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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부대 - 2015년 제3회 제주 4.3 평화문학상 수상작
장강명 지음 / 은행나무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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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쓸모없는 죽음

-장강명 '댓글부대'를 읽고-

 

 

 

 

 

전쟁과 평화

    

 소설의 세 인물은 각기 닉네임으로 지칭된다. 소설에 나오는 커뮤니티의 이름은 작가가 뒤에 밝혔듯이 실존하는 커뮤니티들을 모델로 한다. 이 소설은 사실 온전한 픽션이 아니라 팩션이다. 소설은 사실일 법한이야기들을 엮는다. 그래서 소설은 늘 개연성과 허구라는 틀에 구속된다. 그러나 이 개연성을 획득하기 위해서 사실을 끌어들이는 순간 소설의 가장 큰 능력이 사라지고 만다. 그건 바로 상상력이다. 상상력은 디테일에 있는가, 그 디테일로 모든 것이 해결된다고 믿는 순간 우리에게는 악마가 찾아든다. 악마는 디테일로 우리를 유혹한다. ‘댓글부대의 디테일은 바로 세 인물이 지니는 욕망과 좌절, 그리고 헛된 희망이다.

 이 디테일들은 지극히 사실적이기에 빛나기 어렵다. 이철수와 어르신, 호화찬란하게 빛나는 호텔과 한 신문을 파괴시키는 공작들은 허무맹랑하다고 여길 수도 있겠지만, 그들이 마주하는 현실은 너무나도 설득력이 있다. 이미 우리는 수많은 근대사를 다룬 영화에서 얼마나 세상이 비현실적이 될 수 있고 부패할 수 있는지 목격해 왔다.

 무엇보다 이 소설에서도 고백하듯 댓글 부대1차가 아닌 2차다. 2차는 1차적인 산물을 재가공한 것을 의미한다. 소설은 하나의 소설로서 독립하지 못한다. 반영과는 다르다. 이 소설에서 언급되는 절망들은 사실상 인터넷 공간에서 난무하는 이야기들, 좌절들을 그대로 묘사한 것에 불과하다. 그러나 이게 20대의 초상이고, 우리는 이 초상에서 벗어나지 못한다고 말한다면, 소설은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소설은 철저하게 현실을 묘사할 뿐이며, 현실의 거울 역할밖에 하지 못하는 건가? 모든 소설은 확인에 불과한 것인가?

 삼궁과 찻탓캇 등의 인물들이 술집에서 만난 여자들에 의해 농락당하거나 돈을 뜯기고, 희망을 걸었으나 배신당하고, 죽어가는 와중에도 그녀들을 걱정하는 모습은 지극히 찌질하다. 작가는 이전에 댓글부대를 작업하기 전 한 인터뷰에서 지극히 찌질한 군상들을 그릴 예정이라고 말한 바 있다. 하지만 이 찌질함은 우리가 익히 아는 찌질함에서 변하지 않는다.

 이 익숙한 찌질함과 혐오를 불러일으키는 발언들 덕분에 이 소설의 가독성은 뛰어나다. 작가의 다른 소설들을 읽을 때 순식간에 읽었다가 장점이 될 수 있듯이, 이 가독성은 또다른 단점으로도 작용한다. 그것은 바로 드라마의 문제다.

 

 

 

 

죽음

    

 삼궁은 찻탓캇의 죽음을 몰랐을까? 이철수는 찻탓캇을 죽였을까? 소설에서 등장하는 20대 청년들은 주도자가 되었다가 피해자가 되고, 이내 장기말이 되어 버려진다. 이철수는 그 위에서 군림하는 인물이다. 어떤 역전을 바라지는 않았다. 희망도 바라지 않았다. 이 소설은 지극히 위악적이지도 않다. 왜냐하면 그들이 바라보는 적대 대상’, 그들이 의뢰받아서 파괴해야 할 대상들 또한 그들의 내부에 모순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지극히 착한 척하고 옳다고 믿는다. 그들만이 선을 구현하고 있다고 믿는다. 하지만 그 믿음은 순식간에, 아주 작은 파문으로 깨질 수 있다. 임상진 기자와 찻탓캇의 인터뷰를 배제한다면, 어쩌면 그 작업은 그 댓글부대가 행한 게 아닐 수도 있다. 이미 일어난 일이고 이미 파국은 왔다. 그들이 행동하지 않아도 정해진 것이다.

 다만 이 소설과 작가의 첫 발표 소설인 표백이 지니는 죽음의 층위가 조금 다르다. 물론 수적으로 봐서 표백이 압도적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만, 그 죽음의 경우 살기 위해 죽었다라는 역설이 있는 반면 이 죽음은 너무나도 허망하다. 쓸모없는 죽음, 그게 만약 이 현실에서 죽음이 통용되는 방식이라면, 우리는 그 다음에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앞서 말한 인터뷰에서 작가는 철저하게 재미를 추구한다고 말했지만, 그의 작품 전반에서 드러나는 강한 죽음의 정서에서 나는 다음 작품이 궁금해진다. 그는 계속 죽음의 쓸모에 대해, 효용에 대해 묻는다. 그렇다면 이제, 그 죽음은 여전히 똑같이 작용하면서 그 효과를 덜하게 될 것인가. 아니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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