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치산 대장 홍범도 평전 - 항일 무장투쟁의 영웅, 대한독립군 총사령관 홍범도 장군의 장렬한 삶
김삼웅 지음 / 현암사 / 2013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아빠가 학교 다닐 때 국사 시간에 배운 것에 의하면 봉오동 전투는 홍범도, 청산리 대첩은 김좌진이었단다. 그런데, 그것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 절실히 깨닫게 만든 책이 이번에 아빠가 읽은 김삼웅의 <빨치산 대장 홍범도 평전>이야. 전에도 이야기했지만 아빠는 김삼웅이 쓰는 인물 평전을 좋아하기 때문에 종종 읽는단다. 이름만 알고 지냈던 사람들의 진면목을 발견하게 되는 경우가 많았어. 이번에 읽은 <빨치산 대장 홍범도 평전>이라는 책도 마찬가지였단다. 홍범도라고 하면 봉오동 전투에서 승리한 사람으로만 알고 있지, 봉오동 전투 이전에 그가 어떻게 살았고 봉오동 전투 이후에 그가 어떻게 살았는지 몰랐어. 그런데 이 책을 통해 혁명가로 평생을 살았던 홍범도를 알게 되었고, 그의 대표적인 전투는 봉오동 전투가 아닌 청산리 대첩이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단다. 그의 업적에 비해 그에 대한 평가와 대접이 너무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단다. 대한민국 시민의 한 사람으로써 죄송함마저 들었어.

 

1.

홍범도는 1868년 평양에서 머슴의 아들로 태어났어. 홍범도의 어머니는 홍범도를 낳은 지 일주일 만에 돌아가시고, 아홉 살 때는 아버지마저 돌아가셨단다. 그래서 그는 아홉 살부터 머슴살이를 했어. 그러다가 열다섯 살에 군대에 들어갔어. 열다섯 나이면 원래 군대를 들어갈 수 없지만, 그는 나이를 두 살을 속여 군대에 들어갔단다. 그가 군대에 들어간 것은 대단한 뜻이 있었던 것은 아니고 생계를 위해서였어. 군대에 들어간 그는 나팔수 역할을 했대. 그러다가 서울에서 임오군란이 일어난 이후 경비 인력이 부족해서 차출되어 서울로 갔어. 그는 군인이 백성을 탄압하는 것에 회의를 느꼈대. 그 와중에 부패한 상관을 폭행한 일이 있었는데, 그 일로 군대를 떠났대. 4 년 간의 군생활의 끝이었지. 그래도 그 4 년의 군생활이 나중에 그가 몸을 담은 의병생활에 큰 도움이 되었단다. 특히 홍범도는 신기의 총격술을 가지고 있었대. 백발백중.

그는 군대를 떠나서 제지공장에 취업을 했어. 제지 공장의 주인이 동학을 권유했고, 동학이 무엇인지 잘 몰랐던 홍범도는 거절을 했대. 그 일로 주인과 불화를 빚고, 주인이 임금도 주지 않았대. 그래서 그만 그 일을 그만 두었다고 하는구나. 그 때 나이 스물두 살. 그는 금강산의 신계사에 가서 승려 생활을 했는데, 상좌의 직책이었지만, 행자 노릇을 했다고 하는구나. 그런데 그 절에서 비구니와 연정을 품게 되었고, 그 비구니가 임신까지 하게 되었대. 그런 일이 있었으니 절을 떠났을 수 밖에 없었지. 비구니의 고향인 함경도 북청으로 길을 떠났단다. 그가 절에 있으면서 임진왜란에 대한 지식을 얻고 처음으로 항일 정신을 키우게 된 것으로 알려져 있단다. 홍범도와 비구니는 북청을 가던 길에 건달을 만나 싸움이 붙고 그 일로 비구니와 헤어지게 되었단다. 그렇게 헤어져서 홍범도는 강원도 산중에서 은둔생활을 하게 돼. 이 은둔생활을 하던 중, 김수협이라는 청년을 만나는데, 김수협과 함께 의경운동을 시작하였단다.

 

2.

홍범도는 김수협과 단둘이 일본군 11명을 제압해서 무기를 빼앗았어. 이후 의병대를 만들어 의병을 시작했어. 그렇다고 군 기술을 배운 이들이 아니었어. 농민과 신포수로 이루어진 단체야. 홍범도는 유인석의 의병대와 합류해서 일본군과 전투를 벌이기도 했어. 그런데 전투에서 져서, 의병대는 뿔뿔이 흩어지고 홍범도는 북천으로 향했단다. 북천은 자신이 사랑했던 비구니의 고향이었거든. 그런데, 그곳에서 사랑하는 이를 만날 수 있었어. 그리고 그의 아들 양순도….

그는 그곳에서 7~8년 동안 행복한 삶을 살았단다. 산포수로 생계를 꾸리면서 가족들과 지냈어. 그런데 점점 산포수들에 대한 일제의 탄압과 수탈이 심해져서 그는 저항을 했고, 다시 의병대를 조직했어. 차도선이라는 사람과 함께 의병을 이끌며 삼수, 갑산 지역에서 활동했단다. 일본군은 가족을 회유했지만, 오히려 아들 양순도 어린 나에 의병에 참가했단다. 홍범도가 이끄는 의병대는 규모가 커져서 500여명이 되었고, 주변의 작은 의병대들도 합류하고 연합을 했어. 늘 좋은 일만 있었던 것은 아니야. 아들 양순이 1908년 전투 중에 죽고 말았고, 부인은 감옥에서 죽고 말았어. 혁명가의 가족이 가져야 할 운명이라고 생각하니 너무 가슴이 아프구나. 홍범도가 이끄는 의병대는 왜 강한가에 대해 지은이는 다섯가지로 정리해 주었단다. 첫번째는 주로 포수들로 구성이 되어 있었다는 점. 둘째 기동력이 좋다는 점. 셋째 평민들로 이루어져 있어서 의견충돌이 적다는 점. 넷째 막강한 전투력을 가졌다는 점. 다섯째 백성들의 지지를 받았다는 점이었다고 하는구나.

 

3.

일제 탄압은 점점 커져서 홍범도는 국내 의병전에 한계를 느끼고 국경을 넘기로 했단다. 이때 그의 나이 어느덧 사십이었어. 모든 이들을 데리고 갈 수 없었어. 그는 측근들만 데리고 압록강을 건너 간도로 이동했단다. 1909년 초 홍범도는 다시 연해주 블라디보스톡으로 이동했어. 당시 블라디보스톡은 항일 운동의 중심지였어. 아무래도 일본과 지리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었으니까 말이야. 그는 여기서 안중근을 만나기도 했대. 홍범도는 ‘13도 의군에 참가하기도 했고, 권업회에 참석하면서 본격적인 독립운동을 했어. 권업회는 최재형이 회장을 맡고, 홍범도가 부회장을 맡았어. 그리고 아빠가 존경하는 신채호가 주필이 되어 권업신문을 내기도 했어.

그런데 1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면서, 러시아와 일본이 동맹을 맺으면서 상황이 바뀌었어. 일본과 동맹을 맺은 러시아가 그냥 지켜볼 수 없었어. 1914년 러시아는 우리나라 사람들을 추방했단다. 블라디보스톡에서 독립 운동은 타격을 입었어. 권업회도 이때 해산되었단다. 홍범도는 블라디보스톡에서 쫓겨나서 봉밀산 등지에서 독립 운동 준비를 했어. 삼일 운동이 일어나기 전까지 이어졌단다. 약간의 변화가 있다면 러시아 혁명 이후 다시 러시아와 협력을 하게 되었다는 것.

3.1운동 이후 문창범이 회장으로 있는 대한국민회의에서 활동을 했어. 이 단체는 상해 임시정부와 함께 협력을 하였고 군무부에 있던 홍범도를 중심으로 대한독립군을 창설하게 되었단다. 대한독립군의 사령관은 홍범도였고, 이들은 북간도로 이동했어. 국내 진입 작전을 이끌면서 국경 지역과 가까운 갑산과 평북의 강계 지역에 진입해서 일제의 무기를 갈취하는 등의 성과를 냈단다.

 

4.

1920 6 7. 독립전쟁 제 1회전이라고도 부르는 봉오동 전투. 이것은 사실 작은 전투에서 시작했다고 하더구나. 소규모 헌병순찰대를 격파했는데, 이에 일본군의 반격이 있었고, 삼둔자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벌이게 되었는데, 일본군을 전멸시키는 성과를 냈단다. 이에 일본군의 대대적인 보복전이 있었어. 홍범도는 전략을 세웠어. 먼저 마을의 사람들을 모두 다른 곳으로 옮기는 마을 공동화 작전을 폈고, 이후 유인 작전 전술을 폈어. 그날 날씨는 천둥 번개를 동반하여 좋지 않았지만, 그것은 일본군에도 마찬가지. 봉오동에 있었던 전투에서 적군 500여명을 살상하는 대승을 거두었단다.

봉오동 전투에서 대패한 일본군은 다시 한번 대규모 보복전을 준비하였단다. 이번에는 중국군에 압력을 넣어 중국군까지 동원했어. 하지만 홍범도는 오히려 중국군을 회유했어. 하지만 계속된 일본군의 압박때문에 홍범도는 봉오동를 떠날 수 밖에 없었어. 봉오동 전투가 있고 4개월 뒤, 일본군을 간도 지역에 대규모 군대를 보냈어. 홍범도는 그들을 용정촌에서 100여 리 떨어진 화룡현 삼도구로 유인하려고 했어. 그곳은 깊은 계곡으로 전략적으로 먼저 진을 치면 유리한 곳이었기 때문에 그것을 결전지로 정했단다. 이번 전투에는 김좌진이 이끄는북로군정서군도 함께 했단다.

한편, 일본군은 이 전투를 정당화하기 위해 사전에 음모를 벌였어. 마적단을 돈주고 사서 간도 내 일본 영사관을 공격하여 아홉 명을 죽이는 자작극을 벌였어. 이 사건은 훈춘 사건이라고 한단다. 이 훈춘 사건을 빌미로 대규모 일본군은 간도에 주둔하게 되고, 1920 10 21일부터 26일까지 청산리 지역에서 대규모 교전을 벌이게 된단다. 백운평 전투를 시작으로 완루구 전투, 천수평 전투, 어랑촌 전투, 맹개골 전투, 만기구 전투, 쉬구 전투, 천불산 전투, 고등하 골짜기의 전투까지사전에 미리 진을 치고 있던 우리 군은 이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었단다. 위에서 열거한 많은 전투들은 모두 홍범도의 연합독립군과 김좌진이 인솔하는 북로군정서군이 단독 혹은 연합적으로 수행했던 것이란다. 이 청산리 전투로 일본군은 1200 여명이 죽었어. 우리나라 독립군으로는 정말 큰 승리였단다. 홍범도도 이 전투에서 다리에 총상을 입은 것으로 알려졌단다.

이런 업적에도 불구하고 왜, 청산리 대첩에서 홍범도가 빠진 교과서로 배워야 했을까. 홍범도가 나중에 소련공산당에 가입을 하긴 했지만, 그것보다는 한 사람의 의해서 역사의 왜곡이 시작되었다고 할 수도 있어. 잠시 그 이야기를 해볼게. 나중에 해방이 된 후 북로군정서군의 장교로 있었던 이범석이 국무총리를 맡았는데, 그 이범석이 회고록을 썼어. 그런데 그 회고록에 자신의 업적을 과장해서 쓰면서, 홍범도를 나쁘게 왜곡을 해서 쓴 거야. 홍범도가 도망치다가 아랫사람들이 떼죽음을 당했다고 말이야. 아주 노골적으로 왜곡했다고 하는구나. 그래서 이승만, 박정희 정권의 청산리대첩의 기록에는 홍범도가 전혀 없었다고 하는구나. 그러나 청산리 대첩의 진정한 주역은 홍범도라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란다. 정확하게 이야기하면 홍범도, 김좌진, 이범석의 세 주역들과

무명의 많은 독립군들, 그리고 간도 백성들의 적극적인 지지이것이 청산리 대첩 승리의 원동력이었던 거야. 정세윤 박사라는 분은 청산리 전쟁을 아래와 같이 평가하고 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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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세윤 박사는 청산리 전쟁의 주역은 북로군정서가 아닌 홍범도라는 주장을 편다.

홍범도 부대는 김좌진 부대와 같이 청산리 전쟁에서 크게 활약하였다. 어떤 면에서 청산리 독립전쟁의 주역은 북로군정서 부대가 아니라 오히려 홍범도와 그를 중심으로 한 여러 독립군 부대들이라고 할 수 있다. 북로군정서 군대가 독립군의 단위부대로서는 가장 큰 규모이며 기관총과 박격포까지 갖추고 있어 강한 전투력을 발휘할 수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일본군과의 전투 직전에 수백 리에 이르는 길을 강행군하여 이동하였고 도착 직후는 심한 식량난에 시달려야 했다. 반면 홍범도 부대는 9월 하순 가장 먼저 청산리 일대에 도착하여 훈련과 식량조달 등 적과의 전투에 대비하고 있었다.

청산리 전쟁의 ‘3주역이라 할 홍범도, 김좌진, 이범석은 독립운동 과정에서 각기 다른 행보를 걷다가 청산리에서 연합군 지휘자의 위치에서 일제와 싸워 대첩을 이루었다. (1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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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일본의 보복은 더욱 악랄했단다. 경신대학살이나 간도대학살이라고도 부르는 경신참변. 재만교포 5천여 명 학살을 했어. 시베리아에서도 최재형을 포함하여 70여명을 죽였단다. 이런 무자비한 만행으로 간도의 독립 운동은 위축될 수 밖에 없었어. 홍범도도 독립 운동은 잠시 접고, 이때 대종교와 단군계열 단학회에 참여하여 활동을 했어. 독립군들도 러시아 지역으로 이동을 해서, 자유시 근방에 집결하였단다. 그런데, 러시아가 우리 독립군들에게 무장해제를 요구했어. 다른 나라의 무기를 사용한다는 이유야. , 힘없는 민족의 설움

홍범도는 고심 끝에 그들의 말을 따르기로 했어. 이것보다 더 큰 문제가 있었어. 자유시로 여러 독립군들이 모여들었다고 했잖아. 자유시에 모여든 여러 독립 단체들의 갈등이 고조되었어. 상해파 고려공산당과 이르쿠츠크파 공산당의 파쟁이 결국 비극을 만들었단다. 그들의 분쟁은 무고한 다수의 독립군 대원들이 희생당했어. 600여 명의 사상자가 나왔대. 이를 자유시 참변이라고 부르는데, 이 일로 홍범도 무장 투쟁도 크게 위축되었단다.

홍범도는 부대원 1745명과 함께 이르쿠츠크로 이동해서 소비에트 적군 조선독립여단 1대대장에 임명되었어. 그리고 모스크바에서 극동민족대회에서 참석을 하기도 했어. 이때 레닌과 트로츠키를 만났고, 레닌으로부터는 권총과 돈, 그리고 선물도 받았단다. 러시아 핵심 인물들과 안면을 텄으니, 독립 운동에 대한 지원에 희망을 걸 만 했어. 그러나, 이루쿠츠크로 돌아온 지 얼마 안되어

레닌이 죽었다는 소식, 트로츠키가 축출되었다는 소식. 스탈린이 서기장이 되었다는 안 좋은 소식이 전해졌어.

그래도 홍범도는 꾸준히 독립 운동에 도움이 될만한 일들을 했단다. 연해주에 농업조합을 만들었고, 청년들에게 사격 등 군사 훈련을 시켰어. 그리고 1926년 이인복이라는 여인과 재혼을 했단다. 전 부인과 사별한 지 18년 만이었고, 홍범도의 나이 어느덧 59세였어. 집단 농장을 운영하기 위해 1927넌 소련공산당에 입당을 했는데, 이 이력이 나중에 역사에서 그를 배제하는 빌미가 되었단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스탈린이 서기장이 된 것이 안 좋은 소식이라고 했잖아. 스탈린은 한인들을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동을 명령했단다. 간첩과 외모가 비슷해서 어렵다는 이유였는데, 그러면 사람 대우를 해주면서, 보상을 해주면서, 사람이 살 만한 곳으로 보내줘야지한달 동안 기차를 타고 이동을 해야 하는, 그곳도 척박한 땅으로 먹을 것도 없는 중앙아시아라고 하니…. 우리 한인들 17만 명을 기차로 꽉꽉 채워서 강제 이동 시켰단다. 이때 많은 이들이 기차 안에서 죽었다고 하니, 또 가슴이 먹먹해 지는구나.

홍범도도 노구를 이끌고 이동을 했고, 카자흐스탄에 배치를 받았단다. 그곳 땅에 척박한 땅이었지만, 한인들은 또다시 개척을 했단다. 카자흐스탄에서 홍범도는 태장춘이라는 연극 연출가를 만나게 되었어. 태장춘은 홍범도의 파란만장 삶을 많은 사람에게 알려야겠다고 생각했어. 홍범도를 설득해서 자서전을 쓰도록 했어. 그렇게 쓴 자서전이 <홍범도 일지>였어. 그리고 태장춘은 홍범도의 삶을 연극으로 만들어 공연을 했단다.

1943 10 25…. 조금만 더 사셨으면 꿈에 그리던 해방을 보셨겠지만, 홍범도는 해방을 희망으로만 간직한 채 75세의 나이도 돌아가시고 말았단다. 사람은 죽어서 어떻게 될까. 영혼은 이 세상에 남아 있을 거야.. 분명히.. 그래서 홍범도의 영혼도 조국이 해방을 한 것으로 보고, 기뻐하셨을 거야. 비록 곧 둘로 나뉘어져 서로 총칼을 겨누어 많은 이들이 죽어서 다시 슬퍼하셨겠지만 말이야. 그렇게 나눈 둘이 여전히 다른 길을 가고 있어 가슴 아파하시겠지만, 그래도 일본 지배에서 벗어나 이 정도 나라의 기틀을 마련하고 발전했으니, 조금은 기뻐하고 계시지 않을까 생각한단다. 이국 땅에서, 특히 추운 만주, 연해주 등에서 독립운동을 한 홍범도를 비롯한 많은 독립군들그들의 희생에 고마움을 늘 마음 속에 둘 수 있는 그런 책이었단다.

 

 

장세윤 박사는 청산리 전쟁의 주역은 북로군정서가 아닌 홍범도라는 주장을 편다.

홍범도 부대는 김좌진 부대와 같이 청산리 전쟁에서 크게 활약하였다. 어떤 면에서 청산리 독립전쟁의 주역은 북로군정서 부대가 아니라 오히려 홍범도와 그를 중심으로 한 여러 독립군 부대들이라고 할 수 있다. 북로군정서 군대가 독립군의 단위부대로서는 가장 큰 규모이며 기관총과 박격포까지 갖추고 있어 강한 전투력을 발휘할 수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일본군과의 전투 직전에 수백 리에 이르는 길을 강행군하여 이동하였고 도착 직후는 심한 식량난에 시달려야 했다. 반면 홍범도 부대는 9월 하순 가장 먼저 청산리 일대에 도착하여 훈련과 식량조달 등 적과의 전투에 대비하고 있었다.

청산리 전쟁의 ‘3주역’이라 할 홍범도, 김좌진, 이범석은 독립운동 과정에서 각기 다른 행보를 걷다가 청산리에서 연합군 지휘자의 위치에서 일제와 싸워 대첩을 이루었다. (18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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