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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의 탄생 - 사라진 암호에서 21세기의 도형문까지 처음 만나는 문자 이야기
탕누어 지음, 김태성 옮김 / 김영사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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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어라는 신화

 -탕누어 '한자의 탄생'-

 

 

증식하는 길

    

  문자는 그림 기호에서 시작된다. 잘 듣는 사람, 타인의 말을 잘 경청할 줄 아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이라는 청각에 대한 후한 대우에 비해 시각은 인간의 기본적인 감각 요소이자 그로 인해 가장 쉽게 어리석어질 수 있는 감각이라는 혹평을 들었다. 하지만 장님인 보르헤스는 끊임없이 그의 앞에 놓인 어둠과 빛을 헤치고 문자를 통해 무언가를 보려고 시도했다. 본다는 것은 기본적인 감각이면서 동시에 우리가 망각하고 지나가버린 어떤 것을 발견할 수 있게 할 유일한 수단이 된다. 그림 기호는 인간이 본 모든 것, 그의 생활이나 수렵, 목축, 생각한 것, 운명, 죽음, 탄생을 묘사한다. 라스코 동굴벽화는 원시인의 심심풀이가 아니라 그들이 가치있다고 생각했던 것에 대한 기록이었다. 왜 그들은 기록을 남겨야만 했는가? 인간에게는 짐승처럼 날카로운 발톱이나 이가 있지도 않았고 몸의 크기 또한 어중간했다. 그들은 철저하게 자신이 아닌 도구를 통해 생존해야만 했다. 이러한 도구, 그들과 대립되는 타자로서의 동물과의 구분선을 또렷하게 그어준 게 아니라 인간의 위치를 하락하게 만들었다. 인간이 만들어내고 인간만이 쓸 수 있는 유일한 것, 그게 문자였다면 어땠을까. 눈을 크게 뜨고 언덕이든 산에서든 모든 것을 바라보기 위해 애쓰는 행동, 이 간결한 그림은 후에 이라는 한자가 된다.

  그들은 무엇을 바라보았던 것일까? 갑골문자에서 상형 문자로, 상형 문자가 이어 전주와 가차라는 길로 갈라지면서 한자는 끊임없이 변화해 왔다. 세세한 현실을 드러내기 위해 글자는 더욱 더 복잡해지고 늘어났다. 전주의 경우 기본적으로 문자가 가지고 있는 원초적인 의미의 복사이며, 확장과 연상을 통해 새로운 의미와 사용 방식을 만드는 것이고, 반면 가차의 경우 의미의 연결을 고려하지 않고 소리로만 근거해 사용하는 것이다. 전주의 경우 끊임없이 뻗어나가는 뿌리와 같은 유사의 관계로 형성되는 언어를, 가차의 경우 상사적인 관계로 단절되면서도 묘하게 증식되어 가는 언어를 상상할 수 있다. 그러나 전주의 경우 기존에 지니고 있던 의미-중심은 점차 불어나는 부분들에 의해 복사원본의 지위를 잃고 만다. 시뮬라시옹의 세계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반면 가차의 경우 기존 상형 문자의 뿌리를 야멸차게 끊고 오로지 소리라는 실용주의에 의거한다는 저자의 평가가 있지만, 이 또한 새로운 접붙이기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결국 이러한 형성과정을 통해 한자는, 세계를 하나의 지도로 그려낸다. 처음에는 일직선 길만 그려져 있던 지도는 골목길과 부분마다 위치한 상점, 나무를 그리면서 세계를 그려나간다.

 

 

어느 겨울밤 한 여행자가

     

지도는 세계를 구체적으로 드러내려고 노력하는 동시에 지도의 기호를 통해 세계를 상징화시킨다. 이러한 상징화는 보존의 취지만 지니고 있지 않다. 탈락 또한 가능해진다. 과거, 교통수단이자 힘의 과시, 생계 수단으로 중요했던 말을 가리키는 한자어는 말의 모습에 따라 세세하게 다 있었다. 무릎 위가 흰색인 말, 검푸른 말, 자주색 말, 몸 전체가 붉은 색이고 배만 흰색인 말. 과거와 달리 현재에서 말의 모습에 따라 말을 묘사하는 한자는 몇 개 남아 있지 않다. 검정색과 흰색이 뒤섞인 말, 누런색에 흰 얼룩무늬가 있는 말, 역사적 서사에서 한 자리를 차지했던 말들만이 살아남는다. 또한 먼지를 뜻하는 진이라는 한자는 중국 공산당의 실용주의에 의해 6획의 한자가 된다. 39획에서 15, 6획으로 줄어들면서 말하거나 쓰기에는 더 쉬워졌지만, 이러한 쉬움은 과거를 어려움으로만 포장할 수 있다는 우려가 있다. 과거에는 사슴의 아름다움에 대해 빠짐없이 묘사하겠다는 욕심이 있었고 그 욕심이 글자에 반영되었지만, 현재 우리는 사슴을 보며 아름다움을 쉽게 느끼지 못한다. 동물원 철창살 안쪽에 있는 사슴은 무기력하게 두 눈을 꿈벅거리고 있을 뿐이다.

  이탈로 칼비노의 어느 겨울밤 한 여행자가라는 소설에서는 끊임없이 소설의 시작만이 번복된다. 소설의 주된 갈등이 소개되고 점차 흥미진진해지려는 찰나 소설은 누군가에게 빼앗기거나, 뒷부분이 잘못 인쇄되어 있거나, 번역을 방해받는다. 남성 독자와 여성 독자는 그들이 읽은 잘못된 책의 뒷부분을 알고 싶다는 소망을 품고 한 교수를 찾아간다. 그 교수는 이미 죽어버린 사어인 킴메르어 담당 교수다. 그는 소설을 번역해주지만, 그 소설이 이미 끊겨져 있기 때문에 그는 더 이상 번역해줄 수 없다. 그러한 난관의 봉착 앞에서 킴브리어 소설이야말로 킴메르 작가의 끊긴 결말을 제공해 줄 수 있다는 유혹적인 제의 앞에서 그들, 독자들은 뒷 이야기를 듣기를 기대하지만 거기서도 똑같이 시작만이 번복되어 번역될 뿐이다. 게다가 그 시작도 다르다. 한 문자가 가지고 있는 의미 또한 끊임없이 변이되고 소멸되거나 튤립 구근처럼 땅 속에 가만히 묻혀 있다. 과거 중국 한자에서 사멸한 문자가 일본의 섬 이름이거나, 사용하지 않는 단어가 일본 선수의 이름에 턱하니 박혀 있을 때 마주하는 난처함은 동시에 과거 문자가 아직 살아 있을 수도 있다는 희망을 제시한다. 이러한 희망은 끊임없이 중국 한자의 모태인 그림 기호-상형자와 갑골문자에 대해 해석하게 하고 상상하게 만든다.

  그러나 현대 중국에서의 문자는 어떠한가? 과거 노자가 내게 큰 우환이 있다면 그것은 오로지 내 몸 안에 있다라고 말할 때 쓴 신이라는 문자는 인간의 배 안에 조그마한 점이 하나 있는 상형문자에 기반을 둔다. 그 그림 기호에서는 큰 배에 비해 아주 작은 점이 눈에 분명하게 보인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무시해버리고 싶지만, 차마 무시해버릴 수 없는 또렷하고 작은 검은 점. 그러나 이 정언에 쓰인 한자는 타락한 10대 남녀 아이들이 불장난을하고 나서 직면하는 절망적인 깨달음이 되고 만다. 그들은 그들의 실수가 자신의 몸 안에 어떤 흔적으로 남았다는 것을 깨달아야 하며, 이를 직면할 수밖에 없다. 

   현대사회에서 깨달음이란 불가능한 것이 되어버린다. 우리는 모든 것을 학교와 직장, 세계로부터 배우고 받아들인다고 착각한다. 깨달음이란 타자에게서 무언가를 찾는 것만을 포함하지 않는다. 그 자신이 어떤 존재이고 무슨 가능성을 지니고 있는지 재차 알게 되는 것이다. 과거 인간은 깨달음을 통해 문자를 만들었고, 문자를 통해 기록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깨달았다. 반면 현대 사회에서의 언어는 철저히 자본주의에 기반을 두고 이루어진다. 모든 것은 실용주의와 자본적 가치하에 선택해야 할 것이 되어버린다. 중국 공산당이 추구했던 복잡한 한자어의 간소화 뿐만이 아니라 세계적 언어의 단일화를 그 예시로 들 수 있다. 저자가 말했던 경험처럼 대만의 경제정치구조에서 대만식 중국어는 그 중심에서 밀려나고 영어와 일어만이 중요시되며, 이러한 차별은 동시에 대만식 중국어의 사멸을 불러오고 언어의 단일화가 외국어를 통해 이루어질 수 있다는 위기감을 느끼게 한다. 인간이 자신의 존재 가치를 오직 자본을 통해 획득할 수 있는 것으로 배우게 되면서, 언어에 대한 관심 또한 자연스레 소홀해진다. 아니, 언어는 또다른 자본적 가치의 획득 수단이 된다. 더 높고 더 밝은 곳으로 올라가기 위해 사람들은 가장 많이 쓰는 언어를, 상류층의 언어를 배우려고 한다. 이러한 움직임은 그들의 존재를 빛나게 만들어주기는커녕 더더욱 급박하게 만들 뿐이다. 과거 사람들이 당하였듯. 우리 또한 바벨탑이 무너지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수선공의 세계

    

  그렇다면 한자에 대해 소홀해졌다는 점에 부끄러움을 느끼고, 과거의 한자로 되돌아가야만 하는가? 저자는 급작스러운 단일화를 추구하는 진보도 거짓이라고 생각하지만, 회귀를 주장하는 것 또한 퇴보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영어라는 언어는 그들에게 의사소통의 수단이 될 수 있지만 동시에 언어의 경이와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가령 보르헤스와 바르트가 한자를 통해 중국인들이 쉽게 지나칠 수 있었을 환경에 대해 감탄하며, 한자어의 모습 하나하나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 또한 한자가 그들이 세상에서 아름다움을 더 찾아낼 수 있었던 계기였다는 점을 의미한다.

  발터 벤야민의 모습과 유사한 상형 문자는 후에 덕이 된다. 어떤 격려나 찬양이라는 쉬운 풀이보다는 왜 이 될 수밖에 없었는지 상상해 보는 것도 좋은 계기가 될 수 있다. 단순히 가차라고 판단하며 상형 문자와의 고리가 끊겼다고 한탄하기보다는, 그러한 벤야민적 모습이 어떻게 덕이 될 수 있는지 되짚어 보는 것이다. 이는 벤야민이 파리 시내를 걸어다니면서 찾아내고자 했던 어떤 것, 유대인 혐오가 들끓었던 독일이라는 모국을 떠나 파리라는 이국에서 그가 간절하게 생을 지탱하기 위해 필요로 했던 것이었다. 벤야민은 제2제정기 파리에 살았던 보들레르를 통해서 그가 마주한 참혹한 현실을 분석하고 이를 구원해 낼 수 있는 계기를 발견하고자 했다. 하지만 보들레르는 벤야민보다 훨씬 더 예전에 죽었고, 그 때의 파리와 벤야민이 있는 파리의 시간차는 어마어마하다. 벤야민은 단순히 보들레르로 도피하거나 보들레르를 남용하려고 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미래란 쉽게 예측할 수 없는 어떤 것이라는 점을 알고 있었다. 청각의 경우 멀리서 들려오는 나팔 소리, 바람이 스치는 소리를 통해 몇분 뒤의 상황을 예측할 수 있게끔 한다. ‘미래를 엿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미래에 대한 우월감은 동시에 청각과 후각을 속일 수 있는 계기로 역작동하기도 한다. 반면 시각의 경우 미래를 볼 수 없으며, 단지 현재를 끊임없이 관찰할 수 있을 뿐이다. 과거는 현실에 어떤 흔적을 남긴다. 보들레르는 자본주의와 스노비즘이 팽배한 현실에서 사람들이 잊어버리고 있는 어떤 가치’, 다 늙어빠지고 퇴물 취급 당하며 흉측해진 가치를 찾아내기 위해 애썼다. 벤야민 또한 마찬가지로 이제는 나치스의 나라가 되어버린 독일, 그리고 이에 속속들이 동조하면서 유대인을 희생양으로 삼으려는 세계의 시선에 맞서 그들이 묻어버린 가치를 다시 찾아내고자 했던 것이다. 덕이라는 단어는, 어떤 소중한 것에 대한 끊임없는 탐색의 과정에 지치지 않고 끈질기고 지고지순하게 탐색한다는 태도를 드러내는 것일지도 모른다.

  레비 스트로스의 수선공에 대한 개념 또한 이와 연계된다. 수선공의 가방에는 과거 사람들이 무심코 버리거나 지나쳤던 것, 잊혀졌던 모든 것들이 담겨 있다. 수선공은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사람이 아니라 이전의 것을 통해 현재의 상처를 치유하고 대처하는 사람이며, 그의 손에서 과거의 것은 끊임없이 현재의 것으로 회귀된다. 저자는 한자의 탄생이라는 과거를 통해 현재의 대만을, 고급 클럽에서 영어와 일본어를 쓰고 타자의 존중이 아니라 타자에 매몰되는 대만의 모습을 우려하며 덕의 태도로 이러한 사태를 관망하고, 이어 고려하고자 했는지도 모른다. 이는 우리에게 한자와 중화주의에 대한 오만감을 느끼게 하는 동시에, 그 오만함을 통해서 끝까지 붙잡으려고 하는 한자 주체에 대한 위기의식을 숨김없이 보여준다는 점에서 역사적 공감성-한글이라는 언어를 사용하는 한국인으로서-과 전이된 위기감을 느낄 수 있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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