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생각이 시야에 갇힌다. 억압받는 사람은 체계적으로 작동하는 사회구조를 보지 못하고 자신의 불행이 일시적이거나 우연한 문제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차별과 싸우기보다 "어쩔 수 없다" 며 감수한다. 유리한 지위에 있다면 억압을 느낄 기회가 더 적고 시야는 더 제한된다. 차별이 있다고 말하는 사람을 이해하지 못하고, "예민하다" "불평이 많다" "특권을 누리려고 한다"며 상대에게 그 비난을 돌리곤 한다. - P79
한가지 사실은 분명해진다. 유머가 사회적 맥락에 따라 달라진다는 점이다. 우리는 무엇을 유머로 받아들이는가? 우리는 어떤 내용을 보고 즐거워하는가? - P86
유머, 장난, 농담이라는 이름으로 다른 누군가를 비하함으로써 웃음을 유도하려고 할 때, 그 ‘누군가‘는 조롱과 멸시를 당한다. 그리고 그 ‘누군가‘는 ‘놀려도 되는‘ 특정한 사람들에게 집중되고 반복된다. 우리가 누구를 밟고 웃고 있는지 진지하게 질문해야 하는 이유이다. - P91
능력주의를 표방하는 사람이 더 불공정할 수 있다니 왜일까? 자신이 편향되지 않다고 여기는 착각 때문이었다. 사람들은 자신이 객관적이고 공정하다고 믿을 때 자기확신에 힘입어 더 편향되게 행동하는 경향이 있다. 편견에 고삐가 풀리는 것이다. - P112
한편으로 미국의 이야기는 엄청난 악으로 여겨지는 부끄러운 인종분리의 역사가 어찌 보면 사소한, ‘불쾌한 감정‘에서 시작될 수 있음을 생각하게 한다. 그리고 그 감정을 어떻게 다루는지에 따라 역사가 달라질 수 있다고 알려준다. 어떤 집단에 대한 혐오감을 어쩔 수 없다고 여기며 마음 가는 대로 행동할 때 불평등은 더욱 깊어진다. 안타깝지만 법과 규범 없이 개인들의 자발적 합의를 통해 평등이 이루어지기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불평등한 체제를 유지시키는 우리 감정의 힘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 P127
한가지 교훈은 분명하다. 때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언어도 사용하는 사람에 의해 상처를 주는 잔인한 의미로 바뀔 수 있다는 사실이다. 누군가에게 다문화는 낙인이고 차별과 배제의 용어가 되었다. 한 중학생의 말처럼 말이다. "종례 뒤 선생님이 ‘다문화 남아!‘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다. 나도 이름이 있는데 ‘다문화‘로 부르셨다. 선생님이 내가 마치 잘못을 했다는 듯 말씀하셔서 큰 상처를 받았다." - P133
모두에게 표현의 자유가 있다고 말하지만, 실제로 다수자와 소수자의 자유는 같지 않다. 존 스튜어트 밀John Stuart Mill이 『자유론』에서 지적하듯, 다수자는 소수자의 의견을 거침없이 공격할 수 있다. 반면 소수자는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표현을 순화하고, 상대방에게 불필요한 자극을 주지 않도록 극도로 세심한 주의" 를 기울이도록 요구된다. 다수자는 소수자의 이야기를 듣지 않으면서 잘 말하라고 요구한다. 그렇게 사실상 침묵을 강요한다. - P1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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