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회영 평전 - 항일무장투쟁의 전위, 자유정신의 아나키스트
김삼웅 지음 / 책으로보는세상(책보세) / 2011년 6월
평점 :
품절


 


[참고] 기억력에 의한 내용상 오류 있을 수 있음.


[다시 이회영]

예전에 이회영이란 분을 처음 알게 되고, 그 분에 대한 책을 읽어 보고 싶어서 찾아보다가 역사학자 이덕일이 쓴 "이회영과 젊은 그들"이란 책을 읽었다. 그리고 그 이후 내가 좋아하는 김삼웅이 이회영 평전을 내셔서 꼭 읽어봐야겠다고 생각을 했었다. 그랬다가 책을 낸 지 한참이 지난 이제서야 읽게 되었다. 이회영이란 분에 대한 이야기는 텔레비전을 통해 제법 많이 소개되어 이제는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을 거라는 생각도 든다. 여섯 명의 형제가 어떻게 그렇게 똑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었을까. 그들은 어렸을 때부터 우애 좋기로 소문났다고 한다.

이건영.

이석영.

이철영.

이회영.

이시영.

이호영.

여섯 형제

그들을 행동하게 한 힘은 무엇이었을까? 나라면 절대 그렇게 행동하지 못 했을 텐데 말이다. 비록 일본의 침략을 받았지만이회영 집안처럼 삼한갑족이라고 부를 만큼 권력과 부를 가지고 있었다면 별 걱정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었을 텐데, 그들은 그런 자신의 안위는 삶의 목적이 아니었던 것 같다. 이회영은 여섯 형제의 넷째이지만, 어떤 일을 함에 있어 주도적이었다. 그래서 1910년 나라가 일본에 넘어간 이후, 우리나라에서는 독립운동을 하기 어렵다고 생각하고 간도 땅으로 가자고, 형제들에게 이야기를 하는데, 단 한 명도 반대가 없었다. 그래서 가족들과 하인들 사오십 명이 한겨울에 그 추운 간도 땅으로 갔다고 한다. 하인들도 억지로 끌려간 것이 아니다. 이미 스무 살 때 이회영은 자신의 노비들에게 존댓말을 쓰면서, 가고 싶은 곳으로 자유롭게 가도 된다고 했다. 그런 선각자였다. 이회영 가족과 같이 간 하인들은 모두 자발적으로 간 것이다. 여섯 형제 중에 이석영은 친척의 양자로 들어갔는데, 그 양아버지가 영의정이었기 때문에 엄청난 부자였다고 한다. 이석영도 동생의 제안에 흔쾌히 동의하고, 자신의 전재산을 팔아서 자금으로 썼다고 한다. 급하게 재산을 처분해야 했기에 제대로 돈을 받지 못했다고 하는데도 오늘날로 치면 600억 원에 해당하는 금액이라고 한다. 그렇게 한겨울 모진 밤바람을 맞고 사오십 명이 북으로 걸어가는 장면을 생각해보니, 찡하다. 그 일행 중에는 갓난아이도 있었다고 하는데 말이다.

 

 

[민족주의자]

기억에 가장 남는 부분부터 급히 이야기한다고 그들이 우리나라를 떠나 간도로 가는 장면을 이야기해주었는데, 그 전에도 이회영은 국내에서 잘못된 나라 꼴을 제대로 돌리려고 노력을 했다. 1905년 을사늑약 이후 이회영은 당시 대한제국의 황제인 고종을 몰래 만나게 된다. 그리고 일을 하나 기획했다. 1907년 헤이그에서 열리는 만국평화회의에 사람들을 보내서 우리나라의 상황을 이야기하고 독립을 요구하기로 한 것이다. 이준, 이상설, 이위종이 참석하게 되는데, 이 일은 유명한 일로 학교에서도 배웠다. 그런데, 이 일을 기획한 사람이 이회영이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을 별로 없었을 것이다. 이준이 할복자살했다는 것만 기억을 할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사실과 다르다. 이준은 그곳에서 분함에 병을 얻어 병사를 하신 것이다. 암튼, 이회영이 기획한 이 일에 고종도 동의하고, 옥새까지 그들에게 주었다고 한다. 일본이 우리나라 사람들이 헤이그에 온 것을 알고, 못 들어오게 조치를 취했지만, 그들은 만국평화회의에 참석해서 우리나라 상황을 전세계에 알렸다. 하지만, 약소국의 현실만 확인하고 큰 효과는 얻을 수 없었다. 이 사건에 고종도 연루된 것을 알게 된 일본은 고종을 강제로 황제 자리에서 끌어내리고, 순종을 왕위에 세웠다.

그 이후 이회영은 교육의 중요성을 알고, 교육기관을 만들기도 하고, 여러 거사를 꾸미기도 했지만, 실패를 했다. 그래서 중국으로 망명할 생각을 하게 되었고, 직접 중국으로 적당한 장소를 찾아 나섰고, 그래서 찾은 곳이 간도였던 것이다. 그래서 1910 12 30, 한겨울 그들은 압록강을 건너 간도에 도착했다. 그는 교육이 중요하다고 생각했고, 그 전부터 생각해온 신흥무관학교를 세웠다. 이 신흥무관학교는 독립운동의 메카가 되었고, 350여 명의 독립운동가를 배출하게 된다. 지청천, 이범석 등 많은 사람들이 청산리 대첩과 봉오동 전투에서 큰 활약을 했다. 이회영은 군자금을 모으려고 다시 국내로 들어왔다가 그는 또 다른 큰 일을 계획했다. 그것은 바로 고종을 망명시키는 일이다. 고종을 망명시켜 망명정부를 만들면 독립운동에 큰 도움이 될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 계획은 고종의 갑작스러운 죽음, 친일파가 독살한 죽음으로 이루지 못했다. 삼일 운동이 일어나고 나서, 다시 중국으로 갔다.

 

 

[아나키스트]

아나키스트 이회영. 가장 잘 어울리는 말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아나키스트는 “무정부주의자”로 해석하는데, 아나키스트를 말을 일본에 어떤 사람이 맨 처음에 무정부주의자로 해석을 해서 그렇게 불렀다고 한다. 그런데, 아나키스트를 좀더 정확하게 이야기하면 “무강권주의자”라고 하는 게 더 맞다고 한다. 그리고 이 책에는 유럽에서 처음 생긴 이후 아나키즘의 흐름과 아나키스트들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어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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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지배와 권위를 거부하고 정부나 통치의 부재를 뜻하는 아나키즘(anarchism)은 그리스어 ‘an archor’에서 유래한다. 모든 정치조직, 규율, 권위를 거부하고 국가권력의 강제수단을 철폐하여 자주, 자유, 평등, 정의, 형제애를 실현하려는 이데올로기다. ‘아나키(anarchy)’는 미하일 바쿠닌이 처음 쓴 말로 알려졌다. “그는 ‘재산은 절도’라는 말로 유명한 프루동의 제자로, ‘아나키’는 그가 조합한 단어다. ‘계급구조’를 의미하는 하이어아키(hierarchy)의 반대개념으로 ‘무정부’를 뜻하지만, ‘혼돈’이나 ‘무질서’ 개념으로도 사용된다. (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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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튼, 이회영은 아나키즘을 만나면서 아나키스트가 되었다그가 아나키스트가 된 이유는 그것이 우리나라 독립에 더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한 거다. 그가 그 시대 또 하나의 조류였던 공산주의를 접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 공산주의도 소련에서 이미 변질되고 실패했다고 생각했다. 그만큼 시대를 읽는 통찰력 또한 뛰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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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독립운동의 현실로 보아 (아나키즘이) 가장 실제적인 이론이며 적절한 방법론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또 사실상 모든 운동가들이 자기 사상이야 어떠하든지 이미 무정부주의 자유연합의 이론을 다 같이 이대로 실행하고 있다. 기미년 이전과 이후를 막론하고, 지금까지 수많은 단체와 조직이 생겼지만 그에 소속된 운동가가 자신의 자유의사의 결정에 의지하지 않고 강제 명령에 무조건 맹종하여 행동한 사람이 누가 있는가? 그런 단체가 어디 있는가?

이른바 철의 조직이라고 자타가 공인하며, 강제와 복종의 기율을 조직의 생명으로 하는 공산당이라 하더라도, 그것은 지금의 소련과 같이 자기들의 정치권력을 확립한 뒤의 얘기다. 그들도 혁명 과정에서는 모든 당원이 명령에 무조건 복종한 것이 아니라 자유합의에 토론과 타협을 하고 나서 행동하였던 것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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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열단과 만나게 되는 이회영. 그들을 후원하게 된다. 의열단에는 신흥무관학교 출신의 김원봉이 이끌고 있었다. 예전에 이원규의 <약산 김원봉 평전>을 정말 감명 깊게 읽은 적이 있다. 그리고 김삼웅도 <김원봉 평전>을 쓰셨는데, 아직 읽어보지는 못했다. 김원봉은 작년에 크게 인기를 끈 영화 <암살>에서 나와서 또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기도 했었다. 김원봉이 이끄는 의열단의 활약은 일본 경찰을 공포로 몰아넣었다. 우리에게 알려진 가장 대표적인 독립운동가인 김구보다 더 활약이 많았고, 일본이 김구보다 훨씬 무서워했던 이가 바로 김원봉. 그가 해방 후 어쩔 수 없는 상황에 몰려 북한으로 넘어간 이후 우리 나라의 역사책에서 사라진 것이 끝내 아쉽다. 꼭 그래야만 하는지 모르겠다. 친일파들은 버젓이 실려 있는데 말이다. 김원봉이 우리나라 역사책에 더 크게 부각되었다면, 이회영 선생도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지 않았을까 생각이 들었다. 김원봉과 의열단의 활약에 관심이 있는 이들은 <약산 김원봉 평전>을 추천한다.

 

[독립운동가의 가족]

그 이후에도 이회영은 베이징, 텐진, 상하이를 오가면서 ‘다물단’, ‘무련’ 등 무장 독립 단체를 만들면서 활동을 했다. 하지만, 돈이 없었어. 간도로 오면서 가지고 온 돈은 이미 독립자금으로 다 쓴 이후다. 이회영을 비롯한 형제들, 가족들은 빈곤한 생활을 할 수 밖에 없었다. 결국 이회영은 아내 이은숙에게 독립자금을 마련해 보라고 국내로 다시 보냈다. 당시 임신한 몸이었던 아내 이은숙은 국내로 들어왔다. 일본 경찰의 삼엄한 감시로 인해 자금 마련이 쉽지 않았다. 나중에는 바느질까지 해서 돈을 마련하여 중국으로 보냈다고 한다. 이회영의 아내 이은숙. 이 분 또한 투철한 독립운동가라고 할 수 있다. 그녀는 중국의 먼 땅에서 남편을 찾아오는 수많은 독립투사들의 뒷바라지까지 다 해주었다고 한다.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국내로 자금 마련을 오는데도 한치 망설임이 없었다. 그런데, 그 길이 이회영과 마지막 길이었다고 하니 가슴이 아프다. 나중에 이은숙은 자서전을 통해 이회영의 독립 운동에 대해 자세히 적어 놓아 역사적으로 귀한 자료가 되었다고 한다. 혹시 책을 살 수 있나 싶어 검색해봤더니 이미 수십 년 전에 절판이 되었다. 이런 소중한 책들을 읽을 수 있도록 해야 하는 것도 출판사들의 역할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암튼, 아내를 국내를 보내고 나서 이회영은 텐진을 기점으로 운동을 하다가 상해로 거사를 위해 이동하게 되는데, 어린 두 딸을 데리고 갈 수 없어서 구제원에 맡기고, 아들만 데리고 상하이로 갔다. 구제원은 오늘날 고아원이다. 하지만, 가는 길에 계속 두 딸이 눈에 밟혔다. 그리고 상해에서 윤봉길 의사의 성공적인 거사 소식을 듣고, 경비도 삼엄해졌다는 이야기를 듣고 다시 텐진으로 돌아왔다. 두 딸과 다시 만나게 되었고첫딸 규숙이 나이가 들어서 결혼을 하게 되었는데, 평소 이회영을 존경하는 젊은 아나키스트 독립운동가였다. 이회영은 규숙 부부에게 아직 어린 둘째딸을 보살피게 했다. 그래서 자유로운 몸이 된 그는 다시 무력 투쟁에 온 힘을 쏟게 된다. 국제 아나키스트의 연맹인 동방연맹을 조직하기도 했고남화연맹(남화한인청년연맹)이라는 것을 만들어 백범 김구와 연대하기도 했다. 그리고 일본 유력 인사가 북만주에 온다는 소식을 듣고 일흔 가까이의 나이의 몸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은 삶이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에 이런 위험한 일은 오히려 자신이 해야 한다면서 북만주행 배에 몸을 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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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으로 세상에 태어나서 누구나 자기가 바라는 목적이 있다. 이 목적을 달성한다면 그보다 더한 행복은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였다 하더라도 그 목적의 달성을 위하여 노력하다가 그 자리에서 죽는다면 이 또한 행복인 것이다.

이것을 남의 눈에는 불행하다 할 수도 있겠지만 죽을 곳을 찾는 것을 예부터 행복으로 여겨왔다. 같은 운동선상의 동지로서 장래가 구만 리 같은 귀중한 청년자제들은 죽는 것을 제 집에 돌아가는 듯이 여겨 두려움 없이 몇 번이고 사선을 넘고 사지에 뛰어드는데, 나이 이미 60을 넘어 70이 멀지 않았다. 그런데 이대로 앉아 죽기를 기다린다면 청년동지들에게 부담을 주는 방해물이 될 뿐이니 이것은 내가 가장 부끄러워하는 바요, 동지들에게 면목이 없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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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 이후로 그의 소식은 끊겼다. 그리고 얼마 뒤 뤼순 감옥에서 그가 죽었다는 사망통지서가 국내에 있는 아내 이은숙에게 전달되었다. 그래서 거꾸로 상해에 있는 이회영의 아들과 독립운동가들에게 알렸다고 한다. 뤼순 감옥은 예전에 안중근 의사가 죽은 곳이고, 신채호 선생도 투옥 중 사망하신 그 곳이다. 뤼순 감옥은 우리나라 아픈 현대사를 가득 담고 있는 곳이다. 일본은 이회영이 자살했다고 하였지만, 나중에 그는 모진 고문으로 삶을 잃었다고 밝혀졌다. 그리고 이회영이 일본경찰에 잡히게 된 것은 바로 이회영의 조카가 발설해서 그렇게 되었다고 하니 얼마나 가슴 아픈 일인지 모르겠다.

나중에 해방을 하고 나서 여섯 형제 중에 다섯째 이시영만이 살아서 우리나라로 돌아왔다고 하니 이 또한 정말 가슴 아프다.

 

[이회영]

누군가 이회영이 어떤 분이 물어본다면, 어떻게 이야기하면 좋을까? 이회영이란 어떻게 짧고도 강렬하게 이야기해줄 수 있을까를 많이 생각하면서 책을 읽었다. 그런데, 지은이가 이 책의 ‘닫는 글’에서 그 답을 주셨다. 짧고도 강렬하게 이회영을 정리해 주었다. 그 글을 인용하면서 리뷰를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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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유학에 탐닉하지 않는 개신유학 찾는 열린 사상

왕조체제와 공화주의 교체기의 개명사상

벼슬이나 감투보다 분방하게 살고자 한 자유혼

형식논리의 주자학보다 실천논리의 양명사상

현실안주와 저항인의 갈림길에서 보여준 기득권 포기

‘상놈’들이 모이는 상동교회에서 결혼식 올린 파격

청상이 된 누이 장례 치르고 재혼시킨 여성주의

머슴들 해방시키고 존댓말 쓴 평등사상

황실과 가까우면서도 신민회 창설한 탈근대인

만국평화회의에 특사파견을 주도한 국제주의

고종황제 앞세워 망명정부 세우려던 통 큰 고구려인

일가 재산 모두 팔아 망명한 ‘인민의 전위’

윗자리 사양하고 위험한 곳 먼저 찾은 비범한 범인

굴욕과 억압보다 자존과 저항을 택한 자유주의

경학사와 신흥무관학교 세운 무장투쟁의 원조

목적과 수단을 일체화하는 리얼리스트

일의 성패를 문제 삼지 않고 동기의 순수성을 중히 여긴 양명학자

시작과 끝을 양심에 호소할 뿐 성패를 묻지 않는 강화학파

대원군 난초 쳐서 독립자금 만든 예술혼

지위나 물욕보다 명예와 가치를 높이 산 아나키스트

광복운동 과정에서 ‘자유협동체론’을 제시한 경륜

“독립한국은 4민 평등한 만인의 자유평등과 

공평하게 다 같이 행복을 누리며 

기회가 균등하게 부여되는 사회”를 꿈꾼 민주공화주의

“나의 소망은 언젠가 당신이 우리가 되고 온 세계가 하나가 되는 것이라네. 

존 레논을 닮은 ‘목마른 영혼의 외침’의 소프라노

다물단, 흑색공포단 지휘한 조선의 체 게바라

온갖 고문 악형에도 입을 다문 사육신의 화신

처자보다 동지, 동지보다 조국을 더 사랑한 순혈 조선인

무서운 깊이와 아름다운 표면을 함께한 선비

‘노블레스 오블리제’ 실천한 겨레의 사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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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바로 이회영이다.

 

 

※ 이 리뷰는 <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를 수정하여 작성함.

 

인간으로 세상에 태어나서 누구나 자기가 바라는 목적이 있다. 이 목적을 달성한다면 그보다 더한 행복은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였다 하더라도 그 목적의 달성을 위하여 노력하다가 그 자리에서 죽는다면 이 또한 행복인 것이다.
이것을 남의 눈에는 불행하다 할 수도 있겠지만 죽을 곳을 찾는 것을 예부터 행복으로 여겨왔다. 같은 운동선상의 동지로서 장래가 구만 리 같은 귀중한 청년자제들은 죽는 것을 제 집에 돌아가는 듯이 여겨 두려움 없이 몇 번이고 사선을 넘고 사지에 뛰어드는데, 나이 이미 60을 넘어 70이 멀지 않았다. 그런데 이대로 앉아 죽기를 기다린다면 청년동지들에게 부담을 주는 방해물이 될 뿐이니 이것은 내가 가장 부끄러워하는 바요, 동지들에게 면목이 없는 일이다.

우리 독립운동의 현실로 보아 (아나키즘이) 가장 실제적인 이론이며 적절한 방법론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또 사실상 모든 운동가들이 자기 사상이야 어떠하든지 이미 무정부주의 자유연합의 이론을 다 같이 이대로 실행하고 있다. 기미년 이전과 이후를 막론하고, 지금까지 수많은 단체와 조직이 생겼지만 그에 소속된 운동가가 자신의 자유의사의 결정에 의지하지 않고 강제 명령에 무조건 맹종하여 행동한 사람이 누가 있는가? 그런 단체가 어디 있는가?
이른바 철의 조직이라고 자타가 공인하며, 강제와 복종의 기율을 조직의 생명으로 하는 공산당이라 하더라도, 그것은 지금의 소련과 같이 자기들의 정치권력을 확립한 뒤의 얘기다. 그들도 혁명 과정에서는 모든 당원이 명령에 무조건 복종한 것이 아니라 자유합의에 토론과 타협을 하고 나서 행동하였던 것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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