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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박한 행복

-시어도어 드라이저 '시스터 캐리'를 읽고

 

 

 

 

 

  악인이여, 그대는 왜 실패했단 말인가?

 

  에밀 졸라에 이어 자연주의 작가답게 시어도어 드라이저의 <시스터 캐리>에서는 소설의 상황과 함께 각 상황에 대한 설명들이 덧붙여져 있다. 이는 서사 전반에 거쳐 인물과 인물의 행동을 평가하고, 내용이 기존의 도덕적 관습이나 작가가 생각하는 가치 체계에 위반되는 방향으로 흘러갈 경우, 거침없이 이를 꾸짖는다. 그러나 그들의 서사에서 악인은 승리한다. 작가들은 사회의 도덕에 대해 강조하는 게 아니라 결국 사회에서 악인이 살아남거나 선인들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하거나 조금 비뚤어지고 더러워져야 한다는 듯이 인물을 다룬다. 실제로 그들이 마주하는 세상은 도덕적인 관습에 얽매여 있거나 '습관'에 길들여져 있는 이들에게는 너무나도 역동적인 것이고, 적응할 수 없다면 사라져야 할 거친 바다와 같은 것이다. 시카고에서 거물이었던 허스트우드는 뉴욕에서 자신이 얼마나 초라한 인간이었는지, 그가 풍경을 짜는 것보다 그 풍경의 조그만 한 조각에 불과하다는 것을 새삼 깨닫는다. 인간이 믿고 있는 사회적 입지나 관습으로서의 도덕은 결국 바람에 쉬이 휩쓸려갈 편린이 되거나, 혹은 인간이 살아남기 위해 움직일 때 발목을 붙잡는 거추장스러운 것밖에 되지 않는다. 그러나 이처럼 생존을 위주로 한다면, 인간은 과연 어떤 존재가 될 것인가? 작가의 어조가 묘하게 냉정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바로 그 의문을 불러일으킬 수밖에 없게끔 철저하게 서사에 파고든다는 점 때문이다. 때문에 캐리의 성공담은 성공담이 아닌 실패담으로 묘하게 뒤틀리게 된다.

  하지만 이 소설의 서사를 주도하는 '서술자', 기존의 자연주의 소설이나 괴테의 <친화력>에서 나오는 서술자와는 미묘한 차이가 있다. 그 차이가 이 기나긴 작품에 새로운 색채를 입힌다. 본래 자연주의 소설에서 작가는 전지적 서술자로, 모든 도덕을 제패하고 지혜를 발휘하여 인물들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며 몇몇 인물들이 자신이 복선을 깔아둔 불행에서 벗어날지라도 탄식하거나 사실 그게 자신의 의도였다는 걸 드러낸다. 소설에서 작가는 신이 된다. 반면 <시스터 캐리>의 작가는 어떤 반감이나 회의도 보이지 않으려고 애쓴다. 소설 초반부에서 "캐럴라인은, 가족들이 반쯤은 애칭으로 '시스터 캐리'라고도 불렀는데, 관찰력과 분석력이 그리 뛰어나지 못했다. 이기심은 꽤 있었지만 강하다고 할 만큼은 아니었다.(13)"며 작가는 캐리를 정의한다. 그에게 캐리는 이제 곧 시카고라는 큰 물에서 실패하게 될 "애송이 기사"에 불과했다. 그러나 소설 중반부부터 "사실 캐리는 드루에보다 더 상상력이 풍부했고 취향도 나았다. 우울해하고 고독해 하는 것도 더 섬세한 정신을 지닌 탓이었다.(99)"고 말하며, 이전까지는 촌스럽다고 평가했던 것과 달리 점점 더 우호적으로 바뀐다.

  이는 두 가지 가능성을 암시하는데, 하나는 자연주의 작가로서 철저하게 어떤 교훈을 주기보다는 교훈이 없는 세상의 풍파에서 생존해 나가는 캐리를 통해 허스트우드와 드루에를 반면교사로 삼는 것을 보여주고자 했다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어느새 작가 또한 캐리에게 공감하게 되어버렸다는 것이다. 전자가 좀 더 이 소설을 명료하게 읽을 수 있겠지만, 나는 후자의 경우가 더 매력적이라고 생각한다. 작가의 서술은 앞과 뒤가 조금씩 다르고, 계속 독자에게 의미심장하게 질문하며, 그 질문에 스스로 답을 찾아내려고 하지만 어떤 제시된 답도 충분치 않다. 모든 답들은 흘러내린다. 작가는 캐리에게 공감하게 되면서 점점 캐리에 대한 정의와 서술을 줄여나간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캐리의 속마음을 있는 그대로 전달하는 것밖에 없다. 왜냐하면 캐리는 관습적인 도덕이 얼마나 유아와 같은 것인지, 미니의 삶이 전혀 도덕적이지는 않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작가가 말했듯이 자유의지는 조화이며 본능은 잠식이다. 본능의 맞은편에 있는 것은 무엇인가? 바로 억압이다. 관습에 의한 억압. 이 억압과 본능 사이에서 적절한 줄다리기를 통해 긴장을 유지하는 순간 우리는 자유의지를 얻는다. 하지만 이 자유의지는 너무나도 위험하고 두려운 것이다. 마치 절벽에서 떨어질 지 말지 결정하는 것처럼. 캐리는 유아적인 도덕과 그녀를 가로막는 습관들을 뒤로 젖힌 채 끊임없이 자유의지를 위해 나아간다. 그녀의 성공담이 뒤틀리는 이유는 바로 이 긴장 때문이다. 그녀가 이 기나긴 소설의 끝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 긴장을 예리하게 느끼고 파악할 수 있는 능력 덕분이었다.

 

  다 무슨 소용이람?

 

  캐리가 원하는 건 이곳보다 더 낫고 아름다운 삶이었다. 아름다운 삶에는 긴장 따위 어울리지 않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상류사회를 배경으로 한 연극들은 "이상적인 조건에서 겪는 고통을 오히려 매력적인 것(407)"으로 보이게 한다. 캐리는 감수성이 뛰어나 비참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보며 그들의 처지에 대해 공감하고 슬픔을 보인다고 하지만, 사실상 그녀는 이미 그들을 잊었다. 잊어야만 했다. 그녀가 그들과 같은 사람이었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낡은 습관과 목소리가 그녀에게 명령할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드루에는 캐리를 꺼내주었던 '동정심'이 있었기 때문에 그들을 발견한다. 그러나 그 발견은 자신과의 동질감이 아니라 철저하게 다른 사람이라는 인식 때문에 가능하다. 허스트우드와 드루에, 캐리가 저녁 식사를 마치고 나왔을 때 한 남자가 잠자리를 구할 돈을 적선해 달라고 구걸한다. 하지만 허스트우드는 "캐리에게 무슨 이야기를 하느라 정신이 팔려 있었다."(187) 이는 허스트우드가 소설 후반부에서 다른 사람들의 적선에 기대어 잠자리를 얻는 신세가 된다는 걸 생각해 보면 아이러니컬한 일이다. 반면 드루에는 "수척하게 여윈 서른쯤 된 남자가 가난과 고생에 찌든 얼굴로 호소(187)"하는 것을 알아채고 동정심이 솟구쳐 십센트짜리 동전을 적선한다. 하지만 여전히 "허스트우드는 알아채지도 못했고, 캐리 역시 금세 잊어버렸다.(187)" 캐리의 망각은 과거라는 그림자를 떨쳐 내기 위한 것이었다. 그 긴장은 그녀에게 하여금 드루에와의 관계를 직시하게 했으며, 허스트우드라는 사다리를 거절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위기와 생존, 둘 다를 가능하게 했던 것이다. 캐리는 그들을 풍경으로 치부한다. 허스트우드도 그녀에게는 점점 풍경이 되어간다. 롤라가 한 남자가 길에서 넘어지는 것을 보며 웃었을 때 캐리는 무심하게 "오늘밤에는 마차를 타고 가야겠구나"(643)라고 말한다. 단순한 서술문이지만, 이 넘어진 남자는 어쩌면 허스트우드일지도 모른다. 허스트우드도 캐리가 떨쳐내야 할 그림자이자 스쳐지나가야할 풍경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러면 캐리는 비난받아야 하는가? 아니면 "금박을 입힌 의자 위에서라면 누군들 슬픔을 마다하겠는가?(407)"라는 그 욕망에 대해, 우리 또한 그렇다는 걸 받아들여야 하는가?

  이와 비슷한 소설이지만 다르게 결말을 맺은 소설로 이디스 워튼의 '그 지방의 관습'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언딘은 "어떤 남자라도 정말로 사랑에 빠지면 어린아이처럼 다룰 수 있었다"고 말하며, 주저없이 에이펙스를 버리고 밴 더갠도 버린다. 그녀는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 것처럼 보이고, 그녀의 성공에 대해 독자들은 주인공을 욕해야 하는지 고민하게 된다. 반면 캐리에게는 그럴 수 없다. 그녀의 삶에 드리워진 슬픔 때문이다. 그녀가 믿을 수 있을 만한 것은 돈 뿐이다. "다들 남에게 어떤 슬픈 결과를 가져오게 될지는 관심도 없이 오로지 자신의 즐거움만을 좇는 것 같았다. 허스트우드와 드루에한테서 얻은 교훈도 바로 그런 것이었다."(574)

  캐리를 스쳐 지나간 사람들은 다들 어떤 사람이었던가? 그들은 그들이 좋아하고 바라보는 세상 그대로였다. 냉철한 관찰은 가끔 일관적인 법칙을 발견하려고 애쓰게 되고, 작가 본인에게도 인물을 형성할 때 그 법칙이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자연주의는 결국 하나의 실험이다. 전제만이 아니라 예상되는 결과도 설정해 놓는 실험. 허스트우드와 드루에는 처음 등장할 때부터 그들의 삶을 예정해 놓는다. 허스트우드는 자신의 존재가 점점 축소되는 것을 느낄 때마다 신문을 읽는다. 그는 신문을 읽고 세상을 둘러볼 때면 사치를 부리며, 각박한 생존의 현실에서 외면하려고 애쓴다. 신문에 실린 시카고 거물들의 소식들을 읽으면서 그는 자부심을 얻고, 재난과 사고를 읽으면서 세상으로부터 유리된다. 그가 자신의 아내에게 말을 걸 때도 신문 기사를 읽어주는 것으로 시작한다. 하지만 캐리는 살아남는 것에 익숙하다.

  드루에는 판매사원이며, 그의 손안에 있는 물건은 가장 비싸게 팔아넘겨질 것들이다. 캐리 또한 마찬가지로 그가 흥행시킬 수 있는 하나의 상품이었다. 그는 평생 자신의 물건을 갖지 못한다. 끊임없이 팔아넘기고 팔아넘길 뿐이다. 그에게 영원이나 정착은 없기 때문에, 캐리의 고민이나 슬픔은 이해될 수 없다.

  미니는 캐리가 탈선했다고 생각하며 그녀가 절망의 구렁텅이에 빠졌다고 걱정한다. 그렇다면 미니의 삶은 과연 옳은가? 미니의 남편은 말하지 않는 방식으로 반대의 뜻을 밝히며, 모든 삶을 좌지우지한다. 그녀는 캐리처럼 생존에 대한 문제에 급급해하지 않고 그녀의 남편에게 모든 것을 기대면 된다. 미니는 캐리를 판단할 수 없다. 그녀의 판단을 믿는 것은, 어쩌면 우리가 너무 쉽게 캐리의 파멸을 원하게 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어쨌든 미니의 삶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정숙한 처녀''정숙한 주부'의 결말이기 때문에. 그러나 어느 쪽이 더 불행하고 더 행복하다고, 덜 불행하고 덜 행복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시베리아의 늑대들 : 테스는 죽어야 했는가?

 

  "사교계는 모욕을 잔인하게 되갚는다는 말입니다. 시베리아의 늑대들 이야기를 들어보신 적 있습니까? 무리 중 한 마리가 기운이 빠져 떨어져나오면 나머지가 그놈을 먹어치운답니다. 우아한 비유는 못 됩니다만, 사교계에도 늑대 같은 면이 있어요. 로라는 가식으로 사교계를 조롱했고 가식으로 이루어진 사교계가 그 조롱에 대해 격분하고 있는 겁니다."(242)

 

  허스트우드와 드루에는 캐리가 그들을 사랑한다고 믿으며, 그들에게 온전하게 기대고 있다고 믿는다. 그들은 캐리에 대해 단단히 착각한다. 캐리는 그 착각을 알면서도 자신의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 둘 중 누구를 택해야 할지 망설인다. 그 망설임은 그렇다면 부도덕으로 치부될 수 있는가? 캐리는 늑대들 중 한 마리에 불과하다. 그녀의 모든 행동들은 사실상 다른 늑대들이 하는 행동과 비슷하다. 캐리가 만약 방심한다면, 그들에게 속아넘어간다면 그녀는 영락없이 그들에게 먹어치워지고 말 것이다. 결국 저 대사는 사교계의 모든 사람들이 로라와 마찬가지로 가식적인 인간들이라는 진실을 폭로한다. 캐리는 로라를 연기하며 희열을 느낀다. 그녀가 행해왔던 모든 방어적인 거짓말들과 행동들, 누군가를 따라하면서 생존하기 위해 애썼던 것들에 대해 찬사를 받았기 때문이다. 그 찬사란 생존하기 위해 했던 그녀의 행동들, 그녀가 양심에 위배된다고 했던 그 모든 행동들이 결국에는 그녀의 재능으로 부각되었기 때문이다. 그녀가 여태껏 해왔던 모든 행동들은 상대방을 살피고 최대한 조심하면서 살아왔던 것들이었다. 드루에의 쾌활함은 그녀에게 하나의 사치였다. 쾌활함도 그럴 여유가 있는 사람들이 누릴 수 있는 가치였다.

  캐리는 에임스에게 매력을 느끼며, 그가 제시한 방향으로 고개를 돌려 그녀의 미래를 바라보지만 여전히 불안해한다. 에임스는 그녀처럼 생존의 각박함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 그는 돈이 많지 않아도 될 것 같다고 말한다. 소설은 부흥기의 시카고에서 불황의 뉴욕으로 넘어가면서 자본주의의 흥망성쇠를 그린다. 캐리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에임스가 아닌 다른 누군가가 필요할 것이다. 끊임없이. 자본주의의 방책이 정신주의라는 것은 또다른 극단적인 오답에 불과하다. 캐리가 불안해하면서도 계속 살아남을 것이라는 미래, 배우로서 성공하리라는 그 미래는 에임스를 택한다는 것이 아니라 그녀가 테스의 결말을 맞지 않으리라는 점에 있다. 테스는 희생자였고, 불운했으며, 사랑으로 인해 살해당했다. 하지만 캐리는 사랑을 믿지 않는다. 그녀는 그 욕망이라는 것들이 얼마나 무책임한지 알았기 때문이다. 캐리는 행복해지길 원한다. 하지만 그 행복은 너무나도 희박한 산소와 같이, 그녀를 간신히 숨쉬게 할 정도, 맛보게 할 만큼만 있을 뿐이다. 겨우 숨만 붙어 있게끔 유지하면서. 소설의 악덕은 결국 온전한 행복의 실패다. 충분한 행복이란 없다는 걸 알지만, 캐리는 변하지 않는다. 그래서 캐리는 계속, 살아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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