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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족 예절론 - 박상수 비평집
박상수 지음 / 문예중앙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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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정체성의 일관된 서사를 만들기 위해 우리는 얼마나 애쓰는가. 비교적 ‘나‘에 가까운 행위를 선택하며, ‘나답지 않다고 생각되는 행위는 버리거나 반복하며 정체성을 유지해나간다. 그러나 이것은 말을 바꾸면 수많은 ‘나‘답지 않은 것들을 희생시켜가며 매우 빈약한 ‘나‘다움을 간신히 유지해나간다는 말과 같지 않을까.

우리 시대의 권력은 ‘억압하면서 오는 것이 아니라 ‘생산‘하면서 다가온다는 점일 터이다. 자본이라는 권력은 각 개인에게 ‘너는 충분히 너자신을 네 뜻대로 움직일 수 있다‘는 ‘자유의 이름‘으로 다가왔고, 이러한 자유주의적 신화는 억압이 아니라 강렬한 유혹으로 이 시대 개인의 내면을 사로잡았다.

"물론 진실은 언제나 건강한 자들이 아니라 앓는 자들의 편에 있다."

우리는 이미 20세기 초, 프로이트가 마주했던 히스테리자에게서 고통과 쾌락이 동시에 존재할 수 있음을 확인하지 않았는가. 히스테리자는 몸의 고통 때문에 괴로워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코 그 고통이 멈추는 것도 바라지 않는다. 고통이 쾌락을 산출하는 근거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주이상스‘ 이다.

"시를 자아와 세계의 동일시라는 상투어로 정의하는 관행은 오래되고도 끈질긴 것이다. 이를 자아의 세계화(투사)라 부르건 세계의 자아화(동화)라 부르건 자아는 세계 전체를 틀 짓는 강력한 근거였다. 그러나 상기했듯이 이로써 세계의 실상을 드러낼 수 없다."라고 정리하며 이제는 ‘자아 중심의 시론‘ 대신 ‘주체 중심의 시론‘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역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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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면의 힘 민음의 시 223
서동욱 지음 / 민음사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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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집의 무엇이 나로 하여금 ˝올해 들어 읽은 시집 중에 가장 인상 깊은˝ 이라는 수식어를 쓰도록 하는가. 그가 시집에 덧붙인 <시>라는 제목의 글은 나의 이런 비밀스런 속내와 많이 닮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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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맺어야 할 사회계약
이만주 지음 / 다미르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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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위 ‘말놀이‘ 시, 해체시들이 내 맘에 꼭 드는 건 아니지만, 시가 이러면 ˝안 된다˝라는 관념부터가 큰 벽이자 위험이다. 누가 시를 함부로 규정하는가? 아래 글처럼 그런 시는 ‘삶의 자양분이 안 될 것‘이라는 지레짐작부터가 이미 삶의 독(毒)이 아닌가. 신문에 실린 이상의 시를 규탄하던 기억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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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배를 든 루스 - 제7회 중앙장편문학상 수상작
이지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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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나귀에게 길을 묻던가 해야지.” 
고대 사람들은 새로운 길을 떠나기 전에 당나귀를 보냈다고 한다.
그러면 당나귀가 새로운 길을 사람보다 앞서 찾아 내는 것이다. 안전하게.
누가 대신해서 앞길을 터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삶을 제대로 사는 법을 터득한 사람이 있을까? 과연 그런 방법이 어디에 따로 성스럽게 보관되어 있을까? 있기는 있는 걸까? 이러한 질문들에 대해 어떠한 단서로 모으지 못한 우리는 그래서 늘 불안하기만 한가보다. 어느날 어떤 권위있는 발견자가 우리 앞에 등장하여, “삶을 제대로 사는 법 따위는 세상 어디에도 없는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그럼 이만, 흠흠.” 하고 발표를 하고 연구자들에 의해 공인된다면, 그때부터 사람들은 ‘드디어’ 안도할 수 있게 될는지도 모르겠다. ‘내 인생만 유독 엉망인 것은 아니군.’ 하며. 


그렇다해도 그 발견자는 머지않아 ‘위대함'과는 거리가 먼, ‘인류 최악의 인간’으로 불리게 될지도 모른다. 그는 인류가 가진 최후의 보루이고 요새인 ‘꿈'을 망가뜨린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때서야 모두 이렇게 말할지도 모르겠다. 

“결코 안도하지 않아도 좋아요. 저 편 어딘가에는 좀 더 나은 것이 기다리고 있다고 말해줘요!”라고.

좀 더 나은 풍경이 있는 방, 좀 더 나은 앞날이 있는 직장, 좀 더 나은 사람이 미소를 띄우고 팔을 벌려 따스하게 맞아줄 거라고.... 예전의 ‘꿈'의 행방을 물으며.


소설 <담배를 든 루스>는 스물셋에 휴학중인 한 여대생의 일상에 관한 기록이다. 솔직담백한 한 권의 일기를 훔쳐보는 것과 같은 기분이다. 이미 책을 읽은 나에게 주인공인 그녀의 이름을 묻는다면 나는 답할 수가 없다. 이름이 뭔지 기억하지 못하니까. 직업의 특성 때문일까 이름은 수시로 바뀐다. ‘리즈’로 시작한 이름이 몇 번이고 바뀐다. 이름이 바뀌어도 달라질 것도, 큰일날 것도 없다. 그러니 이름이 바뀌어서는 안 될 이유도 없는 것이다. (술집에서 손님들의 말상대를 해주는 아르바이트이다보니 굳이 본명을 알고자하는 사람도 없었다. 그녀와 함께 일하는 동료들에게도 역시 이름은 중요한 것이 아니다. )


이름을 잊고 모두를 별명내지 가명 정도로 지칭하다보니 어느새 이 소설 속 이야기는 ‘모두의 이야기'처럼 들려오게 된다. (‘리즈’로 불리던) 주인공은 다사다난했던 비참한 가정사를 간직한 채 세상 안에서 고아처럼 홀로 살아가는 인물이다. ‘집도 절도, 돈도 빽도 없는' 그녀는 스스로 살아야 할 뿐이다. 닥치는 대로 일을 해야지 겨우 대학 강의실에 발을 들여놓을 수가 있었고, 이태원 우사단로 한 구석에 요상한 구조를 가진 코딱지만한 방바닥에 등짝을 기대를 수 있었다. 그야말로 '입에 풀칠하기 위해' 그리고 등록금을 납부하기 위해 거리로 내몰린 케이스인 것이다. 마음 아픈 문장이 등장한다. 


‘방세를 버느라 방에 있지 못했고, 학비를 버느라 학교에 가지 못했다.’


이 얼마나 착잡한 문장인가. 울어야하나 웃어야하나.

누군에게는 발거음 소리에 숨겨 방귀 한 번 뀌는 것처럼 쉽고 당연한 일이, 다른 누군가에게는 온몸을 내던져야 겨우 가능한 일이었던가. 

선거철 후보자들의 벽보 앞에 선 그녀가 생각한다.


‘나의 무엇을 벽보에 붙일 수 있을까. 무엇을 팔아야 할까. 팔고 싶기도 하고 그러고 싶지 않기도 한 것이 아니라, 정확하게 아무것도 팔고 싶지 않다. 하지만 적당한 것을 팔지 않으면 결국 가장 깊이 숨겨둔 사물을 팔아야 할 수도 있다. 그러기 전에 나는 나의 일부를 전단지에 붙여야 한다. 그것은 잘라버린 머리칼일 수도 있고 분홍빛 유두일 수도 있고 떨어져나간 살갗이나 손톱일 수도 어깨의 깐죽거림이거나 성대, 종아리, 폐일 수도 있다. 나는 나 외에 팔 것이 없다.’


교육 받기 위해 현대 사회에서 가장 ‘비교육적'이라는 공간까지 찾아가 마치 쓰레기통을 뒤지는 거리의 고양이처럼 음침하게 다녀야하는 처지가 된다는 것은 과연 누구의 잘못일까? 

알바로 연명하다 저무는 청년들의 처지, 그리고 밤 사이 로드킬 당해 골목 귀퉁이에 쓰러져 있는 길고양이의 주검. 이 모두 휘황찬란한 불빛을 자랑하는 화려한 도시 안에서 엄연히 벌어지고 있는 참극이다.



<담배를 든 루스>는 영국의 화가이며 비주얼 아티스트인 ‘줄리언 오피(Julian Opie)’의 연작 그림 

작가 ‘이지'는 이 연작의 그림들로부터 ‘보편성’이라는 특질을 읽어낸 듯하다. 그림 속의 주인공이 루스를 포함한, 루스 아닌 모든 사람이 될 수 있었듯, 자신의 소설 속 이야기가 한 여대생의 유독 별난 이야기가 아닌 이 시절 속을 통과하는 수많은 젊음들의 보편적 고난일 수도 있다는 점을 말하고 싶었던 것 같다. 그러니 등장인물들에게 특정한 이름을 부여할 필요도 없었던 것이다. 누구의 이름이라도 집어 넣어볼 수 있는 넉넉한 공란이 필요했기 때문에.



다행히도 배는 암초들 속에서 좌초되지 않은 듯하다. 삶을 겪어보겠다는 출사표를 던지는 것도 같다.

청년만 괴로운가? 중년도, 장년도, 노년도 괴롭기는 마찬가지일 것이다. 살다보면 약간은 알아갈 줄 알았는데도 노년에도 앞날이 컴컴한 것은 젊을 적과 별반 다를 게 없다고들 한다. 해까지 뉘엿뉘엿 저물어 간다고 생각하면 조급하기까지 한 것이 장년이며 노년이다. 소설은 아래와 같은 말을 세상에 남기고 있다.


“어쩌다보니 되어있다는 말은 거짓말이다. 큰 거짓말이다. 하지만 거짓말을 하지 않고서는 살아갈 수 없으므로 누구나 어쩌다보니 이렇게 되었네, 하며 훌훌 털고 일어서곤 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어차피 한 번 길을 잃어야 한다면 이쯤에서가 좋다고 생각한다. (.......) 꼭 내가 찾아내야 하는 길이라면 지금쯤 넘어지는 편이 낫다고 말이다. 물론 언제고 같은 지형에서 같은 자세로 넘어질 것이다. 어쩔 수 없다. 넘어지는 것을 면제 받은 사람은 세상에 없을테니까. 그저 그것이 누적되어 점점 나아지기만을 바랄 뿐이다. 적어도 조금 멋있게 넘어지거나, 덜 아픈 방법을 알아낼 수 있겠지. 그렇게 가다보면 언젠가는 내가 가는 곳이 어디인지 알 수 있을지도 모른다.”


어디선가 좌초하지 않은 자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가.

삶에 대한 출사표를 감히 툭 던지는 우아한 손동작이 보이지 않는가.



<담배를 든 루스>는 어둡지 않다. 그것이 장점이다. 적절히 유머러스하다가 꼭 필요한 곳에서는 필요한 만큼 안으로 파고든다. 나는 그런 점에서 ‘젊음’, ‘청년', ‘청춘' 같은 단어들을 떠올리게 된다.

고통을 만나면 누구나 아프다. 청년이라고해서, 젊다고해서 맷집이 더 좋거나 아픔에 무딘 건 아닐 것이다. 오히려 인생에 막 뛰어든 청년들이 더 아프게 느낄 지도 모르겠다. 처음 맞아보는 매라서...... 

그런데도 징징대지 않았다. 괜한 앓는 소리도 하지 않았다. <담배를 든 루스> 속 그녀는 담담히 현실을 맞이하고 있었다. 현실은 고달펐으나 패색은 보이지 않는다. ‘젊음’의 면모이고, ‘청년'의 몸동작이다. 팍팍한 세상을 헤쳐나가는 슬프도록 아름다운 춤이다. 


소설가 ‘이지’의 장편 데뷔작 <담배를 든 루스>는 가벼운 듯 가볍지 않고, 어두운 듯 어둡지 않은, 참 밝게 빛나는 소설이다. 그 안에는 젊음이 있다. 나이를 막론하고 젊음을 잃은 자라면 결코 가질 수 없는 세상을 향한 예리한 시선과 극복의 기운이 담겨 있다. 최근 몇 년간 만나본 국내 소설 가운데 단연 눈에 띄는 작품, 기억에 남을 멋진 작품이다. 


언젠가 그대들에게 쏟아질 눈부신 햇살을 기약하며. 

오늘을 응원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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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지의 시 - 2014-2015 이성복 시론집
이성복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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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복 시인의 팬이라면 이 3권의 시리즈는, 감독의 코멘터리를 통해 다시 감상하는 명작 영화처럼 의미있는 책이 될겁니다. 차분한 책의 디자인도 좋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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