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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그림자라도 ㅣ 바일라 20
김진형 지음 / 서유재 / 2024년 9월
평점 :
처음엔 그저 평범한 성장소설인 줄 알았다. 중학교 1학년 아이들, 조별 활동, 서로 다른 성격, 그리고 우연처럼 엮인 사건. 그런데 책장을 넘길수록, 이 이야기는 단순한 우연이 아니라 ‘필연적인 마음의 충돌’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그렇게 나는 다섯 명의 아이들과 함께 오래도록 감춰졌던 ‘속마음의 문’을 열게 되었다.
하지만 이들 다섯은 그렇게 버려진 자리가 오히려 마음의 문이 열리는 출입구가 될 줄은 몰랐다. 서은중학교 1학년 7반 윤슬, 수영, 지우, 연아, 귤희. 이호 고택이라는 기피 유적으로 떠밀리듯 향한 아이들은, 저마다 다른 사연을 품은 인형 하나씩을 손에 쥐게 된다. 그리고 그 순간부터 감춰왔던 속마음이 형체를 갖고 나타나기 시작한다.
이 작품은 마치 현실을 정밀하게 확대해 놓은 작은 스노우볼 같다. 안을 들여다보면, 미세한 감정의 입자들이 부유하다가 어느 순간 하나의 이야기로 응결되어 떨어진다. 그 이야기들이 바로 ‘친구 관계’라는 예민한 감정의 지형도 위를 걷는 다섯 아이의 내면이다.
윤슬의 그림자 인형은 친구가 되고 싶었던 아이를 향한 간절한 마음이 때로는 관계를 망치기도 하는 걸 보여주었다. 관계 맺기에 서툴러 자꾸만 오해를 사는 그 모습이 낯설지 않았다.
귤희의 벌 인형은 삼각관계 속에서 감정의 중심에 서지 못한 아이의 억울함이자, 사랑을 잃은 자의 분노였다. 뾰족한 침이 꼭 마음 한 구석을 찌르는 것 같았다.
수영의 잠자는 인형은 내 안의 무기력, 죄책감, 외면하고 싶은 기억을 떠올리게 했다. 누군가의 울음을 외면하고 돌아선 날, 나도 그런 인형을 갖고 있었는지 모른다.
연아의 귓속말 인형은 설렘과 불안이 교차하는 관계의 민낯이었다. 한 사람의 관심에 기댔다가, 그 작은 틈에서 무너지는 마음의 경계를 보며 나 역시 움찔했다.
지우의 쌍둥이 인형은 우정의 균형이 깨지는 순간의 상실감을 고스란히 보여줬다. 좋아했던 만큼 실망도 크고, 이해하려 해도 지치게 되는 감정. 어른이 되어도 반복되는 일이었다.
이 책은 ‘친구’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다양한 감정의 뒷면을 집요하게 파고든다.
집착, 질투, 실망, 상실감… 어느 하나도 악의에서 시작된 감정이 아니다. 오히려 ‘조금 더 가까이 가고 싶어서’, ‘놓치기 싫어서’, ‘그냥 내 곁에 있어줬으면 해서’ 비롯된 마음들이다. 그러나 그것이 표현의 선을 넘는 순간, 관계는 금이 간다.
이 소설의 탁월함은 그 선을 넘기 직전의 순간, 혹은 넘은 뒤 후회하는 지점을 섬세하게 포착한다는 데 있다. 한 번쯤은 누구나 지나온, 하지만 아무도 말하지 않는 감정의 이면을 작가는 인형이라는 중간 매개를 통해 서늘하면서도 따뜻하게 보여준다.
어쩌면 우리는 모두,
누군가의 곁에 조금 더 가까이 가고 싶은 작은 인형 하나쯤은 품고 살아가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그 인형이, 여전히 마음 한구석에서 조용히 속삭이고 있는지도.
“괜찮아. 넌 그렇게나 애썼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