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71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마리와 수아는 어느새 섬의 유명인사가 되어 있었다. 신기한 생물을 보듯 호기심 넘치는 눈동자가,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눈을 떼지 않는 혐오가, 근처에도 있기 싫다는 듯 방향을 바꾸는 발걸음이 담벼락 너머에서, 문틈 사이로, 전봇대 뒤에서, 거리에서,
가게에서, 집에서 불꽃처럼 타올랐다. 저 멀리서 민지가 손을 흔들며 이쪽으로 달려오려다가 다른 사람에게 팔을 붙잡히는 모습을 보았다. 전염병에 걸린 것도 아닌데 사람들이 가까이 오지 않았다. - P138

자신이 수아를 죽였다. 마녀가 기어코 인어를 죽인 것이다. 비늘에 어린 빛이 약해졌다는 걸 직접보고도 시간을 거슬러와서 그렇겠거니 했던, 그저수아가 옆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해서 가만히있었던 자신의 탓이다. 애정 어린 시선으로 살피고주시하며 바다가 더럽혀지지 않도록 지켜야만 했는데. 인간의 악의가 공기처럼 퍼져 있는 곳에서 마녀가 쉬이 인간을 죽이는 모습을 본 인어는 결국 모든 빛을 잃은 것이다. - P152

계속 타올라 재밖에 남지 않았던 마음에 수아가꾸준히 애정을 주니 싱그러운 싹이 돋아나는 것 같았다. 끊임없는 입맞춤과 자신 하나만 바라보는 시선과 파르르 떨리는 손가락과 크게 울리는 고동 소리와 늘 서늘하나 자신과 닿아 있으면 순식간에 미지근해지는 체온이 한결같은 사랑을 표현하고 있어서, 마리는 행복했다. 미움과 증오와 경멸과 분노와 혐오가 물에 서서히 젖어 순식간에 녹아내리고, 행복과 환희와 들뜸을 노래했다. 마녀가 행복을 느끼는 건 모두 수아 덕분이었다. - P153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네 눈물은 바다와 연결되어 있어서 끊임없이 흐르는 걸까. 언제가 되어야 눈물이 그칠까. - P95

수아는 밤에 태어났을 거야. 낮의 활기참을 모아 밤의 다정함 속에서 태어났겠지. 살을 에는 겨울바람에 머리를 들이밀고 나왔다가 많은 사람 중에 나와 눈이 마주쳤을 거야. 채 떠오르지도 않은 햇살을 눈동자에 담아서 내 몸과 마음을 녹여 준 게 분명해. - P100

"인어로 잘 지내고 있던 널… 그냥 두는 게 나았을까?"
자신의 사랑이 강요였을까 하는 의문은 차마 꺼내지 못했다. 그러나 삼킨 말마저 들었다는 듯 수아의 얼굴이 굳었다. 수아는 바닥에 앉아 마리의 발을매만졌다. 그 옛날 혹은 일어나지 않은 미래에 그랬던 것처럼, 발가락 하나하나를 매만지고 발등을 쓰다듬고 복숭아뼈를 손바닥으로 어루만졌다.
"그렇게 따지면 마녀로 잘 살고 있는 너를 흔든 내가 먼저 잘못한 거 아닐까?"
마리가 수아의 볼을 매만지자, 수아가 그 손바닥에 얼굴을 기댔다. 살며시 얹히는 무게감이 행복했다. 자신과 수아는 서로를 사랑했을 뿐이었다. 단지... 서로의 죽음을 눈에 담고 마음에 담아 곱씹고또 곱씹은 탓에 상대방을 발견한 순간 정신없이 몰두했던 게 문제였다. 마녀로 살아온 시간이 너무 길어, 상대를 배려하지 못했다. 자신의 방식만을 강요하지 않았더라면. 아니, 수아가 자신에게 달려올 때부터 누구인지 알았더라면….
"우리가 그때 무사히 도망갔더라면 좋았을 텐데."
마리는 내뱉고서야 무슨 말을 했는지 알아차리고 웃어 버렸다. 모든 사건이 일어나기 이전 시점에서 다시 시작하려면 도대체 시간을 얼마나 거슬러가야 하는 걸까. - P123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태풍이 온 게 왜 내 탓이야? 누가 무녀로 태어나고 싶었대? 안 해! 놓으라고!"
"무녀가 어떻게 그런 말을 해! 요괴에게 단단히 홀렸군."
"수아 님은 요괴가 아니야!"
"가망이 없어. 안 되겠다. 안타깝지만 방법은 하나뿐이다. 바다님과 하늘님께 제물로 바쳐야겠어. 묶어라."
"그냥 이대로 자빠뜨려 애를 배게 하는 건 어떨까요?"
자신의 몸을 훑는 남자의 시선이 일렁이는 어둠속에서도 선명하게 느껴졌다.
"놔, 싫어, 뭐 하는 거야!"
"땅이 썩었는데 어찌 좋은 싹이 나올까."
"그럼 이제 기원은 어떻게 드리지요?"
"저 계집을 태워서 얻은 재를 마신 임부가 아기를 무사히 낳으면 그 아기가 다음 대 무녀가 된다. 마침 애를 배고 있는 이가 둘이나 있으니 둘다에게 먹여 보면 되겠지. 걱정 말거라."
"웃기지 마, 이렇게는 못 죽어, 안 죽어."
"이렇게라도 남은 이들에게 사죄할 수 있으니 다행이 아니냐. 죽어서도 반성해라." - P47

"내가 수아 님을 지켜 드릴게요. 사랑해요. 사랑해, 수아야…."
THE마리의 나지막한 목소리는 장작이 타들어 가는불규칙한 소리와 일정한 박자로 밀려오는 파도 소리에 삼켜졌다. 갑자기 마른하늘이 하얗게 번쩍거리더니 이내 벼락이 마리를 향해 내려왔다. 한 번내리꽂힐 때마다 마리를 감싸고 있던 불꽃이 하늘을 찌를 듯 활활 타올랐다.
사람들은 상상도 하지 못한 광경에 비명을 지르며 뒷걸음질 쳤다. 그러나 문제는 벼락만이 아니었다. 저렇게 내리치는 벼락을 불 속에서 맞으면 분명죽어야 하는데..… 왜 아직도 우리와 시선이 마주치는 거지?
어느새 장대에서 풀려난 마리가 팔을 휘두르자작은 불꽃이 작살을 휘두르던 남자를 향해 날아갔다. 남자의 머리카락에 옮겨붙은 불꽃은 불티를 날리며 살아 있는 뱀처럼 남자의 몸을 휘감더니 한순간에 크게 타올라 남자를 집어삼켰다.
"요, 요괴다! 무녀가 요괴가 되었다!"
화려하게 흩날리는 불꽃이 마리의 몸을 옷처럼감싸고 있었다. 살아 있는 듯 휘몰아치는 불꽃은 시시각각 기묘한 문양을 만들었다. 날카로운 매의 눈같기도 했고, 이미 죽은 지 오래인 생선 눈알 같기도했다. 소용돌이치는 태풍과 사람을 잡아먹을 듯한파도를 연상케 하는 무늬를 보는 것만으로도 사람들의 온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 P51

마리는 눈물 자국이 선명한 얼굴에 귀기 어린 표정을 띄우며 타오르는 장작 위에서 천천히 내려왔다. 모든 한을 담은 듯 무거우면서도 거리낄 것이없다는 듯 가벼운 몸짓이었다. 마리가 움직일 때마다 주변에서 불꽃이 파도치듯 너울거렸다. 손을 들어 나뭇하게 휘젓자 살아 있는 불꽃이 사람들에게옮겨붙었다.
마리의 발걸음은 바람처럼 가볍고 벼락처럼 매서웠다. 불꽃을 온몸에 두르고 파도의 박자를 따라춤을 추듯 움직였다. 그 움직임은 짝 잃은 새가 넋놓고 우는 듯 애달팠고, 망망대해 위에서 죽어 지상을 떠돌게 된 영혼을 위로하는 것처럼 상냥했다.
사람들은 불이 자신의 몸을 잡아먹는 것도 모른채 넋을 놓고 마리를 바라보았다. 불은 신당에 있던사람들을 잡아먹으며 점점 커졌다. 바닷가에 있던사람들은 태양이 내려앉은 듯한 불이 코앞에 다가오는 걸 보고 혼비백산하여 바닷속으로 들어갔다.
빙 돌아 헤엄쳐 마을로 돌아오려고 했으나 기다란해초에 온몸이 칭칭 감긴 것처럼 물속으로 가라앉아 숨만 보글보글 빠져나갔다.
사람들이 타오르고, 아래로 가라앉고 있을 때 마리는 바닥에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모아 기도했다.
정말로 무녀를 태워서 얻은 재에 힘이 있다면……
"무녀인 저와 제물들을 함께 보내니 수아를 무사히 살려 주세요. 그것이 저의 마지막 소원입니다."
눈물조차 흐르지 못한 채 끓어올랐고, 너울거리는 열기 속에 모든 것이 타오르더니 이내 재만 남고 말았다.
살아남은 사람이 아무도 없는 곳에서, 옥가락지만 달빛을 받아 빛나고 있었다. - P52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죽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죽지 않으면 뭐 하나. 이 섬에 매여 다른 이들의 뜻을 전하는 것 외에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지? 때가 되면 흘레붙은 가축처럼 원치 않는 새끼를 배고 죽을 힘을 다해 낳고 그아이가 자랄 때까지 병든 몸으로 차가운 바닷물 속에서, 말라 죽을 듯한 뜨거운 햇살 아래서 끊임없이 기원만 드려야 하나?
어두운 바닷속보다 더 깜깜한 미래를 떠올리자 팔다리에서 힘이 빠졌다. 죽는 순간에라도 지긋지긋한 섬을 벗어날 수 있었으니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하는 걸까. 마지막으로 달을 보고 싶다는 생각에있는 힘을 다해 눈을 뜨니 은하수가 빠르게 다가오고 있었다. 너울거리는 긴 머리카락 사이로 아침에마주쳤던 얼굴이 어두운 바닷속에서 뜬 달처럼 선명하게 보였다. 아침에는 어여쁘게 웃어 줬는데 지금은 다급하고 놀란 표정이었다. 웃어 주세요, 날보고 웃어 줘요. 행복하게 갈 수 있도록……

눈이 감겼다 - P13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코린느 마이에르의 책 때문에 격노했던 《엘》의 저널리스트 미셸 피투시는 1987년, 가족을 돌보는 것과 일을겸할 때의 어려움 및 여성해방의 유감스런 결과들이 주제인 《슈퍼우먼들이혐오하는 것들 Le Ras-le-bol des superwomen》이라는 책을 출간했다. 적어도여기에서는 삶에서 방정식을 구성하는 요소 가운데 하나를 제거함으로써삶을 가볍게 하는 사람들에 대해 논의하지 않는 것이 분명하다.
자발적 무자녀 여성들의 ‘선의’를?‘ 심하지 않는 경우, 사람들은 그녀들

에게서 모성을 대체할 대상을 찾는다.
직업이 교사라면 그녀는 학생들의 어머니가 되고, 여성 작가들에겐 책이자식들이 된다. ‘아이의 부재로 인한상처를 극복하는 방법을 고찰하는 에세이에서 미국 작가 로리 리슬레는 상징적 모성을 길게 설명한다. 이는 상당 부분 개인적 필요에 따른 것으로보이긴 하지만 책에 대한 인터넷 평가에 따르면 이러한 그녀의 강조는 같은처지에 있지 않은 많은 여성들에게는거슬리는 것이었다. 그중 자발적 무자녀인 클로틸드는 간호학교에서 자신의 교사 활동과 학생들과의 관계를설명하며 "나는 모성애적 보살핌이라는 것은 잊고 싶다"고 말한다. 6362

영화는 결론을 자막으로 덧붙인다. 그녀는 대대적으로 성공을 거듭하지만 결코 결혼한 적도, 아이를 낳은적도 없다고. 이 마지막 설명은 그녀가 위대한 사랑을 잃은 뒤 수녀 같은삶을 살며 오로지 일에만 몰두한 듯한인상을 남긴다.
그러나 현실의 샤넬은 화려하고도파란만장한 인생을 살았다. 적어도 몇몇 사람들이 볼 때 그녀에게는 사랑했던 것으로 보이는 친구와 연인들이 있었다. 영화에서는 그녀의 직업을 사적불행을 일시적으로 완화하는 대체물로 보이게 하는 다소 조작적인 무엇이, 더욱 그럴듯하게 말하면 클리셰의용이한 사용이 있다. 그러나 그녀는

이런 맥락에서 울프를 선두로 내세우는 ‘문학 마녀들‘을 축하하는 서문에서 팸 그로스만이 "아이들 아닌 다른 것을 만들어내는 여성들은 여전히 많은 이들에게 위험한 여성 취급을 받는다"고는다"고 쓴 것은 옳은 말이라고 인정할 만하다.

그러니 버지니아 울프같은 작가가 된다 해도 어머니가 되지않는다면 당신의 존재는 정당화되지않는다는 것을 알아두는 편이 좋을 것이다. 당신이 출산을 생각하지 않거나출산에 무관심하다면 그런 경고를 받을 것이다. 당신이 모르는 사이에 틀림없이 당신을 매우 불행하게 만들고마는 이 비출산이라는 심각한 결핍에서 주의를 돌리고자 걸작을 쓰려 애써봤자 소용없는 짓이다. 걸작을 쓰고싶다면 다른 이유들을 위해, 당신의즐거움을 위해 써라. 아니면 차라리불미스러운 당신 삶의 여유를 나무 아래서 한가롭게 책을 읽는 데 혹은 당신이 하고 싶은 다른 일들에 바쳐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71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