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택이라는 이데올로기
레나타 살레츨 지음, 박광호 옮김 / 후마니타스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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뜬금없지만, 며칠 전 내가 받은 질문에서 이야기를 시작하려고 한다. 회사 선배가 불쑥 “인생의 황금기가 언제였어?”라고 물은 적이 있다. 올해로 서른인 내게 황금기라 할 만한 때가 있을까 싶어 잠시 머뭇거리기는 했지만, 의외로 내 대답은 빨랐다.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IMF 전까지요.” 정확하게 1993년부터 1996년까지다. 이유는 간단했다. 우리 집에 자가용이 생긴 때가 1993년, ‘내 집’이라고 하는 아파트에 들어간 게 1995년이었기 때문이다.

 

이 사사로운 이야기가 『선택이라는 이데올로기』와 만나려면 한 단계를 더 거쳐야 한다. 이즈음에 MBC 주말 예능 <일요일 일요일 밤에>의 <이휘재의 TV 인생극장>이 인기를 끌었다. 이 코너의 포맷은 간단하다. 이휘재가 여자 연예인 게스트와 함께 콩트를 한다. 콩트의 하이라이트 즈음에서 인생에 한번쯤 고민해볼 만한 두 가지 선택지가 등장한다. 둘 중 어떤 선택지를 고르느냐에 따라 콩트의 결말은 완전히 달라진다. 이휘재는 선택지를 고르면서 “그래, 결심했어!”를 외치는데, 이게 이 콩트의 트레이드 마크였다.

 

이제 약간의 비약을 감안하고 두 이야기를 합쳐보자. 1990년대 초중반은, 한국이 기적 같은 압축 성장의 혜택을 가장 여유롭게 즐기던 때였던 것 같다. 겨우 30년을 산 내게도 그때는 (굳이 고르라면) ‘황금기’였다. 경제적으로도 선택의 폭이 넓어졌고, 정치적으로도 민주 선거를 거치며 한껏 고조되었던 시기. 이때 등장한 <이휘재의 TV 인생극장>은 꽤 의미심장하다. 사람들은 무엇이든 선택할 수 있다는 기대감으로 가득 차 있었고, 이휘재의 선택에 일희일비하며 ‘나라면 다른 선택을 했을 테고, 그러면 더(혹은 차라리) 나았을 텐데’라고 무의식적으로 계산기를 두드렸을 수도 있다.

 

이렇게 이야기를 엮고 보니, 한국은 1990년대부터 ‘선택이라는 이데올로기’의 영향력 아래 있었던 것 같다. 외환위기를 겪으며 무한한 가능성을 향한 선택의 분위기는 한풀 꺾였지만, (『선택이라는 이데올로기』에서도 언급되듯, 2008년 세계금융위기 이후로 사람들에게 검소와 절제가 또 다른 선택지로 등장한 것처럼) 사회적으로나 개별적으로 뼈를 깎는 선택이 있었다. 그중에 제일이 ‘명퇴(명예퇴직)’가 아니었나. 그리고 2000년대 중후반, 내가 대학교를 졸업할 때가 되자 피를 토하게 하는 (1990년대의 ‘자수성가’ 신화의 뒤를 잇는) ‘자기계발’의 선택지가 백만 스물 한 개쯤 놓여 있었다. 이 중 하나를 선택해도 잘된다는 보장은 없고, 열 개를 선택해도 불안은 줄어들지 않았다. 아직 백만 열 한 개쯤의 선택지가 더 있었으니까. 무엇보다 선택에 따르는 비용을 감당하기 어려웠다. 한국에서 선택의 이데올로기는 점점 날 선 양날의 칼이 되어가고 있다.

 

이번엔 좀 더 가볍게(?) 생각해보자. 편의점 냉장 진열대에 수많은 커피 음료가 있다. 무엇을 마셔야 잘 마셨다고 소문이 날까? 그만그만한 가격, 엇비슷한 양, 그야말로 별 차이 없는 맛. 선택을 결정하는 건 함께 온 사람들이 무엇을 선택하는지와 1+1 혹은 2+1 행사 중인 제품이 있는지, 이 두 가지로 압축된다. 함께 온 사람들은 분명 각자 선택했는데, 결국 다 같은 음료를 들고 있다. 이상하다. 분명 선호는 ‘주어져 있다’라는 게 주류 경제학의 정설인데, 개인의 선호는 합리적인 선택으로 이끌리기 마련인데(마법처럼!) 어째서 이런 결정장애 현상이 벌어지는 것일까? 경제학자들은 그저 예외일 뿐이라고 말하겠지. 하지만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선호가 아니라 선택지일 뿐이 아닐까 의심이 드는 건 왜일까.

 

『선택이라는 이데올로기』의 저자 레나타 살레츨은 바로 이런 현상을 포착했고, 그 이면에 무엇이 있는지 분석했다. 그는 후기 자본주의가 선택이라는 관념을 광범위하고 철저하게 사람들에게 각인시켰고, 사람들을 ‘나는 무엇이든 선택할 수 있다’라는 무한한 가능성의 착각에 빠뜨렸다고 지적한다. 그리고 어떤 가능성에 다가가거나 실현하기 위한 크고 작은(대체로 아주 잘게 쪼개지는) 선택지들 앞에서 두려움과 불안을 느끼는 현대인이 많아졌다고 말한다. 맞는 말이다. 어떤 삶을 선택한다고 해도 내가 선택하지 않은 것을 후회하거나 갈망한다. 살레츨은 그래서 사람들이 자신에게 조언을 해줄 (성공한) 사람을 찾는다고 말한다. 이제 특정 분야에서 성공했다고 일컬어지는 사람들이 ‘멘토’로 나선다. 하지만 어떤 멘토를 구할 것이냐, 이것부터 난관이 아닌가.

 

오롯한 개인의 합리적인 선택은 없다는 것과 사회가 선택지를 구성할 뿐 아니라 심지어는 선택권을 제공 혹은 박탈하기도 한다는 사실이 이 책에서 선명하게 드러난다. 선택할 수 있다고 밀어붙이면서 선택하지 못하거나 선택으로 실패한 사람들에게는 일말의 자비도 없다. 그래서 모두가 억압당하고 우울하다. 한편, 살레츨은 완벽한 선택을 해야 한다는 강박적인 계산과 자신의 선택이 ‘좋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한 사투를 개인이 반복하는 동안, 사회가 병들 수 있다는 암시도 놓치지 않는다.

 

살레츨의 이러한 비평 혹은 분석은 그녀의 전공인 라캉주의를 바탕으로 더욱 설득력 있게 논리를 구성하는 것 같다. 라캉의 정신분석학에 문외한인 나로서는 정신분석학 용어가 나오면서부터 살레츨 특유의 논리를 제대로 따라가지 못해 아쉬웠다. 그래도 충분히 재미있었고, 충만한 고민의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지난 6월, 후마니타스에서 나온 『신자유주의와 권력』과 함께 읽어도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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