그날 ‘돌고래‘와 ‘아더 사이드‘와 ‘스틸 뷰티풀‘이라는 말은 나의 ‘매직‘이 되었다. 이 말들은 처음 들은 순간부터 변함없이, 시들시들하고 풀이 죽은 나 자신으로부터 나를 떼어놓고, 보이지 않던 아름다움을 찾아 나서고 싶게 만든다. 이 말들은내가 힘없이 늘어져 있을 때 반복적으로 나 자신에게 말을건다. ‘현실의 다른 측면을 봐봐! 다른 쪽으로 가봐! 가서 여전히 아름다운 이야기를 찾아내봐. 아직 어둠 속에 있는 인간의 목소리, 인간의 가능성에 빛을 비춰봐. 어디서나 아름

다움을 찾아낼 수 있잖아!‘ 누구에게나 시간은 흐르고 그 시간은 되돌아올 수 없다는 것이 진리인 만큼이나 누구라도일생에 한번은 아름다운 세계에 눈뜨고 아름다움과 함께 새롭게 시작해야 한다는 것 역시 진리다.
최근 수년간은 이 생각에 의지해서만 초라한 자아를 극복하고 꺾인 무릎을 펴고 길을 나설 수 있었다. 우리는 대부분 무엇을 원하는지도 모르는 채 검은 물살 위에서 이리저리 외롭게 흔들린다. 그래서 ‘아더 사이드‘는 우리 모두의단어가 될 수 있다. 무엇을 원해야 할지 모르기 때문에 현실의 다른 측면을 보고, 다른 사람들을 보고, 다른 이야기를들어봐야 비로소 지금과 다른 삶이 가능하다. ‘아, 난 이것을 원하는구나!‘ 하고 알게 되는 것은 한 개인의 삶에 일어나는 강렬한 해방적 순간이다.
‘스틸 뷰티풀‘은 변주가 가능하다. 아무리 많은 일이 일어났어도 아름다운, 슬프지만 아름다운, 덧없지만 영원한,
슬프지만 기쁜 내 마음의 고독이 찾던 이야기들은 모두 이말과 관련이 있다. 몇 번이고 곱씹어볼 만큼 아름다운 이야기를 듣던 날들은 사랑스러운 일몰에 대한 기억처럼, 어느아름다웠던 별이 가득한 밤의 기억처럼 끝없이 떠오르는 마음속 풍경이다. 우리의 어둠을 의미 있게 만드는 것은 아름

답고 빛나는 이야기뿐이다.
한 사람의 운명을 알려주는 것은 모두 ‘시‘라는 말이 있다. 그렇다면 내 인생에 거듭 나타나는 이 단어들이 나에게는 시다(그러고 보니 그날 내가 탄 배의 이름도 ‘운명호‘였다). ‘내가 그날 운명호를 타고 찾아 나선 것은 돌고래였다‘라는 짧은 문장 하나가 나에게는 내 운명을 암시하는 결정적인 시고, ‘아더 사이드‘, ‘스틸 뷰티풀‘도 모두 시다. 이 단어들에나의 수많은 현실이 달라붙었다. 나는 이 단어들에 의지해서 일어나지 말아야 할 일이 일어나는 세상, 좋아할 수 없는일이 가득한 세상, 수시로 등지고 떠나버리고 싶었던 세상의 ‘조금 다른‘ 일부가 되는 방식을 겨우 찾아낼 수 있었고그 단어 안에 나 자신이고 싶은 마음, 나 자신으로만 머물고싶지 않은 마음, 나 자신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은 마음, 가슴 아프게 스러지고 마는 세상의 온갖 것에 대한 애타는 사랑을 담으면서 내 삶의 형태를 만들어가려고 노력했다(그날 내가 돌고래를 그렇게 오래 생각했던 이유를 아주 많은 시간이 흘러서야 깨달았고 문장으로 표현할 수 있게 되었다. 돌고래를보자 내 가슴속에 꿈 하나가 애절하게 생겨났던 것이다. ‘나도 내 삶의 형태를 가지고 싶다‘). 지금은 내 단어들이, 내 꿈이 나보다훨씬 낫다. 앞으로도 이 단어들에 의지해서 한 걸음 한 걸음 더 가볼 수밖에 없다.

내가 아는 한, 유사이래 인류 최고의 기쁜 자기발견은 바로 이것이다. "내가 너를 행복하게 했단 말이지, 대단하다!"
나는 시 속에서, 그리고 시적인 순간들을 만나면서 달라지고 싶다. 현실을 변신의 장소인 것처럼 살고 싶다. 특별한이야기의 힘을 믿고 우리에게 마법 같은 힘이 있음을 믿고세상에 기적이 존재함을 믿고 우리의 행동이 우리의 운명을바꿀 수 있음을 감히 믿으면서 살고 싶다. 우리는 다른 사람이 달라질 수 있는 가능성을 믿어야 자신도 달라질 수 있다.
나는 그 가능성의 증거가 되고 싶다. "누가 그래? 내가 예전과 똑같은 사람이라고."

하지만 어떤 미래가 오든 미래는 결국 인간의 손으로 만들어진다. 나는 다른 것은 몰라도 인간이 인간일 때 얼마나 우아할 수 있는지는 알고 있다. 그래서 인간이지금과 다르게 존재하는 것이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다. 우리가 인간으로 태어난 것을 낭비하지 않는게 가능하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다.

당신이 당신의 가장 멋진 점을 표현할 단어를 찾아내면 정말 좋겠다. 우리의 좋은 결말을 위해서 어떤 단어가 필요한지 찾아내면 정말 좋겠다. 우리가 언젠가 인간의 아름다움에 대해서 실컷 이야기할 수 있게 된다면 정말 좋겠다. 지금은 말이 있어야 할 자리에 공허와 잔인함이 있지만 언젠가 우리의 말과 의미가 아름다운 관계를 맺고 ‘우리가 말을공유하고 있다니, 그런 멋진 일이 있다니‘라고 느낄 만한 이야기가 많아지면 정말 좋겠다.
우리가 곧잘 그 사실을 진지하게 여기지 않지만 세상은이야기로 이루어져 있다. 언제나 가장 좋은 이야기로 힘을내고, 가장 좋은 이야기와 함께 여러 가지 압력에 맞서 싸우면서 따뜻하면서도 깊게 대담하면서도 섬세하게 살 수 있게된다면 기쁠 것이다. 현실을 살되 마음의 한쪽에 뭔가를 품고 현실의 일부분을 바꿀 수 있다면 기쁠 것이다. 저마다 이문제 많은 현실의 ‘해결자의 목소리‘가 된다면 기쁠 것이다.
우리가 가진 여러 모습 중 가장 좋은 모습이 우리의 미래가된다면 정말 기쁠 것이다.
그때 잠시 땀을 닦으면서 당신을 당신으로 만든 이야기를 들려달라. 당신이 멈추지 않기 위해 필요로 했던 이야기도 들려달라. 두꺼운 고독을 뚫고 나오게 했던 존재에 대해서도 이야기해달라. 당신의 고유한 기쁨에 대해서도 말해달라. 나는 살아 있는 자의 귀로 듣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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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도원 삼대
황석영 지음 / 창비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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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의 우리는, 끊임없이 싸워온 우리의 결과다.
어쨌든 세상은 조금씩 아주 조금씩 나아져간다.

는 작가의 말이 진득하게 내 귀에 남아있다

진오는 국민학교 시절에 할머니 신금이에게 되물은 적이 있었다.
"일제시대에는 그랬다 치고, 왜 우리 식구들은 힘센 쪽에 붙지못하고 맨날 지는 쪽에만 편들었어요?"
"왜, 약한쪽 편드는 게 싫으냐?"
"물론이지요. 너무 손해잖아요?"
그러면 할머니는 감실감실 주름살 잡힌 눈을 더욱 가늘게 뜨고웃으면서 말했다.
"그때에는 지는 것처럼 보여도 결국은 약한 이들이 이기게 되어있다. 너무 느려서 답답하긴 했지만."
그리고 신금이는 덧붙였다.
"오래 살다보면 알 수 있단다. 서로 겉으로 내색을 안 할 뿐이지속으론 다들 알구 있거든."

"같이 좀 살자, 못된 것들아. 같이 좀 살아."
이진오는 그녀가 말하려던 충분한 한마디가 바로 이 말이라는걸 알아들었다.
"노동자가 높은 데로 올라와 사람들에게 자기 처지와 입장을 알아달라고 농성하게 된 것만 해두 엄청난 사회적 변화라구. 우리 할머니는 늘 그렇게 말했어. 어쨌든 세상은 조금씩 아주 조금씩 나아져간다고."

나는 우리 근현대문학을 섭렵하면서 몇몇 빠진 부분이 있음을발견했다. 단편소설에 비해 훨씬 질과 양이 떨어지는 장편소설 부분과 그중에서도 근대 산업노동자들의 삶을 반영한 소설이 드물다는 점이었다. 일제강점기에 잠깐 있었던 카프의 흔적에서도 대부분이 단편소설이거나 도시빈민 일용노동자 또는 룸펜 계층을 다룬것들이며 산업노동자가 전면에 등장하는 본격적인 장편소설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최근까지 쓰인 장편소설의 경우에도 대부분이 농민을 위주로 한 작품들이었다.
나는 이 시기의 노동운동 자료들을 살피면서 식민지 시대 이후조선의 항일노동운동은 너무도 당연하게 사회주의가 기본 이념의출발점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해방 이후 분단되면서 생존권투쟁에 나선 노동자들은 ‘빨갱이‘로 매도당했고, 한국전쟁이 터지고 세계적인 냉전체제가 되면서 수십년 동안의 개발독재시대에 모든 노동운동은 ‘빨갱이운동‘으로 불온하게 여겨졌다. 우리가 기나긴 분단시대를 거쳐오면서 애초의 출발점부터 북한에 대하여 민족적 정통성을 주장하기 어려웠던 것이 사실이지만, 남한 민중이 근대화의 주체가 되어 산업화를 이루고 민주주의체제를 수립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레 피와 땀으로 이룩한 정통성을 갖추게 되었다.

에 돌 하나를 끼워넣는 작업이 되기를 바랐던 것이다. 어떤 이들은지금 혼란에 접어든 신자유주의적 세계의 모습을 자본주의 세계체제가 몰락해가면서 무엇인가 다른 질서로 향하여 가는 이행기의그것이라고 말한다. 이 고통의 기간을 줄이거나 늘리는 것은 오로지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 자신의 노력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방대한 우주의 시간 속에서 우리가 살던 시대와 삶의 흔적은 몇점 먼지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세상은 느리게 아주 천천히 변화해갈 것이지만 좀더 나아지게 될 것이라는 기대를 버리고 싶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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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 무엇인지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나에게 나아가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건 사랑인 것 같다고 어렴풋이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사랑은 대체 무엇일까?
그러던 차에 발견한 책. 이름이 익숙하다. 알고보니 내가 지나가다 본 유튜브 채널을 운영하는 사람이었다. 철학을 쉽게 설명해주는 유튜버 중 한 명이다.(어쩌면 가장 젋은?)
여러 철학자들의 생각과 작가의 생각들을 읽고 나니 나는 아직 갈길이 멀었다
내가 사랑할만한 사람만을 사랑하는 한계를 더 확장시킬 수 있을까?! 아니, 이건 나한테 너무 어려운데 꼭 확장 시켜야만 할까??

지금은 고민스럽고 어렵지만 하루 하루 쌓이다보면 나만의 결론이 나져있을 것이라는 걸 이젠 안다. 마음이 조급하진 않다. 이게 책을 읽고 난 뒤 내가 얻은 가장 큰 깨달음일 것이다.


이 책 날개를 살펴보며 알게 건 이 책이 작가의 세번째 책이라는 것!
이전 책들도 읽어보고 싶다.

오늘날에는 종종 이런 관점을 잊고, 누군가를 현재의 일부모습만 가지고 쉽게 판단하거나 비난하는 경우가 있다. 한 사람의 시간을 전체적으로 들여다보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타인을 대할 때 이러한 연속적인 시간의 관점을 적극 받아들여 좀 더 너그러워질 필요가 있다.

만약 정말로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그와 나의 인연을 보다넓은 시간적 관점에서 깊이 살펴볼 필요가 있다. 사랑은 상대에 대한 이해와 앎을 포함한다. 오랜 시간 누군가를 사랑한다말하면서도 그 사람이 누군지를 잘 모른다면, 그 사랑은 커다란 한계를 가진 셈이다.
우리는 현재라는 좁은 시야에서 벗어나 상대방의 다양한시간을 들여다봐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부서지기 쉬운/그래서 부서지기도 했을/ 마음까지 돌볼 수 있어야 한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한때 어린아이였고, 소년 혹은 소녀였고, 다양한 추억과 상처를 간직한 채 성장해왔다. 그리고 언젠가 백발노인이 될 것이며, 죽음을 향해 걸어갈 것이다. 이모든 시간적 층위가 그의 존재를 총체적으로 구성하고 있다.
우리는 그 넓은 시간 속에 펼쳐진 다양한 빛깔의 면모들을조금씩 시간을 들여 세심히 들여다봄으로써, 우리가 사랑하는 그 사람이 누구인지를 비로소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결국 우리가 추구할 길은 어른의 마음으로 살아가되, 아이의 마음의 한 조각을 가슴 한편에 품는 것이다. 복잡한 이 세상을 살아가며 수많은 현실적인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선 대상의 속성을 객관적으로 파악하는 어른의 관점이 꼭 필요하다. 아이의관점으로만 세상을 산다면, 결코 세상을 잘 살아갈 수 없을것이다. 앞서 아이들의 마음이 의미로 가득 차 있다고 했지만, 그렇다고 모든 아이가 행복한 건 아니다. 세계 곳곳에는여러 환경적 · 선천적 조건으로 상처받고 고통에 시달리며 살아가는 아이가 많다. 그런데 아이는 자력으로 그 불행을 극복할 수 없다. 자신이 처한 조건을 바꾸기엔 능력이 부족하다.
아이를 도울 수 있는 건 어른뿐이다.

기억의 현재성
철학자 피터 골디는 기억은 구성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에따르면 기억은 객관적인 과거 정보의 나열이 아니다. 과거에받아들인 정보를 기본 재료로 해서, 그 이후에 추가된 다양한 요소를 바탕으로 구성되는 것이다.

이렇듯 기억은 객관적인 과거 정보와 거리가 멀다. 언제나정보의 축소, 삭제, 확대 등을 포함하며, 현재 내 기분이나 생각의 영향을 받아 변형된다. 이런 맥락에서 기억과 합리성의관계는 역설적이다. 대상에 대한 판단은 분명 현재뿐만 아니라 과거에 대한 기억을 종합적으로 고려해야 합리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 하지만 막상 기억은 조작과 왜곡이 더해진다. 따라서 기억에 기초해 누군가에 대한 주요한 판단을 내릴 때는 매우 조심해야 한다.

그런데 실존자의 삶은 상황에 영향을 받을지언정 상황에의해 모든 것이 결정되지는 않는다. 실존자는 주체적인 결정의 순간들을 마주하며 살아간다. 그리고 그 순간에 무엇을 선택하는지에 따라 삶이 달라진다.

율법학자는 이웃을 사랑하는 행위보다 사랑의 대상인 이웃이 누구인지 규정하는게 먼저라고 생각했다. 누가 진정한 이웃인지 모른다면 누구에게 사랑을 베풀지 알 수 없다고 본 것이다. 그런데 예수는 반대로 생각했다. 이웃을 규정하는 것보다 사랑을 베푸는 게 우선이라고 이웃이기에 사랑의 대상인 것이 아니라, 사랑하기 때문에 그 사랑으로 말미암아 이웃이 된다고.

사랑은 죽음을 방해합니다. 사랑은 곧 생명입니다.
내가 이해하는 모든 것은 그걸 사랑하기에 이해하는 것입니다.
내가 사랑하는 모든것 역시 그걸 사랑하기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_레프 톨스토이

아무것도 모르는 자는 아무것도 사랑하지 못한다.
대상에 대한 고유한 앎이 많아질수록 사랑은 더 위대해진다.
_파라켈수스

삶이란 사랑하는 법을 배우기 위해주어진 얼마간의 자유시간이다.
_아베 피에르

나는 단 하나의 책임만 아는데,
그것은 바로 사랑하는 것이다.
_알베르 카뮈

실존적 고민을 해결하고 싶다면, 이성을 통해 정답을 찾는것보다 사랑을 발견하고 회복하는 일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사랑은 삶의 의미에 대해 강력한 대답을 제시한다. 지적으로는 삶의 의미를 ‘모른다‘고 판단하더라도, 사랑 안에서는 이미 무언가가 밝혀져 있다. 그렇기에 우리는 삶을 쉽게 포기하지 않는다. 바로 거기에 귀 기울이면서, 우리는 삶의 의미나 가치에관한 나름의 대답을 찾고자 노력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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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들어보았던… 좋아하는 작가가 언급했던 책의 이름들..
그리고 의미도 모른채 읽었던 책들이 박연준 작가의 글말로 소개된 책.
“그랬구나. 이 분은 이 책을 읽고 이런 생각을 했구나.”
“내가 듣도 보도 못한 좋은 책들이 세상에는 참 많구나.”

작가가 한 작가의 책만 보게 된다면 “존 버거”의 책만을 읽을 것이라고 한 문장이 기억나 도서관에서 뽑아 온 “다른 방식으로 보기”
아직은 내가 그의 글을 이해하기엔 모자란 것 같다 다음을 기약하기로 했다. 그의 소설에 조만간 다시 한 번 도전해야겠다.
그리고 만나보고 싶은 책은
로맹 가리의 “흰 개”

언젠간 이 책의 목록들에 적힌 책들을 다 만날 수 있길
그보다 더 바라는 것이 있다면, 나의 글말로 정리해볼 수 있길

글쓰기는 공들여 말하기
읽기는 공들여 듣기

책 표시에 등장하는 히잡을 쓴 여인처럼 꽁꽁 얼어 붙은 세상 한가운데 앉아 기어코 책을 읽는 사람, 타인의 말을 공들여 듣는 사람이 존재하리라 믿어요.

01 무서록, 이태준 고수의 맛 - 19
02 호밀밭의 파수꾼, J.D. 샐린저 정말, 굉장히, 엄청난 25
03 사랑의 단상, 롤랑 바르트 사랑의 바이블 - 31
04 박용래 시전집, 박용래 우는사람-37
05 봉별기, 이상 속아도 꿈결 속여도 꿈결 45
06 다른 방식으로 보기, 존 버거 다르게 보면 다른사람이 된다- 51
07 내 방 여행하는 법, 그자비에 드 메스트르 누구도 못 말리는 여행-57
08 헬렌 니어링의 소박한 밥상, 헬렌 니어링 이것은 요리책이 아니다-63
09 사양, 다자이 오사무이 세상의 공기와 햇빛 속에서 살기 힘듭니다- 69
10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 안톤 슈낙 슬픔은 영혼의 운동이다-75
11 장자, 장자
12 연인, 마르크리트 뒤라스
13 진달래꽃, 김소월
14 나르치스와 골드문트, 헤르만 헤세
15 침묵의 세계, 막스 피카르트
16 나는 왜 쓰는가, 조지 오웰
17 슬픔이여 안녕, 프랑수아즈 사강
18 화사집, 서정주
19 동백꽃, 김유정
20 변신, 카프카
21 삼십세, 잉에보르크 바흐만
22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루이스 캐럴
23 수상록, 미셀 드 몽테뮤
25 여름의 책, 토베 얀손
26 빌뱅이 언덕, 권정생
27 시는 내가 홀로 있는 방식, 페르난두 페소아
28 로미오와 줄리엣, 윌리엄 셰익스피어
30 월든, 헨리 데이비드 소로
31 젋은 베르테르의 슬픔, 요한 볼프강 폰 괴테
32 모자, 토마스 베른하르트
33 슬픈 인간, 나쓰메 소세키 외
34 섬, 장 그르니에
35 흰 개, 로맹 가리
36 스토너, 존 윌리엄스
37 은유로서의 질병, 수전 손택
38 밤엔 더 용감하지, 앤 섹스턴
39 어린 왕자, 앙트안 드 생텍쥐페리

고전이란 해석으로 탕진되지 않은 채 온전하게 살아남은 책입니다. 읽고 또 읽어도 닳지 않는 책입니다. 오랫동안 사람들 입에 오르내려도 소문을 등지고 커다래지는 책입니다. 우리 곁에 유령(교차로의 유령!)처럼 남아 일상에 스며드는 책입니다. 작가는 죽고 없는데 이야기는 살아남아 여전히 세상을 여행하는 책입니다. 시간의 상투성과 세월의 무자비함을 견디고 목소리의 생생함을 간직한 책입니다.

고전에는 올바른 길이나 훌륭한 선택법이 나오지 않습니다. 어쩌면 길을 잘못 든 사람이 ‘계속 길을 잘못 가는 방법’이 나와 있을지 모르지요. 시행착오가 없는 삶. 그런게 있을까요? 우리가 고전을 읽어야 한다면 ‘잘못된 길을 열심히 걸을 때 우리가 얻는 가치’를 위해서인지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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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은 빛난다 - 허무와 무기력의 시대, 서양 고전에서 삶의 의미 되찾기
휴버트 드레이퍼스 외 지음, 김동규 옮김 / 사월의책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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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하고 무기력한 세상에서 우리의 삶이 빛날 수 있는 방법을 고전에서 찾아보려 시도한 책!

에필로그
빛나는 모든 것들
늙고 지혜로운 스승에게 오랫동안 가르침을 받아온 두 제자가있었다. 어느 날 스승이 말했다. "제자들아, 너희들은 이제 세상에나갈 때가 되었다. 세상의 모든 것들이 빛난다는 사실을 발견한다면, 너희들의 인생은 복될 것이다."
제자들은 아쉬움과 흥분이 뒤섞인 채 스승을 떠나 각자의 길로 갔다. 여러 해가 지난 후 그들은 우연히 다시 만나게 되었다. 그들은 서로를 다시 만난 것에 행복해했고, 상대방이 어떻게 살았는지를 들으려는 기대감으로 들떴다.

첫 번째 제자가 두 번째 제자에게 시무룩하게 말했다.
"나는 세상에 있는 많은 빛나는 것들을 보는 법을 배웠지. 하지만 여전히 불행하네. 슬프고 실망스러운 것들 역시 많이 보았기에스승님의 충고를 따를 수 없다고 느낀다네. 아마 나는 결코 행복과 즐거움으로 충만해질 수가 없을 것 같으이. 솔직히 말해서 모든 것들이 빛난다는 것을 발견할 수 없었으니까 말이야."
두 번째 제자는 행복감에 반짝이며 첫 번째 제자에게 말했다.
"모든 것들이 빛나는 건 아니라네. 하지만 빛나고 있는 것들은 모두가 그러하지."

기능만을 생각한다면 어떤 컵, 어떤 커피여도 상관없다. 즉잠을 깨우는 기능만 있다면, 커피 대신 각성제나 담배 또는 마약을택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렇듯 언제든 대체 가능한 것은 극소량의 의미와 가치밖에 갖지 않는다. 또한 이렇게 인간 주위의 모든사물이 대체 가능한 것이 되면, 그런 상황은 그것들을 이용하는인간마저도 대체 가능한 존재로 만든다. 어느덧 사물도 사람도 의미를 잃게 되는 것이다. 커피가 잠을 깨우는 기능만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새로 시작된 아침에 감사하며 하루를 준비하고 타인과함께 여유를 즐기는 것이라면, 그래서 커피 마시기가 분별력이 요구되는 일종의 빛나는 의례다도道가 그렇듯이와 같은 것이된다면, 커피 마시는 모든 단계와 절차는 중요한 의미를 갖기 시작한다.
커피가 인체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과학적 설명은 커피와 커피마시는 행위를 얼마만큼이나 설명해줄 수 있을까? 어느 과학자가특정 기분을 만들어내는 커피의 효능을 해명했다고 치자. 그렇다면 커피에 함유된 특정 화학물질-예컨대 카페인-을 투여하는것으로 커피마시기를 대신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경우에도 커피와커피 마시는 제반 행위들은 사라지고 카페인만 남는다. 같은 방식으로 과학적 설명에만 의존한다면, 바흐의 칸타타는 사라지고 주•파수만 남으며, 고흐의 자화상은 사라지고 화소만 남는다. 결국

인간마저 사라지고 신경 뉴런간의 화학물질이나 유전자 배열의메커니즘이라 밝혀진 과학 법칙만이 남게 된다.
근대 이후의 허무주의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신을 인간으로, 인간을 지식으로 대체하는 과정에서 무의미만을 양산한 셈이다. 신을 추방하면서 성스러움마저 쓸어버린 것이 근대인의 실수였다.
그러나 정확히 말해서 성스러움은 상실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세속화 시대에도 성스러운 자리는 남아있다. 우리가 아직 자각하지 못했을 뿐이다. 허무의 높은 깊어만 가지만, 아직 탈출할 희망은 남아있다. 성스러움의 흔적은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변형된 상태지만, 여전히 이곳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허무주의를 극복하는 방법은 성스러움을 다시 밝히는 길이라 말할수 있을 것이다. 모든 것들이 의미로 빛나기 위해서는 성스러움을다시금 불러와야 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성스러움을 다시 불러올 수 있을까?

저자들이 제출한 답은 다신주의polytheism라는 것이다. 다신주의라는 말에는 다시 두 가지 강조점이 있다. 첫째, ‘다多‘신주의라는 말에는 전체주의, 환원주의에 대한 경계의 의미가 담겨 있다.
서양 전통철학과 유대-기독교적 전통은 일신주의monotheism 편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일신주의는 의미의 다양성을 하나로 축소시킬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예컨대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에서 헬레네는 남편과 자식을 버리고 젊은 남자랑 도망간 행위를자랑스럽게 말하는 장면이 등장하는데, 도덕의 관점 내지 가정을수호하는 헤라 여신의 관점에서 보면 지탄받을 일이지만 미의 관점에서 보면 이해 가능한 행위로 정당화된다. 이것은 헤라 여신만있는 것이 아니라 아프로디테 여신도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이 점에서 다신주의는 서로 충돌하고 경쟁하는 복수적인 믿음체계를 인정하고, 각각을 충분히 고려하는 가운데 사태에 유연하게

대처하는 것이 현명한 일임을 함축한다. 그렇다면 다신주의는 일단 성스러운 신의 자리에 지금껏 앉아있었던 것들과 앞으로 앉게될 모든 신들을 허용한다는 말이다.
둘째, 다신 ‘주의라는 말에는 신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여기에서 신은 앎으로 해소되지 않는 믿음체계를 뜻한다. 동시에 인간이 주도할 수 없는 타자적 영역이 존재함을 의미한다. 어떤 사람이 행위를 하고 목적한 바를 이루는과정에는 행위주체가 통제할 수 없는 영역이 숨어있다. 예컨대 가요 경연에 출전한 사람은 결과가 어떻게 나올지 완벽히 예상할수 없으며, 또 노래를 목적의식적으로 부르기보다는 망아忘我의몰입상태로 부르는 편이 더 나을 수 있다. 위험에 빠진 사람을 구해낸 영웅들이나 창작 활동을 하는 예술가, 현란하고 초인적인 기술을 선보이는 운동선수들은 모두 자신이 어떤 의도나 목적으로행했는지를 정확히 모른다. 그들은 전승된 문화, 오랜 시간 동안의 연습, 또 미지의 힘에 이끌려 즉각적으로 행한다. 행위 주체의관점에서 볼 때, 그것은 무엇이든 주체의 통제 바깥에서 벌어진일이다. 우리의 행위와 사건에는 이처럼 타자적인 계기가 언제나동반한다. 이 모든 것을 아울렀던 말이 ‘신‘이다. 그리고 이런 신에대한 믿음 속에서 경이와 감사의 마음도 생겨날 수 있다. 그런 마음에서만 의미도 증폭될 수 있다.
다신주의라는 말의 두 의미는 모두 인간 중심주의, 주체 중심주의를 경계하고 있다. 그러면서 다신주의는 타자성을 소중히 살

리려고 한다. 의미는 인간 혼자만으로 형성되지 않는다. 또한 의미는 한 개별 주체의 힘만으로 형성되지 않는다. 신으로 표현되는 인간 이외의 타자 내지 자연과 함께 다수의 주체가 어우러지는 과정에서 의미는 발생한다. 다신주의에서 공동체가, 그리고 공동체 구성원들이 공유하는 문화가 중요한 까닭이 여기에 있다. 이속에서 작지만 의미 있는 목소리들이 커다란 파문을 이루며 확성된다. 과거 아이스킬로스의 비극이 공동체 구성원들 사이에서 상연되어 빛을 발하듯이, 현대에는 ‘붉은악마‘의 응원과 촛불 집회가 빛을 발한다. 그 속에서 개개 구성원들은 자신이 누구이고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분명하게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다신주의에도 여전히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공동체 중심주의가 열광주의로, 종국에는 파시즘 비슷한 것으로 빗나갈 위험이 있기때문이다. 여전히 그것도 일종의 ‘중심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한 셈이다. 그래서 저자들은 다신주의에 대한 논의에서 메타 포이에시스에 대한 논의로 넘어간다.
저자들은 의미를 밝히는 성스러움이 세 차원에서 일어난다고본다. 그들은 그것을 퓌시스physis, 포이에시스poiesis, 메타 포이에시스meta-poiesis 라고 말한다. 역사상 지금까지 앞의 두 가지 차원이 일어났고, 이제 마지막 메타 포이에시스 차원이 열려야 한다고보고 있다. 저자들이 보기에, 테크놀로지는 포이에시스의 일종이지만 성스러움을 파괴한다. 그러나 어쨌든 테크놀로지도 포이에시스이다. 또한 어느 누구도 전적으로 테크놀로지를 부정할 수 없

다면, 테크놀로지가 성스러움을 드러낼 수 있는 가능성은 남겨두어야 할 것이다. 그 가능성이 무엇인지는 저자들도 언급하고 있지않다. 여하간 퓌시스, 포이에시스, 테크놀로지, 메타포이에시스에관해서 간략히 정리해 보기로 하자.
첫째, 퓌시스는 그리스어로 ‘자연‘을 뜻하는 말이다. 번역을 해서 그렇지, 우리가 통상 알고 있는 자연 개념과는 조금 다르다.
퓌시스의 근원적인 의미는 생성과 소멸, 드러남과 사라짐의 강렬한 교차에 있다. 밤하늘에 순식간에 반짝였다 사라지는 별똥별이나 봄에 신기하게 움텄다가 늦가을 어느 날 갑자기 시드는 풀잎처럼, 퓌시스는 빛과 어둠의 강렬한 대조 속에서 사유되어야 할개념이다. 스피노자가 신이 곧 자연이고 자연이 곧 신이라고 생각했던 것처럼, 그리스적 자연은 신적인 것이다. 나타났다 사라지고이내 또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은 신들이 세상이라는 연극무대에 번갈아 등장했다가 퇴장하는 모습으로 상상할 수 있다.
그래서 위에서 말한 다신주의는 일차적으로 퓌시스의 다양한 모습임이 판명된다. 이 퓌시스의 차원이 성스러움의 근간이다. 허무주의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먼저 이것을 살려야 한다. 하지만 시스만으로는 안 된다. 왜냐하면 퓌시스를 참칭하는 인간중심주의가 존재할 수 있고, 퓌시스만으로는 세상에 의미가 충만해지기 어렵기 때문이다.
둘째, 포이에시스는 그리스어로 ‘창작‘을 뜻하는 말이다. 플라톤에 따르면, 그것은 없던 것을 있게 만드는 기술을 뜻한다. 일반적

으로 그것은 인간의 제작술을 뜻하는 말로 사용된다. 그런데 저자들은 하이데거에게서 영감을 받아 포이에시스를 퓌시스에 가깝게 해석한다. 즉 퓌시스가 감춰진 모습을 드러내는 힘이듯이,
포이에시스는 이전까지 감춰진 것을 인간의 손으로 현상하도록만드는 기술이다. 시스의 위용을 더욱 잘 드러내는 인간의 능력이 포이에시스인 것이다. 이런 점에서 창작은 기독교적 신과 연관된 ‘무로부터의 창조‘가 아니라, 퓌시스의 바탕 위에서 시스를 더 잘 드러내는 창작이라 말할 수 있다. 가령 운동선수처럼 인간에게 감추어진 몸의 재능을 극대화한다거나, 예술가처럼 작품을 통해 이전에는 볼 수 없던 것을 보여준다거나, 아니면 장인처럼 재료가 지닌 특성을 최대한 드러내는 기술이 포이에시스다. 이런 창작적 활동을 통해서 인간은 자연을 잘 이해하고, 그것의 의미를 더 풍요롭게 드러낸다.
셋째, 테크놀로지는 원래 포이에시스와 밀접한 관계에 있던 개념이다. 그 말의 어원인 ‘테크네techne‘는 포이에시스와 거의 같은뜻을 지니고 있었다. 둘 모두 퓌시스를 드러내는 인간의 활동을뜻한다는 점에서 일치한다. 하지만 근대 이후 테크놀로지 개념은변화한다. 이제 ‘자연의 결‘에 ‘따라‘ 창작하는 포이에시스와는 달리, 테크놀로지는 인간을 중심으로 자연을 통제하고 지배하는 기술로 탈바꿈한다. 테크놀로지 시대로 진입하면서 포이에시스인 목수가 대패질하면서 살폈던 나뭇결과 옹이, 그 지역 나무들의 특성, 나무를 키운 토양과 기후 등등에 관한 앎은 사라져가고

있다. 거침없이 자를 수 있는 전기톱을 가진 사람에게 이전의 도수가 가졌던 앎 따위는 더 이상 익힐 필요가 없다. 더 좋은 녹치를 만들기 위해서 다양한 맛으로 구별되던 물은 사라지고 물을구성하는 화학물질만 남게 된다. 근대 이후 테크놀로지는 시스의 극히 작은 일면만을 극대화했다. 왜 그랬을까? 인간을 위해서였다. 그러나 곧 인간을 위한 것도 아님이 밝혀진다. 왜냐하면 인간마저 복잡한 수식과 법칙, 유전자 지도로 분석되어 결국 사라지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과학기술에 매혹된 과학맹신주의자들은 또 다른 차원의 일신주의자이며 종국에는 허무주의자가 되지않을 수 없다. 결국 테크놀로지는 인간의 편의를 위해 퓌시스의일면만을 배타적이고 강압적으로 드러냄으로써 도리어 퓌시스를철저히 은폐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마지막으로 드레이퍼스와 켈리는 메타 포이에시스를 제안한다.
메타 포이에시스란 포이에시스처럼 퓌시스를 최선의 상태로 드러내면서도 동시에 여전히 남아있는 인간 중심주의의 흔적을 경계하는 태도를 뜻한다. 다시 말해서 메타 포이에시스는 앞서 언급한퓌시스, 포이에시스, 테크놀로지 가운데 어느 하나에 얽매이는것이 아니라 그들 사이에서 절묘한 균형을 잡는 기술이고, 다른것으로 부단히 옮겨meta 다닐 수 있는 기술을 뜻한다. 그것은 예컨대 군중과 하나가 되어 일체감을 형성했다가도 어느 순간 냉철하게 빠져나올 수 있는 능력이자, 군계일학의 한 인물에 열광했다가도 파시스트와 훌륭한 정치가를 분별할 수 있는 안목이다. 스마트폰과 GPS를 애용하다가도 때로는 그것들을 과감하게 끄고서 손으로 편지를 쓰고 창밖의 경치를 주의 깊게 살피는 지혜다. 그래야만 허무의 암흑이 걷히고, 모든 것들이 빛날 수 있다.

우리 것으로 만들 수 있다면, 이 성스러움의 개념은 퓌시스의 혐오스런 출현을 막는 동시에 그것을 최고의 상태로 유지해줄것이다. 퓌시스의 위험성을 막는 방안을 알아보기 전에, 우리는먼저 우리 문화의 언저리에 여전히 이용 가능한 성스러움의 관례들이 있는지 검토해볼 필요가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퓌시스를 적절한 위치에 두기 위한 기초를 설계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육성 활동은 예로부터 포이에시스poiesis*라는 말로 불려왔다. 약 1백 년 전까지만 해도 우리를 육성하고 함양하는 포이에시스적 실천은 사물들을 다루는 방식의 핵심을 이루고 있었다. 이런 포이에시스적 실천 즉 창작적poietic 활동은 특히 사물을 최선의상태로 만드는 장인의 기술에서 흔히 볼 수 있었다. 그것은 고대때부터 문화에 간직되어온 실천으로서, 호메로스의 세계에서는대장장이 신인 헤파이스토스가 사물들을 빛나게 만들었고, 당시

그리스인들은 그것들에 대한 경이감에 사로잡히곤 했다. 그러헤파이스토스는 호메로스의 만신전에서 주변 인물이었다. 아이스킬로스에 이르러서야 아테나 여신의 창작 스타일이 등장하여문화를 세련되게 만들었고, 존재하는 모든 것들에 대한 이해를조직했다. 이처럼 주어진 의미들을 최선의 것으로 연마하는 장인적인 창작 활동에 대한 이해는 19세기 말까지 살아 있었고, 그럭저럭 괜찮았다. 하지만 우리 테크놀로지 시대에 그것은 여러모로공격을 받고 있는 중이다.
우리 시대의 일반적 경향이 창작적 기술의 발전과는 동떨어져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창작 능력이 여전히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영역들이 있다. 예를 들어 야구나 테니스 기술 또는 피아노 연주기술은 지금도 전통적인 방식으로 전수된다. 연습은 운동선수나 음악가로 하여금 특정 상황에 반사적으로 반응하는 방법-왼쪽 땅볼, 3옥타브 주법 등을 익히게 해준다. 그리고 우리는 이런 연습을 바탕으로 초심자가 그 분야에서 기술적으로 숙달되기를 기대한다. 그러나 이런 학습법은 매우 단조롭고 고된 것이어서,
그 과정을 통해 얻는 반사적 기술은 고생의 대가치고는 너무 사소해 보인다.
사실 기술은 이런 과정이 보여주는 것보다 훨씬 풍부한 현상이다. 우리는 기술적 성취가 물리적 능력의 단순한 습득 이상을 내포한다는 것을 지적해볼 수 있다. 하나의 기술을 배운다는 것은세계를 다르게 보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이런 기술 개념, 즉 장인적 숙련의 개념은 오늘날보다 훨씬 광범위하게 퍼져 있었다. 우리는 기술을 주로 기술적 숙련으로 이해하고 있지만, 수레바퀴 장인은 적어도 세 가지 점에서 이런 생각을넘어선다. 빼어난 수레바퀴 장인으로서 거의 마지막 인물인 조지스트는 100년 전쯤 전통적인 기예 개념에 대해 다음과 같은 글을 남긴 바 있다"

나는 무늬만 목재인 것들은 절대로 쓰지 않는 구식 일꾼들을 안다.
그런 목재는 일에 전혀 적합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안다. 숙련된 일꾼은 결심 판사와도 같다는 것을. 왜냐하면 나무는 대패(지금은 거의 사용되지 않지만)나 도끼(역시 폐물이 된)아래에서 이제까지 발견되지 않았던 성질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나 자신의 손으로 느꼈기에 나의 눈으로 아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문외한에게 가르칠 수는 없다. "채찍처럼 질긴"
톱밥과 "당근처럼 쐐기꼴을 한 톱밥의 차이를 어떻게 가르칠수 있으며, "썩은" 느낌과 "푸석푸석한 느낌의 차이를 어떻게설명할 수 있겠는가? 참나무건 너도밤나무건 이런 차이들은다 고르게 있다. 하지만 실제 작업을 해본 사람들만이 그것을안다20첫째로, 수레바퀴 장인은 목재 자체에 대한 숙련된 이해를 가지고 있다는 점부터가 다르다. 스터트가 여기서 강조하고 있는 부분은 숙련된 운동선수에게서 우리가 보는 부분과 같은 것이다. 순간적으로 골대를 감지하는 러닝백이 그렇듯이, 다년간의 경험을쌓은 장인은 숙련된 기술 없이는 볼 수 없는 차이들을 분간해낸다. 그런데 스터트는 더 나아가 우리가 이제껏 주목하지 못한 부분, 즉 작업자의 능력과 그가 분간해내는 사물의 속성 사이의 관계에 대해서도 지적한다. 스터트에 따르면, 목재는 도끼나 대패를거치면서 이전에는 보여주지 않은 성질들을 드러낸다. 우리가 시각적으로 이런 차이를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우리 손으로 그

것들을 느꼈기 때문이다. 이처럼 쓸모 있는 나무를 분간해내는이 능력은 문외한에게 가르쳐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그것은 나무의 빛깔이나 결 등 외양상의 특징을 분간하는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보다는 나무가 도끼나 대패에 어떤 적성을 보이는지를 즉시 알아챌 수 있는가의 문제이며, 바퀴로 쓰일나무가 마차 무게를 견뎌낼지 견뎌내지 못할지를 즉각 알 수 있는가의 문제이다. 당시 환경에서 이런 차이를 분간하기 위해서는나무를 쪼개고 톱질하고 대패질하는 기술이 우선 필요하다. 그리고 바퀴 형태로 짜서 농부의 필요에 맞게 마차에 끼우는 솜씨또한 필요하다. 이런 기술적 통찰력은 본질적으로 실천 속에서만발현된다.
수레바퀴 장인의 이런 통찰 속에는 어떤 신비스런 점도 없고 마법적이거나 초자연적인 요소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현상은 뭔가 우리에게 계시해주는 점이 있다. 왜냐하면 이 현상은 우리가 누구인지를 전혀 새롭게 이해하도록 하는 실마리를 제공해주기 때문이다. 수레바퀴 장인은 나무의 쓰임새라든지 성질 등의미 있는 차이를 나무 속에서 발견하지 자기 자신에게서 발견하지 않는다. 숙련된 장인은 톱밥이 "당근처럼 쐐기꼴"을 했는지를결정하지 않는다. 이것은 데이비드 포스터 월러스가 계산대 줄에서 짜증내는 여인을 보고 가족 중 누군가 병원에 입원했을 거라고 단정하는 방식과 아주 다른 것이다. 오히려 문제는 세상 속으로 나가는 것이다. 장인의 과제는 의미를 만드는 데 있는 게 아니

라 기술을 자기 내부에서 육성하는 데 있으며, 이미 주어져 있는 의미를 분간하는 데 있다.
이런 현상에는 또 다른 측면도 있다. 수레바퀴 장인이 차이를구분하는 능력만을 가진 게 아니기 때문이다. 스터트는 이 점을분명히 알고 있었다. 그에 따르면, 잘 숙련된 장인은 작업하는 모든 나무덩어리를 구별할 수 있을뿐더러 그것들이 제각기 다른 특성과 개성을 가진다는 것을 이해한다. 각각의 나무덩어리는 늘 앞서 만진 것과는 다른 어려움을 가져다주며, 이전 것과 다른 취급을 요한다. 나무의 진짜 장인이 되려면 그것을 다루는 데 어떤 작업이 필요한지를 정확하게 인식할 수 있어야 한다.
옛날 장인에게 나무가 지닌 저항성을 매정하고도 몰상식하게다루는 전기톱 따위란 없었다. 나무는 기계의 먹잇감이 아니요, 무력한 희생물도 아니었다. 오히려 나무는 그것을 잘 달랠줄 아는 사람에게 자신의 미묘한 덕을 허락하곤 했다. 마치이해심 많은 친구와 함께 일하듯이 그런 장인과 협력해서 일했다. 21스터트의 설명은 기술에 대한 두 번째 개념을 보여준다. 장인이다루는 각각의 나무덩어리는 그에게 유일무이한 것이다. 더 나아가 각각의 나무를 다루는 작업 상황들도 그에게는 언제나 유일무이하다. 이 말은 장인이 자기 행위를 미리 계획하지 않는다는

것을 뜻한다. 즉 나무를 다루는 장인의 기술은 기계적이고 자동•적으로 반응하는 활동이 아니라, 지성과 유연성을 지닌 활동이라는 얘기다. 그의 재능은 실천을 통해서 구현되며, 순간순간마다달라진다. 아마도 똑같은 방식으로 작업을 반복하는 일은 장인에게 없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기술의 개념은, 각 상황들의 유일성이장인에게 성스러운 차원을 열어준다는 점이다. 스터트의 설명에따르면, 각각의 나무덩어리들은 서로 구별되는 자기만의 특성을가지기 때문에 장인은 작업하는 나무와 친밀한 관계를 맺는다.
나무의 덕성은 이처럼 보호받고 육성되는 가운데 드러난다. 나무에 대한 이런 친밀한 감각은 장인에게 나무에 대한 배려와 존경의 느낌을 불러일으킨다. 하지만 이런 느낌은 작업장에서 절단되고 건조되는 나무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나무는 그것을 키운장소가 있으므로, 장인은 그곳의 토양, 지형, 수원에 대해서도 친숙해진다. 그는 또한 날씨와 계절에 대해서도 자세히 안다. 왜냐하면 이런 요소들로 인해 나무들은 제각기 장인의 톱에 달리 반응하게 되기 때문이다. 장인은 겨울에 벌목한 나무와 늦봄이나여름에 벌목한 나무의 건조 속도가 제각기 다르다는 사실을 잘안다.
결국 이렇듯 다양한 실천적 지식을 통해서 장인은 나무에 대한단순한 책임감을 넘어서, 자신이 사는 고장과 땅에 대한 유대감을 가슴 깊이 간직하게 된다. 실제로 스터트는 자기가 사는 땅과

고장에 대한 장인의 존경심을 분명하게 언급하고 있다. 특정 장소에 대한 이런 존경심은 기술적 숙련이나 반사적 반응과 같은 우리의 기술 개념을 훌쩍 뛰어넘는 것이다. 그것은 자신이 사는 곳에 대해 성스러움의 감각을 갖게 해주며, 궁극적으로는 우리 자신을 최고의 상태로 고양시켜준다. 스터트가 현대의 기술 발전과비교하면서 수레바퀴 장인이 자기 고장에 대해 갖는 존경심을 설명하는 부분은 상당히 설득력 있다. 땅과 더불어 일하는 장인의기술과 지성이 "매정하고도 몰상식한 기계로 대체됨에 따라, 땅에 대한 존경심도 사라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나무가 즐비한 지역과 거기 거주하던 영국인들은 서로 밀접한관계를 맺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관계를 통해 양육된 애정과존경-진짜 토박이가 토종 나무에 대해 느끼는 마음은 거의존경심에 가까운 것이다-은 이제 모두 사라지고 말았다. 게걸스런 탐욕들이 이 오래된 숲을 모독했기 때문이다. 나는 사물들이 경박한 마음으로 다뤄지는 것을 주변의 모든 것에서 보고 들었다. 나는 그런 경박함을 늘 혐오스럽게 여겼다. 나는 무거운 짐마차에 매인 말들이나 성당을 짓는 데 쓰이는 큰 돌을볼 때 그렇듯이, 그런 취급을 당하는 사물들에 고통스런 동정심을 느낀다.22즉 수레바퀴 장인에게 재료로 제공되는 나무는 단순한 물리적

속성들의 집합 이상의 것이다. 나무는 성당의 돌처럼 성스러운 것이며, 관심과 존경으로 다뤄야만 한다. 그렇게 대하지 않는 것은모독이다.
스터의 설명은 기술에 관한 설득력 있는 관념을 갖게 해준다.
스터트가 말하는 장인적 기술은 개인의 고립적이고 자동반사적인 기술 숙달과 달리, 전적으로 자기 지역과의 연대감 속에서 이루어진다. 훌륭한 관계들이 다 그렇듯이 한쪽은 다른 쪽을 최선의 상태로 만들어준다. 장인은 매정하고 몰상식한 기계가 아니라나무에 대한 지적 관찰자이기 때문에, 나무는 그에게 자신의 미묘한 덕을 드러낸다. 그러나 장인이 나무를 분간하는 능력을 함양하고 나무와 그 땅에 대한 존경심과 책임감을 갖는 것은, 나무가 이미 이런 덕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장인과 기술 사이에는 일종의 피드백 관계가 만들어진다. 양자는 상호 이해와 존경을 통해 서로를 함양해준다.23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런 장인과기술의 상호 육성에 대해 포이에시스라는 이름을 붙였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장인적 기술이 지닌 육성의 힘만으로는 퓌시스의 위험을 없앨 수 없다. 아무리 자신의 땅을 존경하는 수레바퀴 장인이라 해도 히틀러의 현란한 수사에 휩쓸리지 않기란 어렵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술이 사물의 의미심장한 차이를 드러낸다는 관념은 결정적인 중요성을 갖는다. 왜냐하면 사람들의 삶속에서 이미 작동하고 있지만 누구도 알아채지 못한 또 다른 종류의 창작적 기술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퓌시스의 위험스런 출현과300

자비로운 출현 사이의 의미 깊은 차이를 분별하는 더 높은 차원의 기술 말이다. 이런 기술을 습득한 사람은 군중으로부터 빠져나오는 것이 언제나 능사는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라는 정조에 휩싸여 2만 명의 사람들과 함께킹 목사에게 환호하는 현장에 있어본 사람에게는, 그곳에서 빠져나왔다는 것이 그리 자랑할 만한 일이 아니다. 그날 국립기념공원에 있던 모든 사람이 거기에서 벗어나 냉정한 숙고와 합리적 판단으로 반응하려고 했다면, 그 사건은 원래만큼의 영향력을 가지지못했을 것이고, 우리가 사는 세계는 더 가난해졌을 것이다.
그런 정조에 휩싸여야 할 때가 언제이고 빠져나와야 할 때가 언제인지를 깨닫는 것은 오늘의 세계를 사는 우리에게 결정적으로중요한 기술이다. 다른 기술이 다 그렇듯이 이런 기술을 습득하기 위해서는 위험을 감수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 위험이 무엇인지는 뒤에서 살펴볼 것이다. 그러나 당장은 그런 기술이 오늘의 문화에 유용한성스러움의 형태를 길러준다는 데 주목하기로 하자.
‘메타포이에시스‘, 우리는 그것을 이런 이름으로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세속 시대가 낳은 쌍둥이 위험에 빠지지 않도록 키를잡아준다. 즉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퓌시스의 성스러운 현상들을되찾게 함으로써 허무주의에 맞설 수 있게 해주는 한편, 퓌시스가 지닌 광적이고 혐오스런 측면에 맞설 수 있는 기술을 배양시켜 준다. 그러므로 이 세속적 허무주의 시대에서 잘 살아가려면,
열광하는 군중과 하나가 되어 일어나야 할 때가 언제이고, 발걸음을 돌려 그곳에서 재빨리 빠져나와야 할 때가 언제인지를 알아차리는 차원 높은 기술이 필요하다.

다. 더 나아가 이런 경험은 우리 자신을 GPS가 시키는 대로 일하는 자동화 장치로 변모시킨다. 이것 역시 세계가 존재하는 방식가운데 하나이며, 때로는 최선의 방식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것을삶의 목표로 삼는다면, 우리를 최고로 만들어주는 기예와 관심,
그리고 존경심과 경외감을 가질 기회는 사라지고 말 것이다.
가치 있는 분야의 일들에 관심을 갖고, 그 안에서 의미심장한차이를 드러내는 기예를 육성하는 것이야말로 테크놀로지적인삶의 방식에 저항하는 길이다. 그러나 우리는 누구를 사랑할지결정하는 일만큼이나 어떤 분야에 관심을 가져야 할지 결정하기가 어렵다. 무엇이 관심가질 만한 가치를 지닌 일인지 어떻게 알수 있는가?
우리가 알든 모르든, 이미 우리는 주변의 모든 일들에 관심을가지고 있는게 분명하다. 의미가 밝혀지기를 기다리고 있는 세계처럼 인간은 자신 속에 수많은 관시믜 양태들을 숨겨두고 있는 존재이기 떄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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