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만 해도 수반을 잃은 정부를 누가 지배하고 있는지 정확히 아는사람이 없었다. 하지만 바리케이드, RTLM 아나운서의 자신에 찬 목소리길거리에서 벌어지는 살인 보도 등으로 미루어볼 때 후투 파워가 쿠데타를 주도하고 있는 것이 거의 확실했다. 실제로 그랬다. 하비아리마나를암살한 사람들의 신원이 밝혀진 바는 없지만 모두 그의 측근 가운데 극렬분자들이 저지른 소행이라고 의심하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특히 하비아리마나 여사와 절친한 친구이자 아카주 창립 회원인 테오네스트 바가소라 대령이 배후 인물로 꼽혔다. 그는 이미 1993년 1월에 세상의 종말을준비하고 있다고 말한 바 있었다. 하지만 하비아리마나를 누가 살해했든간에 제노사이드를 기획한 자들은 그의 죽음을 즉시 이용할 만반의 채비를 하고 있었다. 르완다의 후투 파워 상층부가 그날 밤 제노사이드 계획을 실행에 옮기는 동안, 역시 대통령을 잃은 부룬디에서는 군대와 유엔 방송이 침착하라는 방송을 내보냈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 P142
그러고 나서 투치족에 대한 전면적인 숙청이 시작되었다. 유엔군은살인자들을 저지하지 못했다. 외국 정부들은 서둘러 대사관 문을 걸어 잠그고 자국민들을 철수시켰다. 하비아리마나 여사 같은 특별한 몇몇 경우를 제외하고는 구조를 호소하는 르완다인들은 모두 버림받았다. 그녀는프랑스군 수송기 편으로 신속히 파리로 이송되었다. 평화 협정 이행이 교착 상태에 빠져 있는 동안 언제라도 전투를 재개할 준비를 하고 있던 르완다 애국전선은 하비아리마나가 사망한 지 24시간이 채 지나지 않아 키갈리 주둔지에서 병력을 이동시켜 국회 의사당 주변의 고지를 장악한 데이어 북동쪽의 ‘비군사 지대‘에서 대규모 공격을 개시했다. 정부군은 거세게 반격하며 국민들이 계속 살인 작업에 몰두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했다. RILM 아나운서는 고소하다는 듯이 "바퀴벌레들아, 이제 곧 너희도살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게다. 너희가 우리를 죽이도록 놔두지않겠다. 우리가 너희를 죽일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런 식의 메시지와 사회 각계각층 지도자들의 격려에 힘입어 투치족 학살과 반정부 성향의 후투족에 대한 암살은 르완다 곳곳으로 퍼져나갔다. 후투족 젊은이들과 노인들도 민병대를 본받아 살인 임무에 가담했다. 이웃이 이웃을 집에서 칼로 찔렀고, 동료가 동료를 향해 일터에서 칼을 휘둘렀다. 의사들은 환자들을 살해하고, 학교 선생들은 학생들을 살해했다. 겨우 며칠 만에 대부분의 마을에서 투치족 거의 모두가 목숨을 잃었고, 키갈리에서는 죄수들이 도로에 즐비한 시체를 수거하는 작업에 투입되었다. 르완다 전역에서 살인에 이어 집단 강간과 약탈 행위가 이루어졌다. 술에 취한 민병대원들이 약국을 약탈해 손에 넣은 각종 향정신성약품을 복용하고 버스로 이곳저곳을 누비며 사람들을 마구 죽였다. 라디오 아나운서는 청취자들에게 여성들과 아이들에게도 인정을 베풀지 말라고 독려했다. 살인자들을 더욱 고무하는 방법의 일환으로 라디오, 소파, 염소 등과 같은 투치족의 재산을 미리 분배한 것은 물론이고 심지어는 여자를 강간할 수 있는 기회까지 보장했다. 키갈리의 한 시의회 여성 의원은 투치족의 머리를 잘라올 경우 50르완다프랑(당시의 화폐 가치로 약 30센트에 해당함)을 나누어 주었다는 얘기도 있다. 이런 관행은 ‘양배추 팔기‘로 알려졌다. - P144
밀 콜린스 호텔에서 맥주는 많은 사람의 생명을 구했다. 임시 지배인 폴 루세사바기나는 전쟁 중인 도시에서는 술값이 오르기 마련이라는점에 착안해 중간 상인 여러 명과 연락하며 호텔 술 창고를 늘 가득 채워놓았다. 그는 술을 구입하면서 손님들이 굶어 죽지 않도록 고구마와 쌀도 충분히 준비했다. 그런 사업을 하려면 군대 지휘관들의 비위를 맞춰야 하는데 그는 뇌물을 최대한 활용했다. 그는 "술을 이용해 사람들을 구워삶았지요"라고 말하며 웃음을 터뜨렸다. 그가 구워삶은 사람들은 후투파워 지도자들이었다. 그가 그들을 구워삶았다는 말은 그들에게 술을 상남해 호텔에 피신한 사람들을 죽이지 못하게 했다는 뜻이다. "그들에게술은 물론이고 때로는 돈도 주었지요." 그가 매수한 르완다 정부군 사령관 오귀스탱 비지뭉구 소장도 수시로 호텔을 드나들며 잇속을 챙겼다. "다들 찾아왔지요. 나한테 그들이 원하는 게 있었으니까요. 그러거나 말거나 내게 중요한 문제는 아무도 내 호텔에서 끌려 나가지 않게 하는 것이었지요." 폴은 온화한 성품과 건장한 체격에 부르주아 호텔 지배인치고 다소 평범해 보이는 외모를 지니고 있다. 그 역시 스스로를 보통 사람이라고 생각할 뿐 자신의 주변에서 소용돌이치는 광기에 맞서 싸웠으면서도 그런 행동을 비범하다고 여기지는 않는 듯했다. 그의 말을 직접 들어보자. "사람들은 모두 바보가 되고 말았지요. 왜 그런지 그 이유는 모르겠습니다. 나는 사람들에게 지금 선생에게 말하듯이 대놓고 ‘나는 당신이 하는일에 동의하지 않습니다‘라고 말하곤 했지요. 나는 아니라고 말해야 할때는 그렇게 말하는 사람입니다. 당시에도 마찬가지였어요. 나는 그저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했을 뿐입니다. 살인자들에게 절대 동의할 수없었으니까요. 나는 그들을 지지하지 않았고, 그래서 그런 내 생각을 그들에게 솔직히 말했지요." 물론 많은 르완다인이 제노사이드에 동의하지않았다. 하지만 많은 사람이 내키지 않는데도 결국 살인에 동참했다. 수없이 많은 사람이 그저 자기 한 목숨 부지하는 데 급급했다. 폴은 할 수만있다면 모든 사람을 구하고자 애썼다. 그들을 죽이고자 하는 사람들과 협상해야 한다면 그는 기꺼이 그 일을 감수했다. - P159
키베호의 산꼭대기 성소에 동정녀 마리아가 마지막으로 모습을 드러낸 때는 1994년 5월 15일이었다. 당시 교구 내에 얼마 남지 않은 투치족생존자들은 여전히 살인자들의 추격을 받고 있었다. 이미 몇 달에 걸쳐 수천 명의 투치족이 키베호에서 살해되었고 가장 규모가 큰 학살이 그곳성당에서 일어났다. 살인자들이 손으로 죽이는 일에 지쳐 성당에 불을 질러 산 자들과 죽은 자들을 제물로 삼을 때까지 살인 행위는 며칠 넘게 이어졌다. 화재가 일어나기 전 며칠 동안 피에르 은고가 신부는 피란민들을보호하기 위해 애쓰다 결국 목숨까지 잃었지만 생존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그 지역의 또 다른 신부 타데 루싱기잔데크웨는 여러 차례 인테라함웨단원들을 이끌고 살인을 주도했다. 타데 신부는 민병대 대원들처럼 바나나 잎사귀로 만든 옷을 걸치고 소총을 들고 다니면서 군중을 향해 총을쏘아댔다고 한다. 가톨릭교회 지도층이 그런 식으로 분열된 상황에서 5월 15일의 성모발현은 제노사이드라는 문제에 신학 차원의 해결책을 제시했다. 성모 마리아 발현을 목격한 발랑틴 은이라무키자가 마리아에게서 직접 들었다는 말의 정확한 내용은 지금은 유실되고 없다. 하지만 그 메시지는 당시 르완다 라디오 방송을 통해 보도되었다. 많은 르완다 사제들과 밀 콜린스호텔에서 방송을 청취한 토마 카밀린디 같은 기자들은 방송에서 동정녀마리아가 하비아리마나 대통령이 지금 천국에서 자기와 함께 살고 있다고 말했다는 골자의 보도를 내보냈다고 증언했다. 그녀의 말은 하느님이 제노사이드를 지지한다는 의미로 널리 해석되었다. - P172
르완다 애국전선 지도부는 시내의 한 운동장에 정부군 포로 수천 명을 가두어놓고 후투 파워가 쉽게 이해할 수 있는협상 조건, 즉 ‘너희가 그들을 죽이면 우리도 이들을 죽이겠다‘는 조건을제시했다. 전선을 사이에 두고 한 차례의 교섭이 이루어졌다. UNAMIR가 교섭을 중재했고 수송 수단을 제공했다. 바로 그 무렵 유엔이 피란민들을 구했다는 소식이 널리 보도되었다. 하지만 진실은 달랐다. 피란민들이 죽음을 모면할 수 있었던 이유는 르완다 애국전선이 정부군 포로들을죽이겠다고 위협했기 때문이다. - P181
나는 조사에 착수했다. 그 결과 제노사이드가 자행될 때까지만 해도르완다에 개들이 많았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사람들은 당시에 개가 많았다‘ 또는 ‘흔했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르완다 애국전선이 북동쪽에서르완다로 진격해 들어오면서 개들을 모조리 쏘아 죽였다. 르완다 애국전선은 어째서 개의 씨를 말렸을까? 물어보는 사람마다한결같이 개가 시체들을 먹어치웠기 때문이라고 대답했다. 누군가가 내게 "영화에서는 볼 수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나는 르완다에서 직접 목격한 개들보다 더 많은 개들을 이후에 비디오 화면을 통해 보았다. 개들은르완다 특유의 붉은 토양 한가운데 웅크리고 앉아 여기저기 널린 시체 더미 위에서 배를 불리고 있었다. 의료 봉사 단체에서 활동하던 한 영국 여성이 르완다 애국전선이 카브가이 주교관구에 있는 대성당에서 시체 몇 구를 뜯어먹고 있는 개들을총으로 쏘는 모습을 보고 크게 분개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제노사이드당시 그 성당은 르완다 중부 지역의 집단 처형장이었다. 그녀는 군인들에게 개들에게 총을 쏘면 안 돼요"라고 말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녀는 반만 알았다. 심지어 푸른 헬멧의 UNAMIR도 1994년 늦여름부터 눈에 보이는 족족 개들을 쏘아 죽였기 때문이다. 그 전까지 르완다인들은 유엔군이 과연 총 쏘는 법을 알기는 하는지 궁금하게 여기고 있었다. 그렇게 성능이 우수한 무기를 무고한 시민들의 살상을 막는 데 사용하는 모습을 단한 번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몇 달 후 평화유지군의 사격 솜씨는 매우 뛰어난 것으로 드러났다. 제노사이드는 사실상 국제 사회의 용인 아래 이루어졌다. 그리고 들은 바에 따르면 유엔은 시체를 먹는 개를 공중위생 문제로만 간주했다. - P185
푸른 헬멧을 쓴 벨기에 군인 열 명이 살해된 지 일주일 뒤인 1994년 4월 14일, 벨기에는 UNAMIR에서 발을 뺐다. 후투 파워가 의도한 대로였다. 벨기에 군인들은 임무를 제대로 완수하지 못하고 비겁하게 꽁무니를빼는 것에 불만을 품고 유엔 베레모를 갈기갈기 찢어 키갈리 공항 활주로에 집어던졌다. 그로부터 일주일 뒤인 1994년 4월 21일, UNAMIR 사령관 달레르 소장은 정예 부대 5,000명과 후투 파워를 진압할 수 있는 재량권만 있다면 제노사이드를 신속하게 저지할 수 있다고 말했다. 적어도 내가 알고 있는 군사 분석가 가운데 그의 판단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여태까지 아무도 없다. 거의 모두가 그의 판단이 옳았다고 생각한다. 일단 RTLM 라디오 송신기만 제거하면 작전은 순조롭게 끝났을 터였다. 하지만 같은 날 유엔 안보리는 UNAMIR를 90퍼센트나 축소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켜 270명의 군인만 남겨두고 전원 철수할 것을 지시했을 뿐 아니라 남아있는 군인들에게도 샌드백 뒤에 웅크리고 앉아 가만히 사태를 지켜보는 일 외에는 다른 임무를 허락하지 않았다. 르완다 주둔 유엔군의 철수는 후투 파워가 그때까지 거둔 가장 큰 외교상의 승리였다. 이는 거의 미국 단독의 공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당시 백악관은 소말리아에서의 패배가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게 남아있는 와중에 대통령령 제25호‘로 불리는 문건의 초안 작업을 막 끝낸 상태였다. 이 문건에는 미국이 유엔의 평화유지 활동에 참여하지 않아도 되는 구실이 조목조목 열거되어 있었다. 달레르 장군의 병력 보충과 작전재가 요청이 미군의 파병으로까지 이어지지는 않으리라는 점이나 작전임무가 평화유지가 아니라 제노사이드를 저지하는 데 있다는 점은 그리중요하지 않았다. 대통령령 제25호에는 워싱턴 정책 입안자들이 이른바어법"이라고 부르는 것, 다시 말해 미국이 개입을 원하지 않는 작전 임무에는 다른 나라들도 설득해 참여하지 않게 해야 한다고 촉구하는 내용도 포함되어 있었다. 사실 클린턴 행정부가 유엔 대사로 파견한 매들린올브라이트는 르완다에 허수아비나 다름없는 270명의 군인을 남겨두는것조차 반대했다. 후일 올브라이트는 (나치를 피해 도망친 체코 피란민의 한사람으로서) 유화 정책을 눈곱만큼도 허용하지 않을 뿐 아니라 미국 군대를 해외에 보내 잔혹한 독재자와 범죄 국가를 응징하는 ‘뮌헨의 딸‘이라는 평판에 힘입어 미국 국무장관 자리에까지 올랐다. 르완다 사태와 관련해 그녀의 이름이 거론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 하지만 사망자 숫자가 천명 단위에서 만 명 단위를 넘어 십만 명 단위로 불어나는 동안 그녀는 자신의 책임을 회피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다른사람들도 그렇게 하도록 설득해 결국 정치인으로서의 경력에 돌이킬 수 없는 흠집을 남기고 말았다. - P188
따라서 프랑스가 인도주의 차원의 군대 파견을 미처 언급하기도전에 르완다 애국전선은 이미 르완다 동부를 장악한 상태였다. 그들은 키리 북쪽과 남쪽까지 아우르며 꾸준히 서쪽으로 진격하고 있었다. 르완다애국전선은 자신들이 장악한 지역에서 투치족에 대한 학살 규모가 어느정도였는지를 전 세계에 알렸다. 반면 르완다 정부 지도자들과RTIM은르완다 애국전선이 후투족을 발견하는 족족 죽이고 있다고 주장했고, 프랑스군 대변인은 사태를 ‘상호 간 제노사이드‘로 몰아가면서 르완다 애국전선을 ‘크메르누아르‘라고 불렀다. 하지만 르완다 애국전선은 질서회복에 전념하는, 놀라울 만큼 규율이 엄격하고 일사불란한 반군이라는인상을 국제 언론에 심어주었다. 당시 약 2만 명의 전사들로 구성되어 있던 르완다 애국전선은 병력수가 두 배 이상인 데다가 민병대와 ‘자위‘ 명목으로 동원된 대규모 시민들의 지원까지 등에 업은 정부군을 거세게 밀어붙이고 있었다. 수많은 프랑스인을 비롯해 후투 파워의 안위에 관심이 있는 사람은 누구나 이런 질문을 떠올리지 않았을까 싶다. ‘도대체 무엇이 잘못되었을까? 가장 간단한 대답은 2차 세계대전 말기의 독일군처럼 르완다의 후투 파워 정권도 제노사이드라는 과업을 완수하는 데 주력하느라 정작 전선은 신경 쓰지 못했다는 사실에서 찾을 수 있다. 하지만 그보다 좀 더 미묘한 역학도 작용했다. 후투 파워 극렬분자들은 1990년 르완다 애국전선과 전쟁을 개시한 이후로 후투족이 희생자라는 전도된 논리를 구사하면서 제노사이드의 열기를 부추겼다. 그 결과 후투 파워는 정치적 목적의 무자비한 집단살인이 심심찮게 자행되어온 한 세기를 통틀어 가장 잔혹한 범죄를 저질렀고, 그런 혐의를 벗으려면 계속 희생자 역할을 자임하는 수밖에 없었다. 후투 파워 지도자들은 르완다를 르완다 애국전선에 넘겨준 후 엄청난무리를 이끌고 피란길에 오르는 방법을 통해 신민들에 대한 통제력을 계속 행사하면서, 유엔이 지원하는 난민촌에 잔류 ‘난민‘ 국가를 세워 자신들의 두려움이 현실로 나타난 것처럼 위장할 수 있었다. - P195
카가메는 부하들이 프랑스 군대를 억류하고 있을 당시 달레르 장군을 통해 긴박하게 협상을 진행해야 했던 상황도 기억해냈다. 그의 말을들어보자. "프랑스 군대는 헬리콥터를 투입해 우리 군대와 진지를 폭격하겠다고 위협했습니다. 나는 서로 잘 논의해 문제를 평화롭게 해결할 생각이 있지만 굳이 싸움을 하고 싶다면 기꺼이 응하겠다고 말했습니다." 결국 프랑스 군대는 자기 군인들을 풀어달라고 요청했고 카가메 장군은 그들을 돌려보냈다. 우간다에서 르완다 난민으로 성장한 카가메는 영어를사용했다. 그는 프랑스가 영어를 사용하는 르완다인들이 후투 파워 신봉자라고 부르는 대량 학살범을 지원하는 이유를 이해할 수 없다면서, 르완다가 영어권에 편입될까 봐 두려워하는 프랑스의 태도에 고소를 금치 못했다. "프랑스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이곳에 살기를 원한다면 프랑스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을 죽이는 일을 거들지 말았어야지요." - P199
르완다 애국전선의 전위 부대는 패주하는 정부군으로부터 나라를 완전히 장악하기 위해 폭도 무리를 뒤쫓아 후투 파워의 심장부인 북서쪽으로 진격했다. 7월 12일 국제적십자위원회 의장은 제노사이드로 100만 명이 살상되었다고 발표했다. 7월 13일 반군은 하비아리마나의 옛 본거지인 루헨게리를 장악했고, 그 후 이틀 동안 50만 명에 달하는 후투족이 국경을 넘어 고마로 달아났다. 7월 15일 미국은 르완다의 후투 파워 정부를외교 관계 대상에서 제외하는 한편 르완다의 워싱턴 대사관을 폐쇄했다. 7월 16일 후투 파워 지도자와 각료 대부분이 튀르쿠아즈 지역으로 도망쳤다. 프랑스는 그들을 체포하겠다고 약속했지만 7월 17일 그들은 바가소라 대령의 측근들과 함께 자이로 건너갔다. 이 무렵 자이르로 몰려든르완다 난민은 100만에 육박했다. 같은 시기에 르완다 애국전선은 종족에 상관없이 아루샤 협정의 권력 배분 원칙에 따라 키갈리에 새 정부를수립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7월 18일 르완다 애국전선은 집중 포격 끝에기세니를 손에 넣은 데 이어 자이르와 인접한 북서쪽 국경 지역 장악에나섰다. 7월 19일 후투 파워에 반대했던 야당 지도자들과 르완다 애국전선이 연합해 키갈리에 새 정부를 수립했으며, 뉴욕에서는 쫓겨난 제노사이드정부의 유엔 주재 대사가 유엔 안보리의 결정에 따라 의석을 내놓고물러났다. 그 후 르완다 애국전선은 르완다 애국군으로, 패주한 르완다정부군은 전 르완다 정부군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이로써 르완다 애국전선은 반군 운동을 이끌어 결국 새 정부의 기틀을 마련한 정치 조직을가리키는 이름으로 남게 되었다. 7월 20일 전 르완다 정부군과 인테라함웨는 자이르로 공수되는 난민용 비상 구호 식품과 물자를 약탈하기 시작했다. 같은 날 새로 조성된 고마 난민촌에서 콜레라가 발생했다는 보고가처음으로 나왔다. 그와 더불어 제노사이드는 흘러간 이야기가 되기 시작했다. - P202
이 모든 상황은 특별히 감지하기 어렵지도 은밀하게 진행되지도 않았다. 8월 말에 프랑스 군대가 마침내 튀르쿠아즈 지역에서 철수하자 후투파워 지지자들이 대거 포함된 50만 명의 후투족이 부룬디로 이주하거나 자이르의 부카부를 경유해 키부 호 남쪽 끝자락의 집단 난민촌으로 이주했다. 고마는 여전히 상황이 가장 열악한 난민촌이었지만 유엔이 난민촌을 개설하는 곳마다 전 르완다 정부군과 인테라함웨는 곧바로 모습을드러냈다. 국제 인도주의 법은 거주자들의 본국으로부터 50마일 이내에난민촌을 건설하는 것을 금지한다. 하지만 르완다인들의 난민촌은 모두 규정보다 본국에 더 가까운 곳에 위치했다. 대부분 탄자니아, 부룬디, 자이르와 맞닿은 르완다 국경에서 몇 마일도 채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었다. 르완다 후투족 인구의 거의 1/3이 이들 난민촌에 거주했다. 물론 이는나머지 2/3, 즉 400만 명 이상은 르완다에 머무는 쪽을 선택했다는 뜻이다. 콜레라와 고마의 힘든 현실은 많은 난민들에게 고향을 떠나지 않았더라면 더 나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불러일으켰다. 하지만 고향으로 돌아가겠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종종 르완다 애국전선의 공모자로 몰렸고더러는 난민촌 민병대의 손에 살해당하기도 했다. 무고한 난민들이 모두떠나면 범죄자들만 남게 될 테고, 그럴 경우 후투 파워가 국제 사회의정을 끌어낼 명분이 사라지기 때문이었다. - P207
물론 몇몇 살인자들의 경우에는 물질적인 이익과 거주 공간의 확대가 살인의 동기였다. 하지만 방글라데시를 비롯해 지독하게 가난하면서인구 밀도까지 높은 나라가 지구상에 많은데 그런 나라에서는 어째서 제노사이드가 일어나지 않았을까? 인구과잉으로는 수십만 명의 인구가거의 100만명에 가까운 이웃을 겨우 몇 주 만에 모두 해치우기로 합의한이유를 설명하기 어렵다. 사실 그 무엇으로도 그 이유를 온전히 설명할수는 없다. 물론 식민지 이전 시대의 불평등, 철저한 위계질서에 입각한중앙집권제, 함족 신화, 벨기에의 통치 아래 불거진 종족 양극화, 1959년후투 혁명과 더불어 시작된 살인과 추방, 투치족 피란민들의 복귀를 거부한 하비아리마나의 정책, 다수당 체제의 혼란, 르완다 애국전선의 공격, 전쟁, 후투 파워의 극단주의, 선전·선동, 관행처럼 빈번하게 일어나던 학살, 다량의 무기 수입, 권력 배분과 통합이 가져온 평화가 하비아리마나 과두 체제에 가한 위협, 극심한 가난, 무지, 미신, 압제 속에서 늘 기죽어 지내며 대부분 술에 찌들어 살아가던 소작농들의 두려움. 국제 사회의무관심 등 조금이라도 가능성이 있어 보이는 요인을 모조리 찾아내 하나로 조합해보면 제노사이드가 횡행했던 이유가 확연히 이해되면서 그런사태는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고 결론 내리게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인구열 명에 한 명꼴로 목숨을 잃은 그런 대규모의 학살이 일어날 만한 근거는 찾기 힘들었다. - P221
그 다음 일주일 동안 키베호에서 나오는 도로란 도로는 비에 흠뻑 젖은채 고향으로 향하는 피란민 행렬로 북새통을 이루었다. 도로 여기저기에서 시민들이 떼 지어 몰려나와 집으로 돌아가는 피란민들에게 욕설을퍼붓고 심지어는 주먹질까지 했다. 르완다로서는 모진 시련의 기간이었다. "작년. 그러니까 세상의 그 누구도 제노사이드를 막으려고 노력하않을 때 르완다 애국전선이 르완다를 해방시키려고 진격해 오는 광경을보고 이들이 영웅이로구나, 하는 생각에 곧바로 선두의 군인에게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습니다. 하지만 키베호 사건 이후에는 손을 어디다 내밀어야 할지 모르겠어요." 스위스 적십자 대표 페리 알랑의 말이다. 키베호 난민촌에서 귀환한 사람들 가운데 체포나 폭력을 경험한 사람들의 비율은 다른 난민촌에서 귀환한 사람들에 비해 조금 더 높을 뿐이다. 하지만 키베호 난민촌에 있던 후투 파워 지지자 상당수는 숲으로도망쳐 르완다 국경 너머 유엔 관할 아래 있는 인도주의 난민촌으로 피신했다. 제노사이드 주동자들에게 그보다 안전한 천국은 더 이상 없었다. - P238
게릴라 군대 시절 르완다 애국전선은 정치 교육과 더불어 엄격한 규율로도 명성이 자자했다. 아프리카 대부분의 지역에서 군인의 제복과 총은 일종의 약탈 허가권으로 간주되어왔다. 르완다에서 4년을 싸우는 동안 르완다 애국전선은 간부들에게 결혼은 물론 연애까지 금지했다. 도둑질을 할 경우 채찍으로 처벌받았고, 살인이나 강간 같은 범죄를 저지를경우에는 장교든 사병이든 가리지 않고 처형되었다. 카가메 장군은 이렇게 말했다. "다른 사람에게 그렇게 심한 짓을 하고도 멀쩡하게 지낸다는것은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병사들은 그 점을 존중했고, 그 결과 건전한 정신과 기강이 형성됐지요. 무장한 사람들에게 하고 싶은 일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자유를 주어선 안 됩니다. 무기를 함부로 사용해선 안 됩니다. 무기를 함부로 사용할 기회가 주어진다면 그 사람은 사회에 매우큰 위험이 될 수 있습니다. 분명한 점은 군인의 임무는 사회를 보호하는것이라는 겁니다." 1994년 7월, 전쟁이 끝나자 국제 구호 단체 관계자들까지도 르완다애국전선을 경외의 눈길로 바라보면서 흥분에 들떠 그 대의와 행동의 정당성을 확신한다고 말했다. 물론 르완다 애국전선이 인도주의라는 동기에서 전쟁에 나섰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지구상에서 유일하게 1948년 제노사이드 협약의 조항을 충실하게 이행한 무력이었다는 점은 분명했다. 물론 르완다 애국전선이 제노사이드를 주동한 것으로 알려진 사람들을상대로 보복성 살인을 수행했으며 후투족 시민들에게 잔학 행위를 저질렀다는 데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1994년 국제사면위원회는 4월과 8월사이에 ‘비무장 상태의 시민과 포로로 붙잡힌 적군 수백 명, 어쩌면 수천명‘이 르완다 애국전선 병사들에게 살해당했다고 보고했다. 하지만 제노사이드가 잦아들기 시작한 며칠 동안 구호 단체 관계자들에게 가장 깊은인상을 남긴 것은 따로 있었다. 다름 아니라 고향과 가족이 완전히 사라지고 없는데도 반군들이 전반적으로 보여준 자제심이었다. - P270
상황이 이러하니, 조국을 떠나 난민으로 지내는 투치족들이 더 이상귀향의 꿈을 꾸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부모와 형제자매들, 일가친척들이 모두 살육당했다는 소식을 듣고선, 제명대로 살려면 외국의 안전한 망명지에 그대로 남아 있는 게 상책이라고 판단하지 않겠느냐고. 그 사람들이 미치지 않으려면 르완다를 다시 ‘고향이라고 부를 수 있는 날이 오리라는 희망을 영원히 접는 수밖에 없지 않겠느냐고. 하지만 해외 난민들은 피가 채 마르기도 전에 르완다로 꾸역꾸역 돌아오기 시작했다. 수만 명이 르완다 애국전선의 바로 뒤를 따라 돌아왔고, 곧이어 수십만 명이 그 뒤를 이었다. 투치족 귀환자들과 도망치는 후투족 군중이 국경에서 서로 마주쳤다. 아프리카 전역에서뿐만 아니라 저 멀리 취리히와 브뤼셀, 밀라노, 토론토, 로스앤젤레스, 라파스에서도 르완다로 돌아오는 사람들이 줄을 이었다. 르완다 애국전선이 키갈리를 해방하고 나서 9개월 뒤, 망명해 있던투치족 75만 명 이상이 (100만 마리에 가까운 소 떼와 함께) 르완다로 돌아왔다. 이는 사망자를 거의 대체하는 숫자였다. 보나방튀르는 키갈리로 돌아왔을 때 낯익은 얼굴은 거의 보지 못했다면서 행방불명된 사람들뿐만아니라 처음 보는 사람들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다. 르완다인들이 내게 르완다에 얼마나 있었느냐고 물을 때면 나도 그들에게 똑같은 질문을 던졌다. 그 나라에서 몇 달 지내고 나자 내가 만나는 르완다인 가운데 나보다 더 오래 그 나라에서 지낸 사람을 찾기가 어려웠다. 사람들에게 돌아온이유를 물어보면 그때마다 주로 누가 살았는지 보려고, 자신들이 도울 수있는 일이 무언지 알아보려고 왔다는 대답이 나왔다. 그러면서 거의 매번이렇게 덧붙였다. "고향에 오니까 좋아요." 기묘하고 작은 나라 르완다는 또다시 전 세계에 역사상 전례가없는대서사를 보여주었다. 오랫동안 난민 네트워크를 운영하면서 의식화와기금 조성, 병력 모집 작업을 해온 르완다 애국전선 지도자들조차도 귀환인파의 규모에 깜짝 놀랐다. 과연 무엇이 한 번도 르완다 땅을 밟아본 적이 없는 이 수많은 사람이 상대적으로 안정되고 안전한 생활을 버리고 묘지에 정착하도록 움직였을까? 대대로 내려온 추방이라는 유산과 망명 생활의 서러움, 나아가 조국에 대한 기억 또는 그리움이 모두 그 이유였다. 제노사이드에 맞서겠다는, 하마터면 이 세상에서 완전히 사라질 뻔한 나라의 당당한 일원이 되겠다는 공동의 의지도 이유 가운데 하나였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의 경우 그러한 의지와 금전상의 이득을 보겠다는 마음이함께 뒤섞여 있었다. - P2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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