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물의 안타까움성
디미트리 베르휠스트 지음, 배수아 옮김 / 열린책들 / 2011년 7월
평점 :
절판


수컷들의 웃픈 세상사는 이야기

 

사물의 안타까움성

디미트리 베르휠스트 지, 배수아 옮김, 열린책들, 2011

 

지난 월요일, 매주 나가는 정기모임을 그만 깜빡 잊을 정도로 한 책에 푹 빠져 버렸다. 5분 단위로 터져 나오는 웃음을 주체할 수 없어, 도서관에서 집으로 장소를 옮겨서야 맘놓고 뒹굴어 가며 포복절도하며 읽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책 뒤쪽이 자꾸 줄어드는 것이 안타까워 수시로 남은 쪽의 두께를 재며 읽은 책이다. 맥주병 위에 사람얼굴을 얹은 표지부터 인상적인 디미트리 베르휠스트의 장편소설 사물의 안타까움성이다.

 

육담肉談으로 써내려 간 블랙코미디 같은 야성적인 이 낯선 벨기에 소설에 누군가는 "자전소설이 거둘 수 있는 최대한의 성취"라는 헌사를 붙이면서, 거칠게 압축하여 젊은 수컷이 기록한 진정한 수컷들의 이야기라고 표현했다. 열세 살 소년 디미트리의 시선을 따라가는 이 자전적 성장소설은, 무위도식하며 술로만 일관하는 막장 인생을 살면서도 ''처럼 군림하며 거칠 것 없이 야생마의 삶을 살았던 아버지와 삼촌 세대의 폭죽같은 인생에 대한 따뜻한 회상이다.

 

쥐꼬리만 한 할머니의 연금을 파먹으며 술과 여자에만 탐닉하는 4형제가 있다.(영화로도 만들어진 천명관 소설 고령화 가족이 얼핏 떠오른다) 그나마 우편배달부라는 정규직을 가진 아버지를 제외한 3명의 룸펜 삼촌들은 루저 중의 루저이고 더 갈 곳 없는 하층 인생들이다. 그러나 디미트리 눈에는 생강빛 수염을 가진 제임스 본드의 더 멋진 이복동생만큼이나 영웅이며 전설같은 남자들로 비친다. 자신들이 가진 모든 재능(이들에게 이런게 있긴한지 의심스럽긴 하지만)을 좋아하는 술과 도자기 몸매를 가진 여자들에게 바치는 데만 온통 써버리는 벨기에인 조르바같은 존재들이 그들이다. 그러나 미래가 없는 이들 가족들은 자연으로 돌아가는 소박하고 식물적인 삶 대신에, 도시에서 오토바이 엔진소리같은 동물적인 삶을 선택한다. 가난에 기죽지 않고 일상에 폭죽을 쏘아올리며, 매일매일을 불꽃놀이 같은 축제의 삶으로 바꾼다. 그야말로 도시에서 유목하고, 세속에서 출가하는 삶의 귀재들이다.

 

작가는 곳곳에서 존 레논이 존경한 미국 싱어송 라이터인 로이 오빈슨Roy Orbison에 대한 오마쥬를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특히 법원 집행관에게 TV를 압류당한 뒤 그날 밤 예정된 로이 오비슨의 컴백 공연 중계를 보기 위해 마을에 살고 있는 이란 이민자의 집에 맥주 한 박스를 들고 쳐들어가 벌이는 기상천외한 난장亂場이 펼쳐지는 4오직 외로운 이들만이는 압권이다. (난 로이 오빈슨을 이정재가 지금보다 더 젊은 남자였던 20여년전 출연했던 영화 젊은 남자에서 처음 알았다. 그의 노래 꿈속에서In Dreams’와 함께) 아버지가 갓 태어난 디미트리를 자전거 앞에 싣고 담배 연기 자욱한 술집을 돌아다니며 믿기 힘들 정도의 비상식적인 탄생 축하를 벌이는 대목(254-259) 역시 맨송맨송한 정신으로 읽기에는 아까운 장면 이다. 누군가 사랑하는 연인에게 어떻게 눈물과 정액 중 하나만을 골라 바칠 수 있겠냐고 한것처럼, 이 소설 역시 지뢰처럼 곳곳에 묻어 놓은 눈물과 웃음을 골라 딛는 것은 불가능하다.

웃음인가 하면 금새 눈물인 이런 괴물같은 소설을 옮긴이가 누군가 들여다 봤더니 배수아 그녀다. 1990년대 한국소설의 새로운 문법을 개척했다고 알려진, '배수아 소설은 작가의 이름을 가리고 봐도 알 수 있다'는 정평을 받는 그녀가 자신의 문체를 숨기고 능청맞게 풀어냈다. 예컨대 이런 대목에서는 밑줄을 긋지 않을 수 없다. “사람들은 대개 어느 정도의 불행을 자기 운명에 허용하는 경향이 있지 않은가. 불행에 버리고 말지 뭐. 그게 더 쉬우니까.”(243) “시인 한스 안드레우스를 떠올렸다. 그는 죽음이 임박했을 때 다음과 같은 말로 아내를 임종의 침상에서 물러가게 했다고 한다. <이만하면 됐으니까 가줘. 이제부터는 나 혼자서 치러야 하는 일이니까>”(270) 또 남자들만의 말 없는 교류가 이루어지는, 긴장과 애정이 씨줄과 날줄처럼 묘하게 겹치는 순간에 대한 묘사도 있다. “지금 우리 둘 사이에서 벌어지는 암묵적인 경쟁은 모든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서 일어나게 되는 원초적인 일이다. 누가 강자인지 가려내고야 말겠다는 이 끈질진 승부는 결국 나이에 의해서 판가름 나는 것이 보통이다. 아버지들은 아들의 손에 친부 살해의 무기를 직접 쥐여 주게 된다. 그러면서 아들이 자신을 능가해 주기를 간절히 바란다. 아버지를 무찌르기 위해 주먹 부대를 동원할 필요는 없다. 그의 자식이 어느덧 이렇게 늠름한 사내로 성장했다는 것을 보여 주어 만족감을 안겨 주기만 하면 그것은 곧 그 자신은 쇠락의 길로 접어들었다는 고통스러운 깨달음과 동격이 되니 말이다.”(228-229)

 

전세계 애주가들에게 복음같은 이 소설은 갓 끓여 내온 커피와 폭신한 케익과는 어울리지 않는다. 맥주를 병째 들이키며 읽는 게 제격이다. 그리고 우리는 안다. 사람은 신을 믿고 악마는 아직은 우리를 믿는한 가끔은 마셔줘야 한다는 걸. 금주협회(정말로 이런 단체가 있다면)는 예산의 절반 이상을 이 소설의 절판을 위해 써야 할지 모른다. 나 역시 소설을 읽는 내내 아쉬운대로 냉장고에 있던 체코 맥주로 대신했는데, 마지막 318쪽 읽기를 마쳤을 때는 필스너가 한 병도 남아있지 않았다. 벨기에 맥주 호가든을 사러 츄리닝 바람으로 슈퍼로 향했다. 눈발이 마지막 남은 은행잎을 위협하던 지난 월요일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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