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체국
찰스 부코스키 지음, 박현주 옮김 / 열린책들 / 2012년 2월
평점 :
절판


규율은 생산최적화 사회구조 창조 도구이다!

  - 규율사회의 온순한 신체이기를 거부하는우편 배달원 ‘치나스키’를 중심으로

 

질서, 규범, 법과 제도 등 무수한 이름의 규제 장치들에 익숙해 진 우리들의 몸은 이것들에 순응한다. 이 사회적 장치들은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 것일까? 소설의 첫 장은 미합중국 우정사업본부‘복무윤리강령’이 장식하고 있다. 우체국 직원의 행동 규범 수칙이다. 우체국 직원을 위한 것일까? 결코 아니다. 우정사업본부라는 조직을 위한 것이고, 이 조직은 상층부의 권력을 가진 자들에 의해 운영된다. 사회의 규제 장치들이란 개인인 약자들을 감시하고 처벌하는 기능을 갖는다.

 

이 소설을 이렇게 규범 등 사회 규제 장치의 기능이라는 획일적 주제로 몰아감으로써 소설이 발산하는 더 많은 언어들을 사장시키는 편협이 있겠지만, ‘미셸 푸코’에 앞서 이미 ‘찰스 부코스키’가 문학작품으로 개인의 신체와 정신을 억압하는 이들 기능을 통찰하고 있다는 점에서 관용될 수 있지 않을까? 부코스키가 만들어낸 현대인의 신체에 새겨진 규범의 감시와 처벌 기능을 거부하는 ‘헨리 치나스키’라는 중년남자, 그의 속물적 여과정치 없이 내뱉는 말, 얽매이거나 애걸하지 않는 행동이 매혹적으로 보이는 까닭은 바로 내가 하지 못하는 것이기 때문일 것이다. 순응한 몸과 정신, 혹여 보잘것없는 내 것들을 잃게 될까 쩨쩨하고 비루해진 나의 억눌려진 정신이 그로인해 해소되기에.

 

치나스키는 우편 배달원이다. 물론 예기치 않게 수년 후에 우편물 분류 사무원이 되지만, 그의 노동력을 무참히 착취한다는 점에서 다르지 않다. 정규직원이 결근하면 일종의 땡빵용으로 새벽부터 기다리다 집배 순로를 배정받는 ‘보결 배달원’으로 우체국에 입사한다. 게다가 현장 주임의 부당한 처우에 대한 시정을 상부에 요구했다가 오히려 일자리의 위협과 더욱 혹독한 처사에 내물리는 등 시련을 겪은 끝에 정규직 집배원이 되지만, 정년퇴직을 눈앞에 둔 성실한 선배 배달원이 오랜 그의 인고의 삶을 허물어뜨리는 누명으로 고통스러워함에도 우체국과 동료들은 외면하기만 한다. 조직이 그 구성원을 지켜주지 않는다. 자신들의 그 하찮은 이익과 명예를 위해서. 그래서 치나스키는 어렵사리 오른 정규직 우편 배달원을 사직(辭職)한다.

 

우편 배달원은‘사람을 죽이는 노동’의 대명사로 불릴 정도로 그 육체적, 정신적 혹사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더구나 보결 배달원이란 위치는 생계의 위협이라는 불안함을 내재하고 있기에 비굴함을 요구한다. 설혹 감당할 수 없는 배달물량을 배정받더라도, 폭우가 쏟아져 통행이 가능치 않더라도, 근무시간이 아무리 연장되더라도 감수하지 않으면 곧 불이익이 되어 일자리를 잃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해서 도달한 정규직 자리를 과감하게 내던질 수 있는 사람이 바로 치나스키이다. 인간성이 배제된, 오직 노동자라는 수단으로만 여겨지는 조직을 인내하는 것은 자신을 속이는 것이기에.

 

몇몇 비평은 이러한 치나스키를‘반(反)노동’의 상징적 인물정도로 묘사한다. 이건 타인의 노동을 이용하여 이익을 향유하기만 하는 자들, 결코 노동을 하지 않거나 아예 모르는 자들의 이야기에 불과하지 않을까? 치나스키가 경마에 빠져 몇 푼의 배당액으로 술과 무노동을 향유하기는 하지만, 그는 항상 강도 높은 노동에 종사하고 있으며,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요구에도 그 요구의 달성을 위해 시도하고, 또한 완수하는 미덕을 외면하지 않는다. 다만, 획일적으로 설정된 표준작업량의 일회적 측정으로 불이익의 감수를 종용하고, 끊임없이 연장되는 작업시간으로 사람을 단지 노동하는 기계로 인식하며, 어떠한 노동의 부당성에 대한 이의도 허용치 않으려는 무참한 조직에 저항 할 뿐이다. 이것을 반노동이라고 부른다면 인간은 더 이상 인간일 수 없게 되는 것이 아닌가?

 

이처럼 소설은 비정규직의 고통, 노동의 비인간화라는 노동현실을 통해 규범이라는 감시와 처벌의 장치가 인간을 어떻게 길들여 한낱 생산성을 위해 도구화하는지를 거침없이 보여주고 있다. 생활의 달인 어쩌구하는 어느 TV프로를 우연히 본적이 있다. 엄청난 높이로 쌓인 박스더미를 순식간에 옮기는 묘기를 하는 창고 노동자를 비추면서 달인이라 추켜세우는 것이었고, 컨베이어벨트를 빠른 속도로 지나가는 제품에서 불량품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선별해내거나, 연말연시에 폭주하는 우편물을 분류하는 우체국 직원의 쉴 새 없는 손놀림을 포착하면서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는 뻔뻔함이었다. 그들이 순응할 수밖에 없었던 오랜 노동의 강도를 읽는 것이 아니라, 생산성이라는 산출물량에 초점을 맞춘 자본가의 탐욕에 기승하는 것이리라. 광고주를 기쁘게 하려는 방송사의 취향이야 이해하지만 노동자들의 노동을 단지 기예(技藝)로 취급하여 눈요깃감으로 둔갑시키는 한국의 주류의식에 이맛살이 찌푸려졌던 기억이 되살아나는 것이다. 그래, 기예로 보이는 그네들의 숙련된 동작에 가해졌던 감시와 처벌의 규정이 얼마나 오랜 시간 가해졌던 것인지는 생각할 수 없는 것일까?

 

소설 『우체국』에서 사회적 규제 장치인 온갖 규범들이 감시와 처벌이라는 기능을 통해 사람을 어떻게 길들이고, 현대 자본주의의 효과적인 이익 도구로 사용하는지를 이와 같이 읽을 수 있다. 그러나 이 매혹적인 문제의식과 달리 치나스키라는 남자의 여성관은 여성을 남자의 성적 대상 이상으로 인식하지 않는 여성 편력으로 비판의 도마 위에 오른다는 점은 허물이라 아니 할 수 없다. 소설 속에 그의 사실 혼 관계의 첫 번째 아내에서부터 두 번째의 어린 아내, 그의 딸을 나아주는 세 번째 동거 여인을 비롯한 주변의 여자들은 오직 섹스라는 성적 파트너로 등장할 뿐이다. 그녀들과 그의 이상이 진지하게 논의 되지도 않을 뿐 아니라, 부부로서의 관계를 지속시키는 데 인내라는 어떠한 수고도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물론 이를 사회적 규범에 얽매이거나 순응하지 않으려는 인간으로서 치나스키를 창조해내려는 작가의 결벽(潔癖)한 의도라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결혼이라는 사회장치 역시 인간을 속박하는 자유의 흠결중 하나라고 말이다.

 

결국 치나스키는 11년여에 걸친 우편물 분류 사무원이라는 육체노동을 그만두고 소설을 쓰기로 한다. 이것은 다름 아닌 자기의 발견, 즉 주체를 찾았다는 것이다. 현대의‘규율사회’가 “인간을 복잡하고 규율화하는 복잡한 생산구조 내에서 기능하는 신체 상태로 환원시켜 개인을 모두 유사하거나 혹은 적어도 비교 가능하고 양립 가능한 존재”로 바꾸었다는 푸코의 말처럼 자신들이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는 사이에 질서에 예속되어 다양성이 배제되고 차이가 제거되어 같아지기를 요구하는 사회에 대한 멋진 저항인 것이다. 오늘의 노동이 동일한 인간으로 변형시키려는 규율사회의 권력에 침식되어 차이를 제거하고, 일탈을 금지하여 시민을 ‘온순한 신체’를 가진 부품화 하는 것이라는 소설 속 치나스키의 외침은 사실 감동적이기까지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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