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려모코토 학살 소식이 키갈리에 돌기 시작하면서 만나는 르완다 정부관리마다 한결같이 분노했다. 그들은 내게 만약 자이르가 조상이 르완다인이라는 이유로 자국의 투치족을 추방했다면 르완다인을 조상으로 둔자이르 르완다의 후투족은 살인까지 저지르고도 어째서 멀쩡하냐고 물었다. 이와 관련해 두사이디는 이렇게 말했다. "제노사이드가 다시 일어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자이르가 앞장서서 우리 국민들을 해치고 있습니다." 나는 제노사이드 당시 자이르 대통령 모부투 세세 세코가르완다로 무기를 실어 보냈을 뿐만 아니라 프랑스 군대 오페라시옹 뒤르쿠아즈 기지를 내주는 등 르완다 애국전선과 싸우는 하비아리마나를지원했다는 사실이 자꾸만 생각났다. 게다가 이제는 국경 난민촌에서 재기를 다지는 후투 파워 세력을 선동하고 있었다. 그 무렵 유엔의 한 조사팀이 전 르완다 정부군의 악명 높은 바가소라 대령이 자이르 군대의 신분증으로 세이셸(인도양 서부 마다가스카르 북동쪽에 있는 섬나라 옮긴이)에가서 무기와 탄약을 구입했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보고서를 내놓았다.
1996년 초반 키부 북부에서의 전쟁이 격렬해지는 시기와 때를 같이해 자이르의 후투 파워 세력도 르완다에 대한 공격을 강화하는 한편, 침투 요원들을 보내 제노사이드 생존자 수백 명을 살해했다. ‘아프리카의 권리라는 단체의 말을 빌리면 ‘증거 인멸‘을 위해서였다. 그런데도 국제 사회는 난민촌을 통해 자이르에 돈을 계속 쏟아부으면서 모부투가 제노사이드 주동자들을 부추기는 것에 대해 아무런 책임도 묻지 않았다. 르완다 정부로선 분통이 터질 일이었다. - P341

모부투는 아프리카에서 최장기 집권을 자랑하는 독재자였다. 그는1960년과 1965년 사이에 CIA와 다양한 백인 용병 부대의 용의주도한 지원과 집권당인 콩고국민운동의 폭압 정치를 통해 권좌에 올랐다. 그의 장기 집권은 무엇보다도 이웃의 비극을 자신의 이점으로 활용하는 탁월한능력 덕분이었다. 냉전 시대에 들어와 미국과 동맹 세력은 중앙아프리카의 공산주의 세력을 막는 보루로 부랴부랴 그를 내세웠다. 그 뒤 베를린장벽이 무너지자 모부투는 더 이상 쓸모가 없었다. 바야흐로 민주주의 진작이 새로운 대세였다. 모부투가 다수당 체제로 개혁하는 척 흉내만 냈을뿐 아무런 성과도 내놓지 못하자 예전의 서구 후원자들은 그와 관계를 끊었다. 서유럽 전체나 미시시피 강 동쪽의 미국과 맞먹는 그의 거대한 나라는 코발트, 다이아몬드, 우라늄, 금으로 넘쳐났다. 그가 세계 최고의 부자 중 한명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하지만 1993년 말 급료를 받지 못한 그의 군대가 폭동을 일으켜 살인과 약탈과 강간을 일삼으면서 자이르는 만퍼센트에 이르는 인플레이션을 감당해야 했다. 모부투는 권좌에서 쫓겨났고, 미국이나 유럽으로 가는 비자를 받지 못해 파멸이 코앞에 닥친 듯했다. 바로 그때 르완다의 제노사이드가 그에게 다시 서광을 비춰주었다.
이번에는 난민 문제를 처리하려면 반드시 거쳐야 할 인물로 그가 주목받았다. - P342

"댁들한테 우리는 전체의 한 점에 지나지 않았지요." 무궁가에서 나오는 도로 위로 꾸역꾸역 쏟아져 나오는 군중을 헤치며 르완다 쪽으로 며칠을 운전하고 난 뒤 만난 한 귀환자는 이렇게 말했다. 난민촌에 있을 때그들은 입만 열면 떠나올 때처럼 다 같이 집으로 돌아가겠다고 맹세했다. 전체의 한 점이 된다는 것이 중요했다. 그렇게 되면 누가 누군지 분간할수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국경을 향해 돌진하는 숫양처럼 한 시간에 1만2,000명씩 (1분에 200명씩) 몰려들었다. 하지만 그 광경은 극단주의 후투지도자들이 오래전에 약속한 의기양양한 공격과는 거리가 한참 멀었다. 그보다는 거의 침묵 속에서 이루어진 망명지에서의 철수였다.  - P366

르완다에선 수천 명이 도로를 따라 몇 시간을 진을 치고 서서 자신들처럼 입을 굳게 다문 채 밀려드는 인파를 지켜보았다. 현대사를 통틀어 다른 민족을 살육했거나 이른바 살육이라는 행위를 저지른 민족이, 고만고만하게 작은 공동체에서 살육당한 민족의 유족들과 완전히 뒤섞여 생활하면서 응집력 강한 국가 사회를 이루어야 했던 적은 일찍이 없었다. - P367

하지만 생존자들이 살인자 옆집에, 심지어는 기루무핫세의 집에서처럼 한 지붕 아래 살아야 하는 이유가 과연 무엇이란 말인가? 문제와 맞서는 일을 뒤로 미룬 이유는 대체 무엇이었을까? 이 물음에 대해 카가메 장군은 내게 이렇게 말했다. "생각이 앞선 나머지 무턱대고 모조리 싸잡아비난해선 안 됩니다. 우선은 안정된 분위기를 만든 다음에 그때 가서 비난해야 할 사람을 비난해도 늦지 않습니다. 평화로운 공존을 차츰차츰 이끌어나가기 위해서는 경우에 따라 모른 척할 수도 있습니다." 카가메는이런 요구가 국민들에게 너무 가혹한 처사라는 점을 인정했다. 귀환이 있고 나서 군인들이 성난 군중에게서 살인 용의자를 구출해 ‘보호‘하고 있다는 소식이 끊임없이 들렸다. 정의에 대한 요구와 질서에 대한 바람 사이에서 균형을 잡기란 쉽지 않을 것이라고 카가메는 말했다. "이 두 가지 목적을 다 이루려면 국민의 정서라는 문제를 고려해야겠지요." - P374

생존자들이 정말 원하는 것은 그들이 ‘이전‘이라고 부르는 시절처럼지내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불가능했다. ‘이전‘의 세상은 이미 파괴되었기 때문이다. 그렇더라도 제노사이드로 가장 피해를 많이 입은 사람들이 그 후에도 가장 많이 외면당한다면? 보나방튀르 은이비지는 나이어린 생존자들이 극단주의자로 변해가는 현실을 특히 우려했다. "가족을잃고 희망도 미래도 없이 살아가는 아이들이 만 명이라고 가정해봅시다.이런 나라에서 그들에게 ‘네 아버지와 네 형제 일곱과 네 누이를 죽였으니 너도 가서 네 이웃을 죽여라‘ 라고 말하면 그들은 마체테를 들고 그렇게 할 겁니다. 왜냐고요? 희망이 없는 탓에 미래를 보지 못하니까요. 국민들에게 화해를 향해 나아가야 한다고 말하면서 이 아이들을 잊어버린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들이 거리를 걸어다니는 모습만 보고는 그들의 문제가 뭔지 알 수 없지만 십중팔구 어머니나 누이가 강간당하는 광경을 지켜보았을 겁니다. 이 아이들이 사회로 돌아와 미래를 보면서 ‘그래, 도전해보는거야 라고 말할 수 있게 하려면 많은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러한 노력은 이루어지지 않고 있었다. 정부에서 운영하는 생존자프로그램은 전무했다. "아무도 그들을 도우려 하지 않습니다." 카가메의 고문 클로드 두사이디는 해외 기증자와 원조 단체를 염두에 두고 이렇게말했다. "돈을 주면 요긴하게 쓰겠다고 아무리 말해도 아무도 관심을 보이지 않습니다." 나중에 상무장관에 임명된 보나방튀르는 외국의 원조가 부족한 이유를 르완다의 부족한 투자 기회 때문으로 설명했다. "부자가 아니고서는 국제 사회에 기댈 수 없는데, 우리는 부자가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석유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 역시 피가 흐르는 인간이라는 사실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이 문제와 관련해 두사이디는 국제 사회가 제노사이드가 실제로 일어났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고 결론내렸다. "그들은 우리가 그 일을 잊기를 바랍니다. 하지만 우리가 그 일을잊으려면 먼저 생존자들이 정상 생활을 되찾을 수 있도록 도와야 합니다. 잊는 과정은 그 다음 일입니다." - P383

내가 보기에 1990년대 중반의 중앙아프리카는 중세 후기의 유럽과 비슷했다. 그 시기의 유럽도 부족과 종교 문제로 인한 끊이지 않는 전쟁, 부패한 전제군주, 탐욕스러운 엘리트, 미신을 믿는 농부, 창궐하는 질병, 극심한 가난, 난무하는 약속들로 몸살을 앓았다. 그런 유럽에 더 큰 번영과 좀 더 건전한 정부를 가져다준 일등 공신은 물론 식민주의였다. 식민주의는 침략을 수출하고 부를 수입하게 해주었다. 식민지였던 나라들은현대 민족 국가로 발돋움하는 과정에서 그런 기회를 누리지 못했다. 독립한 국가들이 지속 가능한 정치 전통을 세우려는 갈등 과정에서 보여주는정치는 그것이 어떤 형태를 띠는 과도기의 현상일 가능성이 높다. - P394

하지만 희망은 막연히 생각할 때보다 그 이름을 부르며 굳게 믿을 때더 큰 힘을 발휘한다. 그래서 나는 또 하나의 이야기를 통해 르완다에 과연 희망이 있는지의 여부를 여러분 판단에 맡기려고 한다. 1997년 4월 30일. 내가 이 글을 쓰기 시작한 지 거의 일 년째 되던 날 르완다 텔레비전은 이틀 전, 자신이 기세니의 한 기숙학교에서 여학생 17명과 62세의 벨기에 수녀를 살해한 제노사이드 주동자였다고 고백하는 남자의 모습을보여주었다. 학교를 노린 그런 공격은 한 달 새에 두 번째였다. 첫 번째는 ㅎ키부예의 학교에서 일어났다. 키부예에서는 학생 16명이 살해되고 20명이 다쳤다.
텔레비전에 나온 죄수는 학살이 후투 파워의 ‘해방‘ 작전의 일환이었다고 설명했다. 그가 속한 민병대는 인원이 150명으로, 주로 전 르완다정부군과 인테라함웨가 그 구성원이었다. 그보다 먼저 키부예에 있는 학교를 공격했을 때처럼 기세니의 학교를 공격할 때도 민병대는 자고 있던 학생들을 깨워 후투족은 후투족끼리, 투치족은 투치족끼리 모이라고 명령했다. 하지만 학생들은 거부했다. 두 학교 여학생들 모두 자신들은 르완다인일 뿐이라고 말했고, 그래서 무차별하게 매질과 총격을 당했다.
시체로 넘쳐나는 르완다인들의 상상력 안에는 순교자가 더 들어설여지도, 필요도 없다. 그건 우리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우리 모두가 살수도 있었지만 대신 죽음을 무릅쓰면서까지 자신들을 르완다인이라고 부르는 쪽을 택했던 저 용감한 후투족 여학생들의 사례에서 조금만 용기를얻으면 안 될까?
1995년 5월 ~ 1998년 4월 - P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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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갈리의 남자 교도소에선 그곳 관리를 맡고있는 대위와 부관들의 안내를 받으며 곡예단과 합창단, 정찰대, 만화책을읽고 있는 세 남자를 지나쳤다. 대위가 앞장서서 짧은 지휘봉을 휘두르며서로 엉긴 채 엎치락덮치락하는 죄수들을 뚫고 길을 열었다. 그러면서 대위는 계속 이렇게 소리쳤다. "미국에서 온 기자님이시다." 그러면 서로엉겨 있던 죄수들은 우리 발치에 쭈그리고 앉아 기계적으로 박수를 치며절하는 시늉을 했다. 그 모습을 보면서 바로 이것이 제노사이드의 이유를설명할 때 종종 언급되는 권위에 대한 맹목적인 복종‘(그 유명한 군중 심리)이라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르완다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위계질서는 교도소 울타리 뒤에서도 볼수 있었다. 지식인, 공무원, 전문 직업인, 성직자, 상인은 불편하나마 그래도 감방을 차지했지만 농부와 노동자들은 지붕도 없이 뻥 뚫린 마당에나와 앙상한 몸을 서로 기댄 채 쭈그리고 앉아 지내며 질문이 생길 때마다 지도자의 의견을 구했다. 그들은 어째서 그런 상황을 참았을까? 어째서 폭동이라도 일으키지 않았을까? 경비 체계가 그렇게 허술한데도 어째서 르완다에서는 탈출 기도가 거의 없었을까? 5,000명의 죄수가 들고일어나면 키갈리 중앙 교도소의 담을 무너뜨리고 수도를 위험에 빠뜨려 그들이 불신하는 정부에 큰 위기를 야기하는 것쯤은 식은 죽 먹기였고, 지원만 제대로 받는다면 전면적인 봉기에 불을 댕길 수도 있었다. 아무도죄수들의 복종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했다. 기껏해야 그들이 살아 있다는행운을 놓치고 싶지 않았을 거라고 짐작할 뿐이었다. 르완다 애국전선이자신들을 가만둘 리 없다고 확신하고 있던 상황에서 오히려 국제 구호 단체 관계자와 기자와 외교관들이 찾아왔으니 꿈만 같지 않았겠는가. - P299

르완다의 지명 수배자들이 가장 많이 몰려 있던 곳은 자이르와 케냐였다. 부패로 악명이 높던 그 두 나라의 대통령 모부투 세세 세코와 다니엘 모이는 하비아리마나의 절친한 친구로 그의 미망인 아가트 여사를 극진히 대접했다. 특히 모부투는 하비아리마나가 살아 있을 때 그를 ‘막내동생‘이라고 불렀을 정도였다. 그의 유해는 아무도 모르게 집단 탈주자들틈에 섞여 국경을 넘어 고마로 운반된 뒤 모부투의 사유지에 있는 묘지에묻혔다. 유엔이 르완다에 파견한 검사팀 책임자였던 마다가스카르 출신의 오노레 라코토마나나에게 자이르나 케냐 사람을 기소할 의향이 있느냐고 묻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그 두 나라 모두 국제 조약 가맹국들입니다." 하지만 1997년 해임되기 전까지 거의 2년 동안 라코토마나나는자이르 조사관을 파견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런 가운데 1995년 10월 케냐 대통령 모이는 유엔 재판소를 ‘날치기 기구‘ 라고 매도하면서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나는 그 사람들이 소환장을 가지고 케냐에 들어와우리 국민들을 데려가는 것을 절대 좌시하지 않겠다. 만약 그들이 이곳에온다면 모두 체포할 것이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지킬 것이다. 누구든우리를 괴롭힌다면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카가메는 아프리카 독재자들이 인맥을 형성해 서로를 보호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우리 아프리카 형제들한테도 배신감을 느낀다"고 말했다. 그리고 스산한 어조로 이렇게 덧붙였다. "그들은 이곳에서 일어난 일이 어디에서나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그러니까 바로 자기네 나라에서도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확신하건대, 그런 일이 일어나면그들은 우리 땅으로 도망쳐 올 것입니다. 당장 내일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그런 일들은 이미 일어났고, 또다시 일어날 수 있습니다." - P312

하지만 불명예를 안고 쫓겨났어도 신디쿠브와보는 후투 파워 권력층에게 희생양으로서 여전히 쓸모가 있었다. 고마 서쪽 10마일 지점의 키부호 북단에 계속 사령부를 두고 있던 전 르완다 정부군 지도자들은 시간이지나자 망명정부와 거리를 두면서 새로운 정치 전선 조직을 속속 만들었다. 조직의 수뇌부는 세상에 ‘깨끗하다‘는 인상을 줄 수 있도록 제노사이드와 관련이 없다고 알려진 사람들로 채워졌다. 그런 조직 가운데 르완다민주공화당이 가장 눈에 띄었다. 르완다 민주공화당은 난민 위기를 애국전선 탓으로 돌리면서 귀환의 선결 조건으로 전면 사면을 요구하고 나섰다. 이러한 선전 전략에 힘입어 르완다 민주공화당은 구호 단체와 언론관계자들에게 큰 호응을 얻었다. 유엔 난민기구 직원들은 난민촌을 방문할 때마다 일부러 르완다 민주공화당 지도자들을 내게 소개하곤 했다. 나는 그 점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들은 신디쿠브와보와 똑같은 말을 했다. 그런데도 인도주의 단체들은 그들이 사려 깊고 정당하며 난민들의 목소리를 대변하고 있다고 확신하는 듯했다. BBC는 자이르, 케냐, 브뤼셀에서 활동하는 르완다 민주공화당 대변인들을 ‘난민의 대표자라고 보도했다. 르완다 민주공화당이 제노사이드 주동자들과 연계되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실은 그랬다. 고마의 전르완다 정부군 사령부가 조종하는 그림자 후투 파워 정권과 르완다 민주공화당 요원들은 자이르의 난민촌을 완전히 장악한 채 가구 단위로 매달 현금 또는 배급받은 구호식량 일부를 세금으로 거두어들였을 뿐만 아니라 집으로 돌아가려는 사람들을 협박했다. - P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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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만 해도 수반을 잃은 정부를 누가 지배하고 있는지 정확히 아는사람이 없었다. 하지만 바리케이드, RTLM 아나운서의 자신에 찬 목소리길거리에서 벌어지는 살인 보도 등으로 미루어볼 때 후투 파워가 쿠데타를 주도하고 있는 것이 거의 확실했다. 실제로 그랬다. 하비아리마나를암살한 사람들의 신원이 밝혀진 바는 없지만 모두 그의 측근 가운데 극렬분자들이 저지른 소행이라고 의심하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특히 하비아리마나 여사와 절친한 친구이자 아카주 창립 회원인 테오네스트 바가소라 대령이 배후 인물로 꼽혔다. 그는 이미 1993년 1월에 세상의 종말을준비하고 있다고 말한 바 있었다. 하지만 하비아리마나를 누가 살해했든간에 제노사이드를 기획한 자들은 그의 죽음을 즉시 이용할 만반의 채비를 하고 있었다. 르완다의 후투 파워 상층부가 그날 밤 제노사이드 계획을 실행에 옮기는 동안, 역시 대통령을 잃은 부룬디에서는 군대와 유엔 방송이 침착하라는 방송을 내보냈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 P142

그러고 나서 투치족에 대한 전면적인 숙청이 시작되었다. 유엔군은살인자들을 저지하지 못했다. 외국 정부들은 서둘러 대사관 문을 걸어 잠그고 자국민들을 철수시켰다. 하비아리마나 여사 같은 특별한 몇몇 경우를 제외하고는 구조를 호소하는 르완다인들은 모두 버림받았다. 그녀는프랑스군 수송기 편으로 신속히 파리로 이송되었다. 평화 협정 이행이 교착 상태에 빠져 있는 동안 언제라도 전투를 재개할 준비를 하고 있던 르완다 애국전선은 하비아리마나가 사망한 지 24시간이 채 지나지 않아 키갈리 주둔지에서 병력을 이동시켜 국회 의사당 주변의 고지를 장악한 데이어 북동쪽의 ‘비군사 지대‘에서 대규모 공격을 개시했다. 정부군은 거세게 반격하며 국민들이 계속 살인 작업에 몰두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했다. RILM 아나운서는 고소하다는 듯이 "바퀴벌레들아, 이제 곧 너희도살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게다. 너희가 우리를 죽이도록 놔두지않겠다. 우리가 너희를 죽일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런 식의 메시지와 사회 각계각층 지도자들의 격려에 힘입어 투치족 학살과 반정부 성향의 후투족에 대한 암살은 르완다 곳곳으로 퍼져나갔다. 후투족 젊은이들과 노인들도 민병대를 본받아 살인 임무에 가담했다. 이웃이 이웃을 집에서 칼로 찔렀고, 동료가 동료를 향해 일터에서 칼을 휘둘렀다. 의사들은 환자들을 살해하고, 학교 선생들은 학생들을 살해했다. 겨우 며칠 만에 대부분의 마을에서 투치족 거의 모두가 목숨을 잃었고, 키갈리에서는 죄수들이 도로에 즐비한 시체를 수거하는 작업에 투입되었다. 르완다 전역에서 살인에 이어 집단 강간과 약탈 행위가 이루어졌다. 술에 취한 민병대원들이 약국을 약탈해 손에 넣은 각종 향정신성약품을 복용하고 버스로 이곳저곳을 누비며 사람들을 마구 죽였다. 라디오 아나운서는 청취자들에게 여성들과 아이들에게도 인정을 베풀지 말라고 독려했다. 살인자들을 더욱 고무하는 방법의 일환으로 라디오, 소파, 염소 등과 같은 투치족의 재산을 미리 분배한 것은 물론이고 심지어는 여자를 강간할 수 있는 기회까지 보장했다. 키갈리의 한 시의회 여성 의원은 투치족의 머리를 잘라올 경우 50르완다프랑(당시의 화폐 가치로 약 30센트에 해당함)을 나누어 주었다는 얘기도 있다. 이런 관행은 ‘양배추 팔기‘로 알려졌다. - P144

밀 콜린스 호텔에서 맥주는 많은 사람의 생명을 구했다. 임시 지배인 폴 루세사바기나는 전쟁 중인 도시에서는 술값이 오르기 마련이라는점에 착안해 중간 상인 여러 명과 연락하며 호텔 술 창고를 늘 가득 채워놓았다. 그는 술을 구입하면서 손님들이 굶어 죽지 않도록 고구마와 쌀도 충분히 준비했다. 그런 사업을 하려면 군대 지휘관들의 비위를 맞춰야 하는데 그는 뇌물을 최대한 활용했다. 그는 "술을 이용해 사람들을 구워삶았지요"라고 말하며 웃음을 터뜨렸다. 그가 구워삶은 사람들은 후투파워 지도자들이었다. 그가 그들을 구워삶았다는 말은 그들에게 술을 상남해 호텔에 피신한 사람들을 죽이지 못하게 했다는 뜻이다. "그들에게술은 물론이고 때로는 돈도 주었지요." 그가 매수한 르완다 정부군 사령관 오귀스탱 비지뭉구 소장도 수시로 호텔을 드나들며 잇속을 챙겼다.
"다들 찾아왔지요. 나한테 그들이 원하는 게 있었으니까요. 그러거나 말거나 내게 중요한 문제는 아무도 내 호텔에서 끌려 나가지 않게 하는 것이었지요."
폴은 온화한 성품과 건장한 체격에 부르주아 호텔 지배인치고 다소 평범해 보이는 외모를 지니고 있다. 그 역시 스스로를 보통 사람이라고 생각할 뿐 자신의 주변에서 소용돌이치는 광기에 맞서 싸웠으면서도 그런 행동을 비범하다고 여기지는 않는 듯했다. 그의 말을 직접 들어보자.
"사람들은 모두 바보가 되고 말았지요. 왜 그런지 그 이유는 모르겠습니다. 나는 사람들에게 지금 선생에게 말하듯이 대놓고 ‘나는 당신이 하는일에 동의하지 않습니다‘라고 말하곤 했지요. 나는 아니라고 말해야 할때는 그렇게 말하는 사람입니다. 당시에도 마찬가지였어요. 나는 그저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했을 뿐입니다. 살인자들에게 절대 동의할 수없었으니까요. 나는 그들을 지지하지 않았고, 그래서 그런 내 생각을 그들에게 솔직히 말했지요." 물론 많은 르완다인이 제노사이드에 동의하지않았다. 하지만 많은 사람이 내키지 않는데도 결국 살인에 동참했다. 수없이 많은 사람이 그저 자기 한 목숨 부지하는 데 급급했다. 폴은 할 수만있다면 모든 사람을 구하고자 애썼다. 그들을 죽이고자 하는 사람들과 협상해야 한다면 그는 기꺼이 그 일을 감수했다. - P159

키베호의 산꼭대기 성소에 동정녀 마리아가 마지막으로 모습을 드러낸 때는 1994년 5월 15일이었다. 당시 교구 내에 얼마 남지 않은 투치족생존자들은 여전히 살인자들의 추격을 받고 있었다. 이미 몇 달에 걸쳐 수천 명의 투치족이 키베호에서 살해되었고 가장 규모가 큰 학살이 그곳성당에서 일어났다. 살인자들이 손으로 죽이는 일에 지쳐 성당에 불을 질러 산 자들과 죽은 자들을 제물로 삼을 때까지 살인 행위는 며칠 넘게 이어졌다. 화재가 일어나기 전 며칠 동안 피에르 은고가 신부는 피란민들을보호하기 위해 애쓰다 결국 목숨까지 잃었지만 생존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그 지역의 또 다른 신부 타데 루싱기잔데크웨는 여러 차례 인테라함웨단원들을 이끌고 살인을 주도했다. 타데 신부는 민병대 대원들처럼 바나나 잎사귀로 만든 옷을 걸치고 소총을 들고 다니면서 군중을 향해 총을쏘아댔다고 한다.
가톨릭교회 지도층이 그런 식으로 분열된 상황에서 5월 15일의 성모발현은 제노사이드라는 문제에 신학 차원의 해결책을 제시했다. 성모 마리아 발현을 목격한 발랑틴 은이라무키자가 마리아에게서 직접 들었다는 말의 정확한 내용은 지금은 유실되고 없다. 하지만 그 메시지는 당시 르완다 라디오 방송을 통해 보도되었다. 많은 르완다 사제들과 밀 콜린스호텔에서 방송을 청취한 토마 카밀린디 같은 기자들은 방송에서 동정녀마리아가 하비아리마나 대통령이 지금 천국에서 자기와 함께 살고 있다고 말했다는 골자의 보도를 내보냈다고 증언했다. 그녀의 말은 하느님이 제노사이드를 지지한다는 의미로 널리 해석되었다. - P172

르완다 애국전선 지도부는 시내의 한 운동장에 정부군 포로 수천 명을 가두어놓고 후투 파워가 쉽게 이해할 수 있는협상 조건, 즉 ‘너희가 그들을 죽이면 우리도 이들을 죽이겠다‘는 조건을제시했다. 전선을 사이에 두고 한 차례의 교섭이 이루어졌다. UNAMIR가 교섭을 중재했고 수송 수단을 제공했다. 바로 그 무렵 유엔이 피란민들을 구했다는 소식이 널리 보도되었다. 하지만 진실은 달랐다. 피란민들이 죽음을 모면할 수 있었던 이유는 르완다 애국전선이 정부군 포로들을죽이겠다고 위협했기 때문이다. - P181

나는 조사에 착수했다. 그 결과 제노사이드가 자행될 때까지만 해도르완다에 개들이 많았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사람들은 당시에 개가 많았다‘ 또는 ‘흔했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르완다 애국전선이 북동쪽에서르완다로 진격해 들어오면서 개들을 모조리 쏘아 죽였다.
르완다 애국전선은 어째서 개의 씨를 말렸을까? 물어보는 사람마다한결같이 개가 시체들을 먹어치웠기 때문이라고 대답했다. 누군가가 내게 "영화에서는 볼 수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나는 르완다에서 직접 목격한 개들보다 더 많은 개들을 이후에 비디오 화면을 통해 보았다. 개들은르완다 특유의 붉은 토양 한가운데 웅크리고 앉아 여기저기 널린 시체 더미 위에서 배를 불리고 있었다.
의료 봉사 단체에서 활동하던 한 영국 여성이 르완다 애국전선이 카브가이 주교관구에 있는 대성당에서 시체 몇 구를 뜯어먹고 있는 개들을총으로 쏘는 모습을 보고 크게 분개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제노사이드당시 그 성당은 르완다 중부 지역의 집단 처형장이었다. 그녀는 군인들에게 개들에게 총을 쏘면 안 돼요"라고 말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녀는 반만 알았다. 심지어 푸른 헬멧의 UNAMIR도 1994년 늦여름부터 눈에 보이는 족족 개들을 쏘아 죽였기 때문이다. 그 전까지 르완다인들은 유엔군이 과연 총 쏘는 법을 알기는 하는지 궁금하게 여기고 있었다. 그렇게 성능이 우수한 무기를 무고한 시민들의 살상을 막는 데 사용하는 모습을 단한 번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몇 달 후 평화유지군의 사격 솜씨는 매우 뛰어난 것으로 드러났다.
제노사이드는 사실상 국제 사회의 용인 아래 이루어졌다. 그리고 들은 바에 따르면 유엔은 시체를 먹는 개를 공중위생 문제로만 간주했다. - P185

푸른 헬멧을 쓴 벨기에 군인 열 명이 살해된 지 일주일 뒤인 1994년 4월 14일, 벨기에는 UNAMIR에서 발을 뺐다. 후투 파워가 의도한 대로였다. 벨기에 군인들은 임무를 제대로 완수하지 못하고 비겁하게 꽁무니를빼는 것에 불만을 품고 유엔 베레모를 갈기갈기 찢어 키갈리 공항 활주로에 집어던졌다. 그로부터 일주일 뒤인 1994년 4월 21일, UNAMIR 사령관 달레르 소장은 정예 부대 5,000명과 후투 파워를 진압할 수 있는 재량권만 있다면 제노사이드를 신속하게 저지할 수 있다고 말했다. 적어도 내가 알고 있는 군사 분석가 가운데 그의 판단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여태까지 아무도 없다. 거의 모두가 그의 판단이 옳았다고 생각한다. 일단 RTLM 라디오 송신기만 제거하면 작전은 순조롭게 끝났을 터였다. 하지만 같은 날 유엔 안보리는 UNAMIR를 90퍼센트나 축소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켜 270명의 군인만 남겨두고 전원 철수할 것을 지시했을 뿐 아니라 남아있는 군인들에게도 샌드백 뒤에 웅크리고 앉아 가만히 사태를 지켜보는 일 외에는 다른 임무를 허락하지 않았다.
르완다 주둔 유엔군의 철수는 후투 파워가 그때까지 거둔 가장 큰 외교상의 승리였다. 이는 거의 미국 단독의 공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당시 백악관은 소말리아에서의 패배가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게 남아있는 와중에 대통령령 제25호‘로 불리는 문건의 초안 작업을 막 끝낸 상태였다. 이 문건에는 미국이 유엔의 평화유지 활동에 참여하지 않아도 되는 구실이 조목조목 열거되어 있었다. 달레르 장군의 병력 보충과 작전재가 요청이 미군의 파병으로까지 이어지지는 않으리라는 점이나 작전임무가 평화유지가 아니라 제노사이드를 저지하는 데 있다는 점은 그리중요하지 않았다. 대통령령 제25호에는 워싱턴 정책 입안자들이 이른바어법"이라고 부르는 것, 다시 말해 미국이 개입을 원하지 않는 작전 임무에는 다른 나라들도 설득해 참여하지 않게 해야 한다고 촉구하는 내용도 포함되어 있었다. 사실 클린턴 행정부가 유엔 대사로 파견한 매들린올브라이트는 르완다에 허수아비나 다름없는 270명의 군인을 남겨두는것조차 반대했다. 후일 올브라이트는 (나치를 피해 도망친 체코 피란민의 한사람으로서) 유화 정책을 눈곱만큼도 허용하지 않을 뿐 아니라 미국 군대를 해외에 보내 잔혹한 독재자와 범죄 국가를 응징하는 ‘뮌헨의 딸‘이라는 평판에 힘입어 미국 국무장관 자리에까지 올랐다. 르완다 사태와 관련해 그녀의 이름이 거론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 하지만 사망자 숫자가 천명 단위에서 만 명 단위를 넘어 십만 명 단위로 불어나는 동안 그녀는 자신의 책임을 회피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다른사람들도 그렇게 하도록 설득해 결국 정치인으로서의 경력에 돌이킬 수 없는 흠집을 남기고 말았다. - P188

따라서 프랑스가 인도주의 차원의 군대 파견을 미처 언급하기도전에 르완다 애국전선은 이미 르완다 동부를 장악한 상태였다. 그들은 키리 북쪽과 남쪽까지 아우르며 꾸준히 서쪽으로 진격하고 있었다. 르완다애국전선은 자신들이 장악한 지역에서 투치족에 대한 학살 규모가 어느정도였는지를 전 세계에 알렸다. 반면 르완다 정부 지도자들과RTIM은르완다 애국전선이 후투족을 발견하는 족족 죽이고 있다고 주장했고, 프랑스군 대변인은 사태를 ‘상호 간 제노사이드‘로 몰아가면서 르완다 애국전선을 ‘크메르누아르‘라고 불렀다. 하지만 르완다 애국전선은 질서회복에 전념하는, 놀라울 만큼 규율이 엄격하고 일사불란한 반군이라는인상을 국제 언론에 심어주었다.
당시 약 2만 명의 전사들로 구성되어 있던 르완다 애국전선은 병력수가 두 배 이상인 데다가 민병대와 ‘자위‘ 명목으로 동원된 대규모 시민들의 지원까지 등에 업은 정부군을 거세게 밀어붙이고 있었다. 수많은 프랑스인을 비롯해 후투 파워의 안위에 관심이 있는 사람은 누구나 이런 질문을 떠올리지 않았을까 싶다. ‘도대체 무엇이 잘못되었을까? 가장 간단한 대답은 2차 세계대전 말기의 독일군처럼 르완다의 후투 파워 정권도 제노사이드라는 과업을 완수하는 데 주력하느라 정작 전선은 신경 쓰지 못했다는 사실에서 찾을 수 있다. 하지만 그보다 좀 더 미묘한 역학도 작용했다. 후투 파워 극렬분자들은 1990년 르완다 애국전선과 전쟁을 개시한 이후로 후투족이 희생자라는 전도된 논리를 구사하면서 제노사이드의 열기를 부추겼다. 그 결과 후투 파워는 정치적 목적의 무자비한 집단살인이 심심찮게 자행되어온 한 세기를 통틀어 가장 잔혹한 범죄를 저질렀고, 그런 혐의를 벗으려면 계속 희생자 역할을 자임하는 수밖에 없었다. 후투 파워 지도자들은 르완다를 르완다 애국전선에 넘겨준 후 엄청난무리를 이끌고 피란길에 오르는 방법을 통해 신민들에 대한 통제력을 계속 행사하면서, 유엔이 지원하는 난민촌에 잔류 ‘난민‘ 국가를 세워 자신들의 두려움이 현실로 나타난 것처럼 위장할 수 있었다. - P195

카가메는 부하들이 프랑스 군대를 억류하고 있을 당시 달레르 장군을 통해 긴박하게 협상을 진행해야 했던 상황도 기억해냈다. 그의 말을들어보자. "프랑스 군대는 헬리콥터를 투입해 우리 군대와 진지를 폭격하겠다고 위협했습니다. 나는 서로 잘 논의해 문제를 평화롭게 해결할 생각이 있지만 굳이 싸움을 하고 싶다면 기꺼이 응하겠다고 말했습니다." 결국 프랑스 군대는 자기 군인들을 풀어달라고 요청했고 카가메 장군은 그들을 돌려보냈다. 우간다에서 르완다 난민으로 성장한 카가메는 영어를사용했다. 그는 프랑스가 영어를 사용하는 르완다인들이 후투 파워 신봉자라고 부르는 대량 학살범을 지원하는 이유를 이해할 수 없다면서, 르완다가 영어권에 편입될까 봐 두려워하는 프랑스의 태도에 고소를 금치 못했다. "프랑스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이곳에 살기를 원한다면 프랑스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을 죽이는 일을 거들지 말았어야지요." - P199

르완다 애국전선의 전위 부대는 패주하는 정부군으로부터 나라를 완전히 장악하기 위해 폭도 무리를 뒤쫓아 후투 파워의 심장부인 북서쪽으로 진격했다. 7월 12일 국제적십자위원회 의장은 제노사이드로 100만 명이 살상되었다고 발표했다. 7월 13일 반군은 하비아리마나의 옛 본거지인 루헨게리를 장악했고, 그 후 이틀 동안 50만 명에 달하는 후투족이 국경을 넘어 고마로 달아났다. 7월 15일 미국은 르완다의 후투 파워 정부를외교 관계 대상에서 제외하는 한편 르완다의 워싱턴 대사관을 폐쇄했다. 7월 16일 후투 파워 지도자와 각료 대부분이 튀르쿠아즈 지역으로 도망쳤다. 프랑스는 그들을 체포하겠다고 약속했지만 7월 17일 그들은 바가소라 대령의 측근들과 함께 자이로 건너갔다. 이 무렵 자이르로 몰려든르완다 난민은 100만에 육박했다. 같은 시기에 르완다 애국전선은 종족에 상관없이 아루샤 협정의 권력 배분 원칙에 따라 키갈리에 새 정부를수립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7월 18일 르완다 애국전선은 집중 포격 끝에기세니를 손에 넣은 데 이어 자이르와 인접한 북서쪽 국경 지역 장악에나섰다. 7월 19일 후투 파워에 반대했던 야당 지도자들과 르완다 애국전선이 연합해 키갈리에 새 정부를 수립했으며, 뉴욕에서는 쫓겨난 제노사이드정부의 유엔 주재 대사가 유엔 안보리의 결정에 따라 의석을 내놓고물러났다. 그 후 르완다 애국전선은 르완다 애국군으로, 패주한 르완다정부군은 전 르완다 정부군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이로써 르완다 애국전선은 반군 운동을 이끌어 결국 새 정부의 기틀을 마련한 정치 조직을가리키는 이름으로 남게 되었다. 7월 20일 전 르완다 정부군과 인테라함웨는 자이르로 공수되는 난민용 비상 구호 식품과 물자를 약탈하기 시작했다. 같은 날 새로 조성된 고마 난민촌에서 콜레라가 발생했다는 보고가처음으로 나왔다. 그와 더불어 제노사이드는 흘러간 이야기가 되기 시작했다. - P202

이 모든 상황은 특별히 감지하기 어렵지도 은밀하게 진행되지도 않았다. 8월 말에 프랑스 군대가 마침내 튀르쿠아즈 지역에서 철수하자 후투파워 지지자들이 대거 포함된 50만 명의 후투족이 부룬디로 이주하거나 자이르의 부카부를 경유해 키부 호 남쪽 끝자락의 집단 난민촌으로 이주했다. 고마는 여전히 상황이 가장 열악한 난민촌이었지만 유엔이 난민촌을 개설하는 곳마다 전 르완다 정부군과 인테라함웨는 곧바로 모습을드러냈다. 국제 인도주의 법은 거주자들의 본국으로부터 50마일 이내에난민촌을 건설하는 것을 금지한다. 하지만 르완다인들의 난민촌은 모두 규정보다 본국에 더 가까운 곳에 위치했다. 대부분 탄자니아, 부룬디, 자이르와 맞닿은 르완다 국경에서 몇 마일도 채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었다. 르완다 후투족 인구의 거의 1/3이 이들 난민촌에 거주했다. 물론 이는나머지 2/3, 즉 400만 명 이상은 르완다에 머무는 쪽을 선택했다는 뜻이다. 콜레라와 고마의 힘든 현실은 많은 난민들에게 고향을 떠나지 않았더라면 더 나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불러일으켰다. 하지만 고향으로 돌아가겠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종종 르완다 애국전선의 공모자로 몰렸고더러는 난민촌 민병대의 손에 살해당하기도 했다. 무고한 난민들이 모두떠나면 범죄자들만 남게 될 테고, 그럴 경우 후투 파워가 국제 사회의정을 끌어낼 명분이 사라지기 때문이었다. - P207

물론 몇몇 살인자들의 경우에는 물질적인 이익과 거주 공간의 확대가 살인의 동기였다. 하지만 방글라데시를 비롯해 지독하게 가난하면서인구 밀도까지 높은 나라가 지구상에 많은데 그런 나라에서는 어째서 제노사이드가 일어나지 않았을까? 인구과잉으로는 수십만 명의 인구가거의 100만명에 가까운 이웃을 겨우 몇 주 만에 모두 해치우기로 합의한이유를 설명하기 어렵다. 사실 그 무엇으로도 그 이유를 온전히 설명할수는 없다. 물론 식민지 이전 시대의 불평등, 철저한 위계질서에 입각한중앙집권제, 함족 신화, 벨기에의 통치 아래 불거진 종족 양극화, 1959년후투 혁명과 더불어 시작된 살인과 추방, 투치족 피란민들의 복귀를 거부한 하비아리마나의 정책, 다수당 체제의 혼란, 르완다 애국전선의 공격, 전쟁, 후투 파워의 극단주의, 선전·선동, 관행처럼 빈번하게 일어나던 학살, 다량의 무기 수입, 권력 배분과 통합이 가져온 평화가 하비아리마나 과두 체제에 가한 위협, 극심한 가난, 무지, 미신, 압제 속에서 늘 기죽어 지내며 대부분 술에 찌들어 살아가던 소작농들의 두려움. 국제 사회의무관심 등 조금이라도 가능성이 있어 보이는 요인을 모조리 찾아내 하나로 조합해보면 제노사이드가 횡행했던 이유가 확연히 이해되면서 그런사태는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고 결론 내리게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인구열 명에 한 명꼴로 목숨을 잃은 그런 대규모의 학살이 일어날 만한 근거는 찾기 힘들었다. - P221

그 다음 일주일 동안 키베호에서 나오는 도로란 도로는 비에 흠뻑 젖은채 고향으로 향하는 피란민 행렬로 북새통을 이루었다. 도로 여기저기에서 시민들이 떼 지어 몰려나와 집으로 돌아가는 피란민들에게 욕설을퍼붓고 심지어는 주먹질까지 했다. 르완다로서는 모진 시련의 기간이었다. "작년. 그러니까 세상의 그 누구도 제노사이드를 막으려고 노력하않을 때 르완다 애국전선이 르완다를 해방시키려고 진격해 오는 광경을보고 이들이 영웅이로구나, 하는 생각에 곧바로 선두의 군인에게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습니다. 하지만 키베호 사건 이후에는 손을 어디다 내밀어야 할지 모르겠어요." 스위스 적십자 대표 페리 알랑의 말이다.
키베호 난민촌에서 귀환한 사람들 가운데 체포나 폭력을 경험한 사람들의 비율은 다른 난민촌에서 귀환한 사람들에 비해 조금 더 높을 뿐이다. 하지만 키베호 난민촌에 있던 후투 파워 지지자 상당수는 숲으로도망쳐 르완다 국경 너머 유엔 관할 아래 있는 인도주의 난민촌으로 피신했다. 제노사이드 주동자들에게 그보다 안전한 천국은 더 이상 없었다. - P238

게릴라 군대 시절 르완다 애국전선은 정치 교육과 더불어 엄격한 규율로도 명성이 자자했다. 아프리카 대부분의 지역에서 군인의 제복과 총은 일종의 약탈 허가권으로 간주되어왔다. 르완다에서 4년을 싸우는 동안 르완다 애국전선은 간부들에게 결혼은 물론 연애까지 금지했다. 도둑질을 할 경우 채찍으로 처벌받았고, 살인이나 강간 같은 범죄를 저지를경우에는 장교든 사병이든 가리지 않고 처형되었다. 카가메 장군은 이렇게 말했다. "다른 사람에게 그렇게 심한 짓을 하고도 멀쩡하게 지낸다는것은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병사들은 그 점을 존중했고, 그 결과 건전한 정신과 기강이 형성됐지요. 무장한 사람들에게 하고 싶은 일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자유를 주어선 안 됩니다. 무기를 함부로 사용해선 안 됩니다. 무기를 함부로 사용할 기회가 주어진다면 그 사람은 사회에 매우큰 위험이 될 수 있습니다. 분명한 점은 군인의 임무는 사회를 보호하는것이라는 겁니다."
1994년 7월, 전쟁이 끝나자 국제 구호 단체 관계자들까지도 르완다애국전선을 경외의 눈길로 바라보면서 흥분에 들떠 그 대의와 행동의 정당성을 확신한다고 말했다. 물론 르완다 애국전선이 인도주의라는 동기에서 전쟁에 나섰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지구상에서 유일하게 1948년 제노사이드 협약의 조항을 충실하게 이행한 무력이었다는 점은 분명했다.
물론 르완다 애국전선이 제노사이드를 주동한 것으로 알려진 사람들을상대로 보복성 살인을 수행했으며 후투족 시민들에게 잔학 행위를 저질렀다는 데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1994년 국제사면위원회는 4월과 8월사이에 ‘비무장 상태의 시민과 포로로 붙잡힌 적군 수백 명, 어쩌면 수천명‘이 르완다 애국전선 병사들에게 살해당했다고 보고했다. 하지만 제노사이드가 잦아들기 시작한 며칠 동안 구호 단체 관계자들에게 가장 깊은인상을 남긴 것은 따로 있었다. 다름 아니라 고향과 가족이 완전히 사라지고 없는데도 반군들이 전반적으로 보여준 자제심이었다. - P270

상황이 이러하니, 조국을 떠나 난민으로 지내는 투치족들이 더 이상귀향의 꿈을 꾸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부모와 형제자매들, 일가친척들이 모두 살육당했다는 소식을 듣고선, 제명대로 살려면 외국의 안전한 망명지에 그대로 남아 있는 게 상책이라고 판단하지 않겠느냐고. 그 사람들이 미치지 않으려면 르완다를 다시 ‘고향이라고 부를 수 있는 날이 오리라는 희망을 영원히 접는 수밖에 없지 않겠느냐고. 하지만 해외 난민들은 피가 채 마르기도 전에 르완다로 꾸역꾸역 돌아오기 시작했다. 수만 명이 르완다 애국전선의 바로 뒤를 따라 돌아왔고, 곧이어 수십만 명이 그 뒤를 이었다. 투치족 귀환자들과 도망치는 후투족 군중이 국경에서 서로 마주쳤다.
아프리카 전역에서뿐만 아니라 저 멀리 취리히와 브뤼셀, 밀라노, 토론토, 로스앤젤레스, 라파스에서도 르완다로 돌아오는 사람들이 줄을 이었다. 르완다 애국전선이 키갈리를 해방하고 나서 9개월 뒤, 망명해 있던투치족 75만 명 이상이 (100만 마리에 가까운 소 떼와 함께) 르완다로 돌아왔다. 이는 사망자를 거의 대체하는 숫자였다. 보나방튀르는 키갈리로 돌아왔을 때 낯익은 얼굴은 거의 보지 못했다면서 행방불명된 사람들뿐만아니라 처음 보는 사람들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다. 르완다인들이 내게 르완다에 얼마나 있었느냐고 물을 때면 나도 그들에게 똑같은 질문을 던졌다. 그 나라에서 몇 달 지내고 나자 내가 만나는 르완다인 가운데 나보다 더 오래 그 나라에서 지낸 사람을 찾기가 어려웠다. 사람들에게 돌아온이유를 물어보면 그때마다 주로 누가 살았는지 보려고, 자신들이 도울 수있는 일이 무언지 알아보려고 왔다는 대답이 나왔다. 그러면서 거의 매번이렇게 덧붙였다. "고향에 오니까 좋아요."
기묘하고 작은 나라 르완다는 또다시 전 세계에 역사상 전례가없는대서사를 보여주었다. 오랫동안 난민 네트워크를 운영하면서 의식화와기금 조성, 병력 모집 작업을 해온 르완다 애국전선 지도자들조차도 귀환인파의 규모에 깜짝 놀랐다. 과연 무엇이 한 번도 르완다 땅을 밟아본 적이 없는 이 수많은 사람이 상대적으로 안정되고 안전한 생활을 버리고 묘지에 정착하도록 움직였을까? 대대로 내려온 추방이라는 유산과 망명 생활의 서러움, 나아가 조국에 대한 기억 또는 그리움이 모두 그 이유였다.
제노사이드에 맞서겠다는, 하마터면 이 세상에서 완전히 사라질 뻔한 나라의 당당한 일원이 되겠다는 공동의 의지도 이유 가운데 하나였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의 경우 그러한 의지와 금전상의 이득을 보겠다는 마음이함께 뒤섞여 있었다. - P2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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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완다인들에게는 예전부터 그런 현실이 익숙한 광경이었지만, 국제원조 단체들이 보기에 르완다는 식민 통치에서 벗어난 다른 아프리카 국가에 비하면 에덴동산이나 마찬가지였다. 아프리카 대륙 어디를 둘러보나 냉전 시대의 열강을 등에 업고 약탈과 살인으로 국가를 다스리는 독재자가 즐비했고, 독재에 저항하는 반군들은 백인 개발 담당자들은 도저히이해할 수 없는 반제국주의 구호를 소리 높여 외쳐댔다. 하지만 르완다는북서쪽의 휴화산들처럼 조용했다. 도로 여건도 좋았고, 교회 출석률도 높았으며, 범죄율도 낮았고, 공중위생과 교육 수준도 꾸준히 높아지고 있었다. 만일 우리가 해외 원조 예산을 집행한다면 거짓말을 하거나 변명을늘어놓는 능력보다는 매년 회계 연도를 마감할 때마다 누구나 만족할 만한 통계 보고서를 제출하는 능력에 따라 전문 관료로서의 성공 여부가 판가름 날 것이다. 그런 곳으로는 르완다가 제격이었다. 벨기에는 옛 식민지에 돈을 쏟아부었고, 프랑스도 아프리카에 프랑스어권 국가를 늘린다는 신식민주의 정책에 따라 1975년부터 하비아리마나 정권에 군사원조를 제공하기 시작했다. 스위스 또한 다른 어떤 나라 못지않게 르완다에 개발 원조를 아끼지 않았다. 이 밖에 워싱턴, 본, 오타와, 도쿄, 바티칸시티도 키갈리와 자매결연을 맺고 구호금을 보내왔다. 르완다 산지마다 은연중에 하비아리마나의 영광을 위해 일하는 젊은 백인 일꾼들이 북적였다. - P97

문제가 많아질수록 새로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들도 늘어났다. 다양한 형태의 후투족 야당이 제각기 목소리를 내며 르완다 일 년 예산의 약60퍼센트에 해당하는 액수를 원조하는 서방 국가들의 관심을 끌기 위해로비 활동을 벌였다. 운 좋게도 시기가 딱 맞아떨어졌다. 1986년 11월(오데트가 해고당하던 달이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면서 냉전의 승자가 된서유럽과 북아메리카는 아프리카 종속국들에 민주화를 요구했다. 거의협박이나 다름없는 요구였지만 하비아리마나는 가장 비중이 큰 후원자였던 프랑스의 프랑수아 미테랑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가진 뒤, 1990년 6월르완다에 다수당 체제를 도입해야 할 시기가 왔다고 깜짝 선언을 했다.
개혁을 대하는 하비아리마나의 태도는 눈에 띌 정도로 무성의했다. 그도 그럴 것이 외국의 강요에 못 이겨 어쩔 수 없이 내린 조치였기 때문이다. 이제 권력을 놓고 공개 경쟁을 해야 한다는 생각은 르완다 전역에 안도감이나 흥분보다는 불안을 야기했다. 하비아리마나와 그의 권력에기대고 있던 북서쪽 주민들은 기득권을 쉽게 포기하려 들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었다. 하비아리마나가 공개 석상에서 정치 개방을 부르짖는 사이 아카주는 권력의 고삐를 더욱 단단히 움켜쥐었다. 변화의 요구가 강해질수록 억압의 강도도 더욱 강해졌고, 개혁을 옹호하던 지도자들 상당수가 망명길에 올라야 했다.
그런 가운데 1990년 10월 1일 오후, 우간다에 본부를 둔 반군 조직인 ‘르완다 애국전선‘이 하비아리마나 정권을 상대로 전쟁을 선포하고 독재와 부패와 ‘난민을 양산하는 추방 정책을 종식할 정치 개혁을 요구하며 르완다 북동쪽 국경을 침공했다. - P104

전쟁은 각기 그 양상이 다르다. 후투 파워도 곧 특이한 양상을 띠기시작했다. 르완다 애국전선의 침공은 50명이 국경을 넘으면서 시작되었다. 곧이어 수백 명이 그 뒤를 따랐지만 전투 지역은 한곳, 즉 북동쪽 지역에 있는 국립공원 일부에 한정되었다. 싸울 상대가 르완다 애국전선이라면 그리로 올라가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침공이 있은 지 사흘 뒤인 10월 4일 밤, 키갈리 시내와 외곽에서 총성이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날이밝자 르완다 정부는 수도를 공격해 온 반군을 성공리에 물리쳤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이는 새빨간 거짓말이었고 전투는 없었다. 총성은 속임수였고 속임수의 목적은 분명했다. 즉 국가의 위기 상황을 과장해 국민들에 반군 동조 세력이 수도까지 침투했다는 인상을 심는 데 있었다.
르완다 애국전선의 침공은 하비 아리마나 독재 정권에 다원주의의 싹을 자를 수 있는 최상의 무기를 쥐어주었다. 그 무기란 바로 결속력을 다지는 데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공동의 적‘이라는 망령이었다. 국가의정체성이 곧 정치이고 정치가 곧 국가의 정체성이라는 국가 이데올로기의 논리에 따라 투치족은 모두 르완다 애국전선의 ‘동조자‘로 간주되었고, 그런 견해를 수용하지 않는 후투족은 투치족을 지지하는 반역자로 몰렀다.  - P105

은게제는 르완다의 소규모 무슬림 공동체의 일원이었다. 한 기독교지도자는 그가 속한 무슬림 공동체 사람들이 "품행도 아주 바르고 제노사이드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심지어는 투치족 무술림을 구하려고 애썼다고 증언했다. 하지만 은제의 진짜 종교는 ‘후투우월주의‘였다. 그가 쓴 가장 유명한 기사는 1990년 12월에 나온 「후투십계명」이었다. 후투 우월주의의 새로운 결정판이라고 할 수 있는 이 강령에서 그는 일필휘지의 솜씨로 함족 신화와 후투 혁명의 명분을 다시 살려내 이리저리 끼워 맞추면서 호전적인 후투족의 순수성을 하나의 교리로 체계화했다. 처음 세 가지 계명은 르완다를 방문하는 백인과 후투족특권층의 취향을 통해 끊임없이 강화되어온 끈질긴 인식, 곧 투치족 여성의 미모가 후투족 여성의 미모를 능가한다는 점에 초점을 맞추었다. 은게제의 주장에 따르면 투치족 여성은 모두 투치족 앞잡이였다. 투치족여성을 아내나 친구나 ‘비서나 첩으로‘ 둔 후투족 남성은 반역자로 간주해야마땅하고, 후투족 여성은 투치족 여성을 사랑하려는 충동에 빠지지 않도록 후투족 남성을 지킬 의무가 있었다. 그런 다음 은게제는 성에서 사업으로 화제를 옮겨 ‘투치족의 유일한 목적은 자기 종족의 패권‘이라며 투치족은 모두 사기꾼이라고 선언했다. 따라서 투치족과 거래하는 후부족역시 종족의 적이기는 마찬가지였다. 이러한 논리는 정치 생활에도 고스란히 적용되어 후투족이 ‘정치, 행정, 경제, 군사, 안보 분야의 요직을 모두 장악해야 했다. 나아가 후투족은 ‘공동의 적인 투치족‘에 맞서 일치단결해 1959년 혁명의 ‘후투 이데올로기‘를 공부하고 널리 알려야 하며, 이 이데올로기를 공부하거나 널리 알린다는 이유로 ‘후투족 형제를핍박하는 후투족은 누구든 반역자로 간주해야 마땅했다.
「후투 십계명은 전국으로 배포되어 크게 인기를 끌었다. 하비아리마나 대통령은 ‘르완다의 언론 자유‘를 입증하는 증거라며 은제의 기사를 치켜세웠다. 르완다 전역의 공동체 지도자들은 이 십계명을 법률과 똑같이 여기며 공동체 모임이 있을 때마다 큰 소리로 낭독했다. 물론 그 내용은 전혀 새로울 것이 없었지만 바야흐로 불기 시작한 성전의 바람과 후투 이데올로기를 의심하는 후투족에 대한 가차 없는 질타는 르완다에서 가장 배우지 못한 시골 농부에게도 경각심을 불러일으켰다. 가장 자주 인용된 여덟 번째 계명은 "후투족은 더 이상 투치족을 동정해서는 안 된다"였다. - P111

1975년에 프랑스와 르완다가 체결한 군사 협정은 프랑스 군대가 르완다의 전투에 개입하거나 전투 훈련을 지휘하거나 치안 업무에 관여하지 못하도록 분명히 못을 박았다. 하지만 미테랑 대통령은 하비아리마나를 좋아했다. 게다가 무기 상인이자 한때 프랑스 외무부에서 아프리카 담당 위원을 지낸 미테랑의 아들 장 크리스토프 역시 그를 좋아했다. 군비지출로 르완다 재정이 고갈되고 전쟁이 지루하게 이어지면서 르완다에서는 불법마약 거래가 성행했다. 군대 장교들까지 나서서 마리화나 농장을 조성했다. 장크리스토프 미테랑이 마약 거래를 통해 이윤을 챙겼다는 소문이 파다하다.)1994년 학살 직후 프랑스는 르완다에 막대한 군사 장비를 실어 날랐다. 1990년대 초반에도 프랑스 군대는 줄곧 르완다의 원군으로 활동하면서 항공 교통 관제와 르완다 애국전선 포로들의 신문에서부터 일선 전투에 이르기까지 사실상의 전권을 행사했다. - P113

르완다의 투치족이 대부분 그렇듯이 전쟁이 일어나자 그녀도 처음에는 르완다에 남아 있는 사람들을 위험에 빠뜨린 반군에 대해 적개심을 품었다. 그녀의말을 들어보자. "우리는 늘 밖에 있는 사람들이 잘 살고 있다고 생각했어요. 우리는 늘 이곳 상황을 기준으로 삼았으니까요. 전 망명한 사촌들에게 ‘왜 돌아오려고 하는 거야? 그곳에 그냥 있어. 너희가 훨씬 더 잘 살잖아‘라고 말하곤 했어요. 그때마다 그들은 ‘오데트, 너까지도 하비아리마나의 말을 흉내 내는구나‘ 라고 말했죠. 르완다 애국전선은 우리에게 망명생활을 하는 이들이 고통을 겪으며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줘야했어요. 우리는 비로소 우리가 그들의 입장을 이때껏 한 번도 진지하게헤아리지 못했다는 점을 깨닫았어요. 이곳 투치족의 99퍼센트가 르완다애국전선이 공격해오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어요. 하지만 우리는애국전선에 대해 논의하기 시작했고 그 사람들이야말로 우리의 형제이며, 우리가 함께 살고 있는 후투족은 우리를 동등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는사실을 깨달았죠. 후투족은 우리를 배척했으니까요." - P114

조직을 정비한 후 극단주의자들이 무기를 대량으로 비축하면서 여기저기서 공격과 학살이 일어났다. 그런 가운데 후투족 젊은이로 구성된 민병대가 속속 꾸려져 ‘민방위 훈련을 받았다. 그중 ‘인테라함에는 가장 먼저 발족한 민병대였다. ‘함께 공격하는 이들‘이라는 뜻의 이 말은MRND와 아카가 후원하는 축구 팬클럽 이름에서 기원했다. 1980년대 말 경제가 무너진 뒤로 몇만 명에 이르는 젊은이들이 일자리를 찾지 못해 빈둥거리며 불만을 쌓아가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민병대 모집은 그들에게 가뭄 끝에 내리는 단비와도 같았다. 인테라함웨를 비롯해 그와 유사한 (후일 모두 인테라함웨에 흡수된) 조직들은 제노사이드를 무슨 신나는 놀이처럼 받아들였다. 후투 파워의 젊은 지도자들은 스포츠머리와 까만 안경에 알록달록한 파자마와 가운 차림으로 오토바이를 타고 돌아다니며, 갈수록 늘어나는 군중을 상대로 종족 단결과 민방위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그런 자리에는 으레 하비아리마나의 성스러운 초상이 그려진 대형 현수막이 미풍에 펄럭이고 공짜 술이 넘쳐났으며, 마치 최신식 춤이라도 되는 양 군사 훈련이 펼쳐졌다. 대통령과 그의 부인은 종종 그런 광경을 지켜보며 즐거워했다. 인테라함웨 단원들은 은밀히 동네 단위로 조를 짜서 투치족 명단을 입수했다. 그러고는 집을 불태우고, 수류탄을 던지고, 마체테로 인형을 베는 은밀한 훈련에 들어갔다. - P118

흔히들 홀로코스트라는 산업화된 살인 행위가 인간의 진보라는 개념에 질문을 던지는 계기가 되었다고 말한다. 그 이유는 기술과 과학이 노동이 그대를 자유롭게 하리라"라는 글귀가 새겨진 유명한 문을 통해 곧장아우슈비츠로 안내하는 수단으로 사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기술이없었다면 독일인들이 그토록 많은 유대인을 살해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하지만 살인을 저지른 주체는 기계가 아니라 독일인들이었다. 르완다의 후투 파워 지도자들은 이 사실을 완벽하게 이해했다. 마체테를 휘두를 줄 아는 사람들을 움직일 수만 있다면 기술이 뒤쳐졌다고 해도 제노사이드를 실행하는 데 전혀 문제 될 게 없었다. 사람들이 곧 무기였다. 이는 후투족 전체가 무기가 되어 투치족 전체를 살해했다는 의미다. 사람들을 무기로 이용하면 수적인 면에서도 유리할 뿐 아니라 책임 소재마저도 유야무야로 만들 수 있다는 이점이 있었다. 모두가 연루된다면 누가 어떤 사건에 연루되었느냐는 질문 자체가 의미가 없어진다. 뭔가에 연루되었다고 의심되는 후투족은 적의 동조자로 몰아세우면 그만이었다. - P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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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일행에 섞여 있던 르완다인이 어찌된 영문인지 알아보고 와서는 이렇게 말했다. "저자가 비명을 지른 여인을 강간하려고 했나 봅니다." 그는 우리가 들은 함성은 곤경에 처했다는 신호로 르완다에서는 그소리를 들으면 함께 함성을 지르는 것이 의무라고 설명했다. "소리를 들으면 누구든 같이 소리를 지르며 달려가야 합니다. 다른 선택은 없습니다. 반드시 그렇게 해야 합니다. 만일 그 소리를 외면하는 경우에는 심문을 받게 됩니다. 이것이 산지에서 살아가는 르완다인들의 삶의 방식입니다." 그는 두 손을 들어 올리더니 손가락 끝과 끝을 맞대고 마치 조각천을이어 맞추듯 이리저리 엇갈리며 움직였다. 그런 식으로 마을은 조그만 땅뙈기로 칸칸이 나뉘어 있고, 사람들은 이웃과 맞닿아 있는 각자의 땅뙈기안에서 서로 복작거리며 살아간다는 뜻이었다. "사람들은 각자 따로 살아가지만 동시에 같이 살아가기도 합니다. 그래서 서로 책임을 져야 합니다. 내가 비명을 지르면 선생도 질러야 하고, 선생이 비명을 지르면 나도질러야 하지요. 누구든 달려가야 합니다. 소리를 듣고도 집에 가만히 있는 사람은 설명을 해야 합니다. 범죄자와 한통속이라 그런 건지, 겁쟁이라 그런 건지. 그러고도 다급해서 소리칠 때 누가 와주기를 바라는지 같은 질문에 말입니다. 공동체의 일원으로 살아가려면 누구나 이 간단한 원리를 지켜야 합니다."
참으로 부러운 관습이었다. 우리가 사는 곳에서도 다급하게 소리를지르면 과연 우리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이 있을까? 누군가 다급하게 외치는 소리에 우리도 함께 고함치며 서둘러 달려갈 수 있을까? 우리가사는 곳에서도 이런 식으로 강간을 저지하고 강간범을 붙잡는 일이 자주 있을까? 나는 깊은 인상을 받았다. 하지만 그런 공동체의 의무 체계가 완전히 거꾸로 뒤집혀 살인과 강간이 하나의 규범이 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무고한 사람이 범죄자가 되고 이웃을 보호하는 사람이 ‘공모자가 된다면 어떻게 될까? 최루가스를 사용해 어두운 은신처에 몸을 숨긴사람들을 울부짓게 만들어 그 소리로 생존자를 찾아내선 무참히 살해하는 일이 정상으로 여겨진다면 어떻게 될까? 나중에 무고네로를 방문했을때 사뮈엘에게서 최루가스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그 순간 계곡에서 여인이 외치던 비명 소리가 생각났다. - P48

하지만 후투족, 투치족이라는 이름이 문제였다. 이름에는 의미가 부여된다. 이름을 놓고 ‘계급‘이 어떻다느니 ‘지위‘가 어떻다느니 ‘신분‘이 어떻다는 둥 의견이 분분하지만 이름이 두 종족을 구별 짓는 근원이라는데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후투족은 농사꾼이었고 투치족은 목자였다. 따라서 처음부터 불평등한 관계에 놓여 있었던 셈이다. 가축은 농작물보다 더 값이 나가는 재산이기 때문이다. 물론 가축을 기르는 후투족도 있었고 농사를 짓는 투치족도 있었다. 하지만 투치족이라는 이름은 정치, 경제적으로 ‘엘리트‘의 동의어로 자리 잡았다. 그러한 계층화는 1860년 투치족 출신 음와미 키게리 르와부기리가 르완다의 왕위에 오른 뒤 일련의 군사 원정을 통해 왕국의 영토를 거의 현재 수준으로 넓혀 지배권을다지면서 더욱 가속화된 것으로 보인다. - P63

하지만 스피크는 처지가 딱한 흑인들과 함께 살면서 아비시니아(에티오피아의 옛 이름—옮긴이) 최고의 혈통임을 나타내는 섬세한 계란형 얼굴, 큰 눈망울, 높은 코‘로 미루어, ‘보잘것없는 원주민과 같은 뿌리에서 나왔다고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우수 인종‘을 발견했다. 이 ‘인종‘은 외투시족(즉 투치족)을 비롯해 많은 부족들에서 발견되었다. 다들 가축을 기르며 다른 종족들을 지배하는 위치에 있었다. 스피크를 가장 놀라게 한 것은 그들의 ‘외모‘였다. 그들은 오랜 혼혈의 결과로 머리가 곱슬곱슬하고 피부가 검었지만 ‘콧날이 없는 펑퍼짐한 코가 아니라 아시아인처럼 콧날이 우뚝한 코를 지니고 있었다. 스피크는 모호한 과학 용어로 자신의 가설을 그럴 듯하게 포장하는 동시에 성서의 역사적 권위를 빌려 그들을 ‘셈족의 피가절반 흐르는 함족‘, 곧 사라진 기독교인의 후예로 규정하고 영국식 교육을 조금만 받으면 자신과 같은 영국인처럼 ‘모든 점에서 우월해질 것이라고 주장했다.민주존 해닝 스피크의 이름을 아는 르완다인은 거의 없다. 하지만 그들대부분은 그의 터무니없는 이론의 핵심, 즉 유럽 인종을 가장 많이 닮은아프리카인이 지배자의 능력을 타고났다는 이야기는 익히 들어 알고 있다. 그러한 이론을 받아들이든 아니든 함족 신화가 자신들이 이 세상에서 과연 어떤 존재인지를 이해하는 데 필요한 개념이라는 점을 부인할 르완다인은 거의 없을 것이다. 후투 파워의 주창자 레옹 무게세라는 1992년11월의 유명한 연설에서 후투족에게 투치족을 은야바롱고 강(르완다를 지나는 나일 강의 지류-옮긴이) 너머 에티오피아로 되돌려 보내라고 촉구했다. 그는 그 문제로 굳이 고심할 필요가 없었다. 1994년 4월 은야바롱고강은 죽은 투치족으로 넘쳐났고, 시체 몇만 구가 빅토리아 호수 기슭으로 밀려들었다. - P68

르와부기리왕의 죽음으로 투치족 왕족들 사이에 격렬한 계승권 분쟁이일어났다. 르완다 왕국은 엄청난 혼란에 빠져들었고, 세력을 쥐고 있다가무력해진 지도자들은 상호 후원을 대가로 식민지 지배자들과 결탁했다. 그 결과 ‘이중 식민주의‘라는 정치 구조가 형성되었다. 이런 구조 아래서 투치족 귀족들은 독일인의 보호와 묵인에 힘입어 내부의 정적을 처단하고 후투족에 대한 지배권을 더욱 강화했다. 국제연맹이 1차 세계대전의 전리품으로 르완다를 벨기에에 넘겨줄 무렵 후투족과 투치족이라는 이름은 서로 적대하는 ‘인종‘을 가리키는 의미로 굳어졌다. 벨기에인들은 그런 양극화 현상을 식민지 정책의 발판으로 삼았다. - P71

어쩌면 식민주의자들이 터무니없는 함 가설을 받아들여 르완다인들의 분열을 꾀했던 이유도 바로 이 르완다의 두드러진 국민성 때문이었는지 모른다. 벨기에인들은 굳이 르완다에 질서를 가져다주는 척하지 않았다. 대신 기존의 문명에서 지배와 종속 개념에 부합하는 특성을 추려내자신들 목적에 맞게 고치는 쪽을 선택했다. 식민화는 폭력이고, 그러한 폭력을 실행에 옮기는 방법은 수두룩하다. 벨기에인들은 군사와 행정 업무를 담당하는 공무원과 성직자 외에 과학자도 르완다에 파견했다. 과학자들은 저울과 줄자와 양각 측경기를 들여와 르완다인의 체중과 두개골의 크기를 재고, 툭 튀어나온 르완다인들의 코를 비교 분석했다. 아니나다를까. 과학자들은 오랫동안 믿어온 바를 확인할 수 있었다. 투치족은 ‘거칠고 흉포한 후투족에 비해 더 ‘고귀하며‘ 귀족의 면모를 좀 더 자연스럽게‘ 풍겼다. 예를 들어 ‘코의 크기‘를 보면 투치족은 코 중앙이 후투족에 비해 약 2.5밀리미터가 더 길고 거의 5밀리미터가 더 가늘었다.
세월이 흐르면서 내로라하는 유럽인 관찰자들 다수가 투치족은 세련되고 고상하다는 맹신에 단단히 사로잡혀, 르완다의 지배 종족이 아틀란티스의 사라진 도시 멜라네시아에서 왔다는 등 스피크가 무색할 만큼 말도 안 되는 주장들을 늘어놓았다. 심지어 프랑스의 어느 외교관은 그들이외계에서 왔다고 말하기도 했다. 벨기에 식민주의자들은 함족 신화를 지침으로 삼고 로마 가톨릭교회와 제휴해 르완다를 통치하면서 인종에 따라 르완다 사회를 철저하게 개편했다. 그런 가운데 르완다 초대 주교 몬시뇰레옹 클라스가 후투족의 공민권을 박탈하고 ‘우수한 혈통을 타고난투치족의 전통적인 지배권을 강화하는 데 앞장섰다. 1930년 그는 투치족 추장을 ‘무식한 후투족으로 대체하려는 시도는 "온 나라를 무정부 상태로 몰아넣어 반유럽 공산주의를 양산하는 결과를 낳을 것"이라고 경고하면서 투치족 추장만큼 유능하고, 똑똑하고, 적극적이고, 진보의 가치를 잘 이해하고, 백성들에게 환영받는 추장은 없다"라고 덧붙였다. - P72

식민지 이전 시대에 후투족과 투치족이라는 정체성이 어떤 의미를지녔건 간에 벨기에인들은 ‘출신 인종‘에 따라 르완다인의 실존을 정의하는 특징으로 만들어놓았다. 그래도 대부분의 후투족과 투치족은 여전히 아주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 종족 간의 결혼도 성행했고, 산지에 사는키 작은 투치족‘의 운명이나 그 이웃에 사는 후투족의 운명이나 별반 차이가 없었다. 하지만 아이들이 학교에 나가 우월한 종족과 열등한 종족이라는 개념을 들으며 성장하기 시작하면서 한 국민으로서의 집단 정체성은 점점 퇴색했고, 그러한 인종 분열 정책 아래 투치족과 후투족은 각각권리와 피해를 주장하면서 반목하기에 이르렀다.
부족주의는 또 다른 부족주의를 낳는다. 벨기에도 ‘인종‘ 계보를 중심으로 계층화된 사회였다. 프랑스어를 사용하는 소수의 왈론인이 플라망어를 사용하는 다수를 몇 세기 넘게 지배했다. 하지만 오랜 ‘사회 혁명‘을 거치며 벨기에는 인구학 측면에서 훨씬 더 평등한 시대로 들어섰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르완다에 진출한 플라망인 사제들은 후투족에게 동병상련을 느끼며 그들에게 정치 개혁에 대한 열망을 불어넣었다. 그 무렵 벨기에 식민 정부는 유엔의 신탁 통치 아래 놓여 있었다. 이는 식민 정부가르완다 독립에 필요한 기초를 마련하지 않으면 안 되는 압력에 처했다는 의미였다. 후투족 정치 운동가들은 다수의 통치와 ‘사회 혁명‘을 요구했다. 하지만 르완다에서의 정치 투쟁은 평등 추구가 아니라 양극화된 사회에서 어느 인종이 주도권을 잡을 것인가 하는 문제로 초점이 맞춰졌다. - P74

르완다가 독립할 즈음 벨기에인들은 지지하는종족을 갈아치웠지만 그들이 마련한 새 질서는 옛 질서를 그대로 유지한채 사람들만 바꾼 데 지나지 않았다. 1961년 1월 벨기에인들은 새로운 후투족 지도자들을 한자리에 불러 모아놓고 군주제 폐지와 공화국 수립을공식적으로 선언했다. 임시 정부는 명목상으로는 후투족 정당과 투치족정당이 균등하게 권력을 나누어 갖는 구도였지만 몇 달 뒤 유엔 진상조사위원회는 보고를 통해 르완다 혁명은 "어느 한 종족의 독재를 야기해 하나의 압제 정권을 또 하나의 압제 정권으로 대체하는 데 그쳤다"라고 결론 내렸다. 아울러 보고서는 "언젠가 우리는 투치족을 상대로 폭력이 행사되는 광경을 지켜보게 될 것이다"라고 경고했다. 하지만 벨기에인들은그다지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르완다는 1962년에 완전히 독립했으며, 그레구아르카이반다가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후투 독재 정권은 대중 민주주의로 위장했다. 르완다의 권력 투쟁은 후투 지배층 사이의 내분으로 발전하면서 과거에 투치족 왕족들이 벌이던 이전투구와 매우 비슷한 양상을 띠었다. 르완다 혁명가들은 트리니다드토바고 출신의 작가 네이폴의 지적대로 너나 할 것 없이 ‘흉내쟁이‘가돼서 자신들이 반기를 들었던 제도를 등에 업고 권력을 남용했다. 그들은 과거의 지배자들이 압제에 신음하던 사람들의 손에 결국 사라지고 말았다는 사실을 깡그리 잊어버렸다. 카이반다 대통령도 루이 드라크제가 남긴 유명한 르완다 역사를 읽었을 것이다. 하지만 카이반다는 르완다 국민을 하나로 뭉치게 하는 힘은 ‘한 국가 정서‘ 라는 라크제의 통찰력을 받아들이기보다 르완다를 하나의 정부가 통치하는 두 나라‘로 인식했다. - P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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