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있는 세계사 교과서 1』 중, 5장 '십자가를 들고 가는 유럽' 을 공부하면서 정리해 본 도표이다. 로마제국의 분열부터 중앙집권국가의 형성까지 주요 사건을 살펴보았다.

 

 

 

 

 

<EBSi 세계사 개념 다지기>

 

흔히 말하는 ‘중세 천년’은 유럽의 시대 구분이다. 기억하기 좋기로는 서로마 제국의 멸망(476)에서 비잔티움제국의 멸망(1453)까지 약 1000년이다.

 

로마 제정 말기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비잔티움으로 수도(330)를 옮기며 로마 중흥을 꾀했다. 그러나 쇠퇴기로 접어든 로마제국은 395년 동로마와 서로마로 분열되었다. 대충 이탈리아 반도와 그 서쪽은 서로마가, 발칸반도와 그 동쪽은 동로마가 차지하였다. 게르만족에 의해 멸망한 서로마 지역은 현재의 서유럽으로, 천년을 더 지탱한 후 오스만 제국에 의해 멸망한 동로마 지역은 현재의 동유럽으로 발전하였다.

 

 

1. 천년의 제국 비잔티움

  

  <EBSi 세계사 개념 다지기>

 

동로마제국의 원년은 학자에 따라 이견이 있으나 330년을 기준으로 보는 견해가 우세하다. 비잔티움제국이라는 명칭은 후대의 서유럽 학자들이 붙인 이름이다.

  

 

<EBS중학 필독중학세계사>

 

비잔티움제국은 330년에서 1453년까지 유럽과 아시아를 잇는 무역의 중심지로 혹은 이슬람으로부터 크리스트교 세계를 지켜낸 방패막이로, 천년제국의 명성을 쌓았다. 서로마제국이 멸망하자 비잔티움제국의 황제는 유일한 로마 황제이자 크리스트교의 지배자가 되었다. 비잔티움제국은 황제가 정치의 수장이자 종교의 수장인 황제교황주의를 채택하고 중앙집권 체제를 구축하였다. 그러나 서유럽은 점차 비잔티움제국의 영향력으로부터 벗어나려 하였다.

  

  <EBSi 세계사 개념 다지기>

 

비잔티움제국의 최전성기는 6세기 유스티니아누스 대제 때이다. 유스티니아누스 대제는 이탈리아반도를 비롯하여 옛 로마제국 영토를 거의 회복하였다. 로마법의 전통을 이어 받아 <로마법 대전>을 완성하고 , 성소피아성당을 재건하였다. 유스티니아누스 대제의 아내인 테오도라는 비잔티움제국을 공동 통치하였다는 평가를 받을 정도로 유스티니아누스 대제를 훌륭하게 조력하였다.

 

 

  <EBSi 세계사 개념 다지기>

 

비잔티움제국은 사산왕조 페르시아 시대부터 이슬람 세력까지, 끊임없이 동양세계의 침략을 받았다. 11세기 이슬람 세계를 정복한 셀주크 튀르크가 예루살렘을 공격해 오자, 비잔티움제국의 황제가 서유럽의 교황에게 도움을 요청하여, 200년에 걸친 십자군 전쟁이 시작되었다.

   

 

<EBSi 세계사 개념 다지기>

 

비잔티움제국은 새롭게 이슬람 세계의 주인이 된 오스만제국에 의해 1453년 멸망하였다.

   

 

 

 

2. 또 하나의 크리스트교 세계, 서유럽

  

  <EBSi 세계사 개념 다지기>

 

중세 서유럽은 두 개의 축으로 지탱되었다. 게르만족이 장악한 정치제도와 로마 귀족이 차지한 크리스트교이다. 서유럽 국가는 두 세력의 연대로 성장하였다.

 

「중세는 '기독교 공화국 respublica christiana' 으로 규정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res'는 '일', 'publica'는 '공공의'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레스푸블리카 respublica는 정치적(세속적) 측면 , 크리스티아나christiana는 종교적 측면을 가리킵니다.  '레스푸블리카 크리스티아나'는 레그눔regnum과 사케르도티움sacerdotium의 결합으로 말할 수도 있습니다. 레그눔은 정치적 권위, 사케르도티움은 종교적 권위를 가리킵니다. 다시 말해서 중세 사회는 레그눔과 사케르도티움의 접합 구조 위에 세워진 사회입니다. 중세 사회에서 어떤 문제가 생기면 그것의 깊은 바닥에는 레그눔과 사케르도티움의 대립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아주 쉽게 표현한 말이 '두 개의 칼 two swords'이고, 이는 '황제의 칼'과 '교황의 칼'을 가리킵니다. 즉 중세 시대에는 황제의 세속적 권위와 교황의 종교적 권위가 끊임없이 서로 충돌했다는 것입니다.」 (역사고전강의 p189 )

  

 

<EBS중학 필독중학세계사>

 

그런데 왜 두 개의 칼이 손을 잡았던 것일까? 게르만족은 로마인에 비하면 야만족이었다. 중국 한족의 입장에서 유목민이 오랑캐였던 것과 같다. 오랜 로마의 통치 아래 로마시민이 된 서유럽인을 통치하기 위해, 게르만족은 로마교회의 권위를 필요로 했다. 로마교회로서도 보호해 줄 군대도 황제도 사라진 상황에서 정치적 보호자가 필요했다. 동로마제국의 간섭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도 로마교회는 게르만족과 손을 잡아야 했다.

 

이런 까닭으로 중세 유럽에 대한 교과서는 정치적 부분과 종교적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고, 2절에서는 먼저 게르만족의 정치 체제를 중심으로 서유럽 사회를 설명하고 있다. 물론 둘은 유기적으로 결합되어 있어 완전히 분리하여 공부하기는 어렵다.

  

  <EBSi 세계사 개념 다지기>

 

중세는 몇 시기로 세분화할 수 있는데, 모두 전쟁과 관련이 있다. 서로마제국을 멸망시키고 중세의 문을 열어젖힌 것은 게르만족의 침입이다. 훈족에 밀려 대이동을 시작한 게르만족은 로마제국 말기부터 로마용병으로 활동하며 로마제국의 정치에 영향력을 행사했다. 게르만 용병대장 오도아케르가 서로마제국을 멸망시킨 것은 갑자기 일어난 사건이 아니다. 게르만 용병은 로마제국의 다양한 영역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었기 때문이다.

  

  <EBSi 세계사 개념 다지기>

 

지도의 다양한 왕국을 세운 다양한 종족들은 모두 게르만족이다. 대부분의 게르만족은 로마영토를 통치하는데 실패하는데, 그 중 프랑크족이 성공했다. 프랑크족을 이끈 클로비스가 정통 로마가톨릭(아타나시우스파)으로 개종하면서 로마인들의 지지를 받았던 것이다.

  

  <EBS중학 필독중학세계사>

 

프랑크 왕국의 전성기는 8~9세기 카롤루스 대제 때이다. 카롤루스 대제는 로마교황으로부터 서로마제국 황제의 관을 받기도 했다. 서로마제국은 오래 전에 사라졌지만 프랑크왕국은 서로마제국의 이름을 받을 정도로 성장했다.

   

 <EBS중학 필독중학세계사>

 

카롤루스 대제가 죽은 뒤 손자대에 가서 프랑크 왕국은 분열했다. 게르만족의 전통대로 자식들에게 영토를 나누어 준 것이다. 나중에 서프랑크는 프랑스가, 동프랑크는 독일이, 중프랑크는 이탈리아가 된다.

  

  <EBS중학 필독중학세계사>

 

이 분열을 틈타 이민족들이 침략했다. 사방에서 침입이 있었지만, 가장 무서운 적은 ‘노르만, 바이킹’ 이었다. 노르만은 스칸디나비아 반도에서 내려온 ‘북쪽의 게르만족north man’이다.

 

노르만족이 점령한 지역은 키예프공국과 프랑스 북부의 노르망디공국이며, 영국에 노르만 왕조를 세우기도 했다. 키예프공국은 나중에 러시아가 되었다.

 

  

  <EBSi 세계사 개념 다지기>

 

9~11세기에 걸친 100여 년 간의 노르만 침입은 서유럽 세계를 엄청나게 변화시켰다. 프랑크 왕국의 분열로 약해진 왕권이 더욱 약해지고, 성채와 무장을 갖춘 기사들이 스스로 영토를 보호하며 지켜나가는 자치제가 성립되었다. 중세의 상징인 봉건제가 확립된 것이다.

  

  <EBS중학 필독중학세계사>

 

봉건제는 정치적 측면과 경제적 측면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정치적으로는 주군과 봉신(가신) 관계 즉 주종관계가 성립되었다. 봉신은 주군을 섬기고 주군은 봉토를 내리지만, 봉신의 영지 지배에 대해 어떤 간섭도 할 수 없다. 쌍무적 계약 관계에 기반 한 주군-봉신 관계는 지방분권 사회를 확립했다.

  

<EBS중학 필독중학세계사>

   

<살아있는 세계사 교과서 p125>

 

봉건제의 경제적 측면은 장원제도이다. 영주(봉신)와 농노의 관계를 바탕으로, 봉토를 운영하는 제도이다. 농노는 노예가 아니지만 거주이전의 자유 없이 영주의 장원에서 일정 기간 일을 하고 세금을 내야 했다.

 

 <EBS중학 필독중학세계사>

 

노르만족의 침입 후 봉건제가 확립되고, 11세기부터 서유럽은 중세 문화의 꽃을 피웠다. 인구와 생산력이 늘어나면서 상업과 수공업도 서서히 기지개를 켜기 시작했다. 부르그(도시)가 생기고 부르그에서 사는 수공업자를 중심으로 길드가 형성되었다. 농업 생산력도 증가했고 대학도 생겨났다. 11세기 로마네스크 양식이 유행하더니 12세기에는 고딕 양식의 건축물들이 하늘높이 세워졌다.

 

 <EBSi 세계사 개념 다지기>

 

 

 

3. 서유럽의 영혼을 지배한 카톨릭

 

3절은 중세를 지배한 또 다른 축인 크리스트교에 관한 내용이다. 313년 콘스탄티누스대제에 의해 공인을 받은 기독교는 392년에 로마제국의 국교가 되었다. 동서로마가 분열되고 서로마에는 로마교회가, 동로마에는 콘스탄티노폴리스교회가 각각의 교회를 대표하였다.  서로마제국이 멸망하자 로마교회는 보호자를 잃고, 프랑크족의 지배아래 살아남을 방안을 찾아야 했다.

 

 <EBS중학 필독중학세계사>

 

로마교회와 프랑크왕국은 서로 이해가 맞았다. 로마교회는 정치․ 군사적 보호자가 필요했고, 프랑크왕국으로서도 옛 로마인을 지배하기 위해 기독교라는 이념이 필요했다. 옛 갈리아의 로마귀족은 성직자가 되고, 프랑크 귀족은 전사가 되어서, 각각 정신적 지도자와 정치적 지도자의 역할을 담당했다.

 

「서로마제국이 멸망한 다음에 지식 엘리트였던 기독교 성직자들은 로마의 전통을 보존하고 -그런 점에서 이렇게 성립된 기독교를 로만 가톨릭이라고 부릅니다- 그것을 게르만 족의 전통과 결합시켰습니다. 남부 갈리아 지방의 로마 귀족들은 주교직을 맡거나 교회 조직을 장악하여 이른바 '기도하는 자'가 되고, 북부 프랑크 게르만 귀족은 전사 계급을 구성하면서도 수도원을 설립하고 유지하는 이른바 '싸우는 자'가 됩니다. 이 두 집단의 결합이 앞서 말한 것처럼 '기독교 공화국'을 이루는 것입니다. 이들은 동일한 지배계급의 일원으로 서로 협조하고 견제하는 관계를 유지했습니다. 」 (역사고전강의 p191~2 )

 

한편 비잔티움황제는 교회의 수장과 정치적 수장을 겸한 강한 권력을 가지고 있었다. 서로마제국이 멸망하자 비잔티움제국의 황제는 로마교회에 영향력을 행사하려 하였으나, 로마교회의 주교가 스스로 로마 교황임을 자처하며, 비잔티움황제의 간섭으로부터 벗어나려 하였다.

   

 <EBS중학 필독중학세계사>

 

726년 비잔티움황제 레오3세의 성상 숭배 금지령으로 가열된 로마교황과 비잔티움황제의 대립은 1054년 동서교회가 완전히 분리되면서 끝났다. 서유럽은 로마 가톨릭(보편적인 교회)으로, 동유럽은 그리스 정교(바른 전통을 이은 교회)로 갈라섰다.

 

그 과정에서 800년, 프랑크왕국의 카롤루스대제는 로마교황으로부터 서로마황제의 관을 받았다.

  

 <EBSi 세계사 개념 다지기>

 

프랑크왕국과 로마교회가 결탁했지만, 하늘아래 두 개의 해가 존재하기는 힘들다. 하나가 해이면 하나가 달이어야 했다.

   

 <EBSi 세계사 개념 다지기>

 

서유럽세계는 황제의 세속적 권위와 교황의 종교적 권위가 끊임없이 충돌했다. 성직자 서임권을 두고 다투던 황제와 교황의 대립은 1077년 ‘카노사의 굴욕’이라는 사건을 계기로 교황권의 승리로 끝이 났다. 교황 그레고리우스7세가  신성로마제국 황제 하인리히4세를 파문하자, 황제가 교황에게 무릎을 꿇고 싹싹 빌었다. 교황권이 황제권력을 누르고 성장하기 시작했다.  

 

십자군전쟁 전후로 전성기를 찍었던 교황권은 서서히 쇠퇴하여, 두 권력이 역전되는 상징적 사건이 발생하였다. 1309~1377년 사이의 ‘아비뇽 유수’이다. 과세권을 놓고 다투던 프랑스국왕이 교황을 납치하여 유폐했다.  교황이 아비뇽에 유폐되는 바람에 로마에서는 새로운 교황이 선출되었고 이후 여러명의 교황이 난립하는 교회 대분열 사태가 일어났다. 후스와 위클리프가 성서지상주의를 주장하며 교황과 교회를 비판하며 나섰고, 이는 16세기 초에 시작된 종교개혁의 밑바탕이 되었다.

   

<살아있는 세계사 교과서 p129>

 

교황권이 황제권을 능가하며 발발한 것이 십자군 전쟁이다. 노르만족의 침입이 그치고 서유럽은 안정된 사회로 접어들었다. 생산력이 발전하고 상공업이 기지개를 켜면서 힘이 쌓인 서유럽세계에 비잔티움황제의 급보가 날아들었다. 1055년에 이슬람세계를 정복한 셀주크 튀르크가 예루살렘을 공격한 것이다.

   

 <EBS중학 필독중학세계사>

 

 비잔티움황제는 “우리가 남이가!”를 외치며 도움을 요청했지만, 서유럽세계의 복심은 따로 있었다. 크리스트교세계를 수호한다는 순수한 사명감도 있었지만, 이면에는 그동안 쌓은 힘을 써보고 싶은 팽창욕구가 있었다. 예루살렘뿐만 아니라 비잔티움제국도 젖과 꿀이 흐르는 풍요로운 나라였기 때문이다.

 

<EBS중학 필독중학세계사>

 

1096년 1차부터 1270년 7차까지 서유럽의 십자군은 총 7차에 걸쳐 원정을 떠났다. 예루살렘을 회복한 적도 있었으나 최종결과는 실패였다.

 

성전이라기보다는 정치적․ 경제적 목적이 컸던 십자군전쟁의 본질을 가장 잘 보여준 것이 4차 침입이다. 예루살렘으로 가지도 않은 십자군은 오히려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약탈했다.

   

 <EBSi 세계사 개념 다지기>

 

십자군 전쟁의 패배는 서유럽세계를 다시 한 번 바꿔놓았다. 전쟁을 결정한 교황의 권위가 땅에 떨어졌고, 200년에 걸친 오랜 전쟁을 통해 제후와 기사 계급이 몰락했다.

 

반대로 교황과 대립하던 왕권이 강화되었다. 제후의 몰락은 지방분권제의 쇠퇴를 가져왔고,  왕권이 더욱 강화될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되었다.

   

 <EBS중학 필독중학세계사>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은 중계무역을 통해 전쟁 특수를 누리면서 발달했다. 비잔티움문화와 이슬람문화가 유입되면서 서유럽은 커다란 자극을 받았다. 이탈리아에서 르네상스가 시작되었다.

 

 

 

4. 도시와 함께 발전한 중앙 집권 국가

 

어느 시대도 마찬가지지만 어느 날 갑자기 일어나는 변화는 없다. 중세에서 근대로 이행하는 과정에도 과도기가 있다. 책에 따라 조금씩 다르지만 14~16세기에 일어난 르네상스와 종교개혁, 그리고 중앙집권 국가의 수립을 근대로 가는 길목으로 본다.

   

 <EBSi 세계사 개념 다지기>

 

17세기는 과학혁명의 시대이고, 철학적으로 보면 근대 이성의 토대를 놓은 데카르트의 시대이기도 하다. 과학과 이성은 근대의 아이콘이다. “이성의 권위에 대한 계몽의 신앙” 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이성은 강력했다. 냉소적으로 말하면 신으로부터 인간을 해방시킨 이성이 또 다른 신으로 군림한 시대가 근대라고 할 수 있다.

   

 <EBS중학 필독중학세계사>

 

십자군전쟁 이후 중세사회는 격변기에 들어섰다. 이백년에 걸친 전쟁으로 기사계급이 몰락하고 교황권이 약화되었다. 상공업자가 성장하여 길드를 형성하고, 그들이 만든 도시는 영주의 간섭으로부터 벗어나 자치권을 획득했다. 자치도시들은 동맹을 맺기도 했다. 상공업자가 사는 도시를 부르그burg라 불렀는데, 부르주아의 어원이 되었다.

   

 <EBS중학 필독중학세계사>

 

14세기에 흑사병이 유럽을 휩쓸었다. 대기근과 흑사병으로 유럽인구의 1/3이 죽어나가자 농노의 절대다수가 부족했다. 전쟁으로 황폐해진 장원에 농노마저 귀해지자 장원제도가 무너지기 시작했다. 그 외에도 화약과 나침반, 인쇄술의 발달로 사회는 빠르게 변하고 있었다.

   

<EBS중학 필독중학세계사>

 

이런 변화의 가장 큰 수혜자는 국왕이었다. 국왕의 견제 세력인 교황과 기사(영주)가 몰락하자  왕권이 강화되었다. 도시의 발달로 상공업자의 힘이 커지고, 차츰 영주의 예속에서 벗어나기 시작한 농민의 위상이 높아지자, 중세사회를 특징짓던 지방분권체제가 쇠퇴하고, 중앙집권체제가 발달했다. 시민과 국왕이 직접 손을 잡게 된 것이다. 13~14 세기에 등장한 신분제 의회는 이런 변화를 상징하였다. 프랑스의 삼부회의가 그 대표적 사례이다.

   

 <EBS중학 필독중학세계사>

 

서유럽에서 가장 일찍 중앙집권국가가 된 곳은 프랑스와 영국 그리고 에스파냐였다.

   

 <EBS중학 필독중학세계사>

 

프랑스는 영국과의 백년전쟁이 끝난 1453년, 영국은 백년전쟁에 연이은 30년 간의 장미전쟁이 끝난 1485년, 에스파냐는 이베리아 반도에서 이슬람세력을 완전히 몰아낸 1492년 이후 중앙집권체제가 확립되었다.

 

 

 

중세를 끝내기 전에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에 대해 공부해야 하지만, 너무 길어서 일단 여기서 유럽의 중세를 마친다. 물론 따로 한번 정리해 둘 필요는 있을 것 같다.

 

마지막으로 『역사고전강의』의 한 부분을 소개한다. 교과서와는 또 다른 관점의 역사를 읽을 수 있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르네상스는 중세 말에 나타난 현상입니다. 이 과정을 거치면서 중세는 무너지고 근대 체제로 이행하는데, 정치적인 측면에서 말하자면 이것은 근대 절대주의 국가가 들어서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중세를 지탱하는 핵심적인 요소들인 교회, 귀족(영주), 도시가 몰락하면서 절대 권력을 가진 왕권 중심의 국가로 이행하는 과정이기도 하다는 말입니다. 이 시대에 나타난 중요한 특징을 살펴봅시다. 여러 차례 강조하였듯이 첫째는 화약과 대포입니다. 이것으로 말미암아 기사 계급이 몰락하고 지방 영주의 권한이 약화되었습니다. 둘째는 왕과 관료의 중앙집권적 체제가 등장한 것입니다. 전쟁 비용을 감당하지 못한 귀족은 왕의 관료가 되었습니다. 특히 프랑스는 중앙집권 체제가 가장 강력하게 성립한 나라입니다. 셋째는 사업과 정치의 결합입니다. 이것은 아주 독특한 현상입니다. 전쟁의 규모와 양상이 변하면서 더는 세금으로 그 비용을 충당하지 못하게 되었고, 그 결과 왕들은 전쟁을 치르기 위해 사업가들에게 돈을 빌리게 된 것입니다. ...

 

이 세 가지가 정치적 측면이라면 지성사적으로도 두 가지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첫째는 자연과학에 대한 열망이 강력하게 생겨난 것입니다. 30년 전쟁을 거치면서 확실성에 대한 추구가 생겨났는데 이것은 17세기 과학혁명을 이해하는 중요한 시대적 요소라 할 수 있습니다. 둘째는 기독교 신앙에 대한 회의입니다. 가톨릭이냐 프로테스탄트냐를 떠나서 신이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등장하였습니다. 17세기를 대표하는 학자 중에 이 문제를 심각하게 고민한 학자들로는 토마스 홉스와 베네딕트데 스피노자 그리고 리샤르 시몽을 들 수 있습니다. p2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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