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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인
주제 사라마구 지음, 정영목 옮김 / 해냄 / 2015년 12월
평점 :
지독한 풍경들
-주제 사라마구 '카인'을 읽고-
질투하는 신
여호와는 아벨의 공물은 받았지만, 카인의 공물은 받지 않았다. 카인이 아벨을 살해한 순간 그는 두 죄를 저지른다. 하나는 인간을 죽였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동생을 죽였다는 것이다. 여호와는 그에게 죄를 묻지만, 카인은 이를 수긍하지 않고 반박한다. 여호와는 그가 유독 아벨만을 사랑하거나 카인을 증오했던 게 아니며, 그저 카인을 ‘시험’했다고 고백한다. 카인이 아벨을 질투했듯이 여호와 또한 완전한 헌신을 바라며 둘을 질투했다. 카인과 아벨의 사이에 균열을 가져온 건 바로 여호와였기 때문이다. 여호와는 카인에게 ‘누구도 해칠 수 없게끔’ 표식을 남긴다. 이 표식은 사실상 여호와가 누군가를 질투했으며 그 질투로 인해 원하는 것을 얻지 못했다는, 실패의 증거인 셈이다. 그는 카인과 아벨, 두 형제의 헌신을 바랐지만 그가 얻은 것은 아벨의 피와 카인의 불신 뿐이었다.
권위와 헌신, 영광. 성경은 이스라엘 민족과 여호와가 이룬 찬란한 영광들만을 기록한다면 카인은 그 성경의 길을 벗어난다. 성경이 시대별로 점차 자라나는 유대인들을 기술한다면, 카인은 유리된 채 ‘동일한 현재’에 머무른다. 카인은 아브라함에게서 이삭을 구했지만, 어디선가 또 다른 아브라함이 또 다른 이삭을 죽일 것이다. 인간이 무슨 탑을 세우든 신은 계속 그 탑을 무너뜨릴 것이다. 카인은 여호와를 사랑했던 만큼 여호와를 증오하게 된다. 그의 질투로 인해 너무 많은 비극들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여호와는 간교하고, 질투가 많으며, 한없이 영악하다. 욥에게 밀어닥친 비극은 악마 때문이 아니라 악마에게 그를 떠민 여호와에게 있다.
여호와는 자신의 소유를 확신하기 위해 모든 이들을 시험한다. 그리고 그들을 끊임없이 의심한다. 그는 그들을 ‘소유하지 못했다’. 의심과 불신, 폭력은 그들을 끊임없이 다시 소유하기 위한 과정에 불과하다. 카인은 신이 인간을 사랑한다고 말하는 아브라함에게 냉소적으로 말한다. 신이 그들을 사랑했다면, 약속을 어기지 않았을 것이라고. 아브라함은 이삭을 평생 납득시키지 못할 것이다. 이삭은 아버지에게 왜 그를 죽이려 했는지 계속 묻는다. 이삭이 거듭해서 알게 되는 건 여호와의 전능함이 아니다. 그저 아브라함에게 이삭은 하나의 양에 불과하다는 것뿐이다. 후일 내려지는 모든 축복들은 이삭을 설득하기 위한 여호와의 시도였다.
공범
카인은 노아의 방주에 탄 사람들을 모두 죽인다. 여호와가 방주를 열었을 때 마주한 사람은 카인 뿐이었다. 노아는 여호와의 뜻을 받들어 모든 동물들을 한 쌍씩 태운다. 그러나 그는 가장 태우고 싶었던 일각수를 놓친다. 일각수는 홍수로 인해 소실될 대지 너머로 사라진다. 여호와는 그가 노아를 죽였다고 화를 내는 게 아니라 ‘자신의 계획’을 망쳤다고 분개한다. 카인은 왜 그들을 죽이고 인류의 시작을 막았는가?
카인은 여호와가 저지르는 모든 ‘실수’를 막고자 했다. 여호와가 왜 그들을 사랑한다고 하는 한편 그들에게 엄중한 체벌을 가하는 것인지 묻는다. 천사들은 그에게 굳이 궁금해하지 말라거나 신에게서 큰 뜻이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카인은 이미 신의 질투를 목격했기 때문에 묻는다. 왜 그는 ‘처음부터’ 실수를 저질렀는가? 신이 아담과 하와에게 자신의 혀를 박아넣었을 때, 신과 같은 언어를 쓰게 했을 때부터 그들과의 논쟁을 예상했어야 했다. 카인은 여호와가 만든 자신의 적이자 그를 가장 잘 이해하는 공범이 된다.
신의 대척점은 악마가 아니다. 신의 대척점은 카인이라는 인간이 된다. 신은 카인이 썩어 문드러질 것이며 어떤 영광도 누리지 못할 것이라고 예언하지만, 카인은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가 마주했던 모든 부조리들은 여호와의 이름으로 행해진 것이었다. 카인이 속죄하는 방법은 살해의 책임을 다른 누군가에게 돌리는 것이 아니다. 그 살해의 원인을 짚어나가는 것이다. 그 원인을 짚어나가기 위해서는 여호와라는, 혹은 그 근원을 마주해야 하는데 니체가 말하지 않았던가. 우리가 괴물을 들여다볼 때, 괴물 또한 우리를 들여다본다. 그리고 괴물과 싸울 때 가장 중요한 점은, 우리가 괴물이 되어버린다는 것. 괴물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괴물이 되어서만 괴물과 동등하게 맞설 수 있지 않은가?
카인은 여호와의 전능함을 지니지는 못하지만 여호와의 게획을 망쳐 놓을 누군가가 될 수 있다. 악마는 여호와의 전능을 입증하는 도구에 불과할 뿐이다. 인간은 신을 만들었고 그 신을 폐기하며, 다시 매달렸다가 내던지기를 번복한다. 이러한 불신과 맹신의 번복 속에서 우리가 마주하게 되는 진실은 무엇인가. 아니면 그저 회의밖에 없을까.
하와와 릴리스
이 회의주의의 끝에서 마주하게 되는 것은 무엇인가? 노인은 카인에게 말한다. 그는 자신에게 진실을 말하지 않을 것이라고, 카인은 그래서 자신의 이름 대신 동생의 이름을 댄다. 굳게 믿어왔던 모든 것들은 여호와의 말 한 마디에 의해 카인처럼 떠돌아다니게 된다. 여호수아는 여호와에게 적을 멸족시켜 달라고 말하려 하지만, 여호와는 재빨리 여호수아의 입을 막는다. 여호와가 만약 그가 처음부터 정해놓은 규칙을 어긴다면, 그건 전능함이라기보다는 ‘위반’이기 때문이다. 하와는 에덴에서 쫓겨나지만 천사와의 협상을 통해 과일을 얻는다. 아담은 하와를 자신의 소유물로 칭하지만, 하와는 자신의 자유를 주장한다. 릴리스도 마찬가지다. 노아는 릴리스의 소유권을 주장하지만 릴리스는 노아에게 어떤 마음도 주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한다. 이삭은 자신의 아버지를 의심한다. 유대인과 가나안, 이스라엘은 처음부터 있었던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이 회의는 무엇을 낳는가? 살아 있는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남지 않는 피바다, 혹은 재 뿐일까?
인간은 성경을 썼고 성경은 인간을 쓴다. 성경이 모든 소설의 근원일지도 모른다는 설은 사실 인간이 쓰는 소설이 성경과 사뭇 닮아있기 때문에 가능해진다. 이러한 상호 쓰기의 가능성은 인간을 신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신을 인간으로 격하시킨다는 ‘불손’함이 있을지도 모르나, 그렇다면 인간은 신보다도 못한 존재란 말인가? 인간과 신은 대화할 수 있으며, 그 대화는 한 쪽의 일방적인 납득이 아니라 어떤 논쟁으로 이어졌을 때만 생산적인 상황에 이를 수 있지 않은가.
성경에서 모든 영광에 대해 이야기했던 것과 달리 사라마구는 성경이 쓰지 않았던 풍경들을 쓴다. 모세가 자신의 형 아론을 어떻게 대우했고 삼천명의 피가 얼마나 흥건하게 흘렀는지, 여호수아가 전리품을 훔친 사람을 어떻게 대우했고 그 군대가 지나간 자리가 얼마나 비참했는지. 그 풍경들 또한 성경에서 말하지 않았으나 한편으로는 말해질 수밖에 없었던 어떤 것들이었다. 하와는 자신의 꿈에 대해서 말한다. 꿈에서는 ‘뱀’이 나온다. 여호와는 뱀이 자신보다 더 많은 걸 알고 있느냐고 비꼰다. 이 순간 인간은 신에게서 떨어져 나온다. 하와는 이미, 신이 그녀의 꿈에 간섭하지 못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 그녀는 여호와의 폭력으로부터 비껴 나오려 한다. ‘남자들이 너를 소유하고, 너를 죽일 것이고, 너는 산통에 시달리며’. 그 모든 저주들을 거부하는 릴리스는 카인으로부터 여호와의 이야기를 듣는다. 이미 그녀는 ‘아벨’이라고 밝혔던 누군가가 사실은 ‘카인’이라는 것을 알고 수긍했다. ‘카인’은 저주받았고 모두가 부정해야 하지만, 오히려 여호와에 의해 그는 부정받지 못하고 끊임없이 참견해야 한다. 이 풍경과 정서들을 써내는 것, 여백으로 처리되었던 것이 사실은 여백이 아니라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야말로 지독한 회의 끝에 내심 바라는, 반짝 빛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게 더 깊은 절망일지언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