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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오르는 아시아에서 더럽게 부자 되는 법
모신 하미드 지음, 안종설 옮김 / 문학수첩 / 2016년 2월
평점 :
절판
깨끗한 빈 손
-모신 하미드의 '떠오르는 아시아에서 더럽게 부자되는 법'을 읽고-
생존을 위한 반대
오십 명 중 한 명이 죽는다는 병에 걸린 '당신'은 아파서 땅에 얼굴을 댄 채 움직이지 못한다. 아버지는 그런 '당신'에게 묻는다. 괜찮느냐고. 당신에게 가장 필요한 건 어쩌면 부모의 위안, 무즙이 아니라 보다 효과가 좋은 약, 포옹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당신은 오토바이나 새 자전거, 장난감도 가져본 적이 없기 때문에 그렇게 어리광을 피워도 된다는 생각까지도 가지기 어렵다. 아프다는 말 대신 당신은 '네'라고 답한다. 아픔을 고백할 수 있을 만한 여유는 없다. 자신에게 절실한, 고통을 표현하는 대신 그 반대를 대답한 순간부터 아버지에게 그는 강한 아이가 된다. 그의 형과 누나도 마찬가지로 그들이 살아내는 지리멸렬한 삶에 대해 두렵고 질리면서도 차마 솔직하게 고백하지 못한다. 자신의 뜻을 숨기고, 낯선 이들로부터 스카프로 젖가슴을 가리며, 페인트가 묻은 채 돌아다니는 것이다. 생존을 위해서.
자기계발서는 결국 '자기'가 스스로 성공해야 한다는 것을, 앞으로 벌어지는 모든 일은 당신의 책임에 불과하다는 메시지를 강조하는 차원에서 끝난다. 마을에서 유일하게 도시로 나가 일하고 있는 아버지는 지주들이 지나갈 때마다 고개를 수그리는 데 개의치 않으며, 그들에게 고개를 숙이길 거부하는 수도원 사람들에게 반감을 보인다. 그들이 순응하며 저항할 생각조차 하지 못하는 계급 구조에서 그들은 살아남기 위해 그 질서에 순응하고 그 질서의 구조를 배운다. 아버지는 그래서 '당신'을 교육시켰다. 고등 교육까지. 아버지는 그들의 구조를 배우고 그들의 구조에서 '당신'과 아버지가 올라갈 수 있는 한계를 알고 있다. 아버지가 말하는 성공이란 당신이 말하는 성공보다 한참 낮다.
하지만 공부는 점점 할 수록 이상향에 가까워진다. '이상주의자를 조심하라'는 자기 계발서의 말은 이전의 팝 심리학, 생각이 모든 한계를 뛰어넘게 해준다는 이상주의에 대한 작가 나름의 '진짜 자기 계발서'의 수칙이라 할 수 있다. 이상주의자들은 커뮤니티에서 모든 것이 해결될 수 있다고 약속하지만, 그 약속은 어머니의 죽음 앞에서 어떤 효용성도 발휘하지 못한다. 사랑도 이상주의의 한 축이 되어버리는 이 상황에서 '당신'은 삶의 모든 충동에 반기를 든다.
그렇다면 이 반대는 흔한 신파 드라마의 한 부분이 되어버리는가? 작가는 '당신'의 감정에 쉽게 이입하지 않기 위해 애쓴다. 거리감을 두는 건 '자기 계발서'의 입장에서 당신의 모든 행동을 판단하고 훈계하기 위해서다. 당신은 듣지 못한다. 어쩌면 그 시선은 초자아의 시선일지도 모른다. 당신은 결국 그 생존의 법칙에 따라 더럽게 부자가 된다. 그렇다면 그 시선의 끝에는, 행복이 있을까?
실패한 두 사람
애석하게도 그는 가족에게 버림받고 처남에게 배신을 당한다. 그가 지키려고 했던 가정이라는 공간은 그를 이해하지 못하는 가족들에 의해 해체된다. 이에 그를 탓할 수도, 그의 아내를 탓할 수도 없는 까닭은 이 자기 계발서의 시선이 심각할 만큼 공정하기 때문이다. 그는 아내를 사랑하지 못한다. 사랑하려고 애쓰지만 그 사랑은 아내와 그의 아들이라는 세 축을 기준으로 구성되는 것이다. 그가 온전히, 아무 것도 없는 상황에서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은 그녀밖에 없다.
하지만 그녀에게 그는 버리고 싶었던 과거의 일환이었다. 그녀는 그를 사랑하지만 그와 함께 할 수는 없다. 그녀는 가족을 버렸고 과거를 버렸다. 자신이 하고 싶은 일보다 아무 것도 없는 상황에서 성공하기 위해 나비처럼 날아다닌다. 나비는 날개가 젖거나 무거워지면 날지 못하고, 까닥하면 사마귀에게 잡아먹힌다. 나비의 아름다운 날개에 반해 무작정 잡아서 박제를 시켜버리는 사람들도 있다. 그녀는 그 손길에서 벗어나 살아남기 위해 아둥바둥 날아왔다. 그 필사의 몸부림을 알기 때문에 그와 그녀는 서로를 원망하지 않는다. 그들이 생각했던 성공을 향해서.
하지만 그는 결국 가정을 잃었고 그녀는 충실한 오른팔을 잃었다. 그게 그들이 저지른 과오 때문이며 그들의 결말이 인과응보였다고, 우리는 쉽게 말할 수 있을까? '부자 아빠, 가난한 아빠'의 저자였던 '부자 아빠'는 끝내 '가난한 아빠'가 되었다. 그들은 노력을 했고 성공을 거두었다. 그 노력은 분명히 더러운 노력들이었다. 그녀는 영화를 좋아했지만 영화에 출연하는 대신 돈이 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했고 스폰서를 얻기 위해 애썼다. 그는 폭력배를 동원해 이웃집 소녀에게 시선을 받고 싶어했던 총잡이 소년을 죽여 라이벌에게 위협을 가했고 전쟁 군수 사업에 동참했으며 로비를 서슴치 않았다. 모든 동화는 그 끝을 말하지 않는다. 그저 행복하게 살았다고만 할 뿐, 그들이 그 뒤에 겪을 미래에 대해서는 말해주지 않는다. 소설의 잔인한 점은 바로 그 실패까지 다 기술해 버린다는 점이다. 그러나 그 실패는 평가를 위한 실패가 아니다. 지나친 감정이입으로 그들의 모든 오점을 가려버릴만한 실패도 아니다.
성공한 두 사람
행복의 정점 이후를 기술하지 않는 이유는 명확하다. 무엇이든 최고를 달리면 그 이후는 하락밖에 없다. 추락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다시 성공하지 못하거나 성공할 생각도 하지 못한다는 말은, 어떻게 보면 하나의 슬로건이거나 수치화의 결과다. 우리는 모든 분야에서 다 성공할 수 없다. 성공하기 위해 어떤 것을 버리고 취한다. 백설공주는 마녀를 죽이고 왕자와 결혼했지만, 그녀가 과연 새 어머니에 대해 원망만 품고 있었을지는 모른다. 그녀가 과연 좋은 어머니가 될 수 있을지 우리는 확신할 수 없다. 완벽한 성공이란 너무 멀다. 우리의 손은 한정되어 있고 그 손에 쥘 수 있는 건 우리가 생각하고 바라는 것에는 다다르지도 못한다.
아이러니컬하게도, 그들은 가장 실패했다고 생각한 순간 서로가 놓친 것을 다시 쥘 수 있게 되었다. 손안에 들어 있던 것들이 다 빠져나가거나 그들 스스로가 놓은 순간, 바닥에 뒹굴어 너덜너덜해진 그 감정들을 다시 들어올릴 수 있게 된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다시 주운 그 감정은, '그래도 아름답다'.
생존하기 위해 자기 자신의 성공을 최우선으로 했던 그들은 마지막 순간에 자신의 안위보다 상대방을 걱정한다. 그녀는 혼자 남겨질 그를 걱정하고, 그는 혼자 남는 순간 떠나간 그녀를 생각한다. 그 때 그들은 온전하게 서로의 소유가 되면서 서로를 가진다. 문학은 그 실패를 아름답게 그린다. 그래서 지나치게 감상주의적이라는 소리를 들을지도 모르지만, 이 자기계발의 시선은 공정하게 실패와 성공, 성공과 실패를 그린다. 그 시선이 한쪽에 치우쳤다고 누가 자신있게 말할 수 있을까. 더럽게 부자가 되었지만, 그들은 가장 깨끗한 빈 손으로 놓쳐버렸던 서로를 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