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릴리안이 멈칫하고는 뭘 곰곰이 생각하는 듯하더니, 뜻밖에도 다시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얼굴이 새빨개진 채 침대 머리맡으로 다가와, 프랜시스에게서 한 발짝쯤 떨어진 자리에 멈춰 서서 그녀의 가슴에 손을 뻗었다. 젖가슴 자체를 만진 건 아니었다. 어리둥절한채 가만히 얼어붙어 있는 프랜시스의 가슴 위의 허공에 손을 올리더니, 거기에서 삐져나온 무언가를 움켜쥐듯 손가락을 구부리는 시늉을하는 것이었다. 그러고는 입으로 끼익, 쉭 하는 소리를 내면서 천천히 손을 끌어당겼다.
그 짧은 연극이 끝날 때쯤에야 프랜시스는 그 의미를 이해했다. 릴리안이 손을 올렸던 자리는 프랜시스의 심장 바로 위였다. 릴리안은 심장에 박힌 말뚝을 빼내는 시늉을 한 것이다.
릴리안은 프랜시스와 한 번도 시선을 마주치지 않았지만, 그 손길은 매끄럽고 세심했다. 심지어 손을 우아하게 펼쳐서, 빼어 들었던 말뚝을 저편에 팽개치는 시늉까지 해 보였다. 그러고는 자기 행동에 담긴 의미에 스스로 놀랐는지 가만히 서 있었다. 릴리안의 심장이 쿵쾅거렸다. 목 아래 피부가 북 가죽처럼 떨리는 게 프랜시스에게도 보였다. 둘은 말없이 서로를 마주 보았다. 그 순간은 팽창하는 듯, 어딘가에 아슬아슬하게 매달린 채 정지한 듯 느껴졌다. 마치 물방울처럼, 눈물 한 방울처럼. 그러다가 커튼이 바람에 펄럭거리고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나자 릴리안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발길을 돌려 방을 나갔고, 문을 닫았다.
왜 그런 행동을 한 걸까? 무슨 의도로? 프랜시스는 베개에 등을 파묻은 채, 멀어져가는 릴리안의 발소리를 들으며 의문에 빠졌다. 가슴에 손을 얹어보니 상상 속의 말뚝에 관통당했던 자리가 약간 말랑말랑하게 느껴졌다. 프랜시스는 블라우스 옷깃을 끌어 내리고 축 처진캐미솔 끈을 젖힌 뒤, 방 저편의 거울 앞으로 건너가서 가슴을 비춰보았다. 눈에 띄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피부에 아무런 흠도, 자국도없었다. 당연히 그럴 리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침대로 돌아와 심장위에 손을 올리고 누우면서 그녀는 확신했다. 릴리안의 손길이 자신의 가슴에 일으켜놓은 어떤 열기가 일렁이는 것이, 피가 훅 달아오르는 것이 느껴진다고. - P2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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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에게는 미국 장애인법이 적용되지 않는다. 영재교육에 관한 연방 정부의 공식 지침도 없다. 하지만 우리가 그다지 인정받지 못하는 차이로 나타나는 이례적인 머리를 가진 학생들을 위한 특별 프로그램의 중요성을 인지한다면, 놀라운 능력을 보여 주는 이례적인 머리를 가진 학생들을 위해서도 마찬가지로 특별 프로그램을 도입하는 문제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대니얼 신갤Daniel Singal은 「애틀랜틱 먼슬리」에서 <문제는 평등을 추구하는 행위 그 자체가 아니라 그 과정에 따라오는 우수성에 대한 편견이다> 2"라고 썼다. 2007년 「타임지에 쓴 글을 통해 교육가 존 클라우124John Cloud는 아동 낙오 방지법이 <철저히 평등주의적인> 가치관에만 근거해서 영재 학생들에게는 어떤 지원도 제공하지 않는다고 비난했다.
2004년에 발표된 「전국 월반 현황에 관한 템플턴 보고서 Templeton National Report on Acceleration」는 학교 제도가 뛰어난 능력을 지닌 아이들의 발목을 잡기 위해 설계되었다고 단언한다. 적대적이거나 무관심한 교육제도에 직면해서 자녀의 요구를 지지하는 책임은 또다시 부모의 몫으로 떨어진다. 레온 보트스타인이 냉담한 어조로 말했다. 「만약 베토벤이 오늘날의 유치원에 다녔다면 사람들은 그에게 약물치료를 했을 테고, 그는 우체국직원이 되었을 것이다. - P104

대부분의 경우에 사회적인 환경에 의해 성과가 좌우된다는 점에서 천재성에 대한 편견을 바로잡는 일도 사회의 책임이다. 어떤 면에서 천재성은 최고의 수평적 정체성이다. 스키에 선천적인 소질이 있지만 과테말라에서 가난하게 태어난 사람은 절대로 자신의 소질을 발견하지 못할 가능성이 많다. 아무리 컴퓨터 프로그래머로서 가장 중요한 재능을 타고난 사람이라도 15세기에는 크게 성공하지 못했을 것이다. 만약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이누이트족으로 태어났어도 그토록 바쁜 일생을 보냈을까? 갈릴레오가 1990년대에 살았더라면 끈 이론을 발전시킬 수 있었을까? 이상적으로 말하면, 천재가 재능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도구와 환경뿐 아니라동료와 추종자로 이루어진 특정한 수용 집단이 필요하다. 미국의 인류학자 앨프리드 크로버가 1940년대에 주장했던 것처럼, 천재는 천재를 낳는다.137 아이작 뉴턴 경은 <내가 조금 더 멀리 봤다면 그건 그대들 같은 거인의 어깨 위에 서 있었기 때문이오>‘"라고 인정했다. <성인(聖人)>과 마찬가지로 <천재>란 상당한 시간과 몇 번의 기적이 있어야 비로소 정당하게 붙을 수 있는 꼬리표다. 우리는 보다 인간적이고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장애인을 돕는다. 비범함에 대해서도 동일한 마음가짐으로 접근할 수있다. 동정은 장애인의 자존감을 저해한다. 탁월한 재능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적의가 유사한 장애물이다. 동정과 적의는 하나같이 우리와 근본적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두려움을 느낄 때 나타나는 징후다. - P128

신동을 자녀로 둔 모든 부모들은 위험 요소가 많고 결과 또한 미심쩍은 목표에 지극히 헌신적이다. 요컨대 그들은 자칫 도외시될 수 있는 사회적 발달과 주체할 수 없는 실망감, 고질적인 괴리감, 심지어 가족 관계의영구적인 균열 등의 위험 요소에도 불구하고 좀처럼 성취하기 어려운, 그마저도 신동인 자녀가 어른이 되었을 때 정말로 원할지조차 확실치 않은생활 방식을 갈구한다. 자녀를 지나치게 몰아붙여서 결국 자녀가 포기하도록 만드는 부모들이 있는 반면에, 재능을 개발하고자 하는 자녀의 열정을 받쳐주지 못한 채 어쩌면 그 자녀가 향유했을 수 있는 유일한 삶을 박탈하는 부모들도 있다. 부모라면 누구나 어느 쪽으로든 실수를 범할 수있다. 자녀를 지나치게 밀어붙이는 실수가 훨씬 확연하게 보이고 특히 우리 문화에서 빈번하게 나타나지만 나머지 다른 하나도 심각한 실수이기는 마찬가지다. 평범한 자녀를 양육하는 법에 관한 사회적 동의가 부재한다는 사실을 고려했을 때, 비범한 자녀를 양육하는 법에 관한 사회적 동의도 없으며, 행복을 가늠하는 내적인 잣대가 근본적으로 다른 자녀 때문에신동 자녀를 둔 많은 부모들이 당황스러워한다는 사실 역시 놀라운 일은아니다 - P135

강간에 의해 태어나는 아동은 왜소증이나 다운증후군 아동만큼이나힘든 출발을 한다. 일반적으로 이러한 임신은 재앙으로 여겨지며, 어쩌면이미 갈등으로 벌집이 된 가정생활을 완전히 뒤집어엎는다. 친모는 자신이 그 아이의 양육을 둘러싼 온갖 도전은 물론이고 그런 아이가 존재한다는 사실 그 자체를 극복할 수 있을지도 확신이 없다. 그 같은 상황에서 도움을 기대할 수 있는 믿음직한 파트너는 좀처럼 드물다. 초보 어머니들에게는 으레 모순된 감정이 병존하기 마련이지만 흔히 강간으로 잉태된 아이의 친모가 직면하는 적대감과 혐오감은 그 가족에 의해서 더욱 증폭될수 있다. 또한 사회는 그런 어머니와 아이 모두에게 매정한 평가를 내릴 것이다.
대다수 장애에서 자신의 특정한 상황을 공유하지 않는 장애인들은 주어진 상황 안에서 인간적인 부분을 찾으려고 애쓰는 반면, 그들의 상황을 공유하는 장애인들은 지원과 인증, 집단적 정체성을 목표로 서로에게 이끌린다. 하지만 강간에 의해 태어난 아동의 경우 그들의 결함은 이방인에제도, 때로는 가족이나 친지에게도, 그리고 보통은 어쨌거나 그로 인한 정신적 그늘을 극복해야 하는 아동 본인에게도 보이지 않는다. 강간에 의해태어난 아동의 수평적 정체성은 난해한 동시에 상궤를 벗어난다. 일반적으로 그런 아동의 정체성은 입양된 경우와 마찬가지로 가족의 비밀이 되고, 누가, 무엇을, 언제, 누구에게 이야기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잠재적인위험을 내포한 거래가 된다. 자녀가 청각 장애이거나, 신동이거나, 자폐인경우 부모는 그 사실을 오직 짧은 시간 동안만 비밀로 할 수 있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다른 사람들이 금방 알아차릴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당사자인 아동도 언젠가는 알게 될 것이다. 반면에, 강간에 의해 태어난 아이는자신의 정체성을 모른 채 평생을 살아갈 수도 있다. 이는 아이의 눈으로 바라보는 어머니의 모습과 어머니의 눈으로 바라보는 아이의 모습이 각각의 사례별로 유동적일 수 있음을 의미한다. 하지만 아이가 입양의 완전한 의미를 이해할 수 없더라도 해당 사실을 일찍부터 아이와 공유해야 한다고 믿는 전문가들이 많은 입양의 경우와 달리, 강간은 이제 막 걸음마를뗀 아이에게 설명해 주기에는 너무나 혼란스럽고 무서운 이야기다. 아이의 입장에서 자기 부모에게 약점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비록 그 약점에 자신이 연루되어 있다고 생각하지 않더라도 끔찍한 일이다. - P139

여성을 비난하는 이러한 관행은 19세기초 사회정의 운동이 일어나면서 비로소 변화를 맞이했다. 「킹스턴 브리티시 휘그Kingston British Whig』 지는 1835년에 <행실이 나쁜 여성이라고해서 법적으로 보호받지 말아야 할 이유는 없다>고 주장했다.‘ 이 당시 미국에서는 흑인 여성에 대한 강간은 인정되지 않았다. 자신의 소유물을 침해한다는 자체가 어불성설이었기 때문이며, 주인에 의한 강간으로 태어나는 아이들 역시 노예가 되었다. 강간죄로 기소되는 흑인 남성은 혹시라도 재판 없이 그 자리에서 죽임을 당하지 않았더라도 대체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 한편 백인 남성은 기소를 피하기 위해 백인 피해자와 돈으로 합의하는 경우가 많았다. 1800년대의 법원은 어쩌면 억울하게 기소되었을지 모를 백인 남성을 보호하는 데 주로 관심을 기울였다.‘ 강간 혐의로 상대를제소하고자 하는 여성은 일반적으로 육체적 상해를 증거로 제시해서 자신이 저항했다는 사실을 입증해야 했으며, 피의자 남성이 그녀의 질 내부에사정했다는 사실을 어떻게든 <입증>해야 했다. " - P143

마리나는 아뮬라와 함께 있을 때자신이 강간당했다는 사실을 떠올리지 않는다. 나는 이를테면 <오, 내일수영을 해야 하는데 네 옷들은 깨끗하니?>라는 생각을 해요. 엄마 노릇에 전념하는 거죠. 그때의 기억이 스멀스멀 떠오르는 것은 밤에 자려고 혼자침대에 누웠을 때예요. 그녀는 자신을 이라크에서 돌아온 참전 용사에 비유했다. 그들은 말로 결코 표현할 수 없는 끔찍한 광경들을 목격했어요. 그런 상태로 고향에 돌아왔기 때문에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 몰라요. 이전과는 다른 사람이 된 거죠. 아무도 그들을 이해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그들은 그들에게 더 이상 아무런 의미도 없는 이런저런 기대를 갖고 있는 지역사회로 돌아가죠. 내가 받는 느낌이 바로 그래요.
그녀는 강간을 당한 직후에 아이를 낳음으로써 회복에 걸린 시간이 단축된 것 같다고 생각한다. 그녀가 말했다. 「나는 어떻게든 살아남아야했고, 앞으로 나아가야 했으며, 이 아이를 돌봐야 했어요.」 하지만 만약 아뮬라가 없었다면 자신에게 일어났던 일을 단순히 잊으려고 노력하는 데그쳤을 거라고 인정했다. 그리고 어느 시점에 가서는 한계에 부딪히고 말았겠죠.

마음만 먹으면 손쉽고 안전하게 낙태할 수 있는 환경은 강간으로 임신된 아이를 낳아 기르는 여성으로 하여금 결정이 강요되는 것이 아니라자신이 결정의 주체라고 느끼도록 도와준다. 심지어 임신에 관련된 각종선택에 반대하는 사람들조차 일반적으로 <강간의 예외성>을 인정한다. 적어도 이 무대에서만큼은 강간 피해자 여성에게 무제한의 독립성이 보장되어야 한다. 요컨대 낙태를 하든, 꼬박 10개월을 기다려서 아이를 낳은 또는 직접 아이를 키우든, 아니면 입양을 보내든, 당사자인 여성의 결정이 존중되어야 한다. 그러한 아이를 직접 키우기로 결정하는 여성은 장애 아동을 둔 부모들과 마찬가지로 아이의 도전적인 정체성에도 불구하고 그 아이를 선택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에 따른 결과로 아이와 함께 사회적인 비난에 직면하기도 한다.
낙태할 방법이 없어서, 또는 종교적인 신념 때문에, 또는 강압적인 파트너나 남편, 부모 때문에 강간에 의해 임신한 아이를 그대로 낳아 기르는여성들도 많다. 나는 깊은 자기반성의 의미로 그 같은 결정을 내린 여성들도 만났다. 임신 상태를 계속 유지하는 것이 강간당할 때 경험했던 강요된 수동성을 침묵 속에서 똑같이 재연하는 행위라고 주장하는 여성들도있었다. 어떤 이들은 그들의 아이를 증거처럼 느낀다고 밝혔다. 그들은 아이를 지우는 것이 그 아이가 존재하도록 만든 사건 자체를 부정하는 것처럼 느껴졌다고 설명했다. 어떤 경우든 낙태를 선택하는 행위는 페미니즘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여성들 중 상당수는 유일하게 낙태 반대 운동을 통해 도움을 받았고, 따라서 그들이 꼭 동의하는 것은 아닌 도덕적 담론의 짐을 짊어지게 되었다. 강간으로 생긴 아이를 낳아서 키우기로 선택한 많은 여성들이 낙태를 강요하는 극심한 사회적 압력을 느꼈다고 밝혔다. - P153

강간에 의해 잉태된 아기는 친모의 유전자와 강간범의 유전자를 나눠갖는다. 따라서 어떤 여성들은 강간으로 잉태된 태아를, 외부 생명체가 자신의 육체를 부당하게 정복했다는 의미로 받아들인다. 반면에 어떤 여성들은 자신의 확장된 모습으로 받아들인다. 유에스 뉴스 앤 월드 리포트U.S. News & World Report]에 소개된 한 기사에 따르면, 사정이 달랐으면 아마도 낙태에 반대했을 한 여성이 강간을 당해서 임신한 여동생에게 <만약어떤 사람이 네게 총을 쐈다면 너는 그 총알을 계속 몸 안에 지니고 다니겠니?"라고 조언한다. 똑같은 상황의 다른 어떤 여성은 <아기에게는 죄가 없다. 나처럼 희생자일 뿐이다>라고 말했다. 몸 안에 있는 <총알을 제거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리고 <무고한 아기>의 생명을 빼앗지 않는 것도 마찬가지로 중요하다. 이런 상황에서 화자가 사용하는 용어는 그사람의 도덕적 가치관을 암시한다. 낙태에 반대하는 페미니스트 조앤 켐Joan Kemp는 <강간에 의해 태어난 아이를 《강간 피해자의 아이》라고 부르지 않고 대체로 《강간범의 아이>라고 부르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도대체 어떻게 강간범이 <아이의 아버지>로 간주될 수 있을까?>라고 개탄한다. 용어의 선택은 <합리적인> 행동 방침을 좌우할 수 있다. 켐프는 초병에게 강간을 당한 한 여성이 <그 아이는 내 아이이며, 그 아이를 거부하는것은 가부장적인 사고방식에 굴복하는 행위라고 판단했다>고 말한다.
그 여성의 경우에 친모에게 박힌 상징적인 총알은 그녀에게 힘을 주는 원천이었다. - P154

자신의 미래에 대한 분명한 생각이 없는 젊은 여성이나 어린 소녀는 강간에 의한 임신을 유지하거나 중단하기로 결정할 때 대체로 부모나 다른 연장자의 바람에 대한 반항심이나 복종심이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임신 사실 자체를 부정하는 여성들도 있다. 강간이 원인이 된 임신 사례 중 3분의 1은 임신 중기(中期)가 되어서야 발견된다. 임신 사실을 뒤늦게 발견하거나 그에 따른 대응이 늦어질 경우 여성의 선택권이 줄어드는 문제도 있지만, 아기를 낳을지 말지 결정해야 하는 순간에도 피해 여성이 여전히 회복되는 과정에 있는 경우가 많다. 궁극적으로 어떤 선택을 하든 상관없이 강간에 이은 임신은 우울증과 불안, 불면증,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로 이어질 수 있다. 강간은 영구적인 손상을 초래한다. 흉터를 남기지는않지만 아물지 않는 상처를 남긴다. 내가 인터뷰한 어떤 여성이 말했듯이<아이를 지울 수는 있지만 경험까지 지울 수는 없다>.
철학자인 동시에 강간 피해자이기도 한 수전 브라이슨Susan Brison은 <트라우마는 피해 여성의 의식과 무의식을 점령하고 있을 뿐 아니라 계속해서 몸 안에 모든 감각 기관에 남아서 트라우마를 초래한 사건을 되살릴 기회가 생기면 언제든 수면 위로 부상시킬 태세를 갖추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리고 임신은 낙태나 출산이 이루어지기 전까지 몸 안에서 말 그대로 그 같은 상황을 연출한다. 강간 피해 여성들을 치료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문제를 설명하면서 크로아티아의 정신의학과 교수 베라 폴네고비츠-스멜크Vera Folnegović-Smalc는 <우리는 생명 유지에 꼭 필요한 본능을 잃어버렸거나 심지어 죽음을 동경하는 환자들과 자주 마주친다. 특히 자살경향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고 말했다. - P1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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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가 그녀에게 독을 먹인 것 같았다. 침대에 앉아있다 보니 몸속에서 급류가 맹렬하게 흐르는 감각이 점점 더 부자연스럽게 의식되었다. 위장 속에서 액체가 출렁거리고, 귀에 혈류가 고동치는 소리까지 느껴졌다. 별수 없이 침대가 기울어지는 느낌이 드는 것을 감수하고 조심스럽게 몸을 뉘였지만, 어떤 자세를 취해도 편안하지 않았다. 안정이 되지 않았다. 그녀 자신에게서 벗어날 가망이없었다. 눈을 감으니 미래파 화가의 그림 같은 악몽이 펼쳐졌다. 강렬한 빛깔의 뱀과 사다리들, 잉크로 그려 넣은 심장, 히죽 웃는 레너드의 붉은 얼굴이 보였다. 무엇보다도 생생하게 보인 것은 가터벨트의 걸쇠를 더듬어 찾는 릴리안의 모습이었다. 실크 스타킹이 끌려 내려가는 광경이 자꾸만 눈앞에 어른거렸다. - P209

녹색 술병을 떠올리자마자 목구멍에서 쓴 물이 올라왔다. 그런데그 맛은 진과 레모네이드였다. 진과 레모네이드. 그리고 검은 담배.
그걸 시작으로, 바버 부부의 방에서 보낸 지난밤의 기억들이 서서히연이어 떠올랐다. 탁한 물속에서 퉁퉁 불어터진 시체들이 떠오르듯이 서서히 그러나 가차없이. 자신이 한 손에 술잔을, 다른 손에는 담배를 들고서 안락의자에 기대어 앉았던 것이 기억났다. 바버 씨의 담배 상자에 손을 뻗다 말고 새침하게 그를 올려다보며, 사실상 속눈썹을 파닥거리다시피 하며, "당신은 여자들이 담배 피우는 걸 싫어하는 줄 알았는데요."라고 말했던 것도 기억났다. 「메에 메에 검은 양」을 목청껏 불렀던 것도, 키득거렸던 것도, 고함을 쳤던 것도, 그리고....
‘아니야. 인정 못 해!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그러나 가장 흉측하게 불어터진 시체가 떠오르고야 말았다.... 릴리안이 쿠션 위에 올라서서 비틀비틀 스트립쇼를 하고, 프랜시스 자신은 술취한 군인처럼 음흉하게 그녀를 쳐다보았던 기억이.
프랜시스는 이부자리에 얼굴을 파묻고 메스꺼움과 수치심을 억눌렀다. - P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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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피마는 내게 <우리 가족은 누군가가 우리 대화를 엿듣고있을 거라는 불안에 항상 시달렸어요. 그러다 보니 우리에게는 음악이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습니다. 우리가 음악에 열정을 쏟은것도 바로 그 때문이었죠>라고 말했다. 음악은 그들에게 자유의 영역이, 즉 도청 장치가 설치된 아파트에서 분명하게 의사 표현을 할 수 있는 매개체가 되었다. 피마의 원숙한 연주가 선사하는 아름다움 중 일부는 오랜 기간 지속된 그 같은 절박함에서 나온다고 할 수 있다. 뇌 구조가 구어에 적합하지 않아서 음악으로 대화를 나누는 음악가들이 있는가 하면, 피마-그는 결혼한 적이 없으며, 제냐 키신과 마찬가지로 어머니와 함께 산다-는 원래부터 대화가 억압된 상태에 있으며, 특히 어릴 때 대화에서 발화가 거부되면서 그로부터 야기된 긴박한 필요에 따라 음악을 만들어 낸다. 20세기의 러시아 음악은 모호함을, 요컨대 정부 관료가 찾아내서 <체제 전복적>이라는 딱지를 붙일 수 없는 어떤 것을 표현할 수 있는 능력을 표현상의 장점으로 이용했다. 음악은 거의 모든 유형의 침묵 속에 갇혀 지내는사람들에게 자유를 제공할 수 있다. - P24

 기원전 5세기경의 아테네나 문예 부흥기의 이탈리아, 송 왕조에서 많은 수의 천재들이 나타났던 이유는 무엇일까? 천재의 비율은 시대나 장소와 상관없이 일정해야 하는 것 아닐까?
만약 천재성이 유전학에 의해 만들어진다면 능력주의는 신이 부여한 왕권과 다를 바 없다. 요컨대 이 역시 선천적인 우월성을 신격화한다. 천재성이 노력에 의한 결과물이라면 똑똑한 사람들은 당연히 그들이 일군 부와 영예를 차지할 자격이 있다. 공산주의자의 관점에서 보면 누구나 노력만 하면 천재가 될 수 있다. 파시스트의 관점에서 보면 선천적인 천재들은그들을 제외한 인간들과 다른 종(種)이다. 훈련이 부족해서 자신의 잠재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많지만, 탄광에만 한 번 가보더라도 일만 열심히 한다고 해서 천재가 된다거나 부(富)가 보장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충분히 알 수 있다. 높은 지능과 관련된 역사는 지적 장애나 정신 질환의 역사만큼이나 정치적이다. - P27

단거리 육상 선수가 어리석게도 자신을 마라톤 선수와 비교하면서 오만에 빠지듯이, 자녀의 나르시시즘을 부추기는 부모의 행동은 자녀에게 호의를 베푸는 것이 아니다. 명성을 얻기에 앞서 무언가를 성취하는 것이우선이다. 명성이 먼저 올 경우 성취가 불가능해지기 일쑤인 까닭이다. 수많은 뛰어난 음악가의 경력을 관리해 온 음악가 매니저 찰스 햄른이 지쳤다는 표정으로, 열두 살 먹은 자녀가 카네기홀에서 데뷔하기를 바라는 부모들에 대해 설명했다. 그가 말했다. 「카네기홀에서 연주한다고 해서 경력이 쌓이는 게 아니에요. 먼저 경력을 쌓아야지 그다음에 카네기홀에서 연주 초청을 하는 겁니다. - P32

신동과 일한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지적, 감정적, 육체적 나이가 일치하지 않아 조화롭지 못한 상태에 있는 사람에게 일어날 수 있는 파멸을 목격한 적이 있을 것이다. 어린아이의 몸을 하고서 어른 같은 지능을 갖고있다는 것은 성숙한 몸을 하고서 어린아이의 지능을 갖고 있는 것만큼이나 절대로 쉬운 일이 아니다. 줄리아드 음대 학장 조지프 폴리시는 평범한 어린아이가 바이올린을 집어 들거나 건반 앞으로 다가서는 순간 당신의 눈앞에서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는 겁니다. 정말 무서운 일이죠"라고말했다. 동료인 베다 카플린스키 교수가 <천재성은 일종의 이상 증상이고, 이상 증상은 절대로 한 번에 하나씩 나타나지 않습니다. 재능 있는 많은 아이들이 주의력 결핍증이나 강박 장애, 아스퍼거 증후군을 앓습니다. 부모들은 자녀의 그런 두 가지 측면에 직면했을 때 긍정적인 측면 즉 자녀의 재능이나 탁월함 등은 정말 쉽게 인정해요. 하지만 그 밖의 다른 것은 모두 부정합니다>라고 덧붙였다.  - P50

줄리언 와이브라가 영재 아동의 감성적인 욕구를 다룬 그의 글에서<지적 재능을 타고난 아동들의 갈수록 심화되는 자살 문제>를 언급했음에도, 사람들은 어떤 연구도 그러한 아이들이 다른 평범한 아이들보다 감성적으로 강인하지 못하다는 사실을 보여 주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그렇다고 총명함이 자살과 무관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재능이 자살의 직접적인 원동력으로 작용하는 사람도 있는 반면에 유사한 재능 때문에 자살 충동을 극복하는 사람도 있다. 천재성은 천재를 보호하는 동시에 취약하게 만들며, 천재의 자살률은 높다라면 높고 낮다라면 낮다. 평균을 냈을때 그 수치가 비슷하다고 해서 자살률이 실제로 동일하다는 의미는 아니다. 이런 변증법적 차이-동일한 어떤 것이 경우에 따라서는 자살을 부추기기도 하고, 자살로부터 지켜 주기도 하는 것는 아직 충분히 탐구되지않았다. - P51

 어린 시절의 재능에 대해 지나치게 칭찬을 받은 대다수 사람들이 그렇듯이 그 또한 오만과 될 대로 되라는 식의 불안정함이 뒤섞인 상처 입은 나르시시스트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는 <장애물이 나를 가로막으면 그 장애물이 무엇이든 간에 나는 그냥 포기했다>고 고백했다. - P53

그의 부모는 그가 동성애자라고 밝히자 몹시 화를 냈다. 그가 말했다.「나는 부모님의 편협한 애정에 화가 났습니다. 부모에게 자식이란 다양한 모습을 지닌 복합적인 존재입니다. 따라서 자식의 다른 부분은 제쳐 놓고 반짝이는 부분만 골라서 사랑할 수는 없는 거예요.」 20대 때 스콧은 부모에게 너무 화가 나서 작곡을 그만두었다. 「부모님의 관심은 음악을 포기하고 싶게 만들었어요. 부모님한테서 당신들 자신의 목적을 위해 알선하고 광고하는 어떤 것을 뺏고 싶게 만들었어요. 물론 경력적인 측면과 윤리적인 측면에서 스스로 무덤을 파는 부작용도 있었어요. 나는 완전히 불안정한 상태가 되었고, 더 이상은 아무것도 이해가 되지 않았어요. 내게 남은거라고는 마약과 섹스, 치료가 전부였죠.  - P57

부모의 행동이 해를 끼칠 수도 있지만 자녀와 더불어 부모 자신이 클래식 음악 산업의 희생양이 되는 경우도 있다. 어린 음악가들을 끊임없이시장에 내놓는 것이 유료 관객들을 붙잡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믿는 매니저들이 많은 듯하다. 신동을 위한 시장은 그동안 늘 존재해 왔으며 이 시장 때문에 클래식 음악계는 지난 30년간 매주 새로운 신동을 발굴해야 했다. 자신이 이용하는 사람들과 단기적인 이해관계에 있는 사람들에 의해, 심지어 신동의 정신적인 건강도 돈을 벌기 위한 목적의 일환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에 의해 시스템이 구축된 것이다. 저스틴 데이비슨은 <이러한 시스템은 화석 연료를 태우는 것과 다를 게 없다>고 지적하면서 끊임없는 신동의 공급으로 시장에 홍수가 날 지경이다. 클래식 음악계의 매니저들은 협소한, 하지만 그마저도 대체로 더 이상 큰 관심을 받지 못하는 분야의 일만 할 수 있는 신동의 공급 과잉을 초래하고 있다. 그들은 이미 과거가 된 미래를 위해 신동을 준비시킨다>라고 말했다. - P79

이런 생각은 의심할 여지없이 상당 부분 맞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교육은 소용없는 짓이 되고 경험은 시간 낭비가 될 터이다. 나는 단연코 처녀비행을 앞둔 조종사보다는 10년 경력 조종사의 비행기를 탈 것이며, 누군가가 생전 처음 만든 수플레를 먹으려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1만 시간을 성취의 기준으로 삼아 신성시하는 행동은 성취에 대해 아동문학가 허레이쇼 앨저의 감상벽을 갖는 것과 같다. 지난 세기가 배출한 위대한 바이올린 교사 레오폴드 아우어는 학생들에게 <여러분이 약간이라도 재능이 있다고 생각되면 하루에 3시간씩 연습하세요. 약간 멍청하다면 4시간씩 연습하세요. 4시간보다 더 연습해야 한다면 당장 그만두세요. 다른 직업을 찾아요> 라고 충고하고는 했다.
부지런히 연습하는 성향은 그 자체로 선천적일 수 있으며, 그런 성향을 개발하는 일은 적어도 기초적인 재능을 개발하는 일만큼이나 중요할수 있다.  - P91

그러는 사이 서양에서는 <타이거 마더>라는 정형화된 이미지를 경계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하지만 헝가리의 심리학자 미하이 칙센트미하이Mihaly Csikszentmihalyi의 표현을 빌리자면 <어떤 사람도 뛰어나면서 동시에 평범할 수는 없다> 전문화 교육을 시작하는 적기에 대한 질문은 지역마다 제시되는 답이 다르다. 유럽의 학생들은 미국 학생들보다 훨씬 일찍부터 전문 분야를 공부하기 시작하고, 아시아의 학생들은 유럽 학생들보다도 일찍 전문 분야에 집중한다. 음악을 언어라고 한다면 해당 언어의문법을 직관적으로 이해하고 유창하게 발음하기 위해서는 어릴 때부터 훈련을 해야 한다. 그래프먼은 <열여섯 살에도 피아노나 바이올린을 시작할 수 있고, 그때부터 시작해도 상당한 연주 실력을 쌓을 수는 있지만 일류 독주자가 되기에는 너무 늦다>라고 말했다. 요컨대 조기에 전문화 교육을 시작하려면 희생을 감수해야 한다. 예일 음대 학장 로버트 블로커 교수의 주장에 따르면 <상류층 부모들은 자녀에게 예술과 운동, 지역 봉사 같은 활동을 골고루 시키고 싶어 한다. 하지만 진심으로 음악가가 되려는 열망을 품은 누군가에게는 그런 양육 방식이 큰 방해가 된다. 심오한 성취는일반적으로 조기 발견과 특화에 의한 결과다>.  - P99

어릴 때부터 전문화를 강조했을 때의 문제는 아이들이 성공하려면 오직 한가지 길밖에 없다고 믿게 될 수 있다는 점이다. 캐런 먼로 박사는 대안을 준비해 두지 않는 것은 무책임한 짓이다>라고 말했다. 성공을 거머쥐지 못한 신동들은 다른 종류의 인생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기술들은 도외시한채 더 이상 그들을 지탱해 주지 못하는 어떤 것에만 계속 매달려서 미친 듯이 노력할 것이다. 블로커 교수는 한국에서 자녀를 유럽이나 북아메리카에 있는 음악학교에 보내기를 희망하는 부모들 모임에서 연설을 한 적이있었다. 먼저 입학 절차에 관한 설명을 마친 그가 공책을 내려놓으면서 말했다. 「나는 여러분이 오늘 이 자리에 모인 것을 정말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여러분 중 상당수는 열두살이나 열세 살, 또는 열네 살 된 여러분의 자녀를 장차 다른 나라에 보낼 겁니다. 부모 중 한 명이 그 자녀를 따라갈 테고, 한국에 남는 가족과는 이별하게 되겠죠. 어릴 때 이런 일을 겪는 학생들은 멍한 상태로 우리에게 옵니다. 감정이나 열정이 부족하거나 내면의 지성이나 음악성이 부족해서가 아니에요. 가족의 손길이나 온 가족이 함께하는 식사가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그 순간 회의장은 냉랭한 침묵에 휩싸였다. - P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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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버 부인은 마주 웃었지만 금세 미소가 흐려졌다. 시선을 떨구던그녀는 자신이 걸터앉은 난간의 어떤 부분에 주의가 쏠린 듯하더니, 그쪽에 손을 얹으며 중얼거렸다. "이게 결혼이에요, 레이양. 바로 이런게 결혼이에요."
바버 부인의 손이 닿은 자리는 페인트가 벗겨져 있었다. 속까지 깊게 패여서 이전에 여러 겹 칠해졌던 페인트의 빛깔들과 맨 밑의 희끗한 나무 빛깔까지 다 드러나 보였다. 바버 부인은 그 흠을 어루만지면서 말을 이었다. "만사가 잘 돌아갈 때는 이 속에 숨은 색깔들을 생각하지 않죠. 생각하려고 들면 미쳐버릴 테니까, 맨 위에 있는 색깔만 생각하죠. 하지만 그런다고 이 색깔들이 없어지지는 않아요. 말다툼, 서운한 일 같은 것들 말예요. 그러다가 가끔씩 무슨 일이 벌어져서 이렇게 홈이 파이면, 밑에 있는 색깔을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게 되지요." 그녀는 눈을 들더니, 프랜시스의 시선을 의식하고 다시 가벼운 어조로 말했다. "그러니까 결혼하지 마세요, 레이양. 어느 주부한테든 물어봐요! 그럴 가치가 없다고 할걸요. 당신처럼 독신으로 사는 게 얼마나 행운인지 모를 거예요. 마음대로 쏘다닐 수도 있고...." - P130

그런데 일하다가 서로의 손이 맞닿은 순간, 둘 다 움찔 손을 거뒀다. 둘 사이의 모든 것이 어긋나는 것 같았다. 모조리 잘못되어가는 것 같았다. 아까까지 실컷 웃고 떠들던 것도, 유치한 미용실 놀이도, 옷을몇 벌씩 갈아입던 것도 다 사라져버렸다. 아니, 사라지기만 한 게아니라, 프랜시스의 고백 때문에 의심과 비난의 대상이 되어 더럽혀진 것만 같았다. 지금 묵묵히 가위와 빗을 정리하는 릴리안은 흡사 화가 난 듯 보였다. 지금껏 한결같이 상냥하고 스스럼없는 모습만 보여온 그녀인데. 마음이 멀어지려는 걸까? 둘 사이에 있었던 기묘한 사건들을 돌이켜보는 걸까? 터키시 딜라이트, 신사적인 찬사, 음악당에서 릴리안에게 구애하던 남자를 프랜시스가 쫓아버렸던 것.... 프랜시스가 그 남자의 자리를 차지하려고 그랬을 거라고 생각하는 걸까?
그게 정말로 그런 행동이었나? - P1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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