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에 역사에 대한 서류를 찾는다면 신지 때부터 비롯되겠는데. 신지는 권벽에 <응제시>에서 단군 때 사관이라고 한 사람이다. 


그러나 나로서 보건대 단군은 곧 제사를 지내던 임금이요. 신지는 사람에 이름이 아니라 제사를 지내던 임금에 우두머리를 돕는 벼슬 이름이 신치였으니. 역대에 신치들은 해마다 10월제사를 지내던 '대제'에서 우주에 창조와 조선에 건설과 산천지리에 명승과 후세 사람에 거울 삼을 일을 노래했는데. 후세에 문사들은 그 노래를 혹은 구전문이던 이두문으로 편집하고. 혹은 한자에 오언시로 번역해서 왕궁에 비장했으므로. <신지비사> 또는 <해동비록> 등에 이름이 있었다.


고려에 들어선. 저작자에 성명을 알 수 없는 <삼한고기>. <해동고기>. <삼국사>. 등과 김부식에 <삼국사기>와 일연에 <삼국유사>가 있었으나, 지금에서야 전해진 건 <삼국사기>와 <일연유사> 뿐인데, 그 전하고 전하지 아니한 원인을 생각하건대 김부식, 일연 두 사람만에 저작만이 우수해서 전해진게 아니라. 대개 고려 초기부터 평양에 도읍을 정해서. 북쪽으로 나아가서 옛땅을 회복하자는 화랑에 무사가 한 파를 이루었고. 강한 국가만 섬기던 '사대'로 국시를 삼아서. 압록강 안에서 구차하게 편안하게 있을 것만을 주장하던 유교도들이 한 파를 이루었다.


두 파가 대치해서 논전을 벌이기 수백 년만에 불교도 묘청은 화랑에 사상에다가 <음양가>에 미신까지 보태어서 굳이 평양에서 군사를 일으켜서 북벌을 실행하려다가, 유교도 김부식에게 패망하고, 김부식은 이에 그에 사대주의를 근본으로 삼아서 <삼국사기>를 지은거다.


그러므로 동.북 두 부여를 떼어버려 조선문화가 유래한 곳을 진토 속에 쳐묻고 발해를 버리고 삼국 이래 결정된 문명을 지푸라기. 초래 속에 던지고선 이두문과 한영에 구분에도 어두워서. 

한 사람은 몇 사람이 되고 한 곳이 몇 군데가 된 것도 많았으며, 궁궐 안에서 벌어진 <내사>나 외적에 침략에 대한 <외적>에 취사에만 홀려서 앞뒤가 모순되고 사건이 중복된 것도 많아서 대부분은 사적인 가치는 없다고 할 것이다.  


불행히도 그 뒤론 얼마 안 가서 고려가 몽고에 패해서 흘필렬이라 불리던 쿠벨라이 칸에 위풍이 전국을 놀라게 했고 황제궁이니 왕궁이니 하는 명사들은 죄다 철폐되고, 풍악을 올리던, 해동천자에 팔관악부마저 금지되고, 이때부터 만일 문헌에 독립자존에 대한 것이라도 있으면 일체 꺼려 피하게 되었으니. 이러한 때에 허다한 역사 저서 중에선 유일한 사대사상에 고취자던 김부식에 <삼국사기>와 그에 딸린 <삼국유사>만이 전해질 수밖에 없던거다.   


고려 당대에 <사승>에 대해 말해본다면. 고려 말기엔 임금과 신하들은 고정 이전에 나라도 형세하고 강성하던 때에 기록으론 더욱 몽골을 꺼리거나 싫어함에 걸리거나 그저 두려워서 깍아버리거나, 고치고, 말을 오직 낮추고, 후하게 친 사례에 대한 예페로 북쪽 강대국들에게 복종해서 섬기던 사실만을. 부연하거나, 혹은, 지어내서 민간에다 퍼뜨렸다. 이러한 기록들은 곧 이조 때 정인지가 찬술했던 <고려사>에 원전이 되었고, 이조 세종은 비상하게도 사책에 유의했으나. 다만, 그에 할아버지인 태조와 아버지인 태종은 우두머리 장군이던 호두재상 최영에 북벌군 중에서 배신으로 모반해서, 사대에 기치를 들고 혁명에 기초를 세웠으므로, 권근. 정인지. 등에게 명해서 <조선사략>. <고려사>. <고려사절요>. 등을 편찬하게 함에 있어 몽골에 압박을 받던 고려 말기 이전에 조선에 각종 실기에 의거해서 역사를 짓지도 못하고 몽골에 압박을 받은 이후 외국에 아첨한 글과 위조한 고사에만 의거해서 역사를 지어내서 구차스럽게 사업을 마치고. 정작 고려 때 전대에 실록들은 민간에 전해짐도 허락하지 않았고, 규장각 안에 비장해두었었는데, 임진왜란에 전쟁으로 인한 병화에 죄다 타버렸다. 그 뒤론. 세조가 단종에 자리를 빼앗고, 만주에 침략에 대한 꿈을 품고서 강계에다 둔병을 경영하다가.


1. 자기네 태조에 존명건국에 대한 주의로 충돌되어 여러 신하들이 다투어 간하는 일만 분분했고. 


2. 대륙에 용맹하고, 억센 명나라 성조가 있어 조선에 대한 감시가 엄중했고. 


3. 마침내 명나라 사신 장영은 엄중히 둔병에 대한 이유를 힐문하므로. 


세조는 그에 무(武)를 숭상하고, 공을 좋아하던 마음은 사라지고, 조선 문헌에 정리를 자임해서, 불경을 간행하고, 유학을 장려하는 외에 사료에 수집에도 전력해서 조선 역대 전쟁사인 <동국병감>과 조선 풍토사인 <동국여지승람>을 편찬해서, 그 밖에도, 허다한 서적을 간행했으니, 비록 큰 공헌은 없었으나, 다만 얼마간 공적은 있었다 할거다. 선조. 인조. 이후에는 유교계에 철학, 문학에 큰 인물들이 배출되었고, 사학계도 천천히 진보되어서, 허목에 <단군>. <신라> 등 각 세기가 너무 간략하기는 하지만, 대체론 독특한 견해는 있으며, 유형원은 비록 역사에 대한 전문 저서가 없었으나, 한백겸에 <동국지리설>은 비록 수십 줄 에 지나지 않은 단순한 논문이지만, 일반 사학계에선 큰 광명을 열어젖혀서, 후론, 정약용에 <강역고>며, 한진서에 <지리>며, 안정복에 <동사강목>에 실린 강역론이며, 그 밖에도 조선 역사 지리를 설하던 사람은 모두 한 선행들에 단순한 지리설을 부연했을 뿐이었다.  


나로서 보건대, 그 지리설 중에 삼한과 조선을 분리함은 범엽이 전한 <동이열전>에 지리를 설명함에는 족했으나, 이로써 조선 고대 삼천 년 동안에 지리를 단정해서, "동국은 옛날부터 한강 이남을 삼한이라 하고, 한강 이북을 조선이라 했다." 너무도 그런 결론을 내렸던 건 맹목적이기만 하고, 무단적이라고도 생각한다.


이건 선생은 삼신. 삼경. 삼한. 삼조선에 연락적 관계와 발조선. 발숙신. 부여조선. 예맥조선. 진국. 진번조선. 진한. 마립간. 마한. 모한. 등에 '동음이역'임을 몰랐으므로, 이 같은 큰 착오가 있게 된거다. 


그러나 <동이열전>에 보인 선생은 삼한에 위치를 비로소 단순명료하게 분석해서 밝혀 기왕에, 

역사에 대한 기록만 있고 역사에 대한 연구는 없었다고 할 만한 조선사학계에서 선생은 처음으로 사학에 실마리를 열었다해도 좋을거다.


안정복은 평생을 <열사> 한 가지에만 노력한, 오백 년 이래에 유일한 빈한했던 선비로서 서적에 열람은 부족해서 <삼국사기> 같은 것도, 늘그막에서야 겨우 남이 베낀 틀린 글자가 많은 것을 얻어보았으므로, 그가 저술했던 <동사강목>에 궁예에 국호를 '마진기'라 한 웃음거리를 제법 남겼으며, 대륙에 서적 중에서도 참고에 필요한 <위략>이나 <남제서> 같은 것이 있음을 몰라서 

고루한 구절도 적지 아니하다. 


게다가 시대에 유행하던 공구에 <춘추>며, 주희에 강목에 웅덩이에 빠져서 <기자본기> 아래로 단군과 부여를 덧붙이로 했으며, 신라. 마지막 판에 궁예와 왕건을 참주로 한 망발도 있었고, 너무 황실 중심에 대한 주의를 고수해서 정작 민족 자체에 대한 활동을 무시함도 많았었다. 


그러나 연구 정밀하기론 선생 이상 가는 이가 없었으므로, 지리에 대한 지지에, 잘못에 교정이나 사실이나 모순에 대한 변증에는 가장 공이 많다해도 좋을거다. 


유혜풍에 <발해고>는 대씨와 무공에 사업을 수록해서, 일천여 년이나 사학가들은 압록강 이북을 베어버린 결함을 보충했고, 이종휘에 <수산집>은 단군 이래에 조선 고유에 독립문화를 노래해서 김부식 이후 사학가에 노예 사상을 갈파했는데, 특별한 발명이나 채집은 없었다고하더라도, 다만 이 한 가지만으로도 또한 영원히, 오래 남을 일이다.    


한치윤에 <해동역사>는 오직 대륙. 일본. 등에 서적 가운데서 보이는 우리 역사에선 빠진 부여. 발해. 가락. 숙신. 등도 모두 한 편에 세기를 구성했으며, <동국통감>엔 없던 가족사에 대한 저근. 사법명. 혜자. 왕인. 등도 각기 별로 몇 줄씩에 <전기>가 있었고, 궁중어. 문자. 풍속. 등에 부문은 있었다. 


게다가 그에 조카던 한진서에 <지리쏙>도 있어서 뒷사람들에 고증에 수고를 덜어주었으니, 또한 역사학에 대한 머리도 뛰어났다고할거다. 다만, 


1. 너무 글자 사이에선 조선에 대한 사실만을 찾다가 민족 대세에 관계를 잃었으니, 곧, 부루국과 대륙 하우국에 대 국제교제로 볼 <오월춘추>에 있던 주신에 대한 창수사자와 이천 년 동안 이민족 흉노와 연국과 삼조선이 화의하거나 혹은 싸운 전후에 대한 큰 일들은 다 빠뜨렸으며.


2. 유교에 위력에만 눌려서 고죽국이 조선족에 갈래임을 발견하지 못하는 동시에, 백이. 숙이에 대한 성명도 빠뜨렸고.


3. 서적에 선택이 정확하지 못했으니, 진서에 <속석전>에 의하면, "우임금은 백익을 죽이고, 태갑은 이윤을 죽였다."는 등에 기록이 있던게 <죽서기년>에 진본이고, 현존한 <죽서기년>은 거짓인데,  거짓을 그대로다 이걸 기재했으며, 사마상여에 <무릉서>는 당나라 사람에 위조인데, 그대로 신용해서 인용했고, 이 밖에도 대륙인이나 일본인도 없던 사실을 만들어내서 우리나라를 속이고 모욕한 걸 많이 그래도 수입했으니, 이게 그에 책에서 결정이라 아니할 수 없다. 


이조 일대에 일을 적은 역사로 말하자면, 내가 일찍 정종조 한때에 기록을 엮은 <수서>라는 아주 잔글자로 쓴 이백 권에 거질을 보았었고, 만일 <관서>인 <국조보감>, <조야첨재>. 등을 비롯해서, 허다한 개인 저술에 역사서까지 친다면 몇 백에 수레엔 찰 것이다. 


이 태조 이하에 사실을 적은 역사로는 <조야집요>. <연려실기술> 등 몇몇 책을 대강 훑어본 이외에는 자세히 다 읽어본 건 없었으므로, 아직 그 낫고 못함을 말하진 못하거니와, 대개 열에 일고여덟은 사색에 <당쟁사>임은 단언할 수 있을거니, 아. 이조. 이래로 수백 년 동안에 조선인에 문화사업은 이에 끊어졌도다. 


이상에 열거한 역사서를 다시 말한다면, 


첫째로는, 대개는 정치사요. 문화사에 해당하는 건 몇이 됨은 유감이요.


둘째로는, 정치사 중에선 <동국통감>, <동사강목> 이외에는 현재에 답할 저서가 없고, 몯, 한 왕조에 흥하고, 망한 전말로 글에 수미만을 삼았음이 유감이요.


셋째로는, 공구에 <춘추>를 역사에 절대적인 준칙으로 알아서 그 의례를 본받아서 임금을 높이고 신하를 억누르기를 위주하다가 마지막에는 자기나라까지 비방하는 편벽된 논란을 벌임이 유감이요. 


넷째로는, 국민에 자감에 이바지하려 함보다 외국인에게 아첨하려 한 의사가 더 많고, 자기 나라에 강토를 조각조각 베어주어 마지막에 가선 건국 시대에 수도까지 모르게 만들었음이 유감이다. 


우리에 사학계가 이와같이 눈멀고, 귀먹고, 절름발이. 등. 온갖 병을 죄다 가져서 정당한 발달을 얻지 못함은 도대체 무슨 까닭인가. 너무 자주 내락, 외환, 자연에 재난이 잦았던 것은 그만두고서라도, 인위에도 장애를 이룬 걸 들건대,  


1. 신재 때 이래로 역사를 비장해두는 버릇은 역사에 고질이 되어서 이조 때에서도 중기 이전에는 <동국통감>, <고려사> 등 몇몇 관에 간행했던 책 이외에는 사사로이 역사를 짓는 걸 금지했으므로, 이수광은 내각에 들어서야, 고려 이전에 <비사>를 많이 보았다했고, 이언적은 <사벌국전>을 지어가지고도, 벗에게 보임을 꺼려했다.


2. 송도를 지나다 만월대를 쳐다보라. 반쪽에 기와는 남아 있는가. 한 개에 주초라도 남아 있는가. 막막하게 넓은 밭에 이름만 만월대라 할 뿐이 아니던가. 슬프다. 만월대는 이조에 아버지뻘로도 멀지 않은 고려조에 대궐인데. 무슨 병화에 탔다는 설도 없이 어찌 이와같이 정도 없는 빈터만 남았던가. 


이와 똑같은 예로서 백제에 유물을 찾아볼 수 없으며, 평양에서 고구려에 옛 모습을 찾아볼 수도 없다. 이에서 나온 결론은 뒤에 일어난 왕조는 앞에 왕조를 미워해서 역사적으로 자랑할만한 건 무엇이든지 파괴하고, 태워버리기를 위주한거다. 신라로 일어나면. 고구려. 백제. 두 나라 역사는 볼게 없어졌고, 고려로 일어나면. 신라에 역사가 볼게 없어졌으며, 이조로 대신하면 고려에 역사는 볼게 없어져서 매번 현재로서 과거를 계속해서 아니하고 말살하려 했다. 그래서 역사에 쓰일 자료가 박약해졌으며. 


3. 현종은, "조총에 길이는 얼마나 되오"하니. 유혁연은 두 손을 들고서, "이만합니다"하고 형용했다. 기주관은 문답한 정형을 받아쓰지도 못하고 붓방아만 찧고 있었다. 유혁연은 그를 돌아보고선, "전하계선 유혁연에게 조총에 길이를 물으시니, 혁연은 손을 들어, "자, 남짓하고 이만합니다라고 쓰지 못하느냐."하고 꾸짖었다. 숙종은 박태보를 친히 심문하고, 문초하는데, "이리저리 잔뜩 결박하고 뭉우리돌로 때려라."하니, 주서 벼슬에, 고사직은 서슴없이, "필(必), 모양으로 결박해서 돌로 때려라."고 썼다. 

그래서 크게 숙종에게 칭찬을 받았다고 한다. 


이건 궁정에 한 가화로 전해진 이야기이지만, 반면에 남에 글로 내 역사를 기술하기 힘듦을 볼거다. 국문이 늦게 나오기도 했지만, 나온 뒤에도 한문으로 저술한 역사만 있음은 또 기괴하다. 이는 역사 기록에 대한 기구도 부족함이요. 


4. 회재나 퇴계더러 원효나 의상에 학술사상에 위치를 물으면 한 마디도 대답을 못할거요. 원효나 의상에게 소도나 내을에 신앙적 가치를 말한다면, 반분에 이해도 못할거다. 이와 마찬가지로 이조 때 인사들은 고려 시대에 생활에 취미를 모르고, 고려나 삼국에 인사들은 또 삼한 이저에 생활에 취미를 모를만큼 반식. 거처. 신앙. 교육. 등. 일반 사회에 형식, 정신은 모두 변해서, 오늘에 아메리카 사람으로 내일은 러시아 사람됨과 같은 엄청난 차이가 있으니, 이는 역사 사상에 연락은 끊어짐이라, 어디서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 구명할 동기가 생기랴. 이상 몇 가지 원인으로 우리에 역사학은 올바르게 발달하지도 못한거다. 


삼백 년 동안 사색에 다파 싸움은 크게 국가에 해를 끼쳤다 하지만, 당론은 극렬할수록, 제각기 나는 옳고 저는 그르다는 걸 퍼뜨리기 위해서 사사로운 기술만 성행하고, 당에 시비는 매번 국정에 관계되므로, 따라서 조정에 잘잘못을 논술하게 되어, 모르는 사이에 역사에 사사로운 저작에 금지는 깨드려져서, 마침내, 한백겸. 안정복. 이종휘. 한치윤. 등 사학계에 몇몇 인물이 배치되었음에도 그 결과는 마찬가지다. 


혹은 어떤 이는. "사색 이후에 역사는 서로, 피차에 기록들은 모순되어 그 시비마저 가릴 수가 없어서 가장 역사에 난관이 된다고." 하지만, 그들에 시비가 무엇인가 하면 아무 당이나 이조에 충신이니, 역적이니, 아무 선생이나, 주자학에 전통이니 아니니 하는 문제들뿐인지라. 오늘날 우리에 눈으로 보면 서릿발 같은 칼을 휘둘러서 임금에 시체를 두 동강을 낸 연개소문을 쾌남아라 할 거고, 자신에 의견을 주장해서 명륜당 기둥에다 공자를 비평한 글을 붙이 윤백호를 걸물이라 할거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만 냉정한 두뇌로써, 회재. 화담. 퇴계. 율곡. 등에 학술상 공헌에 많고, 적음은 알아야할거다. 주자학에 정통이 되고, 안 됨은 희담만 될 뿐이고, 노론. 소론. 남인. 북인에 다툼은 그 정치상에 미친 영향에 좋고 나쁨을 물을 뿐이고, 이조에 충성된 종되고 못됨은 잠꼬대에 지나지 않을 뿐이고, 개인에 사사로운 덕에 결점을 지적해서, 남에 명예를 더럽히고 혹은 애매한 사실로 남을 배신하고, 모함해서 죽인 허다한 사건들은 반면에 있어선, 당시에 사회 알력에 나쁜 습속으로 국민과 나라를 해친 일종에 통탄할 사료가 될 뿐이다. 


만일 시어머니에 역정과 며느리에 푸념에 지나지 않는 일에 낱낱이 재판관을 불러 그 굽고 곧음을 판결하려고만 든다면, 이는 스펜서에 이른바 이웃집 고양이 새끼를 낳았다는 보고 같아서 도리어 이로써 사학계에 다른 중대한 문제를 등한시 할 염려도 있으니, 그냥. 그저 던져둠이 옳다.

그리고 빨리 지리 관계라든가, 국민생활 관계라든가, 민족에 성쇠라든가하는 더 큰 문제에 주의해서 잘못을 바로잡고, 참된 걸 구해서, 조선 사학계에 표준을 세움은 오히려 급선무 중에 급선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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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역사를 위해 짓는 것이요. 역사 외에는 딴 목적을 위해 짓는 것이 결코 아니다.

다시 말해서. 객관적으로, '사회유동상태'를 잘 따져보고, 발생한 사실을 그대로 적는게

역사고작성자에 목적에 따라서만, 사실을 좌우하거나, 덧붙이거나, 달리 고칠게 아니기 때문이다.

 

화가는 사람에 얼굴을 그릴 때. 이를테면, 연개소문을 그리자면, 모습은 털털한 연개소문을 그려야 하고. 강감찬을 그리려면, 몸집이 마른 강감찬을 그려야 한다. 만일 이도 저도 아닌 억제하고 드날릴 마음으로만 털끝만큼이라도, 서로 바꾸어서만 그린다면. 화가에 본분에는 어긋날 뿐 아니라. 본인에 대한 면목도 아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사실대로만, 영국사를 지으면. 영제사가 되고. 러시아를 지으면. 소련사가 되며. 조선사를 지으면. 조선제국사가 되는 것인데. 기왕에 조선에 조선사라 할 조선사가 있었더냐 하면 수긍하기 어렵다.

 

안정복은. <동서강목>이란 국사를 짓다가. 자주, 내란에 잦음과 외적의 출몰로, 겨레(우리나라)에 대한 옛역사를 흔적도 없게 했음을 슬퍼하였다. 나로서 보건대. <조선사>는 내락이나 외적의 전쟁에서 보다. <조선사>를 저술하던 사람들의 손에 의해서 더 없어졌다고 본다. 어찌하여 그랬냐마는. 역사란 머리로 쓴 말로 같이, 시간적이고 공간적인 발전으로 되어온, 사회 활동 상태에 대한 기록이므로. . . 사람이란 세 가지는 역사를 이루는 큰 세 가지 요소들이므로. 이 요소들을 올바르게 기록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신라에선. . . 김이란 세 성과. 신라를 건국하고자 했던. <돌산고허촌>

 

여섯 지방에 사람으로서뿐만 아니라. 또한 경상도 지방. 고구려. 백제와 한 시대인 때로써 된 것이니. 만일 보다 더 거슬러. 현재로부터. 2000년 전인 왕검과 같은 연대이거나 더 내려와선. 2천 년 뒤인 오늘에서 따른 같은 시국이라면. 비록. 박혁거세의 지혜와. 소박한 여섯 지방 사람들의 정직함. 신라라는 계림에 대한 비록 땅을 소유했을지라도. 당시와는 똑같이 될 수 없으며.

 

또 위치가 유럽에 놓였거나. 아프리카에 있었다면. 또한 다른 면목에 나라는 되었을지언정.

 

당시에는 당최. 나라는 되지도 않았을 것이다.

 

이건. 지극히도 명백한 이치인데. 기왕에. 조선에 역사가들은 매번 그 짓는 바 역사를 자신에 목적을 희생으로 만들어서. 도깨비도 떠 옮기지도 못한 땅을 떠 옮기는 재주를 부려, 고구려란 졸본을 떠다가, 성천이란 화천 부근에 두질 않나. 우리 북쪽에단. 영변. 안주군에 다가 갖다놓고선. 만주에 있던 안시성을 떠다가, 북쪽에. 용강 혹은 안주에다 또 갖다놓질 않나. 평양에. 아사산을 떠다가. 황해도에 구월산을 만들어놓질 않나. 웅상이던 가슬라를 떠다. 강원도 강릉군을 만들어놨다.

 


근거도 없던 역사를 지멋대로 지어놔서. 더 크지도 말고. 더 작지도 말게 짓자고 했던. 압록강 이내에 이상적인 강역마저 정하려고만 했고. 무극. 일연. 등 불자가 지은 역사책에는 불법이 단 한 글자도 들어 오지 않는 왕검시대에부터. 인도에 범어로 만든 지명이나 인명만 가득하고. 김부식. . 유가학파들이 적어놓은. 문자에는 공자.맹자에 인의를 무시하는 삼국무사에 입에서 경전문구만 관용어처럼 외워지고. 대륙 삼국사. 말로 전한 기전서에는 여러 백년 동안에 조선 전역에 인심을 지배하던, 수도 등지에 있던, 영량.술랑.안상.남석행. 등 네 대성에 대한 논설은 볼 수도 없고. 유학했던 최치원만 세세하게도 서술했으며. <역사서>. <여사제강>에는 원효. 의상. 등 여러 철학인들의 불학에 영향된 고려 일대에 사상은 어떠했는지는 볼 수도 없고. 태조 왕. 통일 이전에 죽은 최응이 통일 이후에. 불교를 헐뜯어 올렸다는. <간불소>란 내용만 적혀 있었다.

 

이와 같은 허다한 때에 구속을 받지도 않고. 지멋대로. 역사를 지어놔서. 자기만에만. 

아첨된 신앙에 주관적 심리에만 부합하고자 했으며. 심한 경우엔. 사람까지 속여놔서. 신라에.

금왕마저. 인도에 크샤트리아였던. 찰제리종이라 하질 않나. 고구려 추모왕마저. 대륙 제곡에 후손이라 하질 않나. 게다가 조선 사상에 근원이 되던. 운수를 점치던. <서운관>. 책들을 공자에 말하고자 한 바도 어긋났다 하여. 모두 불태워버렸다.

 

이두형도 말하기를. "근래에 어느 명문이나. 묘지명을 보든지. 주인공이 반드시 용모는 단엄하거나 덕성은 훌륭하고. 학문은 정주를 모시고. 문장은 한유를 존경해서. 거의 비슷하니. 사람을 속일 뿐만 아니라. 글도 가치가 없다."고 했다. 개인적이기만 한 전기에 대한 실상을 잃은 데에 대한 개탄일 뿐이지만은. 이제 임금을 높이고. 백성을 천대하던. 세월이란 도끼. 아래로. 자라난. 후세 사람들은. 마음이나 습속이로도. 삼국에 대한 풍속만을 이야기하고. 치우치고 말만 자르르한. 글들에 만족한 이조 당대에 사람들은 그러한 주관으로. 상고지리를 그리니. 이에 조선이나. 단군이나. 부여나. 삼국이나. 대륙이나. 고려나. 이조 5천 년 이내에 모든 조선이 거의 한도가니로 부어내서. 땅이 늘고 줄어듦에 따라. 민족 활동이 활발하고 약해진 점이나. 시대에 고금만을 좇아.

 

국민이란 민족사상에만. 갈린 금을 도무지 찾을 수조차 없다.

크롬웰이란 화가는 자신에 상을 그릴 때면. 왼쪽 눈 위에 혹을 빼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했고.

자신을 그리려면. 자신에 직접 본 얼굴로 직접. 그리라고 했으니. 이 말은 화가에 아첨함을 물리칠 뿐만 아니라. 곧 자신의 참된 상을 잃을까 함이었다.

기왕에. <조선사>를 지은 이전에 조선에 역사가들은. 매번. 조선에 혹을 베어내고. <조선사>를 지으려 하였다. 그러나. 그네들이 쓴 안경은 너무 볼록했으므로. 어디. 조선에. 눈이나. 귀나. 코나. 머리 같은 것을 혹이라 하여. 베어버리고선. 어디서도 볼 수 없던 혹을 가져다가. 정말로. 붙여놨다. 혹 붙인 <조선사>도 기왕에. 읽는 이도 너무 없다가. 세계가 서로 크게 통하면서. 외국인들이 자주. 조선인을 만나서. <조선사>를 묻는데. 어떤 이는 조선인보다. <조선사>를 더 많이 알고 있어서. 너무 부끄러운 끝에. 돌아와. <조선사>를 읽는 이도 있었다.

 

그러나. 조선인이 읽는 <조선사>. 외국인이 아는 <조선사>는 모두 혹 붙은 <조선사>. 옳은 <조선사>도 아니었다. 기왕에. 있는 기록이 다 틀린 것이라면. 무엇에 의거해서. 도대체 바른 <조선사>를 짓겠는가. 채로 거를 줄 아는 사람들이. 모래 한 말을. 일면. 좁쌀만한. 금을 하나 얻거나. 혹은. 하나도 얻지 못하기도 하나니. 우리에. 글문들을. 사료로. 구하기도. 이같이. 어려운지라.

 

. 어떤 사람은. <조선사>를 연구하려하면. 우선. 조선과. 만주 등지에. 땅 속을 파서. 많은 발견이 있어야만 하고. 금석학. 고전학. 지리학. 미술학. 계보. 등을. 연구하는 학자만 쏟아져. 나와야 한다고 하는 이가 많은데. 그도. 그러하거니와. 우선 급한대로. 수중에 있는 부족한 현금으로나마.

 

역사적 사실들을 가지고 득실을 평하고, 진위를 비교해서. 그나마라도.

<조선사>에 앞길을 개척하는게. 더 급선무인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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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역사란 무엇이고. 조선역사는 어느 정도인가.

 

2. 역사에서 세 가지 본론은 무엇이고. 조선에 대한 오래된 역사에서 주요한 결점은 무엇인가.

 

3. 오래된 역사에는 무엇이 있으며. 역사로부터 무엇을 얻을 수 있는가.

 

4. 역사에 대한 사료를 수집하면서. 무엇을 택했고. 뭘 참고했는가.

 

5. 그동안. 역사서에 대한 개조는 어땠는가.


서론.

 

역사란 무엇인가. 인류 사회에서 ''와 나도 아닌 ''와에 투쟁은 시간적으로 발전하고,

공간적으로 확대된 심적 활동 상태에 대한 기록이고. 세계사라 한다면, 세계적인 인류, 역시나.

그렇게 되어온 상태에 기록이고, <조선사>라 한다면, 조선 민족은 도대체 이렇게 되어온.

상태에 대한 기록이다.

 

무엇을 ""라고 할 수 있으며. 무엇을 "내도 아닌 나"라고 하는가. 깊이 팔거도 없이

얕고. 겉으로만 말하자면. 무릇. 주관적 위치에 서있는 사람을 ""라고 하고. 그 밖엔 "내도 아닌 나"이다이를테면 '조선인'은 조선을 '나'라고만 하고 영제. 러시아. 프랑스미제 등을 내도 아닌 나라고 하지만은 영제. 러시아. 프랑스. 미제 등은 저마다 제 나라만 나라고만 하고 

조선을 내도 아닌 나라고만 하며

무산계급은 무산계급을 나라고만하고, 지주나 자본가는 내도 아닌 나라고 하지만, 

지주나 자본가는 저마다, 가까운 사람만 나라하고, 무산계급은 내도 아닌 나라고만 한다.

 

이뿐만은 아닌지라, 학문에서나, 기술에서나, 직업에서나, 의견에서나, 그 밖에 무엇에든지.

반드시 본위에 대한 나도 있으면, 따라서 나와 대치되는 내도 아닌 나도 있고, 내 가운데에도.

나와 내도 아닌 나도 있으면 나도 아닌 내 가운데서도 나와 내도 아닌 나도 있다.


그러므로, 나에 대한 내도 아닌 나에게로 접촉은 잦을수록 내도 아닌 나에 대한, 

내 분투는. 더욱 맹렬하고 인류 사회에 활동은 쉴 사이도 없으며

역사에 전도는 완결될 날은 없다너무나 맹렬하므로

그러므로, 역사는 나와 내도 아닌 나와에 투쟁이란 기록이다.

 

나와. 나와 반대되는 내도 아닌 나도. 역사적인 나로 되려면반드시 두 가지 본성은 있어야 한다.

 

첫째로는, 상속성이다. 시간에 있어서 생명이란 끊어지지 아니함이고

둘째로는, 보편성이니공간이 주는 영향이란 파급이다


그러므로 인류 아닌 다른 생물에게도 나와 내가 아닌 내 투쟁은 없지 않지만은. 내 의식은 너무 미약하거나. 혹은 전혀 없어서. 상속적이거나 보편적이 되진 못하므로

마침내 역사에 대한 날조들은 인류에게만 주어졌다.

사회를 떠나. 개인적인 나와 내도 아닌 내 투쟁도 없진 않지만은. 내 범위는 너무도 약하거나 

작기만 해서. 역시 상속적이거나. 보편적이 못 되므로. 인류에게 있어서도 사회적 행동이라야.

역사도 되는데. 한 사건만으로도 두가지. 본성에 대한 상속. 보편적인 이치들을 따져보아서.

역사에 사료가 될 만한 분량에 대한 크고 작음을 정하게 된다.

 

이를테면. 김석문은 300년 전에 '지구는 둥글다는'. "지원설"을 주장한 조선 학자지만. 이를 브루노도 주장했던 지원설과 똑같은 역사적 가치를 주지 못한 건. 저편에 있던 학설들로 인해. 신대륙을 발견했다하더라도. 이쪽에선 어떤 결과를 가져오지도 못했기 때문이다.

 

정여립은 400년 전에 '군대와 신하만이 바로선다.'는 주장을 반박하고. 타파한 동양에 위인이다.

그를 사회계약론을 주장한. 루소와도 견줄만 한. 동등한 역사적 인물이라 할 수 없음은. 당시에 다소간 정여립 주장에 영향을 입은 검을 쓰는 사람들인 '검계'들이나 많은 무력으로 폭동을 일으킨 '양반살육계' 같은. 번갯불이 한 번 번쩍했던 것 같은 행동이 없지는 않았으나. 결국 루소 이후에 파란만장했던 프랑스 혁명에는 비길 수 없었기 때문이다. 내가 아닌 나를 정복해서 나를 드러내면. 투쟁의 승리자가 되어 미래 역사에 대한 생명을 잇고. 나를 없애서 내가 아닌 나를 공헌하는 사람은 투쟁에 패망한 사람이 되어 과거 역사에서 묵은 자취만 끼친다. 이는 또 역사에 불변하는 원칙이기도 해서. 승리자가 되려 하고 실패자가 되지 않으려 함은 인류의 본성이기도 한데

빈번이 태도에 어긋나서. 승리자가 못되고 실패자됨은 도대체 무슨 까닭일까.

 

무릇 타고난 본성부터 말하면 내가 생긴 뒤에야. 내가 아닌 내가 생기는 것이지만.

자라난 형식으로 말하면 내가 아닌 내가 있는 뒤에야 내가 있다. 말하자면 조선민족. .

내가 출현한 뒤에 조선민족과 상대되는. 중국민족인 묘족이나. 지나족도 아닌 나도 있었을 것이니. 이는 타고난 것에 속한다.

 

그러나 만일 묘족. 지나족. 등 내가 아닌 나에 반대되는 내가 없었더라면. 조선을 세우겠다.

세 가지 책인 세경을 만든다. 다섯 군대를 둔다. 하는 등의 내 작용이 생기지도 못했을 것이니.

이는 자라난 것에 속한다. 정신의 확립으로 타고난 것을 호위하고. 환경에 순응하고. 자라난 것을 유지하되. 두 가지 중에서 어느 하나라도 부족하면. 패망이란 구렁텅이에 빠진다.

 

유대 종교나. 몽골족.이 가한 무력으로도 침몰에 대한 화에 대한 결과를 면치 못한 건 환경에 순응해서. 자라나게 하지 못했기 때문이고. 남미에 코뮌. 이집트 학문에 발전으로도 쇠퇴하는 재앙마저 구해내지도 못한 것은. 타고난 정신을 확립하지도 못했기 때문이다.

 

이제 조선사를 서술하고자 하고. (우리). 정도로 기준을 잡겠다.

(). 겨레가 자라난 발달된 상태를 서술하는 첫째 조건으로 하고. 그리하여.

 

1. 최초 문명의 기원이 어디서 되었는가.

 

2. 역대로 굳센 땅에서 점도는 어떠했는가.

 

3. 각 시대 별로 사상은 어떻게 변천되어왔는가.

 

4. 민족적 의식은 어느 때에 가장 왕성했고. 어느 때. 가장 쇠퇴했는가.

 

5. 여진족. 유목민족. 몽골족. 이민족 등은 본래 우리 동족이지만은.

 

어느 때에 분리되었고. 분리된 뒤에는 영향은 어떠했는가.

 

6. 우리라는 겨레에게 현재에 대한 계급. 일어난 문제에 대한 일처리도.

 

과연 어땠는가를 서술했는가.

 

(). 우리라는 겨레에 반대하던 주위 각 민족에 대한 관계를 서술하는 것을 둘째로 하고 그래서.

 

 

1. 겨레에게서 분리된 노예선비몽골. 겨레 문화에 힘입어 자라온 일본도 겨레에게는

   큰 적이 되어 있다는 사실과.

 

2. 인도는 간접적으로도. 직접적으로 지나가더라도. 우리 겨레에게도 문화를 수입했는데.

   도대체. 어째서. 돈에 대한 수입으로만. 분량에 따라서만. 민족에게 준 활기마저 여위어.

   국토에 대한 범위마저 줄어들었던가.

 

3. 오늘 이후로 서구에 문화와 북쪽에 사상마저 세계사에서도 중심인데.

   도대체 우리 조선은 왜 문화만 보는 사상에 노예가 되어 소멸하고 말았는가.

 

한국을 잘 씹고 소화해서. 문화를 건설할 것인가. 등을 서술해서 위에 ().()

두 가지로만 본사로는. 역사에 대한 뿌리를 기초로 삼고.

 

(). 글말은 우리 겨레에게 사상을 표현하는 연장이라는 도구로.

      날카롭고. 둔함은 어땠고. 어떻게 변화되었으며.

 

(). 오늘날 종교는 이후로는 거의 가치없는. 폐물이 되었지만.

 

고대에는. 확실히 한 민족에 대한 흥망성쇠의 관건이었는데,


우리 겨레에게 신앙에 대한 추세는 어땠고.

 

 

(). 학술기예 등 우리 겨레에게 천재라는 재능을 발휘한 부분은 어땠고.

 

(). 입고.먹고.잘 수 있는 형편이나 농업. 상업. 공업의 발전과

      땅에 대한 분배와 화폐에 대한 제도에서도 이 밖의 경제조직은 어땠고.

 

(). 인민들의 이동이나 번식. 또 점도가 강한 대지의 신축 정도를 따라서도.

      인구량은 어떻게 되었으며.

 

(). 정치제도는 어떻게 변천했고.

 

(). 북벌진취 사상이란 '북을 정복하고 처야한다'는 사상은 시대에 따라서도 어떻게 변모했고.

 

(). 귀하고. 천하고. 낮고. 가난하고. 부유하기만 한 각 계급에 압제와 서로 얼마나

      대항한 사실과 투쟁이 얼마나 발발하고 쇠퇴했으며.

 

(). 지방자치제는 벌써 태곳적부터 발생했는데.

      도대체. 근세에 와서는 형식만 남기고 고유한 정신마저.

      사라진 원인에 대한 결과이고,

 

(). 외부에 침입에서 받은 거대한 경제적 손실과 전반에 끼친 다수의 이익과.

 

(). 노예와 여진족 등이 한번은 우리 겨레와 분리된 뒤에도.

     다시금 합쳐지지 못한 의문이며,

 

(). 옛날부터. 문화상의 창작. 그러니까. 작가에게 글쓰기들도 적지 않지만은.

      매번 고립적이거나. 단편적이기만 하고. 꾸준하거나 지속적이지 못한.

      이상한 원인 등을 힘써 참고해보고 논술해보면.

 

위에 (). () 이하로. 여러 문제에 본사(本社)에 대한 중요한 부분을 조목조목 일삼아.

요목(要目)을 삼아서, 일반 사람들에게도.

 

역사를 읽는 이로 하여금 조선의 면목만이라도. 그 중 하나라도. 또 일부만이라도.

알게 하고. 깨닫게 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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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네 시집 범우문고 295
하인리히 하이네 지음, 서석연 옮김 / 범우사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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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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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의 뿌리
조세희 지음 / 열화당 / 198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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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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