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는 고마운 줄 알아야 한다고 했다. 나 때문에 가진 돈을 다 썼으니, 기니 여사가 아니었으면 내가 어디 있을지 모른다고 했다. 하지만 난 내가 어디 있을지 알고 있었다. 시골에 있는 대형 주립 병원에 있겠지. 이 개인 병원 바로 옆에 있는 병원에. 기니 여사에게 감사해야 한다는 것은 알았지만 그런 감정이 생기지 않았다. 그녀가 유럽행 티켓이나 크루즈 왕복표를 줬다 해도 다르지 않았으리라. 내가 어디 있든—배의 갑판이든 파리나 방콕의 거리 카페— 나 자신의 시큼한 공기 속에서 속을 태우며 벨 자 밑에 앉아 있을 테니까. - P245
강 위로 둥글고 푸른 하늘이 열렸고, 강에는 배가 많이 떠다녔다. 마음의 준비를 했지만, 곧 엄마와 동생이 손으로 양쪽 문을 잡았다. 뜨겁게 달궈진 다리 위를 지날 때 타이어에서윙 소리가 났다. 물, 배, 푸른 하늘, 갈매기 떼는 비현실적인 엽서를 떠오르게 했고, 우리는 강을 건넜다. 나는 회색의 호사스러운 좌석에 몸을 기대고 눈을 감았다. 벨 자의 공기가 내 주변을 메워서 옴짝달싹할 수가 없었다. - P246
물론 우리 대학의 저명한 여자 시인은 여자랑 살았다. 뚱뚱하고 머리를 치켜 깎은 고전 전공 학자였다. 내가 결혼해서 아이를 많이 낳을 거라고 말하자 시인은 끔찍한 표정으로 날 노려봤다. 그러고는 쏘아붙였다. "하지만 커리어는 어쩌고?" 머리가 아팠다. 왜 수상한 늙은 여자들이 내게 관심을 퍼부을까? 그 유명한 시인, 필로메나 기니, 제이 시, <크리스천 사이언티스트> 여자 상사 모두 마찬가지였다. 다들 날 옆에 두려 했다. 보살피고 영향을 주어서 자기를 닮게 만들려고 했다. - P291
"우리, 떠나온 곳에서 시작하는 거야. 이 모든 게 나쁜 꿈이었던 것처럼 행동하자꾸나." 나쁜 꿈. 벨 자 안에 있는 사람에게, 죽은 아기처럼 텅 비고 멈춰버린 사람에게 세상은 그 자체가 나쁜 꿈인 것을. 나쁜 꿈. 난 모든 걸 기억했다. 해부용 시신, 도린, 무화과 이야기, 마르코의 다이아몬드, 광장에서 만난 해병, 닥터 고든 병원의 사시 간호사, 깨진 체온계, 두 종류의 콩 요리를 가져다준 흑인, 인슐린 투약으로 9킬로그램이 늘어버린 체중, 하늘과 바다 사이에 회색 두개골처럼 튀어나온 바위. - P315
어쩌면, 망각은 친절한 눈처럼 그것들을 무감각하게 하고 덮어버리리라. 하지만 그것들은 나의 일부였다. 그것들은 나의 풍경이었다. - P316
"어떤 남자분이 찾아왔는데요!" 흰 캡을 쓴 간호사가 웃는 얼굴을 문틈으로 내밀었다. 순간적으로 내가 대학에 돌아왔다고 착각했다. 흰 전나무 가구, 나무와 언덕 위로 펼쳐진 하얀 풍경, 휑한 마당 정경. ‘어떤 남자가 찾아왔어!‘ 기숙사 당번인 선배가 전화로 그렇게 말했다. 브리지 게임을 하고 소문에 대해 떠들고 공부하는, 내가 돌아갈 대학의 여학생들과 벨사이즈의 우리와 무엇이 다를까? 그 여학생들 역시 어떤 종류의 벨 자 밑에 앉아 있는 것을. - P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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