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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브런치 - 원전을 곁들인 맛있는 인문학 브런치 시리즈 1
정시몬 지음 / 부키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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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브런치라니. 브런치라는 제목에 가벼움을 느끼기보다 도발을 느꼈던 것은 왜였을까. '감히' 철학을 브런치처럼 즐긴다는 말인가. 이 꽉 막힌 사고회로 때문에 아직 들춰보지도 않은 책에 살짝 심술이 일었다. '얼마나 브런치스럽게 철학을 말하는지 두고보자' 하는 유치한 마음이었달까.

 

약간의 심술과 의구심을 품고 책장을 펼친 것치고는, 아뿔싸, 완전히 말려들었다. 순전히 이 책의 저자 사이먼 정이 이야기꾼이기 때문에 철학은 순식간에 '이야기'로 변신했다.

 

그는 철학 원전을 읽고 기억하고 풀어내는 자신의 내공은 겸손하게 감추면서, '어떻게 하면 사람들이 소크라테스를, 볼테르를, 니체를 직접 만나고 싶어 안달을 낼까? 어떻게 안내하면 좋을까?'를 고심하며 글을 쓴 것 같았다. 그리고 세간에 널리 알려진 소위 '명언'들이 실제로 원전에서는 어떤 맥락으로 쓰였고, 그것이 책 밖으로 나와 수십, 수백 년을 지나면서 어떻게 각색되어 소개되었는지 등을 '팁'처럼 알려주기도 한다. 소크라테스는 정말 "악법도 법이다"라고 말했을까? 니체는 왜 "신이 죽었다"라고 선언했을까?

 

이런 소소한 재미가 철학이 지루하고 어렵다는 편견, 아니 철학을 다룬 이 책이 지루하고 어려울 것이라는 편견을 깨뜨린다. 오히려 다음 철학자, 그러니까 '다음 이야기'를 궁금해 하며 책장을 넘기게 만든다. 

 

이 책은 언제 어느 철학자를 골라 읽어도 큰 탈은 없을 것 같다. 흥미롭게 생각해왔던, 한번 만나보고 싶었던 철학자가 있다면 그 페이지부터 책장을 넘겨도 좋겠다.

 

내가 이 책에서 새롭게 본 철학자는 아우렐리우스이다. 『철학 브런치』에서 아우렐리우스를 발견한 것은 마치 강창래의 『책이 정신』에서 발견한 동양 사상가 '묵자'에 버금가는 것이었다. 개인적으로 현실정치에 발을 붙이고 있던 사상가에게 관심이 많은 터라 유독 꽂혀버린 것 같다. 아우렐리우스가 쌓아 올린 스토아 철학 자체는 복잡하게 지지고 볶는 현실과 거리가 있어 보이지만, 그가 후대에 철인왕으로 칭송받는 이유는 스토아 철학에 있을 테니, 어떤 사람이 현명한 군주(정치가)인지에 대한 실마리를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 책은 그저 철학 겉핥기에 불과하다고 비난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일리 있어 보인다. 그러나 그것은 이 책을 비난할 이유로는 전혀 설득력이 없다. 이 책의 목적은 '깊이'가 아니라 '재미'에 있기 때문이다. 깊이를 원한다면 당연히 원전으로 직행하는 게 낫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철학 브런치』가 어떤 철학을 공부하고 싶은지 결정하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좋은 지침서가, 철학에 처음 '도전'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는 친절한 안내서가 될 것이라는 점이다.

 

『철학 브런치』를 다 읽은 후, 심술은 풀렸다. 브런치처럼 가볍고, 브런치 자리에 함께한 친구들과 수다를 떠는 것처럼 재미있었으니까. 하지만 난 여전히 사이먼 정이 "철학은 흥미진진한 이야기보따리에 가깝다"라고 말한 것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철학은 이야기가 아니라 사유다. 고지식해 보일지 몰라도 이것만큼은 물러날 수 없다. 이 책에 소개된 16명의 철학자들을 둘러싼 시대적 배경이나 그들의 성격 혹은 품성에 대한 '이야기'는 천일야화만큼이나 흥미롭다. 하지만 그들이 자신을 끝까지 밀어붙여 토해낸 사유의 책들은 결코 이야기로만 대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래야 그들의 사유의 무게를 똑같이 느낄 수 있고, 그렇게 해야 우리도 사유의 힘을 기를 수 있는 것이리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미 철학을 즐기는 경지에 이른 듯한 사이먼 정이 이를 몰랐을 리 없다. 그는 철학의 즐거움을 책을 통해 나누기 위해 선택과 집중을 한 것 뿐이다. 다만 '왜 철학을 브런치처럼 즐기길 바라는지' 그의 견해를 이 책에서 충분히 알 수 없어 아쉬웠달까. 어쩌면 그것은 독자의 몫인지도 모르겠고.

 

철학의 벽은 원체 높고, 철학은 스스로 자신의 벽을 낮출 수 없다. 이미 억겁의 세월을 거치며 쌓인 벽이 아닌가(물론 정-반-합의 원리에 따라 쌓였으므로 고르게 쌓이진 않았겠지만). 사이먼 정은 이 벽을 타고 오르려 애쓰기 전에 우선 덕수궁 돌감길을 걷듯 함께 빙 둘러 걸어보자고 제안하는 듯하다. 느긋하게, 천천히, 그리고 수다스럽게. 공성벽 같았던 철학의 벽이 어느새 예쁜 벽화가 칠해진 돌담처럼 보이지 않을까? 그의 제안이 싫지만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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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택이라는 이데올로기
레나타 살레츨 지음, 박광호 옮김 / 후마니타스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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뜬금없지만, 며칠 전 내가 받은 질문에서 이야기를 시작하려고 한다. 회사 선배가 불쑥 “인생의 황금기가 언제였어?”라고 물은 적이 있다. 올해로 서른인 내게 황금기라 할 만한 때가 있을까 싶어 잠시 머뭇거리기는 했지만, 의외로 내 대답은 빨랐다.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IMF 전까지요.” 정확하게 1993년부터 1996년까지다. 이유는 간단했다. 우리 집에 자가용이 생긴 때가 1993년, ‘내 집’이라고 하는 아파트에 들어간 게 1995년이었기 때문이다.

 

이 사사로운 이야기가 『선택이라는 이데올로기』와 만나려면 한 단계를 더 거쳐야 한다. 이즈음에 MBC 주말 예능 <일요일 일요일 밤에>의 <이휘재의 TV 인생극장>이 인기를 끌었다. 이 코너의 포맷은 간단하다. 이휘재가 여자 연예인 게스트와 함께 콩트를 한다. 콩트의 하이라이트 즈음에서 인생에 한번쯤 고민해볼 만한 두 가지 선택지가 등장한다. 둘 중 어떤 선택지를 고르느냐에 따라 콩트의 결말은 완전히 달라진다. 이휘재는 선택지를 고르면서 “그래, 결심했어!”를 외치는데, 이게 이 콩트의 트레이드 마크였다.

 

이제 약간의 비약을 감안하고 두 이야기를 합쳐보자. 1990년대 초중반은, 한국이 기적 같은 압축 성장의 혜택을 가장 여유롭게 즐기던 때였던 것 같다. 겨우 30년을 산 내게도 그때는 (굳이 고르라면) ‘황금기’였다. 경제적으로도 선택의 폭이 넓어졌고, 정치적으로도 민주 선거를 거치며 한껏 고조되었던 시기. 이때 등장한 <이휘재의 TV 인생극장>은 꽤 의미심장하다. 사람들은 무엇이든 선택할 수 있다는 기대감으로 가득 차 있었고, 이휘재의 선택에 일희일비하며 ‘나라면 다른 선택을 했을 테고, 그러면 더(혹은 차라리) 나았을 텐데’라고 무의식적으로 계산기를 두드렸을 수도 있다.

 

이렇게 이야기를 엮고 보니, 한국은 1990년대부터 ‘선택이라는 이데올로기’의 영향력 아래 있었던 것 같다. 외환위기를 겪으며 무한한 가능성을 향한 선택의 분위기는 한풀 꺾였지만, (『선택이라는 이데올로기』에서도 언급되듯, 2008년 세계금융위기 이후로 사람들에게 검소와 절제가 또 다른 선택지로 등장한 것처럼) 사회적으로나 개별적으로 뼈를 깎는 선택이 있었다. 그중에 제일이 ‘명퇴(명예퇴직)’가 아니었나. 그리고 2000년대 중후반, 내가 대학교를 졸업할 때가 되자 피를 토하게 하는 (1990년대의 ‘자수성가’ 신화의 뒤를 잇는) ‘자기계발’의 선택지가 백만 스물 한 개쯤 놓여 있었다. 이 중 하나를 선택해도 잘된다는 보장은 없고, 열 개를 선택해도 불안은 줄어들지 않았다. 아직 백만 열 한 개쯤의 선택지가 더 있었으니까. 무엇보다 선택에 따르는 비용을 감당하기 어려웠다. 한국에서 선택의 이데올로기는 점점 날 선 양날의 칼이 되어가고 있다.

 

이번엔 좀 더 가볍게(?) 생각해보자. 편의점 냉장 진열대에 수많은 커피 음료가 있다. 무엇을 마셔야 잘 마셨다고 소문이 날까? 그만그만한 가격, 엇비슷한 양, 그야말로 별 차이 없는 맛. 선택을 결정하는 건 함께 온 사람들이 무엇을 선택하는지와 1+1 혹은 2+1 행사 중인 제품이 있는지, 이 두 가지로 압축된다. 함께 온 사람들은 분명 각자 선택했는데, 결국 다 같은 음료를 들고 있다. 이상하다. 분명 선호는 ‘주어져 있다’라는 게 주류 경제학의 정설인데, 개인의 선호는 합리적인 선택으로 이끌리기 마련인데(마법처럼!) 어째서 이런 결정장애 현상이 벌어지는 것일까? 경제학자들은 그저 예외일 뿐이라고 말하겠지. 하지만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선호가 아니라 선택지일 뿐이 아닐까 의심이 드는 건 왜일까.

 

『선택이라는 이데올로기』의 저자 레나타 살레츨은 바로 이런 현상을 포착했고, 그 이면에 무엇이 있는지 분석했다. 그는 후기 자본주의가 선택이라는 관념을 광범위하고 철저하게 사람들에게 각인시켰고, 사람들을 ‘나는 무엇이든 선택할 수 있다’라는 무한한 가능성의 착각에 빠뜨렸다고 지적한다. 그리고 어떤 가능성에 다가가거나 실현하기 위한 크고 작은(대체로 아주 잘게 쪼개지는) 선택지들 앞에서 두려움과 불안을 느끼는 현대인이 많아졌다고 말한다. 맞는 말이다. 어떤 삶을 선택한다고 해도 내가 선택하지 않은 것을 후회하거나 갈망한다. 살레츨은 그래서 사람들이 자신에게 조언을 해줄 (성공한) 사람을 찾는다고 말한다. 이제 특정 분야에서 성공했다고 일컬어지는 사람들이 ‘멘토’로 나선다. 하지만 어떤 멘토를 구할 것이냐, 이것부터 난관이 아닌가.

 

오롯한 개인의 합리적인 선택은 없다는 것과 사회가 선택지를 구성할 뿐 아니라 심지어는 선택권을 제공 혹은 박탈하기도 한다는 사실이 이 책에서 선명하게 드러난다. 선택할 수 있다고 밀어붙이면서 선택하지 못하거나 선택으로 실패한 사람들에게는 일말의 자비도 없다. 그래서 모두가 억압당하고 우울하다. 한편, 살레츨은 완벽한 선택을 해야 한다는 강박적인 계산과 자신의 선택이 ‘좋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한 사투를 개인이 반복하는 동안, 사회가 병들 수 있다는 암시도 놓치지 않는다.

 

살레츨의 이러한 비평 혹은 분석은 그녀의 전공인 라캉주의를 바탕으로 더욱 설득력 있게 논리를 구성하는 것 같다. 라캉의 정신분석학에 문외한인 나로서는 정신분석학 용어가 나오면서부터 살레츨 특유의 논리를 제대로 따라가지 못해 아쉬웠다. 그래도 충분히 재미있었고, 충만한 고민의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지난 6월, 후마니타스에서 나온 『신자유주의와 권력』과 함께 읽어도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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