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극히 내성적인]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지극히 내성적인
최정화 지음 / 창비 / 2016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예민하게 짚어내는 불행의 전조들

 -최정화, '지극히 내성적인'을 읽고-

 

 

 

 

 균열과 파열

    

 사건은 소리 없이 시작된다. 어느날 불현듯 찾아온 예감들, 그건 마치 저 위에서, 혹은 옆에서 사소하게 들려온 메시지처럼 가볍고 무책임하다. 최정화의 소설 속 인물들은 끊임없이 평범한 삶을 가장한다. 그러나 그들이 원하는 평범한 삶이란 무엇인가? 평온하게 살다가 평온하게 죽는 것, 황정은의 인물들이 원했던 것처럼 맛있는 과일을 실컷 먹고 잘 자는 삶은, 아이러니하게도 이제는 너무 먼 것이 되어버렸다. 최정화의 인물들은 이 삶을 견디고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힘들어하고 두려워한다. 소설책 제목만큼이나 그들이 '내성적이기 때문'이라고 비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 여자가 자기가 나인 줄로 착각하고 내 구두를 신고 갔다고 말이에요."(구두, 26)라고 말하는 화자에게 그건 단순히 구두를 바꿔 신고 간 실수에 불과하다고 말할 수 있고, "하지만 어쩐지 아내의 불평이 자신을 향한 것으로 들렸다. 그는 너무 오래되었다. 그들 사이는 너무 오래되었다고 말이다."(팜비치, 31)라는 말에는 그의 늘어난 뱃살에 대한 화풀이라고 읽을 수 있다. 그러나 "그가 입을 벌려 손가락을 집어넣고 윗니를 붙든 채 꿈지럭거리기 시작했다. 그녀는 자신 앞에 다가온 불운의 조짐을 보았다."(틀니, 78)는 사소한 예감은 점점 인물들이 주체할 수 없을 만큼 커진다. 커져버린 두려움은 마치 경사로를 굴러떨어지는 공처럼 가속도가 붙는다. 공의 속도를 늦출 수는 없다. 우리는 그 속도가 붙으면서 점차 공을 아래로, 아래로 끌어당기는 힘도 더해진다는 걸 안다. 공을 멈추려면, 그 경사로를 끊어버리면 된다. 그러면 공은 굴러 내려가는 대신 '떨어진다'. 황정은의 '낙하하다'라는 단편에서 화자는 점차 자신의 몸이 가벼워지고 상승하는 것을 느끼지만, 최정화의 인물들은 상승할 수 없다. 그들에게 포기할 수 있는 것이란 없다. 그들은 그저 콘크리트 바닥의 엷은 균열을 볼 뿐이다. 그들은 그 균열만 메꾸면 괜찮을 것이라고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속삭이지만, 실제로 그들이 마주하게 되는 건 소리 없이 자라난 균열이 이르게 하는 파열이다. 균열은 일부분이지만, 파열은 그들의 인생을 쪼개어 산산조각낼 예감이다. '구두'에서 여자는 자신이 가사 도우미로 부른 여자와 묘한 거울상을 이루는 생활의 디테일과, 여자의 자신만만한 태도에서 자신의 불안과 함께 여자의 욕망을 읽어낸다. 그녀는 끊임없이 자신을 의심한다. '보통은' '과민해서' '잘못 생각한 것'이라고 끊임없이 부정하던 그녀는 남편과 자신과의 관계에 대한 '우월감'과 붙임성이 좋은 아이들을 키워낸 '화목한 가정'에 대해 자부심을 느끼면서 그 여자의 그림자를 떨쳐내는 듯하다. 하지만 그녀는 결국 다시 의심으로 돌아온다. 그건 그녀가 남편의 권고에 따라 전주로 가게 되었다는, 뚜렷하게 보이지 않는 불안이다. "처음은 겨우 단 한알이라는 겁니다. 그리고 순식간에 전체가 끔찍한 냄새를 풍기게 된다는 거지요."(지극히 내성적인 살인의 경우, 147) 그렇게, 의심은 뚜렷해지고 균열은 파열선이 된다. 그렇다면 이 소설에서 이런 불안을 느끼게 되는 사람들은, 갑작스러운 사건-우연한 사건에 의해 불행해지게 되는 인물들인가?

 

 

 

 

그래도 싼 사람들

     

'홍로'의 초점 화자인 '', 자신의 삶에 어떤 변화도 끼치고 싶어하지 않는다. 그가 원하는 건 삶의 조력자다. 그가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이라기보다는 그의 평온한 생에 더 이상 참견하지 않는 여자. 자본 소유의 우열관계에서 그는 '이용순'이라는 여자보다 우위에 서 있다. 때문에 그는 그녀에게 이십만원, 삼십만원을 준다. 마치 껐다 켤 수 있는 라디오처럼 그녀를 이용한다. 그녀의 아들이 휴대폰을 팔든 인생을 말아먹었든 그에게는 아무런 상관도 없었다. "평상시 그녀의 목소리가 ''음이었다면 지금 그녀의 목소리는 ''이었다.(홍로, 116)" 그는 거짓말을 주문했고 이용순은 멋지게 거짓말을 해냈다. 이 연극을 끝내는 손은 점차 그가 아니라 이용순의 손으로 넘어간다. 그가 잘못한 것은 무엇인가, 돈으로 이용순을 사려고 한 점? 최정화의 소설 속 인물들은 너나할 것 없이 현실에 안주하고 있으며, 그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건 그들이 현재와 같으리라고 예상하던 미래의 상이 흔들리는 순간이다. "그런 일이라면 자신이 있었다. 의심 없이 그저 하던 대로 쭉 하는 것 말이다.(팜비치, 36)" 아무런 의심도 하지 않는다면 변한 미래도 상상되지 않는다. 그들의 문제는 바로 '상상의 부족'이다. 그러나 그 부족함은 선천적인 부족함, 선천적인 악이 아니다. '부족함'은 바로 '포기'에서 온다. 그들은 어떻게든 이 소설에서 살아남으려고 하고, 그러기 위해서 그들 자신을 타인의 공격으로부터 방어하려 한다. '집이 넓어지고 있어'의 화자가 "나는 그저 이렇게 고요하게 살다가 어느 날 전기 콘센트에 감전사하는 작은 소망을 갖고 있(집이 넓어지고 있어 247)"듯이, 그들에게 가장 필요한 건 폐쇄이고 감금이다. 타인에게 지기 싫다는 이유로, 어떤 보상을 받지 못했다는 억울함 때문에 끊임없이 합리화하고 정당화하는 이 삼인칭이지만 일인칭에 가까운 인물들의 해명 아닌 해명에 이렇게 말할 수도 있겠다. 그들은 그래도 싸다고. 하지만 과연 그렇게 쉽게, 그들과 그들을 읽고 있는 우리 자신을 분리해서 판정을 하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이 서사가 마냥 통쾌하지만은 않은 이유는, 그들이 그래도 싼 취급을 덜 충분히 당했다거나 불쌍하다기보다는, 우리도 비슷한 비밀이 있기 때문이다. '오가닉 코튼 베이비''그녀'"여전히 악몽을(오가닉 코튼 베이비 76)" 꾸며, "꿈의 내용을 더이상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는다(오가닉 코튼 베이비 76)"는 것, 그리고 "알코올의 기운"을 빌려 겨우 잠에 들고, "다시금 다가올 불행-목 디스크의 재발-을 전혀 눈치채지 못한 채 하루치의 긴장을 모두 잊고 마음껏 경추를 일그러뜨리(오가닉 코튼 베이비 76)는 모습에서 우리 자신을 보기 때문이다. 뱀파이어형 인간이라며 자신을 소모하고 하소연하는 데에만 이용하는 사람들을 멀리하라는 글을 읽으면서, 우리는 자기 자신에게도 이런 모습이 있지 않은지, 그래서 혹시 어제 친구가 내 연락을 받지 않은 것인지 두려워하고 이 정보를 보내준 사람의 의도를 의심한다. 그리고 우리는 점차 입을 다물고, 그녀처럼 다가올 불행들을 외면한 채, 꿈의 내용도 말하지 않고 위안거리를 찾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가장 의지하지 않으리라고 믿었던 어떤 최악의 것에. 그래서 우리는 그들을 동정하지 않는다. 다만 어느 순간 공감한다.

 

 

 

불행한 앎

    

  아는 것이 힘이라는 말이 있다. 하지만 얼마나 알아야 힘이고, 그 힘을 어떻게 쓸 수 있을 것인가? 우리는 거대하고 무거운 머리를 지탱하지 못하고, 어쩔 줄 모르면서 나아가기만 한다. 한때 어렸을 적 공상과학 영화에서 나온 외계인들의 머리는 그들의 가느다란 몸에 비해 컸다. 그 불균형은 그들의 기술이 인간들보다 더 우월하다는 상징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적으로서 물리쳐지거나 혹은 친구가 되었다. 휴머니즘이란 이상한 곳에서 발동하게 된다. 적이 아니면 친구여야 한다. 앎에서도 마찬가지다. 앎은 그들의 체계를 나누고 그들의 편을 가른다. ‘팜비치의 화자는 진짜 팜비치에서 온 남자 앞에서 불안함을 느낀다. 그 남자는 팜비치가 무엇인지 알고 있고, 팜비치의 식대로 모든 것에 자신만만하게 나선다. 화자인 가 애써 가져온 상어튜브에 아이를 태우려고 할 때, 남자는 그를 저지한다. 그의 육아법이 마치 최선의 것인 듯. ‘파란 책의 여자에게 하이데거란 5센치미터의 두께에 푸른 바탕의 책에 불과했다. 그러나 남편의 친구, 전직 철학학도였던 남자가 그녀에게 관심을 보이는 순간 그녀는 상승의 욕구를 느낀다. 그 친구가 부여한 정체성이 그녀의 마음에 든 것이다.

  그녀의 오산이라면 바로 그 책을 읽었다고 자랑하는 게 아니라 그 책을 알고 싶어했다는 점에 있다. 그녀의 집에 오는 친구들은 대부분 그 책을 읽지 않았다. 그저 그 책을 집어들어 몇 장을 펼쳐보고 내려놓을 뿐이다. 약간의 찡그림과 함께. 그것은 이 인테리어가 아름답지 않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들의 모임에서 너무나도 이질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쉽게 이해할 수 없는 것, 삶에 대한 고찰. 그들은 텅 빈 방을 상상할 수 없다. 모든 것은 아름답게 꾸며지고 트렌드에 따라 바뀌어야 한다. 그녀도 쇼핑 윈도우의 삶을 살았다.

  그렇다면 그녀가 존재와 시간을 읽기 시작하면서, 그녀가 계몽되고 진정한 삶으로 들어갔다고 말할 수 있는가? 마치 인형의 집의 노라처럼? 우리는 그렇게 낙관할 수 없다. 그녀가 택하는 것이 최고의 윤리이고, 우리는 그 윤리를 짓밟는 현대 사회의 폭력을 본다고도 말할 수 없다. 그녀가 들어간 세계는 또다른 인테리어의 세계다. ‘오가닉 코튼 베이비의 여자가 건강식품에서 요가로, 요가에서 유기농 제품으로, 이어 심리상담에 이르기까지 그녀 자신의 삶을 복구하고 안전해지려고 애썼으나 끝내는 그 악몽들을 떨쳐버리지 못했듯이, 그녀 또한 자신의 삶을 충족시킬 것이라고 믿었던 것들로부터 배반당할 것이다. 앎은 이제 삶의 어두운 부분을 밝혀주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폭력의 가능성을 암시한다. ‘푸른 책은 하이데거도 멋진 소품도 아닌, 결국 푸른 책으로만 남을 것이다. 그 배반의 가능성을 품은 사소함으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