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이라는 말에 예민한 당신에게
조정훈 지음 / 모모북스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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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 '존 F. 케네디' 대통령은 나사(NASA)를 방문했다. 케네디는 NASA의 시설을 둘러보며 사람들에게 이런 저런 질문을 했다. 그때 청소부 한 명이 바닥을 쓸고 있었다. 대통령은 그에게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물었다. 그는 대답했다.

"저는 사람을 달에 보내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는 일이 '전체'에서 보잘 것 없어도 본질적으로 거시적 '목표'를 가지고 나아가는 중이다. 혹은 그렇게 믿어야 한다. 거창하게 미국 이야기를 꺼낼 것도 없다. 천리 길도 한 걸음부터다. 시작하는 이들에게 부분은 너무 작은 티끌과 같은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바닥을 다지는 중요한 일이며 그것을 뿌리에 두고 열매가 맺는다.

화성이나 달에 사람을 보낸다는 계획도 최초에는 종이와 연필로 시작했다. 시작을 보고 전체를 판단 할 수 없다. 전체를 보면 무게에 짓이겨 하는 일이 초라해 보일지 모른다. 다만 거시적으로 살펴보면 우리는 거대한 탑 아래 가장 단단한 기둥을 짓고 있는 일일 수 있다.

도전하는 것들은 꼭 인류를 대표할 필요가 없다. 단순히 학교 수행평가 일수도 있고 깨지 못한 온라인 게임의 퀘스트일 수도 있다. 어떤 종류의 것이던 목표를 설정하고 수행하는 과정에서 다양한 인사이트를 얻는다.

그것이 꼭 바라는 대로 결과가 나오지 않을 수도 있다는 사실.

그것이 꼭 성공에 이르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

그것이 꼭 원하는 시기에, 원하는 곳에서 나오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

우리는 이러한 것을 간과하고 때로 그 과정에서 포기를 선언한다. 사람의 인생은 시작점과 끝점을 찍고 그 점을 잇는 '직선'을 직선으로 긋는 '평면도형'과 다르다. 인생에는 '끝' 점이 없듯, '시작점'도 분명하지 않을 수 있고 그것이 직선이 아니라 곡선일 수도 있다. 내가 그리고 있는 도형이 사실은 '도형'이 아닐 수도 있고, 그것이 때로는 나에게만 의미가 있을 수도 있다.

사람에게는 각자 자신만의 의미있는 삶이 있다. 법정스님은 '무소유'를 사색하셨고, 워렌버핏은 투자수익률을 바라본다. 이태백은 달을 노래했고 닐 암스트롱은 달을 탐험했다. 각자가 매기는 인생의 가치에 따라, 모든 것에 가치는 정해진다. 요즘과 같이 획일화 된 '목표'를 향해 달려가는 시기에는 승자와 패자가 명확하게 나눠진다. 그러나 모차르트와 아인슈타인 중 누가 승자이며 누가 패자일까. 기준을 '음악'에 두느냐, '물리학'에 두느냐에 따라 둘 중 하나는 명확한 패자고 둘 중 하나는 명확한 승자다. 삶은 그렇게 정의되는 것은 아니다. 비교 대상은 언제나 유동적이다. 각자 사람마다 달라지는 이런 기준은 같은 사람의 다른 시기에도 물론 적용된다. 10대의 나와 20대의 나, 30대의 나가 모두 같은 목표를 갖고 있을 수는 없다. 언젠가는 당장 내일 닥치는 기말고사 성적이 최고 걱정이었다가, 어느 순간에는 외모나 돈, 아이의 성적이 그 대상으로 바뀌곤 한다. 모든 것이 정해지는 바가 없이 언제나 움직이는 커다란 유체 덩어리다.

'무언가 시작'이라는 것은 그것이 '요리'건, '운동'이건 같은 정도의 두려움이 생긴다. 처음 김치를 입에 넣는 아이의 두려움과 처음 달에 사람을 보내는 두려움은 어저면 같은 크기 일 지 모른다. 우리가 공감해야 하는 것은 어떤 것에 도달했느냐가 아니라, 어떤 감정과 생각 했느냐다. '컨텐츠'와 별개로 새롭게 도전하는 모든 것들을 극복하는 사람에 대한 경외심을 가져야 할 것이다.

이 수필은 조정훈 작가 님이 일상동안 가졌던 처음에 대한 다양한 생각과 내용을 담고 있다. 목표는 다르고 때로는 그 크기와 종류는 다를 수 있지만 처음하는 것들에 대한 감정은 누구나 비슷할 것이다.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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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 매일 한 권 독서 습관
김은 지음 / 굿위즈덤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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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을 확증편향이라고 부를지 모른다. 기존 가치관이나 신념에 부합하는 정보만 편집적으로 수집하는 시각 말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명확하게 정답으로만 보이는 편향적 정보가 나를 괴롭힌다.

현재의 10대 청소년에게 '스마트폰'은 거의 재앙에 가깝다. 여기에 덧붙여 '독서하지 않는 습관'까지 100년 인생의 행복 도파민 90%를 10대에 끌어 쓰는 기분이다. 현재의 10대는 부모 세대보다 훨씬 '학력'에 자유로울 수 있다. 줄어드는 인구는 점차 입시 경쟁을 줄일지 모른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들은 더 큰 곤경에 처할 것이 분명하다.

공부하지 않아도 되는 '시대'가 아니라 '더 공부해야 하는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지금도 '신규채용' 대신에 '경력직 채용'을 선호하는 시대다. 대입 시험에서 고3들은 '재수생'과 경쟁한다. 다시말해, 현재 10대의 경쟁률이 줄어드는 것이 아니라, 그 윗세대와 경쟁해야 하는 시대가 찾아왔다. 60대에 은퇴를 할 사람들은 70대까지 일하고 공부를 못해도 먹고 살게 해 주었던 직업들은 점차 기계가 대체할 것이다.

인공지능이 고학력자의 일자리를 위협하는 대신에, 고학력자들의 일자리를 더욱 쉽게 만들어 줄 것이며 '답'보다 '질문'이 귀한 시대가 열릴 것이다. 이 시대에 과거보다 더 생각하지 않는 이들은 어떻게 될 것인가.

시중에 돈은 그대로 있는데 인구가 줄어든다. 베이비붐 세대는 곧 은퇴를 앞두고 자녀 세대에게 자산을 넘긴다. 이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인플레이션'이 생겨 날 것이다. '은행'이 '금리'를 낮출 수 없는 '고금리 사회'가 한동안 이어질 것이다. '고금리 사회'는 자산가와 고소득자에게 유리하다.

금리가 높으면 '저축'은 안전하고 매력적인 투자다. 고소득자에게 훨씬 유리하다. 고소득자는 많은 저축을 하고 높은 이자를 안전하게 얻을 수 있다. 저소득자는 필수 지출 외에는 저축할 여유가 없으며 높아지는 물가와 비교적 느리게 인상되는 '급여'로 빚의 늪에 빠질 여지가 있다.

늪은 금리는 대출 이자율을 상승시킨다. 대출 비용이 증가하면 대출에 의존하던 저소득층에게 부담으로 작용한다. 주택 대출이나 학자금 대출과 같은 필수적인 대출 부담은 빈곤층 경제를 압박한다.

분명 고금리는 경제적 불확실성을 증가한다. 이는 소비를 감소시킨다. 소비에 의존하는 산업은 고용 안정성에 위협을 받는다. 보통 이러한 직업에는 '저소득층'이 있다.

당연하게도 높은 금리는 투자 수익률을 높인다. 특히 자산 가격을 상승시킨다. 주식과 부동산에서의 변동성이 커질 수 있다. 이미 자산을 보유하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꽤 괜찮은 시기다. 인구가 감소해도 '수도권 집중 현상'은 줄어들지 않는다. 줄어든 인구는 지방 산업을 위협한다. 도시 집중현상은 더욱 가속화 될 것이다.

인공지능이 '고소득자'를 위협한다는 말은 거짓이다. '스페이스X'가 화성으로 우주 여행을 시켜줘도 혜택은 소수만 받는다. '자율주행'이 완성 단계에 도달해도 다수에게는 유지비가 저렴한 중고차를 구매한다. '컴퓨터'는 '사무직'을 없애기보다 그들의 '효율성'을 높였다. 효율적인 업무는 생산성을 높였고 그들은 더 많은 부를 빠르게 얻을 수 있었다. 아무리 ChatGPT가 의사 시험에 합격하고 변호사 시험에 합격해도 국가는 아무에게나 '자격증'을 발급하지 않는다.

결국 고소득자들이 더 편하고 쉽게 생산성을 높일 수 있는 시대가 온다. 인구가 줄어들면 경쟁은 더욱 가속화 된다. 현재 초등학생들은 현재 고등학생과 같은 시장에서 경쟁을 해야 하며, 현재 고등학생은 현재 대학생의 시장에서 경쟁해야 한다. 결국 동년배 간의 경쟁이 사라지고 윗세대와의 경쟁에서 살아남는 자들이 살아 남는다. 당연한 결과다. 사회는 '나이'로 '경쟁력'을 따지지 않는다. 50대가 청년이 되는 시대에 문해력 짧은 이들의 설 곳은 틀림없이 줄어든다.

아무리 생각해도 대한민국은 '청소년 스마트폰 금지'를 법률로 정해야 한다. 영국이 삼국무역으로 중국에 '아편'을 팔아 국가를 망하게 했던 것처럼, 값싸고 저렴한 중독이 나라를 좀 먹게 한다. 다만 따지고 보면 이는 누군가에게 절호의 찬스다. 모두가 중독되어 있는 사회에 누군가는 단순히 시작하지만 않으면 되는 게임이다. '스마트폰'이 없던 시대도 살았다. 그것이 없으면 죽을 것 같지만 인류 40만 년의 역사에서 스마트폰의 등장은 고작 20년이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뭘 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스마트폰을 내려 놓고 책이나 읽으면 된다. 가만히 있어도 사회는 저절로 뒤로 가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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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어 왕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27
윌리엄 셰익스피어 지음, 최종철 옮김 / 민음사 / 200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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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ou shouldst not have been old till thou hadst been wise."

(당신은 현명해지기 전에, 늙지 말았어야 했다.)

시간이 지나야 알 수 있는 것도 있지만, 반대로 시간이 지나도 알지 못하는 것도 있다.

"당신은 현명해지기 전에 늙지 말았어야 했다."

'광대'가 말한다.

'리어왕'은 권력을 가졌으나 노쇠했고, 나이가 많으나 어리석었다. 늙은이들은 많은 지혜를 가져야 한다. 사회는 늙은이들에게 더 많은 사회적 지위를 부여하고 대우한다. 고로 그들이 가지는 사회적 지위는 반드시 그 자리에 맞는 능력을 갖춰야 한다. 고로 현명해지기 전에는 늙지 말아야 하고 지혜로워 지기 전에는 권력을 갖지 말아야 한다.

무능이 어떻게 비극을 만들어 내는지 '리어왕'은 여실히 보여준다. '권력'은 사용자가 누군지에 따라 극명히 달라진다. 그러나 이 권력자는 '노쇠'했고 나이 들었으며 '우매'했다. 극 초반에 우매한 왕의 무능은 비현실적일 정도다. 모든 것이 큰 그림을 위한 계책이라 믿고 싶을 정도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

자리에 서 있을 때, 누구는 숨은 역량을 보이기도 한다. 반대로 애초에 자리가 주어져서는 안되는 인물도 있다. 모든 인물이 자리에 맞는 지혜로움을 갖는 것은 아니며, 자리가 주어졌어도 여전히 우매한 이들도 존재한다.

이들의 결정은 자신 뿐만 아니라 가족, 심지어 국가의 모든 이들을 파괴하고도 남는다. 셰익스피어는 권력과 책임에 대한 본질적인 질문을 '리어왕'을 통해 던진다.

리어왕은 '자신의 딸들'이 자신을 얼마나 자신을 사랑하는지 선언하라 요구한다. 그 철없는 시기와 질투가 표면적 충성과 사랑을 유도한다. 국왕은 '충신'에 귀 닫고 힘을 약화한다. 이 오류는 개인의 실수로 그치지 않고 확장된 파괴적 결말을 낳는다.

고립은 시야를 좁게 만든다. 글로스터 백작은 극에서 물리적 눈을 잃는다. '보는 것'은 물리적 시각 정보를 인지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는다. '본다'라는 표현은 그보다 더 확장성 있게 사용된다. 눈이 사라진 백작은 아이러니하게도 더 깊은 통찰을 얻는다. 물리적 시력이 상실돼도 정신적인 시야가 확장되는 것이다. 명확해 보이는 것이 가짜인 경우는 지금 현재의 우리에게도 너무 흔한 일이다. '무엇'을 보느냐가 아니라, 무엇으로 보느냐의 차이다.

당연히 '보는 것'은 '눈'이다. 그러나 더 본질적으로 갔을 때, 그 정보를 받아 들이는 '사람'이다. 어떤 시각으로 사물을 보느냐에 따라 우리는 너무나 다른 세상을 산다.

'물이 반밖에 없는 사람'과 '물이 반이나 있는 사람'이 공존하는 세상에서 우리에게 객관적인 세계는 의미를 상실한다. 모든 사물이 해석에 의해 달라지기에 우리는 '객관적 진실'보다 어떻게 세상을 해석해야 하는지, 그 주관적 진실에 눈을 떠야한다. 아무리 물리적 시력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보지 못하는 이들이 있다. 물론 거기에 내가 포함되어 있지 않다고 할 수는 없다.

가만히 보면 우리가 사는 세상은 '오프라인'보다 '온라인'으로 더 확장된다. 우리에게 어떤 것들이 노출되느냐를 결정하는 것은 과거에는 '장소'였겠으나, 지금은 그렇지 않다. '시공간을 초월한 정보'가 무수하게 편파적으로 보여진다. 요즘은 '알고리즘'이 편향된 시각을 강화시키는 시대다. '필터버블'에 의해 편향을 확신하는 확증편향을 갖는다.

리어왕의 '눈'이 그렇지 않은가. 전지적인 시점에서 '리어왕'의 선택은 얼마나 어리석은가. 그러나 알고리즘이 점차 확증편향을 강화하는 시대에서 우리 개인은 과연 '리어왕'과 얼마나 다른 시각을 갖고 있는가.

유튜브 알고리즘을 보고 누군가는 '정치적', 누군가는 이념적, 누군가는 세상 전체에 대한 확증 편형을 갖는다. 그들에게 세상은 오롯이 자신의 신념을 강화시켜 주는 정보만 주어진다.

과거에 '간신'에게 속는 어리석은 왕을 욕하면서 스스로는 온라인이 만들어내는 확증편향의 버블 속에 갇혀 있는 것은 아닌가. 사람은 간혹 자신의 믿고 있는 신념에 힘을 실어주는 것에 감사함을 느낀다. 때로 반대편의 이야기에 기분이 상하기도 한다. 그런 의미로 우리 정치나 문화는 반대의 이야기를 완전히 배재한다. 그렇지 않은가. 알고리즘이 취향을 저격하여 골라주는 덕분에 남성은 남성들의 알고리즘 속으로, 여성은 여성의 알고리즘 속으로, 10대는 10대의 필터 속으로, 30대는 30대의 알고리즘 속으로 속아 들어간다.

각자 자신의 필터 속에 집을 짓고 그 필터가 전체를 대변하는 일부라고 믿는다. 과연 우리는 과거의 우둔한 왕을 욕할 자격이 있으며, 우물 안 개구리를 동정할 수 있는가.

어떤 선택을 하든, 우리의 선택은 세상을 바라보는 '비판적 시각'을 먼저 갖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가 나이를 더 들기 전에, 더 많은 힘이나 권력을 갖기 전에 조금이라도 낮고 젊을 때 더 많이 공부하고 지혜로워져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짝에도 쓸모없이 분란만 만들어내는 노인네가 되어 갈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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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시 취침의 기적 - 엄마와 아이의 습관을 바꾼 탁월한 선택
김연수 지음 / 끌리는책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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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전사를 전역하신 '아버지'는 만 스물이 됐을 때, 나에게 군입대를 권하셨다. 덕분에 자대에 배치된 이후에도 한동안 나이 많은 후임이 계속 들어오곤 했다. 그때 아버지가 하셨던 말씀이 있다.

"뭣 모를 때, 후딱 해야 하는 일들이 있다."

아버지는 말씀하셨다. 알고는 못하는 일들이 있단다. 꽤 혹독한 군생활을 했던 아버지의 진심어린 조언이었다. 가끔 그런 말이 떠오를 때가 있다. '

뭣 모를 때 후딱'

세상에는 엄청난 용기를 요하는 일들이 있다. 간혹 콘센트 구멍에 젓가락을 꽂는다던지, 뜨거운 냄비를 양손으로 덜썩 잡는 일도 그렇다. 그런 일에는 엄청난 용기가 필요하다. 다만 세살 배기 아이들은 그런 일들을 너무 쉽게 해낸다. 그것을 할 수 있는 이유는 용감해서가 아니다. 뭣모르기 때문이다. 가끔 '무지'가 많이 아는 것 보다 필요할 때가 있다. 사람의 '의지력'에는 '총량'이 있다. 인간은 '고민'하거나, '의지'를 내보이는 일에 '정신적 에너지'를 사용한다. 고로 '의지'와 '고민' 따위의 정신력은 '소모품'이다.

고등학교에 재학 할 때, '친구'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친구는 어머니께 자취방에 있는 TV를 치워 달라고 했다. 그때 '친구'의 어머니는 '네가 보지 않으면 되는 걸, 왜 치워야 하냐'고 말씀하셨다. 그날 저녁 '친구'는 신발장 서랍에 있던 장도리를 꺼내어 자취방 TV의 브라운관을 부숴 버렸다. 굳이 불필요한 유혹을 만들어 '에너지'를 소비하는 것에 '의지력'을 시험할 필요가 없다. 그저 없거나 모른다면, 의지력은 다른 방향에 사용될 수 있다.

우리집 아이들 취침시각은 8시다. 그마저 늦다고 7시 30분에 자기를 종용한다. 아이에게 일찍 잠에 들기를 권하는 이유는 '기상시간' 때문이다. 조금씩 앞으로 당기던 기상시간은 이제 4시 50분으로 당겨졌다. 4시 50분이면 로봇청소기가 최대 출력으로 돌아간다. 침실 불은 가장 강한 빛으로 방을 밝힌다. 또한 집 전체 창문이 열려 강한 바람이 집안 전체를 감돌아 나간다. 그때, 거실 안락 의자에 앉아서 책을 보고 있으면 아이는 어느덧 자기가 좋아하는 책을 가지고 나와 무릎에 앉는다.

SBS에서 방송한 '공간의 힘'이라는 '다큐멘터리'에 굉장히 흥미로운 내용이 있었다. 일본 최고 명문대인 도쿄대생의 83%가 '거실공부'를 한다. 아이가 반드시 명문대를 졸업할 필요는 없지만 명문대생은 '학생의 본분'에 적합한 학창시절을 보냈을 가능성이 높다.

'침실'은 잠을 자는 공간, '부엌'은 요리와 식사를 하는 공간, 거실은 말그대로 'Living Room'이다. 놀랍게도 동양에서도 거실은 한자로 살 거(居), 집 실(室)을 사용한다. 동서양 할 것 없이, 거실은 '주 거주 공간'이다. 이 공간에서는 '많은 대화'가 이뤄진다. 다만 요즘 대한민국의 거실은 '방'에 가기 위해 '거쳐 가는 공간'으로만 사용된다. 거실에는 다양한 책들이 놓여 있다. 독서는 '호기심'으로 시작하여 '관심'으로 이어지고, '연결'로 넘어간다. 부모의 관심사나 자녀의 관심사가 한데 섞여 진열되어 있을 수 있다. '서재'를 보면 '그 사람'에 대해 알 수 있다. 아이는 부모를 알 수 있고, 부모는 아이를 알 수 있다. 설거지하며 공부하는 아이와 대화를 나눌 수 있고 공부하며 설거지하는 엄마와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 대부분의 '교육전문가'는 '독서'보다 '대화'가 중요하다는 이야기를 많이 한다. 교육 전문가라면 그 무엇보다 '독서'가 우선이라고 말할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우리아 아이는 이제 막 시간을 배우고 있다. 늦은 감이 있다. 여덟살이 아직 시계를 볼 줄 모른다고 하면 누군가 웃을지도 모른다. 한 번은 '시계읽기'와 '국어', '바슬즐'이라는 과목의 문제집을 선물 받은 적 있다. 절반 정도 풀어보다가 바로 쓰레기통에 집어 넣었다. 시계나 바슬즐은 생활에서 충분히 얻을 수 있다. 국어는 독서를 통해 대체 할 수 있다. '문제집'으로 아이의 학업을 평가 할 필요가 전혀 없다. 이렇게 아무것도 모르니, 아이는 새벽 4시 50분에 깨워도 '그런가 보다' 한다. 만약 이미 중학교를 다니고 있는 아이라면 4시 50분에 깨운다는 것 자체만으로 갈등이 생길 수 있다. 이미 '사회 통념'이라는 '시간'을 학습했기 때문이다. 고로 초등 저학년 때에만 가능한 일이 있다.

아는 지인은 초등하교 저학년 때부터 이미 다양한 학원과 과외를 받는다고 했다. 실제 지인의 아이는 꽤 똑똑했다. 그럼에도 아이에게 학원과 과외를 해주지 않았다. 이유는 단순하다. 학원을 다니는 순간, 아이의 손에는 '스마트폰'이 들려 있을 것이 분명하다. '하교'까지 스마트폰을 반납하는 학교를 마치면 아이들은 마음껏 스마트폰을 이용한다. 학원으로 가는 동안, 학원에서, 학원을 마치고 들어가는 짧지만 긴 짜투리 시간을 '스마트폰'으로 알차게 사용할 것이다. 그럴 것이면 차라리 그 세상을 모르는 편이 낫다. 또한 8시에 취침하고 나면 다른 아이들이 활동하는 시간에 잠에 들고 다시 아이들이 한참 자는 시간에 깨어난다. 개인적으로 동년배끼리 교류하며 배울 수 있는 것은 '학교'에서 충분하다고 본다. 학교 외에서 일어나는 '교류'는 대체로 '긍정적이지 못한 경우'가 훨씬 많다.

아이들은 '가정생활'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가정에서 시간을 보내지 못하기 때문에, 최근들어 '가정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아이들이 대다수다. 과거 뉴스에서 '요즘 아이'에 관한 기사를 본 적 있다. 요즘 아이들이 '가정교육'에 관한 문제다. 물론 '소크라테스' 시대에도 어린 아이들을 보며 '요즘 사람들은...'이라는 기록이 있다고 하니, 어쩌면 내가 꼰대가 된 나이일지 모른다. 그러나 확실히 '요즘 시대'에 발빠르게 맞추지 않아도 되는 부분도 있다. 기본적인 예의와 규칙을 지키는 일, 자기 절제는 충분히 가정에서 배워야 한다.

물론 그러기 위해 부모인 나의 취침시간이 줄어든다. 그러나 충분히 그럴만한 가치가 있다고 본다. 아이에게 수백 만원의 옷을 입히고 과외를 붙이는 것 보다 부모가 몇 시간 잠을 줄이는 편이 훨씬 더 효율적인 투자라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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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곳에서
에르난 디아스 지음, 강동혁 옮김 / 문학동네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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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웨덴 농장의 감자에 떨어진 빗방울도 한 때는 호랑이 방광에 들어 있었다."

'에르난 디아스'의 소설 '먼 곳에서'에 '존재'에 대해 생각해 볼만한 가치 있는 글을 발견했다. 하나의 생명은 다른 모든 생명의 속성을 예측할 수 있다. 모든 것은 돌고 도는 순환계의 일부다.

수소 원자가 여럿의 모양으로 뭉쳐져 다양한 분자가 되는 과정에서 마지막 '철'의 형태로 폭발하면 그것은 우주 사방으로 퍼져나가 다른 무언가의 일부가 된다. 오늘 마신 물은 내일의 소변이 되고 그것은 강물이 되고, 바다가 되고, 다시 구름이 되어 누군가의 신체가 된다. 이렇게 돌고 도는 순환계에서 어떤 것은 '고정'되어 있고, '형태'를 짓고 있다고 착각한다. 그 강력한 '금강'과 같은 인식을 깨부수는 철학을 인도에서 '금강경'에 담았다. 이 고대 동양 철학을 닮은 '존재'에 대한 인식이 '에르난 디아스'의 소설에 한움큼 담겨 있다.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다는 인식을 하지 못하고 사는 유한한 인지력 탓에 우리는 어떤 것을 '낯설다'하고 표현하고, 어떤 것을 '익숙다'하고 표현하지만, 그것은 인식의 표면에 불과할 뿐 모든 것은 이미 그대로 '하나'로 존재한다.

신은 인간을 창조했다. 다만 인간을 거슬러 올라가면 불과 500만 년으로도 인간적 특징을 잃어 버리기 시작한다. 그 지리한 변화와 변화 과정에서 약간씩 사라지는 인간다움을 볼 때, 지금은 인류 역사상 가장 인간다운 인간들이 살고 있는 세상이며 미래 인간에 비해, 가장 인간답지 못한 인간이 사는 세상일지 모른다. 우리 인간도 45억 년만 뒤로 거슬러 올라가면 기껏해봐야 '먼지' 같은 분자였을 뿐, 그 어떤 인간도 존재한 적 없다. 고로 어떤 먼지 분자들이 어떻게 결합하였는지에 따라, '너'가 되고 '나'가 된다.

미국 서부 개척시대에 이민자들은 그렇게 '존재 아닌 존재'로 '존재'를 확인해가며 '존재'로 거듭난다. 하나씩 자신의 정체성을 만들어가고 그들이 인식하는 방식으로 세계를 창조해 나간다. 과연 그렇지 않은가. '미국'이라는 나라도 최초에는 '존재'하지 않던 '무존재'일 뿐이며 어찌 이방인과 원주민이 다를 수 있고 낯설음과 낯익음이 다를 수 있나.

기껏해봐야 30개도 되지 않는 문자 기호의 나열로 '햄릿'과 '해리포터'가 만들어지고 그 작은 숫자의 배열을 한줄 한줄 쌓는 것만으로 하나씩 사라진 시간과 세계가 창조된다.

'에르난 디아스'의 장편소설 '먼 곳에서'는 차근 차근 하나씩 쌓아가는 서사들로 황량한 서부개척시대의 미국을 묘사해 나간다. 그 시대와 공간을 한땀 한땀 정성스럽게 만들어 내는 과정에서 독자는 점차 그 공간과 시간을 함께 살아가는 듯한 착각에 빠진다. 그의 소설은 마치 존재를 만들어내는 무존재와 같다. 신체 없는 두뇌는 시간을 따라 하나씩 신경절을 만들어내고 다시 그것이 구조물을 짜게 한다. 두뇌에서 시작한 세포막은 신경절로, 다시 뼈로 이어진다. 척추는 두개골로 시작했고 척추라는 중심 기둥은 다시 부속물이 뻗어나와 팔과 다리를 만들어내고 손가락과 발가락을 뻗어 낸다. 그런 의미에서 '신체'란 '정신'이 만들어낸 구조물로, 생각과 의지가 실제 우리를 만들어낸다.

마치 어두캄캄한 지도를 하나씩 밝혀 나가는 듯한 방식으로 소설은 공간과 시간을 열어 젖힌다. '에르난 디아즈'의 소설 '먼 곳에서'는 이런 사유를 계속해서 확장시킨다. 주인공 '호칸'은 스웨덴에서 출발해 뉴욕으로 가는 과정에서 실수로 '캘리포니아'를 간다. 이 과정에서 자신의 형을 찾아 미국 대륙을 횡단한다. 이때 만나게 되는 다양한 인물과 도전, 그것은 단순히 '서사'에 그치지 않는다. 여기서 만나는 다양한 '철학'은 소설을 꽤 깊이 있게 만든다. 이민자의 고립과 외로움, 생존에 대한 이야기, 자연과 인간의 관계, 존재와 무존재 등 그 시대와 지금 이 시대에도 동시에 관통하나는 본질적인 이야기를 하나씩 얻게 한다. 그의 이야기는 단순한 지리적 이동이 아니다. 실체와 정체성, 연결과 고립에 관한 사색으로 가득찬 여행이다. 그저 삶을 이어가기 위한 '생존'이 아니라, '자아'를 찾는 여정이다. 미국이라는 낯선 땅에서 '나'라는 존재를 어떻게 만들어 갈 것인지, 그가 맞닥뜨리는 다양한 인물과의 관계에서 자신의 위치는 어떻게 형성할 것인지 끊임없는 고민을 한다. 호칸의 철학적 고민과 사색은 곧 독자에게 이어져 같은 사색과 고민을 하도록 한다. 소설은 깊이 있는 서술과 서정적인 묘사을 한다. 단순히 과거를 보는 것이 아니라 현재와 미래, 인간의 존재에 대한 탐구를 하게 한다. 즉 '호칸'이라는 인물의 '과거'를 통해 우리는 '나'라는 인물의 '현재'와 '미래', '과거'를 모두 통찰 할 수 있는 교훈을 던진다.

"스웨덴 농장의 감자에 떨어진 빗방울도 한 때는 호랑이 방광에 들어 있었다."

동양의 금강경처럼 그것이 그것이라는 강력한 인식을 깨어 버릴 수 있도록, '그것'은 곧 '나'이며, '나'는 곧 '우리'이며, '우리'는 곳 '우주 전체' 임을 알 수 있다. 소설의 주인공은 존재와 무존재 중 '무존재'로 규정할 수 있는 '생각' '혹은' '파장 덩어리' 이겠지만, 이또한 어떤 형태로 변형하여 이곳으로 이식된 '전체'의 일부이다. 이것은 다시 '나'가 되고, 다시 '나'를 빠져나와, '누군가'가 될 지 모른다.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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