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리게 배우는 사람]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
-
느리게 배우는 사람 ㅣ 창비세계문학 30
토머스 핀천 지음, 박인찬 옮김 / 창비 / 2014년 4월
평점 :
신간평가단에서 토마스 핀천의 작품을 골랐을 때, 어떤 기대감이 있었다. 데뷔 전, 특히 대학 시절에 썼다는 초기의 단편을 수록했다는 면에서 독특한 기획이라고도 생각했다. 이 책을 막상 읽기 시작했을 때, 작가 서문을 제일 먼저 읽고 시작했는데, 다 읽고 난 후 서문을 읽지 않았더라면 이 작품의 반도 이해하지 못했으리라 생각이 들었다. 토마스 핀천이 지은 <느리게 배우는 사람>이란 의미는, 이 책의 작가 서문에도 적혀 있듯, "작가의 젊은 시절을 회상"하는 것에 있는 듯하다. 그의 초기 작품을 통해, 후학들이 그처럼 되지 않도록 진심 어린 조언도 잊지 않았다.
토머스 핀천은 문학과 과학의 경계에 서 있는 작가라고 책소개에서 보았다. 그를 찬사하는 말 중 하나가 "영어로 글을 쓰는 현존 작가들 가운데 최고"였는데, 막상 이 책을 다 읽고 난 후에는, 도저히 토머스 핀천이란 작가의 작품을 이해할 수 없었다. 1950년대의 무지에서 오는 시대적인 차이도 무시할 수 없었다. 그의 세계는 나와는 달라, 마치 내가 그보다 한참 아래 있는 어떤 땅에서 서식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는 너무 고차원적이고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곳에 서식해 있다. 그의 은둔생활은 그런 면에서 더욱 더 신비롭게 느껴진다.
전쟁과 전쟁 사이에서 태어난 작가라 그랬을까. 그의 작품에서는 유독 '허무함'이 많이 느껴졌다. 그것은 뭐라고 해야 할까. 어찌 보면 저항과도 같은 허무였고 또 어찌 보면 모든 것을 포기하는 허무처럼 느껴졌다. <이슬비>에서 러바인은 허리케인에 의해 죽은 시체를 수습하면서 죽음에 대한 어떤 저항을 했다고 느꼈다. 하지만 그는 그이상으로 적극적인 행동을 취하지 않는데, 죽음에 대한 무기력에서 오는 허무가 아니었나 싶다. 반면에, <로우랜드>에서 플랜지는 아내에게 대항 한 번 하지 못하고 집에서 쫓겨난다. 그리고 폐차장에 가서 만난 집시 소녀에게 이끌려간다. 그가 자율적으로 어떤 행동을 했는가, 생각하면 의문이 들 만큼 그가 수동적으로 느껴졌다. 젊음을 잃어가는 중년의 나이에서 그는 무기력을 느꼈던 것일까. 싱그러운 젊음을 잃어가면서, 아내에게 대들지 못하는 그런 나약함에 질려버린 것일까. 젊었을 때, 바다에 나아갔던 것을 회상하며 그는 바다를 바라본다. 바다는 그의 환상이며 그의 인생이다. 그리고 그가 만난 소녀는, 마치 바다에서 태어난 생명체처럼 느껴졌다. 어느 것이 환상이고 어느 것이 실재인지 모르는, 그 경계 사이에서 토머스 핀천이 말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이었는지 오래도록 고민했다. 삶과 죽음에서 떠도는 것이 인간의 생이라면 무엇을 가지고 살아야 할지 고민하게 해준 책이기도 했다. 비록 나는 토머스 핀천을 처음 접하긴 했지만 그의 초기 작품, 아니, 그의 작품 세계의 문을 열어준 이 책을 읽게 된 것이 무척 소중하게 느껴졌다. 어떤 작가의 작품을 접하는 것에 있어서 초기 작품은 때론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가 무엇을 주로 읽고 무엇을 보고 들었는지 알게 해주니까 말이다. 이 책에서 토머스 핀천의 군대에 있던 시절을 엿볼 수 있어 좋았다. 마지막 해설에서 보니 은둔자처럼 살아왔다고 하는 기이한 행적이, 그의 존재를 마치 소설처럼 환상과 실재 사이에 끼어 있게 했으니 말이다. 그런 은둔 생활이 그의 작품에 환상과 현실을 섞이게 했던 것일까.
<엔트로피> 역시, 모호한 환상을 품고 있었다. 엔트로피가 무엇인지 몰라 사전의 힘을 빌렸다. 이 작품은 특이한 구성을 갖고 있다. 3층에서 시끄러운 음악과 술과 정신 없는 파티를 하고 있고 4층에서는 어떤 질서에 확립된, 어떤 완벽한 세계를 보여주는 것만 같았다. 혼돈과 질서는 딱 분리된 뉘앙스를 풍겼고 마지막에 창문이 깨졌을 때 두 세계는 어떤 균형적인 감각을 맞추려는 시도를 보인 것만 같았다. 뒤에 역자의 해설과 함께 작품을 곱씹으며 소설의 제목인 엔트로피와 함께 소설의 내용을 가늠하려고 했지만, 생각보다 많이 어려운 작품이었다. 분리된 두 세계가 있다는 것은 확실하겠는데, 그것이 서로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이 엔트로피의 정의인지도 확실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3층에서 일어나는 시끄럽고 무질서한 파티가 현실처럼 느껴진다면 4층에서 일어나는 새의 죽음을 막으려는 한 학자의 시도는, 환상처럼 느껴졌다. 이처럼 내가 본 토머스 핀천의 작품은, 환상과 실재로 번갈아가며 보여지고 있었다.
<언더 더 로즈>는, 시대적 배경에 대한 지식이 있어야 더 재미있게 읽힐 것만 같은 단편이었다. 어떤 세대의 전환이 느껴지는 작품이었다. 스파이, 음모, 나름의 위트가 있어서 흥미로운 작품이라 생각된다. 몰드웝이라는 독일인 첩자는 전설처럼 느껴져 이 작품은 신비롭게 느껴지기도 하였다. 그렇지만 토머스 핀천이 이 작품을 통해 무엇을 말하고자 했는지는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안개 속에 무언가 있지만 그것이 정확히 무엇인지 알 수 없어 조금 답답하다.
하지만 <은밀한 통합>은 무척 좋았다. 이 작품을 읽고 나서야 토머스 핀천의 작품관이 뚜렷해졌다고 느꼈다. 그는 무질서 속에서 어떤 조화를 찾으려고 했던 게 아닐까. 죽음과 삶의 혼돈에서 그 둘을 똑바로 바라보고 양립하려는 작가의 고심이 담겨 있지 않을까 싶었다. 인종차별이라는 거대한 혼돈 아래, 팀과 그 친구들이 칼이라는 상상의 흑인 소년을 만들어내 '통합'을 이끌어내려고 했던 것처럼 말이다. 어른들에 대항하는 철 없는 소년들의 모습은 흑인 칼 매카피를 만나면서 그 목적이 더욱 뚜렷해지지 않았나 싶다. 그들이 말하는 스파르타쿠스 작전이란, 결국 노예제도에 대항하여 전쟁을 벌인 스파르타쿠스처럼, 어른들에 대항하여 인종차별에 대한 비난을 하려고 했던 건지도 모른다. 하지만 결국 그들은 어른들에게 패배를 했던 것일까. 공장이 다시 원래대로 가동되고, 마지막에 집으로 돌아가 안전할 수 없는 꿈자리로 들어가게 되었단 구절은, 결국 그들은 어른들과 같은 길을 걷게 되리란 암시가 되지 않을까 싶었다.
토머스 핀천의 초기 작품 네 작품과, 마지막에 수록된 <은밀한 통합>을 보며 토머스 핀천이란 작가세계가 통합되고 있었다. 그가 말하는 죽음, 혼돈, 허무와 같은 감정들은 어느 순간 빛과 희망과 조화와 같은 감정에 뒤섞였다. 그렇지만 마지막에 남은 것은 결국 아무것도 하지 않는 무기력이다. 이 무기력 앞에서 다시 고민을 해야 할 것이다. 저항할 것인지, 순응할 것인지. 토머스 핀천이 내게 준 답을 이랬다.
바다는 물결치긴 하지만 어떤 견고함을 갖고 있어서, 수평선으로 쭉 펼쳐진 회색 혹은 연한 청록색 사막과 황무지가 되곤 한다. 그래서 구멍줄을 따라 포면 위로 걸어나갈 수 있을 것 같고, 텐트와 충분한 식량만 있다면 그 길을 따라 이 도시 저 도시를 여행할 수 있을 것 같다. 제로니모는 이것을 메시아 콤플렉스의 특이한 벼녕으로 간주해, 플랜지더러 그러한 시도를 하지 말라고 아버지처럼 충고했다. 하지만 플랜지에게 그 광활한 흐린 유리 같은 평원은 단 한명의 인물만이 완전성을 향해 성큼성큼 가로질러 가도록 되어 있는 일종의 로우랜드였다._90~91페이지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