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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역사 - History of Writing History
유시민 지음 / 돌베개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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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역사서를 읽어야 하는 이유, 혹은 역사를 공부해야 하는 이유를 설명할 때, 흔히들 과거를 기억함으로써 현재를 이해하고 미래를 전망하려는 욕망이 인류의 본성임을 그 근거로 들곤 한다. 이 책은 과거를 기억하고 현재를 기록하는 방법에 관한 내용을 다루고 있다. 그러기 위해 과거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동서양의 대표적인 역사서를 소환한다.

먼저 역사의 ‘아버지’ 혹은 ‘창시자’는 누구일까를 따져보는데, 희랍의 역사가 헤로도토스와 투키디데스를 든다. 헤로도토스의 <역사>가 페르시아 전쟁을 어떻게 묘사하고 있는지, 투키디데스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에서 역사를 어떤 방식으로 기록했는지 설명하고 있다.
열악한 소통환경과 정보취합의 어려움 그리고 기록을 남기는 자체도 힘들었던 2천여 년 전의 상황을 고려한다면 두 사람 모두 정말 훌륭한 역사가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저자의 설명에 따르면, 헤로도토스는 페르시아 전쟁을 통해 문명의 충돌을 보았고 따라서 그 관점은 세계사라는 거시적 관점이었던 반면, 투키디데스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을 경험하면서 그리스 민족사라는 미시적 관점을 견지했다. 이들이 역사가라 칭송받을 수 있는 이유는 역사적 사건을 한 쪽 시각에 치우쳐 기술 한 것이 아니라 사건의 주체들을 공정하게 다루었다는 점에 있다. 하지만 당시의 환경으로 미루어 모든 사실을 제대로 취합한다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므로 저자의 상상력이 개입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여기서 이미 랑케의 실증주의 역사관과 카의 역사관이 충돌하기 시작한다.

저자는 에드워드 H. 카의 <역사란 무엇인가?>를 읽으며 대학을 보낸 세대이다. 랑케의 실증주의 역사관과 비교하며 역사와의 호흡을 중요하게 생각한 세대로, 시대적 사명감을 거부하지 않았다. 저자는 자신의 역사관이 어떤지 밝히고 있지 않다. 그렇지만 그런 역사관이 이 책 곳곳에 스며있음을 감출 수는 없는 것 같다. 사료와 고증에 충실한 실증주의 역사관, 애초에 있었던 그대로의 사실을 기술해야 한다는 랑케의 역사관과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를 통해 만들어진다는 카의 역사관은 공존하기 어렵다. 공자의 춘추필법은 그 시대 사관의 주관적 견해가 그 시대의 사상과 어우러지면서 정치공학적 결과물을 만들어 낼 수밖에 없으므로 랑케필법의 또 다른 대척점을 이룬다고 하겠다.

마르크스의 역사관은 기록이라는 측면보다는 사회발전 법칙과 시스템의 일부로 이해해야 한다는 점에서 다른 차원의 관점이라고 할 수 있다.

박은식의 <한국통사>, 신채호의 <조선상고사> 그리고 백남운의 <조선사회경제사> 등은 김부식의 <삼국사기>가 보여준 사대주의 역사관을 거부하고 우리 민족을 중심에 둔 자주적 역사를 기술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역사는 아와 비아의 투쟁의 기록'이라고 신채호는 말한다. 비아와 맞서 투쟁하기엔 너무나도 허약했던 조국. 외세의 침탈에 의해 사라져버린 나라는 역사마저 점령군에 의해 누더기가 되고 만다. 이런 가운데 이들의 민족사에 대한 연구와 노력은 그 방법이 어떤 것인가를 떠나 당시 위축되어 있던 나라 잃은 국민들에게 자부심과 용기를 불어넣어 주었을 것이다. 한 줌 권력을 위해 일본군을 끌어들여 같은 민족을 짓밟았던 동학혁명 당시의 권력자들은 역사를 움직이는 가장 강력한 힘이 다름 아닌 욕망임을 보여주는 것 같아 몹시도 가슴 아프고 씁쓸했다. <한국통사>의 동학혁명에 대한 시선은 그나마 위안이 되는 부분이기도 하다.

슈펭글러나 토인비 그리고 헌팅턴 등은 민족사나 지역의 역사 혹은 세계사라는 관점에서 벗어나 문명의 역사를 연구하고 기술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아놀드 토인비의 <역사의 연구>는 인류사를 도전과 응전의 역사로 본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토인비의 성장과정과 학문적 이력 그리고 엄청난 특혜가 <역사의 연구>라는 대작을 낳게 된 배경이었다는 점은 무척 흥미로운 부분이다.
1996년 출간된 새뮤얼 헌팅턴의 <문명의 충돌>은 베스트셀러 였으며 또한 스테디셀러였기도 하다. 헌팅턴은 문명이란 '사람들에게 동질적 정체성과 귀속감을 가지게 만드는 총체적 생활방식'이라고 설명한다. 그는 이런 관점으로 문명권을 여덟 개로 나누어 설명했는데 저자는 이 책을 역사책이라기보다 국제정치학 책이라고 평가한다. 세계인구의 15% 정도를 ‘평화권’ 그리고 나머지를 ‘분쟁권’으로 나누고 그 분쟁의 원인을 ‘단층선 분쟁’으로 설명하는 점은 상당히 흥미롭다. 저자는 설명하고 있지 않지만 사실 헌팅턴의 이런 주장은 생명이 길지는 못했다. 일본을 독립된 문명권으로 분류한 것은 동북아 일대를 중화권으로 묶은 것과 비교할 때 어색한 것이었으며 납득할 만한 근거를 찾을 수도 없다. 또한 이 문명권 밖에 존재하는 문명에 대해 편견을 가진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기도 한다.

제러드 다이아몬드와 유발 하라리는 역사를 보는 시각을 좀 더 넓혀 인류사라는 관점으로 인간을 본다.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가 되기까지 인류는 어떤 변곡점을 거쳤으며, 무엇이 인류를 지금처럼 만들었는지, 무엇이 인류의 발전과정을 다르게 만들었는지 여러 가지 자료를 들어 설명한다.

역사 기술을 위한 역사가의 재능과 노력, 춘추필법과 랑케필법 그리고 카의 역사인식. 이런 요소만으로 역사를 재단할 수는 없다. 인류는 역사를 기술하기 위해 어떤 방식의 작업을 해 왔는지 그리고 역사를 일정한 틀 안에서 정의하는 것이 얼마나 편협한 것인지를 이 책을 읽으면서 느낄 수 있다. 정당성이 부족한 정권은 역사의 물고를 인위적으로 돌리려한다. 우리의 근현대사에서도 이는 증명된다. 역사의 해석에는 정답이 있을 수 없다.

최은영의 표현을 빌자면, 유시민은 중력이 매우 큰 글을 쓰는 작가이다. 독자를 당기는 힘은 간결한 문장이나 절제된 표현만으로 설명하기 힘들다. 엄청난 독서량과 성찰의 힘이 아닐까 추측만 해볼 뿐이다. 저자는 말한다. 역사는 사람이 만들지만 모든 사람이 역사에 흔적을 남기지는 않는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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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단장 죽이기 2 - 전이하는 메타포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홍은주 옮김 / 문학동네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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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권으로 이루어진 <기사단장 죽이기>는 각각 ‘현현하는 이데아’, ‘전이하는 메타포’라는 부제를 달고 있다. 강력한 도입적 예시로 이 소설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 방향을 제시하고 있는 셈이다. 이데아와 메타포는 뜻밖에도 소설 속에서 독특한 캐릭터로 등장하기도 한다.

이 소설은 서두에서 밝히고 있듯이 주인공이 격은 약 아홉 달 간의 개인사를 일인칭 서술방식으로 풀어낸 이야기이다. 서술하는 자아는 체험하는 자아와 때로 거리를 두기도 하고 때로는 구분이 사라지기도 한다. 이는 소설 전체를 관통하는 대상으로서의 삶과 경험치로서의 삶, 관념과 실체의 관계를 설명하는 적절한 나레이션 방식으로 작동한다.

우선 ‘나’를 중심으로 한 소설의 구조를 정리해 보면,
① 여동생 고미(치)와 부모님 등의 가족관계가 중심이 된 가족사.
② 아내 유즈(柚子)와의 관계 – 표면적으로는 결혼과 이혼 그리고 재결합에 이르기까지 이 소설의 중심이다.
③ 친구 아마다 마사히코와 일본화의 대가인 그의 아버지 아마다 도모히코 - ‘기사단장 죽이기’는 아마다 도모히코가 그린 그림의 제목이다.
④ 별장에서 지내며 알게 된 맨시키 와타루와 그에 얽힌 두 사람 아키카와 마리에와 쇼코
⑤ 그림 ‘기사단장 죽이기’ 속 이데아의 현현
⑥ 여행 중 우연한 인연을 맺게 된 여인과 흰색 스바루 포레스터의 사나이
이 밖에 유부녀 여자친구 정도가 있겠다.

이들은 하나하나 개별적인 줄거리이면서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각각이 다른 줄거리를 위한 근거가 되기도 하고 배경이 되기도 하며, 때로는 알레고리로 작용하기도 한다.
이를테면 아내 유즈와의 사랑이 고미와 무관하지 않으며, 맨시키의 사랑은 어느 순간 아내에 대한 나의 사랑과 닮아있다. 흰색 스바루 사나이는 끊임없이 ‘나’의 무의식을 들여다보게 하고, 쇼코 또한 고미를 연상시킨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은 사랑과 삶과 운명 등과 같이 손에 잡힐 것 같으면서도 알 수 없는 그러나 도저히 포기할 수 없는 것들에 숙명처럼 얽혀있다. ‘만나도 미래가 없는 서른여섯의 남자’인 나는 물론이거니와 등장인물 대부분이 가정사가 순탄하지 못하거나 꼭 풀어야 하는 절실한 삶의 과제를 가지고 있다.
소설은 이들을 서로 얽어놓은 다음 그 틈바구니를 헤쳐나온 ‘내’가 비로소 삶을 담담하게 받아들이게 된다는 구조로 되어있다. 구체적인 삶에서 실패한 ‘나’는 삶을 관조하기로 작정하고 여행과 낯선 곳에서의 정착을 시도한다. 우연히 발견한 그림과 신비로운 교감을 하고 삶을 관념화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삶은 결국 현실이므로 관념화한 삶을 다시 극복함으로써 달라진 ‘나’를 발견하고 이전의 삶으로 귀환한다. 하지만 이때의 삶은 이데아로서의 관념적 삶을 극복한 삶이므로 더 이상 이전의 삶이 아니다.
드라마틱한 과정을 거치지 않아도 ‘나’와 같은 또래가 되면 인생을 어느 정도 반추하게 된다. 익명성 뒤에 가려진 ‘나’가 보편성을 획득하는 순간이다. (다른 인물들과 달리 ‘나’는 익명으로 처리되어 있는데 익명성을 보편성으로 치환하려는 작가의 의도로 읽어도 좋겠다.)

선불교에서는 “가는 길에 부처를 만나면 그를 죽이라”고 말한다. 영적 길을 걷는 동안 제도화된 불교의 경직된 사상과 고정된 법을 만난다면, 거기서도 자유로워져야 한다는 뜻이다.(유발 하라리 <호모 데우스> 258쪽)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여라. 관념화된 부처, 이데아로서의 부처를 깨뜨리지 않으면 부처의 본질에 이를 수 없다.

‘나’의 직업은 화가 게다가 초상화를 그리는 화가이다. 초상화의 본질은 무엇일까. 그림은 기의로서의 대상을 기표로 화폭에 담은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소설에서 초상화는 이를 더욱 구체적으로 드러내는 도구이다. ‘나’는 모델을 보면서 그리는 것이 아니라 대상과의 대화를 통해 내면을 파악하고 그것을 화폭에 담아낸다. 관념을 현실로 옮기는 방법, 기의를 기표에 반영하는 방식이 독특하고 진지하다. 맨시키와 흰색 스바루 포레스터의 사나이 그리고 아키카와 마리에의 초상화를 거치며 이런 과정은 더욱 심화되고 추상화된다. 대상과 삶을 인식하는 방식에 변화가 생긴 것이다.

그러므로 그녀는 그저 눈앞을 스쳐가는 그림자가 아니다. 입체적인 육체를 지닌 현실의 존재다. 혹은 입체적인 육체를 지닌 스쳐가는 그림자거나.(1-328)

그것은 멘시키를 모델로 한 포트레이트였다. 아니, 포트레이트라기보다 물감덩어리를 그대로 캔버스에 갖다 바른 하나의 ‘형상’이라고밖에 할 수 없을 것이었다. 풍성한 백발이 휘몰아치는 눈보라처럼 순백으로 격렬히 용솟음쳤다. 언뜻 얼굴로는 보이지 않는다. 얼굴이 지녀야 할 요소는 모두 색의 덩어리 너머에 감춰져 있다. 그러나 그곳에는 의심의 여지없이 멘시키라는 인간이 실재한다.(1-333)

한밤중 방울소리에 이끌려 찾아간 구덩이는 현실과 판타지를 이어주는 곳이다. 현현한 기사단장 이데아는 스스로를 각성에 가까운 존재라고 설명한다. 이데아를 자율적인 것으로 취급할 수 있는가하는 문제가 드러나지만, 이데아는 타인에게 인식됨으로써 비로소 이데아로 성립된다고 주장한다. 구덩이 속에서 나 자신도 이데아가 되어가는 체험을 하면서, ‘나’는 관념에 대한 각성이 현실에 반영되는 과정을 현실과 판타지를 오가며 경험한다.

성경은 왜 바벨탑을 신에 대한 도전이라고 했을까. 바벨탑을 쌓으면 정말 신에게 다가갈 수 있어서 일까. 신은 자신을 복제해서 인간을 창조했지만, 인간에게는 창조의 능력이 없다. 인간에게 신은 경배의 대상이자 해결해야할 대상이기도 했다. 신을 닮은 인간이지만 신을 복제한 인간이므로 인간에게 주어진 능력은 현실을 복제하는 것이다. 복제함으로써 신의 능력에 도전하는 것이다. 이데아의 각성은 정교한 복제로 해결될 수 없다. 관념에 대한 각성이 없다면 삶을 지배하는 섭리를 이해할 도리가 없다. ‘나’는 <기사단장 죽이기>라는 그림의 도움으로 초상화 그리기를 통해 복제에 각성을 담아내는데 성공한다. 그리고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듯 이데아를 찔러 죽이고 나의 길을 찾아간다. ‘내’가 삶에서 다시 얻은 것은 일상성의 회복이지만 ‘나’는 익명성으로 가려진 ‘누구나’이다. 그 ‘누구나’는 어떤 과정을 통해 무엇을 다시 되찾을지 누가 알겠는가.


하루키는 우리나라 작가들의 표절시비에 자주 등장하는 작가이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하루키의 문체는 유럽문학과는 다른 감성을 드러낸다. 이미 <직업으로서의 예술가>에서 하루키는 스스로 자신의 문체는 일어를 영어로 옮긴 다음 그것을 다시 일어로 옮기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것이라고 설명했다. 여기서 말하는 문체는 이런 문장의 양식이 아니다. 그 속에 담긴 정서가 울림이 있다는 말이다. 그의 작품을 읽으면 기억나는 장면, 기억에 깊이 각인되는 표현들이 우리 의식 속에 파고들어 자리 잡는다. 그리고 어떤 묘사를 할 때 자연스럽게 그 정서가 불려나오는 것이다. 이것이 하루키 냄새가 아닌가 추측해본다. 이를테면 다음의 문장들이다.

주위 산허리에는 도막난 구름이 낮게 걸렸다. 바람이 불면 구름 자투리가 과거에서 길을 잃고 들어와 옛 기억을 찾아 헤매는 넋처럼 산줄기를 흐물흐물 떠돌았다. 가랑눈 같은 새하얀 빗줄기가 소리 없이 바람에 나부끼기도 했다.(1-13)

집은 산머리에 있어서 남서향 테라스로 나오면 잡목림 사이로 바다가 살짝 엿보였다. 대야에 받은 세숫물 정도의 바다. 광대한 태평양의 아주 작은 한 조각이다. 멀리서 보면 그 바다는 칙칙한 납덩어리 같기만 했다.(1-14)

당시 나와 아내는 일단 결혼생활의 끝은 본 상태였고 이혼서류에 정식으로 도장도 찍었지만, 그 후 우여곡절을 거쳐 결국 다시 합치게 되었다.
무엇 하나 쉽게 이해할 수 없는 당사자인 나조차 인과관계를 정확히 파악하기 힘든 그 경위를 굳이 요약하자면 ‘원상 복귀’라는 흔해빠진 표현에 다다를 것이다. 그 두 번의 결혼생활(전기와 후기라고 해두자) 사이에는 약 아홉 달이라는 시간이 험준한 지협에 뚫린 운하처럼 입을 크게 벌리고 있다.(1-15)

반면 무언가 매끄럽지 못한 느낌을 주거나 연결이 어색한 대목도 더러 보인다. 번역의 문제일 수도 있으나 이런 부분은 소설에 몰입하는데 장애가 되기도 한다.

잠깐 고민하다가 결국 긴 얼굴의 손발을 묶은 끈을 풀어주기로 했다. 꽤 단단히 묶은 탓에 푸는 데도 시간이 걸렸다. 이야기하는 것으로 봐서는 그리 나쁜 남자 같지 않았다. 아키가와 마리에가 어디 있는지는 몰랐지만 몇 가지 정보를 기꺼이 알려주지 않았는가. 손발을 자유롭게 해주어도 나를 방해하거나 해치지는 않을 것이다. 게다가 이대로 묶어놓고 갈 수도 없는 노릇이다. 누가 이 모습을 보기라도 했다가는 이야기가 한층 성가셔진다. 그는 바닥에 주저앉아 끈자국이 남은 손목을 조그만 손으로 쓱쓱 문질렀다. 그러고는 이마로 손을 가져갔다. 혹이 부풀기 시작한 모양이었다.(2-375)

마리에의 가슴에 지나치게 집착하는듯한 묘사나 필요이상의 성적 장면에 불편해 하는 독자도 있으며 이 부분은 다른 그의 작품과 연관해서 이야기할 여지가 있을 것이다.

또한 현실인지 환상인지 종잡을 수 없는 묘사들이 작품으로부터 독자를 소외시킨다거나 황당한 느낌을 준다는 의견도 있을 수 있을 것이다. 이 부분 역시 충분히 논의 될 여지가 있지만, 괴테의 <파우스트>나 카프카의 <변신>, 김영하의 <흡혈귀> 등 수많은 작품들이 이런 소설적 가설을 전제하지 않으면 똑같은 취급을 받을 수밖에 없지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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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한 불평등 -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조지프 스티글리츠 지음, 이순희 옮김 / 열린책들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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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사람은 평등하게 창조되었다‘ 미국 독립선언문이 명시하고 있는 말이다. 조지프 스티글리츠는 이를 모든 사람은 동등한 능력을 가졌다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동등한 정치적 권리를 가져야 한다는 것으로 해석한다. 정치적 권리는 게임의 규칙에 따라 달라진다. 경제 불평등은 정치불평등을 낳을 뿐 아니라 더욱 심화시키며, 정치불평등은 다시 경제불평등을 심화시킨다.

사실 위기가 발생할때마다 항상 그 고통을 짊어지는 주체는 서민이다. 노동자는 직장을 잃고, 주택소유자는 집을 잃고, 서민들은 퇴직금까지 날려버리고 자식들의 등록금조차 낼 수 없어 평생의 꿈을 망쳐버리기도 한다. 자영업자들이 무더기로 파산하지만 대기업들은 거뜬하게 살아 남는다. 노동자의 임금이 줄어도 일부 기업은 더욱 번성하고, 은행들은 서민의 등을 치고 기업의 비위를 맞추며 막대한 이익을 챙긴다.

<거대한 불평등>은 이런 일의 원인에 대한 오랜 천착의 결과라 할 수 있다. 2008년 미국발 서브 프라임 모기지론 사태에 의해 어려움을 겪었을때 유엔은 그 원인분석을 스티글리츠에게 의뢰했으며, 그 결과물이 <스티글리츠 보고서>이다. 이후 그는 불평등 문제의 심각성을 공론화 하는 작업에 몰두하는데, <불평등의 대가>를 거쳐 이 책에 이르면서 진보 경제학자로서의 그의 면모를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다. <거대한 불평등>은 2007년 부터 최근까지 <<뉴욕타임즈>>, <<베니티 페어>> 등의 신문과 잡지에 기고한 글을 주제별로 모아 엮은 것으로, 그간의 저서들과는 달리 학문적 입장이 강조된 것이 아니라 불평등과 사회문제를 경제라는 창을 통해 바라보고 있다.

건전한 경제학에 가장 유해한 것은 분배문제에 집중하는 경향이며, 파이의 분배는 정치의 문제이므로 경제학자는 그 문제에 신경쓸 필요 없다는 보수주의 경제학자 로버트 루카스의 논리도 소개하고 있다. 이는 1%가 1%를 위해 설계한 경제정책의 대부분이 그렇듯 ‘은행들에게 충분한 재원을 투입하면 모든 사람에게 혜택이 돌아간다‘는 낙수효과 경제이론이 바탕이 된다. 스티글리츠는 이에 반해 중간소득과 저소득층을 지원함으로써 경제전체가 혜택을 보게해야 한다는 분수효과를 주장한다. 아울러 Sub Prime 사태때도 미국은 주택소유자를 도와야한다고 했음에도 도덕적 해이를 이유로 그러지 않았으며, 실은 은행들의 도덕적 해이가 문제였음을 밝히고 있다.

시장조작, 내부자 거래, 불공정한 독점관행, 비열한 신용카드 관행, 차별적이고 약탈적인 대출 등 은행들이 착취방식에 집중하면 불평등이 심화된다. 반면 은행들이 일자리 창출방식에 집중하면 실업이 줄어드는 동시에 임급이 올라가서 평등성이 강화된다. 도박에 뛰어드는 은행과 대기업, 이길 경우 수익을 챙겨 빠져나갈 수 있고, 실패하더라도 그 뒷감당은 정부 몫으로 떠 넘긴다. <불평등의 대가>에서 지대추구를 통해 은행과 대기업이 어떻게 배를 불려 불평등을 조장하는지 설명했는데, 여기서도 다시 한 번 강조한다.

불평등은 자본주의가 낳은 문제라기보다 20세기 민주주의가 낳은 문제이다. 수익은 개인이 차지하지만 손실은 사회에 떠 넘기는 짝퉁 자본주의와 1인 1표주의 보다 1달러 1표주의에 더 가까운 불완전한 민주주의가 상호작용을 일으켜 난치상태의 불평등을 불러온 것이다.

납득할 수 없는 투자, 부실한 거래 등을 통해 국가에 천문학적 규모의 손실을 입히고도 어떠한 책임도 지지 않고, 오히려 거액의 성과급을 챙기거나 여전히 고액연봉을 받으며 자리를 보전하고 있는 관료, 정치인 그리고 이들과 유착한 업자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 틈바구니에서 손실을 입고, 파산하고, 실직한 국민들은 또 얼마나 많은가. 자원외교, 방산비리, 4대강사업이 그랬고 L시티, 포스코, 송도신도시사업, 한미약품 주식공매도 사건 등 수없이 많은 사례들이 우리나라에도 존재해 왔다.

불평등이 갈수록 심해지는 현상과 기회의 문이 갈수록 좁아지는 현상은 동전의 양면이다. 이미 부의 불평등이 소득 불평등을 앞지르고 있다. 특히 금융소득 가운데 이자소득과 임대소득이 노동소득을 크게 앞지르면서 자조적 수저계급론이 회자되는 것도 이를 반영하는 현상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공공의료시스템이 마비된 국가에서 건강상태를 반영한 팔마비율이 소득반영 팔마비율에 비해 훨씬 심하다는 것은 의미심장한 통계이다.
기회의 불평등은 경제 피라미드의 바닥에서 태어난 사람들이 그곳을 벗어날 수 없게 만드는 사회경제적 이동성의 봉쇄로 나타난다. 이는 자식세대의 경제적 이동성 축소와 기회 축소를 낳기 쉽다.

스티글리츠는 인도와 아프리카의 저개발국을 불평등의 늪에서 빠져나오기 힘들게 하는 것으로 지적 재산권과 특허관련 법률들을 들고 있는데, 일반적인 선입견을 깨뜨리는 흥미로운 사례라 할 수 있다. 이를테면 아프리카에서 말라리아는 여전히 사람들을 힘들게 하는 질병인데, 그 가장 큰 원인은 부자나라들에서는 이 병이 완전히 극복된 점이라는 것이다. 여기에 어떤 인과관계가 있을까?

조지프 스티글리츠는 정보 경제학이라는 새로운 분야를 개척해서 2001년 정보 비대칭성의 결과에 관한 연구로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진보성향의 학자이다. 그러나 현대 경제학에서 진보경제학자의 스탠스는 그 스팩트럼이 꽤 넓은 편이다. 1%와 99%를 대비시키는 스티글리츠와 0.1%의 독식경제를 비판하는 토마 피케티를 동일하게 놓을 수 없으며, 진보경제학자이지만 재벌 시스템을 부정하지 않는 장하준류가 존재한다. 대학에서 배운 <맨큐의 경제학>으로 보수주의 경제학을 다 설명할 수 없는 것과 같다.

이 책의 원제는 The Great Divide로 <거대한 균열>이라 번역할 수 있는데, 이는 스티글리츠가 <<뉴욕 타임즈>>에 ‘거대한 균열‘을 주제로한 시리즈 기고를 한데서 비롯된 것으로, 한국에서는 아마 앞서 출간된 <불평등의 대가>를 염두에 두고 제목을 살짝 비튼게 아닌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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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라알라 2017-07-12 07: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한국판 번역 제목에 그런 의미가 있군요. 일리가 있으신거 같아요.
 
이 사람을 보라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사상선집
프리드리히 니체 지음, 이상엽 옮김 /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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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저런 이유로 최근 니체를 질적으로나 양적으로 꽤 밀도 있게 읽었다. 그 관성으로 별 고뇌 없이 산 책이고, 배송 후 약 5시간만에 다 읽었다. 책 내용이야 관점에 따라 혹은 성향에 따라 호불호가 나뉠 것이라 생각한다.
자신의 저술 혹은 생각들에 대한 수필 같은 글들이라 딱히 요약하거나 평가하기도 마땅치 않다.
그럼에도 구태여 몇줄 적는 이유는.. 책값이 너무 비 싸 다!! 가뜩이나 도서정가제가 못마땅한 차에 이 무슨 테러인지..
번역서가 어떻게 나오는지 모르는 바도 아니고 게다가 니체의 저술이라면 판권도 어렵지 않게 해결했을텐데 이렇게 비싼 이유가 궁금하다.
번역을 비롯해서 이런 저런 얘기를 하고 싶기도 하지만, 알라딘의 추천에 대책 없이 낚인 기분을 떨칠 수 없어 실없이 투정만 부려본다. 별점은 소심한 복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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갱지 2016-12-08 10: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번역이 잘 되어있나요?
지만지에서 나오는 것들은 모든 책이 다른 출판사의 같은 이름의 책에 비해 유난히 비싸더라고요. 출판사 얘길 보면 신경써서 질을 높혀놨다고 하면서 그렇게 받는 것 같던데-

타치오 2016-12-08 12:34   좋아요 1 | URL
번역에 관한 얘기는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네요. 매끄러운 번역이 옳을 때도 있고 정확한 번역이 필요할 경우도 있으니까요. 이 책의 경우 후자인데.. 이미 번역된 것과 견주어보면 평이하다고 생각합니다. 독일어 문장의 특성이 부문장이 많아 그대로 옮기면 담백한 맛이 없는데, 매끄럽지 않은 대신 적확한 표현을 찾으려 애쓴 것 같습니다. 번역은 반역이라는데.. 역자의 노고를 깍아내릴 순 없죠^^

나무는좋다 2019-04-03 22: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다른 출판사에서도 나오던데.. 저도 좀 비싸다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만, 그럼에도 추천하실만할까요?
 
부정 본능 - 우리는 왜 자신을 속이고 잘못된 믿음을 가지며 현실을 부정하도록 진화했을까
아지트 바르키 & 대니 브라워 지음, 노태복 옮김 / 부키 / 2015년 6월
평점 :
절판


인도 출신의 의사이자 과학자인 아지트 바르키는 수년 전 세미나에 이은 식사 자리에서 생물학자 대니 브라워를 우연히 만난다. 거기서 바르키는 인간의 진화에 관한 대니 브라워의 독특한 생각을 듣게 된다.
기존의 진화생물학이 보여주던 시각의 틀을 허물고 전혀 다른 관점으로 인간의 진화에 의문을 가진 대니 브라워의 생각이 바르키를 사로잡았고 이후 그는 이 생각에 매달린다. 그리고 그 생각에 체계를 입히고자 브라워에게 연락하지만 그 사이 그는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버린다.
이후 바르키는 브라워의 아이디어에 자신의 생각을 얹어 책을 만들 결심을 한다. 바르키는 단 한 번 만난 브라워의 생각과 기록들을 추적해 그의 아이디어를 되살리고 거의 헌정에 가까운 방식으로 책을 출간하는데, 2015년 <부정본능>으로 번역된 이 책이 바로 그것이다.

제자의 논문을 가로채고 남의 논문을 도용하면서도 그것이 잘못인 것조차 모르거나, 철면피처럼 뭉개버리는 것이 다반사인 우리네 현실을 생각해보면 이 책은 탄생과정부터 이미 감동을 주고 있다.

인류의 기원과 진화과정에 관해 다양한 견해를 보여주는 책들을 꽤 읽었다.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가 가장 최근의 책이며 <지구의 정복자>, <최초의 남자>, <제3의 침팬지> 그리고 <총,균,쇠> 등 이런 류의 주제가 사람들의 관심과 사랑을 받는 것으로 미루어 인간은 필연적으로 자신의 기원에 대한 호기심을 가질 수밖에 없는 모양이다.

진화생물학의 입장에서 살펴본 인류의 기원과 발전과정은 사실 그 가치가 생물학의 영역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사회학과 철학, 문학 그리고 문화연구의 영역에서도 매우 중요한 바탕이 된다. 관심분야가 제각기 달라도 인간의 근원적 의문 가운데 하나인 `우리는 어디서 어떻게 왔는가`의 해답이 궁금하다면 이 책을 읽는 데 주저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공룡이나 코끼리처럼 인간과 비교해서 월등하게 긴 진화의 통로를 거친 수많은 종들이 인간만큼 진화하지 못한 이유는 무엇일까. 어떻게 인간만 똑똑하게 진화했을까. 브라워의 질문은 여기서 시작된다.

우리 조상들은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죽음을 부정하지는 않았을까. 왜 죽음 앞에서 극도의 공포를 느끼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누군가는 웃으며 죽음을 맞을까. 이런 태도와 인류의 진화는 어떤 관련이 있을까.

지진으로 많은 사람이 희생되고 원인 모를 질병이 목숨을 위협하며 인간에게 죽음이 무엇인지 확인시켜 줄때도 왜 인간은 스스로 삶을 포기하지 않았을까. 죽음 이외에도 처음의 인간들이 마주했을 수많은 공포들을 그들은 어떻게 극복해왔을까.

저자의 말처럼 이 책은 해답을 제시하고 있지는 않다.(아니 어쩌면 제목에서부터 끊임없이 부정본능을 긍정하도록 설득하고 있다고 해야할 것이다) 그러나 수많은 사유의 실마리와 통로를 제시하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이 책을 읽은 후에도 여전히 근원적 물음에 대한 해답이 떠오르진 않는다. 하지만 적어도 인간 근원에 대한 사유의 폭만큼은 확장되고 성숙해진 느낌이 들지 않을까 생각한다. 나 역시 `이성적 낙관주의`가 DNA에 새겨져 있는 인간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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