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중에 느리게 움직일 수 있다고? 그것은 시간에 대해 ‘갑‘인자의 특권 아니겠는가? ‘을‘은 레이스에서 맨 뒤에 처진 스케이트 선수처럼 시간을 따라가기에 급급하다. 하이데거는 <존재와 시간》에서 저 ‘을‘처럼 제대로 된 자리에 존재하지 못하는 자의 삶을 이렇게 기록한다. "자기‘를 잃어버리며 결단 내리지 않는 자는 거기에서 ‘자기의 시간을 잃는다.‘ 그러므로그에게 맞는 전형적인 말은 ‘시간이 없다‘이다."" 자기를 시간 속에서 잃어버린 자, 시간의 맷돌에서 갈리며 비지가 되는자는 늘 바쁘다며 허덕인다. 시간의 소유자가 아니므로 당연히 그에겐 시간이 없다. 시간 속에서 미아가 된 자는 시간을보내기 힘들다. 그는 아무리 노력해도 열리지 않는 문 앞에서전전긍긍하듯 시간에게 고문당한다.
반면 시간을 잃지 않은 자, 오히려 시간을 돈다발처럼 소유한자, 바로 시간의 ‘갑‘은 원하는 만큼 느려도 상관없다. 오히려 시간이 예, 예 하면서 충실한 하인처럼 그와 발을 맞춘다.
시간을 소유한 자만이 원하는 속도로 시간의 페달을 밟으며풍경을 즐기듯 ‘느릴 수 있다. 그는 세상살이에 흡수되어 사라져버린 자가 아니라 원하는 만큼 천천히 세상을 즐길 수 있는 자이다. 시간을 즐길 수 있다는 것, 다시 말해 삶을 즐길 수있다는 것이 느림의 가치이다. - P248

한 사물의 목적인 용도를 실현하느냐의 관점에서 보았을때 파손된 사물이 구원받는 길은 ‘수선‘밖에 없다. 《메테오르》의 한 구절이다. "옛날에 모든 물건은 영구적으로 반듯하게견딜 수 있도록 장인에 의해 직접 만들어진 진품이었다. (...)그 진품은 유산의 일부분이었고 끝없이 수선을 받을 권리가
"19있었다." 이게 사물을 대하는 옛날 방식이다. 더 이상 수선할 수 없는 사물은 쓰레기가 되어 우리 곁에 쌓이도록 방치할수밖에 없다. - P2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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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이드는 <유머>라는 글에서 말한다. "유머는 희귀하고도 귀중한 재질이다."
그런데 그 뒤에 이렇게 덧붙인다. "다른 사람이 들려주는유머를 느끼지 못하는 사람도 많이 있다." 이런 사람들 앞에서 유머를 구사한다는 것은 곧 실언한다는 것이고 이를 빌미로 자신이 고발당할 위험에 처할 수 있다는 것, 한마디로 후회할 괜한 짓을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유머가 통용되지 않는사람들이 대부분인 사회가 달성되었을 때, 그것은 냉혹한 법과 답답한 당위의 눈치를 보면서 겨우 안전한 길을 찾는 일만할 수 있는 겨울이 도래했다는 뜻이다. 요컨대 유머의 존재여부는 사회를 평가하는 기준이다. - P191

유머는 이렇게 마비된 사회에 벌을 내리는 데 그치지 않는다. 유머는 철학 속으로 파고든다. 우리는 고대 철학자 크리시포스XgionO의 정신에서 유머를 발견한다. 크리시포스는 문답을 주고받는 변증술로 명성을 얻었는데, 신들이 변증술을지녔다면 크리시포스의 것과 다르지 않을 거라는 평가를 사람들로부터 받았다. 그의 논변엔 유머가 깃들어 있다. 이런 식이다. ‘만일 네가 무엇인가를 잃어버리지 않았다면, 너는 그것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너는 뿔을 잃어버리지 않았다. 그러므로 너는 뿔을 가지고 있다.
믿기지 않겠지만, 그는 스스로 농담을 하고 너무 웃겨서 죽었다. 어느 당나귀가 그의 무화과를 입에 넣자, 주인 노파에게
"이제 포도주를 당나귀에게 먹여 무화과 열매를 삼키게 하시오"라고 말한 뒤 자신의 이 말이 너무 웃겨 죽었단다. 후에 니체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이 웃다 죽는 사건을 계승한다. "그들은 오히려 너무 웃어대다 죽고 만 것이다!"" - P1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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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편적인 까닭이다. 철학자들은 자연에 대한 인간의 보편적지배력을 이성의 보편성에서 확인했다. 예를 들면, 근대 사상의 공간을 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데카르트는 《방법서설》에서 이성의 보편성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양식bon sens은 세상에서 가장 공평하게 분배되어 있는 것이다. 누구나 그것을 충분히 지니고 있다고 생각하므로, 다른 모든 일ㅇ니ㅣ 있어서는 만족 할 줄 모르는 사람이라도 자기가 가지고 있는 이상으로 양식을 갖고 싶어 하지는 않는다. - P162

AI가 인간이란 예술적 갈구 이상으로 종교적 갈구가 심한생물임을 알게 된다면? AI는 신을 발명해서 인간을 감동시킬(유혹할 것이다. AI 앞에서 단지 예술가가 살아남을까 걱정하는게 아니라 재래의 종교가 살아남을까 걱정하게 될 것이다.
그러면 "도를 아십니까?" 하고 묻는 직업이 위협받게 되며,
이제 우리는 이런 정겹고도 짜증 나는 질문자가 없는 외로운거리를 걸어가야 할 것이다.
죽어가는 내게 기도를 해달라고 하면, 챗GPT가 신부님, 목사님, 스님보다 더 영혼의 위로가 될 말을 해줄 것 같다. 그러면 이미 그는 하나의 기능이 아니라 동반자이다. 내가 아는한 종교는 말씀의 종교이다. 그리고 챗GPT만큼 말 잘하는 자도 없다. 한 말씀만 하소서. 내 영혼이 곧 나으리다. - P169

고대인뿐 아니라 현대인도 산책을 통해 생각의 열매를 수확한다. 루소 Jean-Jacques Rousseau는 <고독한 산책자의 몽상》에서말한다.
매일 산책하며 보낸 여가 시간은 종종 유쾌한 명상으로채워지곤 했는데, 그 기억을 잃어버려 몹시 안타깝다.
이제 앞으로 떠오르는 명상들을 기록해두려 한다. (…) - P175

산책을 하면서 머리를 스쳐간 온갖 낯선 생각 또한 이종이들 속에서 제자리를 찾을 것이다. 나는 생각한 것들을 머리에 떠오른 상태 그대로, 전날 떠오른 생각이다.
음 날의 생각과는 대개 별 상관이 없듯 그렇게 두서없이말하려 한다. 그러나 내 정신이 지금 내가 처한 이 이상한 상태로부터 매일 자양분을 얻어 만들어낸 감정과 생각을 통해, 나의 천성과 기질에 대한 인식이 늘 새롭게생겨날 것이다.‘
산책은 유쾌한 명상, 두서없는 생각들을 만들어낸다. 머리에 떠오른 상태 그대로의 생각이 산책길에는 있다. 이 모든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바로 산책은 책상 앞에 앉아 계획을세우고 하는 공부와는 전혀 다른 생각의 장煬이라는 것이다.
이와 같은 사유의 체험을 버지니아 울프Virginia Woolf의 산책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그녀는 산책에 대해 이렇게 쓴다. "걸을 때는 이런 수만 가지 흥분이 시속되지만, 내일이면 오래되고 죽어버린 구절을 쓰기 위해 앉아 있어야 하죠. (...) 나는 길으면서 계획을 세우겠어요." 울프는 산책길에서의 생각과 책상 앞에서의 생각을 구별한다. 산책길에서 생각은 불어오는바람처럼 자연스럽게 머리를 채우고, 길옆에 핀 꽃처럼 자연스럽게 마음을 기쁘게 한다. 그러나 책상 앞에 앉아 이 생각들을 정리할 때는 까다로운 글쓰기의 규범이 끼어들며, 산책 - P1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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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친구이다. 철학 philosophy 이 ‘진실한 앎sophia‘에 대한 ‘사랑philos‘이라는 점에서 말이다. 철학과 매스미디어, 둘 다 진실을위해서라면 기꺼이 자신을 희생할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 못하다. 철학이 궤변에 시달리는 것처럼 매스미디어 역시 거짓과 경박함에 시달린다. 일찍이 시 - P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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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의미하게, 즉 추구할 만한 대상이 못 되게 만들어 악마를 이긴다. 더 정확히는 이반이 이기려 하지도 않았는데 악마 스스로 이반에게 진다. 이렇게 할 수 있는 힘은 어디서 나오는가?
바로 바보의 ‘순수성‘에서 나온다. 바보의 순수성은 사람들이쫓는 가치를 뒤쫓는 것이 아니라, 그런 가치를 무심히 건너뛰어 버린다. 사람들이 매달리는 기존 가치에 반응하지 않는 바보의 등장 자체가 세상을 지배해온 그 가치들을 의문에 부치고 초라하게 만든다. 이런 바보의 방식으로 기존의 세상을 허무하게 만들고, 새로운 세상을 여는 발판을 마련한 이들이 있다. 석가가 그렇고, 그리스도가 그렇다.
결국 바보가 물정 모르는(즉 순수한) 바보인 까닭은 세상을지배하는 기존의 가치와 단절되어 있기 때문이다. 순수성이라는 면에서 그리스도와 비견되곤 하는 바보 주인공을 내세운 도스토옙스키(DEAop AoCroÉRCRun의 《백치>를 보자. 주인공 미쉬낀 공작은 러시아말로 ‘유로지비,urodiny‘, 즉 ‘성스러운 바보‘
라 불린다. 유로지비는 동방정교에서 바보 행세를 하며 수행하는 수도자를 일컫는 말이다. 공작은 이런 말을 듣는다. "나는 조금 전까지도 당신을 백치로 여겼어요! 하지만 당신은 남들이 전혀 볼 수 없는 것을 볼 수 있어요." 세속의 통상적인가치와 단절한 바보는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봄으로써, 그자신을 바보 취급하는 세상이 실은 어리석은 탐욕과 악덕으로 가득 차 있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 P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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