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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태고의 시간들
올가 토카르추크 지음, 최성은 옮김 / 은행나무 / 2019년 5월
평점 :
폴란드의 지도를 찾아보았다. 독일에 인접한 동유럽 국가로서 2차 세계 대전 때 많은 피해를 본 나라라는 대략적인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다른 서유럽 국가들에 비해 익숙하지 않은 나라였다. 독일, 체코 등과 국경이 닿아있고 러시아와의 사이에 벨라루스와 라트비아가 껴있는 나라. 카톨릭 국가로서 자신들만의 언어인 폴란드어를 사용하는 나라. 전쟁과 사회주의의 변화를 겪으며 많은 부침이 있었던 나라. 그렇게 조금이나마 폴란드를 들여다보면서 수차례의 전쟁과 침략을 경험한 우리나라와 유사한 감성을 느꼈다면 과장된 것일까.
세계 속에서 한국이라는 나라는 아시아의 작은 나라로 제3세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입장에서 폴란드 역시 유럽 국가이기는 하지만 익숙한 서유럽이 아닌 동유럽의 낯선 나라로 생각되는 것이 대부분일 것이다. 특히 영어권이 아닌 폴란드 문학은 한국인에게 제3세계 문학과 마찬가지일 것이다. 한국에는 많이 소개된 바 없는 폴란드 문학이지만 노벨문학상 수상이 몇 번인가 있었다. 흥미롭게도 내가 종종 뒤적거리는 시집의 시인 중에 폴란드 시인이 있다. 비스와바 쉼보르스카(Wislawa Szymborska, 1923-2012). 1996년에 노벨문학상을 받았던 폴란드 시인으로 그녀의 시선집 『끝과 시작』을 좋아하는데 올가 토르카축의 『태고의 시간』을 읽으면서 두 작가를 관통하는 핵심적인 감정들을 느꼈다. 전쟁, 삶과 죽음. 폴란드라는 나라의 지역적 위치와 역사적 배경을 생각하며 작품을 읽었을 때 그들의 작품에, 삶에, 역사의 흔적에 전쟁이 남긴 상흔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엿볼 수 있었다.
올가 토카르추크의 『태고의 시간』은 어머니에게서 딸에게로 이어지는 이야기이자 부모에게서 아이에게로 이어지는 이야기이며 ‘태고’라는 시간과 공간이 환상적으로 중첩되는 배경을 바탕으로 폴란드의 역사적 시간들을 미시적으로 기록하는 이야기이다. 인간, 동물, 식물, 자연, 심지어 사물, 장소 등 모든 것의 이야기들은 파편화된 시간으로서 때로는 어긋나며 제각각 편재하는 듯하지만 거대하게는 하나의 흐름으로 폴란드와 그 속의 사람들의 이야기를 말한다. 그들의 이야기는 전쟁을 중심에 두고 시작된다. 하지만 전쟁은 이야기를 현실적으로 묶어내는 중심이자 삶에 대한 화두를 던지는 계기로서 이를 말미암아 수많은 사람들의 시간들을 파편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러시아의 지배를 받던 시기 전쟁에 차출되어 헤어지게 된 게노베파와 미하우 부부로부터 시작된 이야기는 그렇게 갈래를 낳고, 서로를 만나게 될 날을 기다리며 각각의 삶을 살아내어 가는 더 많은 갈래의 이야기 시간들을 분파한다. 남편 미하우가 떠나고 나서야 자신이 아이를 가졌음을 알게 된 게노베파. 남편이 없는 동안 혼자 태고의 방앗간을 유지하고 딸 미시아를 낳고 삶을 꾸려나간다. 그렇게 게노베파의 시간은 딸 미시아에게로, 손녀 아델카에게로 이어지고, 수년만에 가까스로 전쟁에서 돌아온 미하우와 게노베파의 시간은 미시아와 아들 이지도르, 그리고 미시아의 아이들에게로 흐른다. 어머니에게서 딸에게로 흐르는 시간들, 부모에게서 아이들에게로 흐르는 시간들, 갈래갈래 나누어진 시간들은 단편적이고 찰라적이면서도 거대한 흐름을 가진다.
특히 『태고의 시간』에서 핵심적인 시간의 흐름을 가지고 있는 것은 게노베파-미시아-아델카, 크워스카-루타로 이어지는 어머니와 딸의 시간이다. ‘태고’에 존재하는 모든 이들의 시간이 가엽지만 이들의 시간들은 여성에 대해, 여성의 시간에 대해, 여성으로 존재한다는 것에 대해 시대와 세대별로 차이를 가지고 생각하게 한다. 남편이 없는 동안 홀로 방앗간을 유지하고 아이를 낳아 키우며 경제적·가정적으로 자신의 삶을 꾸려나가야 했던 게노베파. 그녀는 충실하게 생활을 지키면서 남편을 기다리는 여성이기도 했지만 여자로서의 자신의 욕망을 원했던 여성이기도 했다. 그녀의 딸 미시아는 아버지 미하우의 사랑과 지원을 받으며 자랐지만 공부보다는 빨리 결혼하고 싶어했고 원하던대로 결혼하여 아이 넷을 낳고 주부로 평생을 살아간다. 하지만 아델카는 게노베파나 미시아와는 달리 일찍이 태고를 떠나 어디에선가 자신의 가정과 삶을 꾸리며 살아간다. 태고를 벗어난 아델카는 루타와 같다. 크워스카의 딸인 루타 역시 태고를 떠나 도시의 화려함을 경험하고 싶어한다. 그래서 결혼했지만 남편은 루타를 강제하고 폭력을 휘두르는 사람이었고 결국 루타는 남편을 떠나 자유를 찾아 브라질로 떠난다. 게노베파나 미시아의 세대가 태고 마을을 떠나지 못하고 남편에게 의지하지 않으면 생활을 이어갈 수 없었던 것과는 달리 아델카와 루타는 태고를 벗어나고자 하는 움직임을 보인다는 점에서 남성 종속적인 이전 세대보다는 자기 의지적인 여성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들의 삶이 이렇게 이어지기까지, 그리고 이어지고 있는 동안에도 여성으로서 겪는 고난들이 많다. 2차 세계대전 시기 태고 마을이 전쟁 최전선이 되면서 마을에 들이닥친 군인들에 의해 루타가 겪었던 아픔, 미시아와 루타의 남편들이 보이는 아내를 자신의 종속 재산처럼 여기는 태도들, 전쟁과 가부장적인 배경들이 여성들을 얼마나 핍박하고 구속해왔는지 대를 이어가는 여인들의 삶을 통해 보여주는데 그것이 우리네 여성들의 삶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보게 된다. 국가, 민족, 문화, 언어에 상관없이 여성으로서 겪게 되는 고달픈 삶이란 만국공통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깨닫게 되는 부분이다.
이야기의 시작에 “태고(太古)는 우주의 중심에 놓인 작은 마을”이라는 설명이 있다. ‘태고’는 시간이자 공간이 중첩되는 환상적인 장소인 동시에 구체적인 시간성, 지역성을 가진다. 태고 마을은 열려있는 듯하지만 신비로운 마을의 경계를 가지고 고립되어 있으며, 멈춰있는 듯하지만 내외부의 출입으로 움직임이 있다. 또한 우주의 중심으로 어디에나 있지만 알 수 없는 변방이기도 하다. 이러한 환상성과 현실성의 미묘한 조합은 1918년, 1937년과 같은 명확한 시기의 언급처럼 제1차, 2차 세계대전 시기, 폴란드의 사회주의 시기, 독일의 동서분단 시기 등의 구체적인 현실 역사의 개입으로 만들어진다. 애초에 ‘태고’라는 어디에도 없지만 어디에나 있을 듯한 신비로운 배경의 설정은 명확한 역사적 설정이 중간중간 개입하면서 여러 파편된 시간들을 하나의 큰 흐름 속에 위치시킨다. 그래서 이야기는 조각나있지만 서사는 살아있는 설득력을 가지는데 이러한 구성은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와 같은 스페인 문학에서 많이 발견되는 환상적 리얼리즘과 유사하다. 현실과 비현실을 자유롭게 넘나드는 환상적 리얼리즘의 서사는 ‘태고’를 구성하는 여러 구성물들의 시간들을 엮어주는 동시에 독자에게는 인물 개인에게 몰입되지 않고 거리를 두고 분산적으로 이들의 시간을 차분하게 들여다 볼 수 있는 여지를 주어서 개인의 아픈 이야기도 담담하게 받아낼 수 있게 한다.
그렇게 이루어진 『태고의 시간』은 ‘태고’라는 거대하고 원시적인 명칭을 달고 있지만 그것을 구성하는 것은 개개인의 인간들의 이야기이며 작게는 동식물에서 넓게는 장소이고 시간의 이야기이다. 20세기 초부터의 폴란드의 역사를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일면적인 거대 서사를 내세우기보다는 그 뒤에 감춰졌거나 억눌렸던 이야기들을 파편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이러한 거대 서사와 미시 서사의 뒤섞임은 현실과 비현실의 환상적 리얼리즘 서사와 마찬가지로 신화와 역사, 개인과 혼합된다. 예를 들어 크워스카는 사회적 잣대에 구속되지 않고 여성으로서의 자신의 육체적 욕망에 자유로운 인물인데 그녀가 숲속에서 홀로 아이를 낳으면서 자연과 동화가 된다던가 후에 그녀의 딸 루타를 결혼시키며 여름에는 남편과 지내지만 겨울에는 자신과 지내야 한다고 하는 부분에서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대지의 여신 ‘데메테르’와 딸 ‘페르페포네’의 이야기를 떠올리게 한다. 이러한 설정은 거대 서사와 미시 서사를 교묘하게 혼합하며 그 경계를 나누려하지 않는다. 즉, 개인의 서사라고 하여 작다고 소홀한 것이 아니며 역사와 신화라고 하는 것들 역시 수많은 별들이 모여 은하수를 이루듯 세상의 많은 작은 것들이 모여 이루어진 이야기라는 것이다. “어쩌면 현실의 축일지도 모”르는, “이 세계에서 인간보다 더 중요한 존재일 수도 있”는, ‘태고’의 기둥일지도 모르는 미시아의 커피 그라인더를 미시아의 딸 아델카가 계속 돌리는 것으로 이야기가 마무리되는 것은 그녀들의 시간이, 그들의 시간이 앞으로도 계속되고, 그것이 현실을 구성하고 변화시키는, 그리하여 이윽고 흐름 속에서 만나고 계속 함께하게 될 것임을 말해주는 것일지도 모른다.
* 전자책으로 읽은 까닭에 인용부분의 원문 페이지 수를 알 수 없어서 기입하지 못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