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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의 언어 -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인문학 음식의 언어
댄 주래프스키 지음, 김병화 옮김 / 어크로스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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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어로 읽는 음식

 -댄 주래프스키의 '음식의 언어'를 읽고

 

 

 

 

 

 

 

앙트레의 가치

  

앙트레는 프랑스와 미국에서 다른 의미로 쓰이지만, 프랑스어라는 사실은 분명하다. 프랑스어가 메뉴에 쓰인다는 건 가격대가 상승한다는 것을 암시한다. 미식의 도시가 프랑스로 대표된 만큼, 프랑스어는 절대적인 가치를 지닌다. ‘근원이 된다는 점에서 프랑스어는 자본주의에 편승하는 훌륭한 대상이다. 앙트레의 어원과 현대에서 어떻게 변용되어 왔는지 그 맥을 짚어본다는 것은 과거의 시장에서 지금의 본격적인 자본주의 사회로까지 어떻게 발전해 왔는지 역사를 짚어본다는 것과 일맥상통한다. 가격대가 높을수록 단어는 점점 길어지면서 근사해 보이는 단어를 쓰고, 진짜라고 주장하는 대신 암시한다. 반면 싼 음식은 긍정적이고 모호한 형용사를 쓰고 진짜라고 주장하기를 마다하지 않는다. 그들은 가격대의 차이를 변명하기 위해 온갖 수단을 동원하고, 그들의 가치를 정당화하고자 한다. 이러한 얄팍한 술수에 대해 메뉴판을 제대로 읽어낼 것을 주장한다. 언어에게 휘둘리는 대신 언어를 파악해야 한다.

자본주의는 언어를 하나의 상품으로 만들고, 포장지처럼 몇 번이고 둘러서 안에 있는 걸 쓸데없이 기대하게 만든다. 자본주의의 기점은 미국-아메리카로, 모든 음식들이 모이고 흩어진다고 여겨지며 결국 모든 음식의 기원을 없애고 자본으로 환산한다. 이로 인해 언어는 압살당한다. 언어가 압살당하면서 음식 또한 안전하지 못하게 된다. 언어와 음식 간의 올바른 관계를 회복하는 것, 모든 것이 아메리카가 되는 상황을 극복하는 방안은 바로 언어의 회복에 있다.

이는 음식의 이름, 언어가 명명된 순간을 되짚어 올라가는 지점에서 가능해진다. 처음으로 이름이 붙여진 장소와 유래를 알게 된다면 영어식 표기는 힘을 잃는다. 가령 케쳡의 경우, 우리가 흔히 아는 토마토 케첩이 아닌 중국의 오래된 생선 소스라는 걸 알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케첩이 KETCHUP이 아니라 케(오래 저장된 생선)+(소스)이라는 중국어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을 통해 케첩은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변모한다. 케첩이 아메리카에 오게 된 건 자본주의가 벌린 시장이라는 경로 덕분이었다. 외국의 음식들은 새로이 변종되면서 새로운 맛을 이끌어냈다. 이걸 가능하게 한 건 부르주아였다. 언어의 회복은 동시에 우리가 잊고 있었던 자본의 가능성을 확보하게 해준다. 자본은 바로 새로운 융합의 가능성을 환기한다.

 

 

  

돌멩이 수프의 가능성

  

돌멩이 수프의 일화는 사실 단추 수프 일화의 변용처럼 읽힌다. 한 나그네가 굶주린 채 어떤 마을에 당도한다. 그 마을은 너무 인색해서 나그네에게 빵 한 조각도 주지 않는다. 나그네는 사람들에게 가장 맛있는 수프를 끓여 보이겠다고 호언장담한다. 그는 자신의 주머니에 있는 단추를 끓이면 맛있는 수프가 된다고 말한다. 사람들이 모여들자 그는 어떤 재료들을 조금씩 추가해야 한다고 말하고, 사람들은 그의 말에 홀려 이것저것 집어넣는다. 수프의 건더기는 풍성해지고 국물은 진해진다. 마을 사람들은 수프를 나눠먹는다. 그들은 가장 맛있는 수프를 끓이는 방법을 알아냈다. 바로 공동체였다. 서로를 배려하고 도우며, 함께 살아나가고자 하는 마음’. 그게 수프를 맛있게 만든 것이다. 또한 맛있는 걸 먹고 싶다는 강한 마음도 그 요인에서 빠지지 않을 것이다.

자본은 사람들을 억압하고 끊임없이 상하관계를 만들어냈지만, 동시에 사람들로 하여금 새로운 걸 접하고 계급이라는 사다리를 오를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세비체가 덴푸라였고 시크바즈였다는 맛의 뿌리는, 어떤 경계도 없이 거대한 바다를 자유로이 오가는 생선들처럼 그들 또한 무한한 가능성이 있다는 발견에서 온다. ‘이민은 새로운 삶을, 새로운 타자들을 만나게 해주는 기회다. 하지만 우리는 그들을 배제하고 거부하면서 안온한 공동체적 삶을 유지하려고 한다. 그러나 영국의 국민 음식이라고 불리는 피시앤드칩스는 한때 모든 사람들에게 타자로 머물렀던 유대인들의 생선 튀김에서 유래한다. 그들은 그로서 영국인이 된다. 국경은 사라지고, 맛있는 음식으로 통일된다.

어떤 음식의 유래를 찾는다는 건 그 음식의 소유권을 어떤 특정한 나라에 귀착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가령 소시지는 독일 것이라거나 이탈리아 것이라는 다툼은, 그 나라에서 지니는 소시지의 규격의 고유성을 강조할 수는 있어도 새로운 가능성은 부여하지 못한다. 코코넛 매커룬이 프랑스의 고급 과자 마카롱이 된 것처럼, 새로이 번역되고 복사본이 없는 대상-시뮬라크르로서 창조될 수 있는 것이다.

아메리칸 셰프의 경우 프렌치 레스토랑에서 경력을 쌓아오던 한 셰프가 평론가의 공격에 무너지면서 영화가 시작된다. 그는 늘 주어진 메뉴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상황에 갈등하며, 결국 레스토랑을 박차고 나간다. 그는 평론가에게 화를 내며 자신의 요리는 이게 아니며, 요리는 조금도 모른다고 비판한다. 그가 행복해질 수 있는 수단은 푸드 트럭도 고급 레스토랑도 아니다. 바로 국경과 모든 경계를 뛰어넘을 수 있는 요리의 가능성이었다.

 

    

 

 

폴리애나 효과-마무리는 디저트

  

불꽃놀이와 화약에 사용되었던 초석 기술은 달콤한 셔벗과 아이스크림을 만든다. ‘전쟁이 아닌 먹을 것에 귀중한 초석을 쓴다는 것이 낭비처럼 여겨질지도 모르지만, 우리는 덕분에 웃는다.’ 덥고 짜증이 나는 와중 시원하고 달콤한 것을 먹으면서 더위를 즐길 수 있는 것이다.

불행은 각자 다르고, 일반화할 수 없으며, 쉽게 공감할 수도 없다. 사람들은 서로의 불행 때문에 서로를 미워하고 공격하고 싸운다. 불평은 해도 해도 끝이 없다. 우리는 행복해지기 위해서 태어났지만, 아주 쉽게 불행해지곤 한다. 부정적인 단어는 이미 부정적인 현실을 가정한 다음 행사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우리는 쉽게 상품이 되지 않기 위해 의심하고 애쓰려고 한다. 가령 레스토랑에서 진짜 우유 생크림이라고 걸어 놓았다면, 우리는 다시 점원에게 묻는다. 이게 진짜 생크림이냐고. 그리고 우유 생크림에 대해 아는 모든 의심들을 점검해 본 뒤 거들먹거리면서 진짜인지 아닌지 판단을 내린다. 이를 통해 그들은 속지 않으려고한다. 속지 않는다는 게 좋은 것이라면, 끊임없이 의심하는 것 또한 행복해질 수 있는 길일까? 좋은 것과 행복한 것은 다르다. 달콤한 디저트가 이를 썩게 만드는 것처럼. 하지만 이미 우리는 모두가 대상이 되어버렸다. 우리는 우유 생크림에 대한 정보들을 찾아보고 이를 암기하고 속지 않기 위해 애쓰면서 우유 생크림을 산다. 그런데 우리가 우유 생크림을 좋아한다는 확신이 있는가? 어떤 사람은 우유 생크림이나 생크림보다는 버터 크림을 좋아할 수도 있다. 음식의 가치는 사실상 자본이 세워놓은 계급에 의해 결정되는 경우가 많다.

우리는 긍정적이고 낙관적인 종족이라고 저자는 말하지만, 현대 사회는 디저트를 금지한다. 살이 찔 수 있다는 것과, 낭비라는 이유에서다. 이에 화답하듯 디저트가 비싸지는 것은 단순히 손이 많이 가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디저트는 자본의 기준을 뛰어넘는다. 아주 조그만 주제에 손이 많이 가고, 재료도 쉽게 낭비된다. 우리는 달콤한 콤포트를 만들기 위해 설탕 반 그릇을 후라이팬에 붙고 그게 다 졸아서 자작해질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디저트는 자본주의의 원칙에 따르는 척 금가루를 두르거나 유명한 셰프에게서 나오는 척하지만, 사실상 자본주의에 위배되는 음식인 셈이다.

그러니까, 그냥 잊지 말고 디저트를 주문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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