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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은 어떻게 작동하는가 - 그리고 삶은 어떻게 소진되는가
류동민 지음 / 코난북스 / 2014년 12월
평점 :
절판


 

 

서울(이라는 공간)(인간에 의해) 어떻게 작동하는가

-류동민의 '서울은 어떻게 작동하는가'를 읽고- 

 

 

 

 

 

 

  우롱탕의 정치 

 

  현대의 역사는 경제사다. 근대 부르주아의 태동과 함께 소득의 축적은 신분의 상승을 의미하게 되었다. 신분 상승의 기회는 자유와 평등이라는 기조 아래 슬로건처럼 내걸렸고, 세상은 끊임없이 바뀌었다. 근검절약하는 자린고비가 모범적인 인간상이었다. 낡은 단칸방에 살면서도 수억대의 자산을 베개 속에 숨겨 놓고 있는 사람들과, 그 사람들이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준다는 미담들이 전설처럼 떠돌았다. 과거를 미화할 생각은 없지만, 당시에는 지나친 소비가 흠이 되었다.

  현대 사회에서 소비는 자신을 표현하는 수단으로 사용된다. 호모 콘수무스, 소비자로서의 인간이 대두되면서 사람들은 소비를 통해 자신이 현재 지닌 정체성을 규정하고 지향하는 정체성을 좇아가고자 한다. 좋아하는 연예인이 쓰는 물건 가격이 올라가는 것은 그 연예인처럼 될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 아니다. 자신의 마음을 입증하는 소비인 셈이다. 때문에 연예인이 실제로는 그 제품을 쓰지 않는다라는 말은 엄청난 폭로가 되고 나아가 배신감을 안겨주기까지 하는 계기가 된다.

  책에서 말하는 바와 같이 코스트코와 롯데월드, 두 공간은 소비사회의 유토피아를 실현하는 공간이다. 다른 마트들과 달리 회원제로 운영하는 코스트코의 경우 일정한 카드와 현금만이 결제가 가능하다. 입장권을 두 번 확인하는 셈이다. 또한 동네 마트에서는 사먹어 볼 수 없는 미국의 음식들이 시식대를 차지하고 있으며, 싼 가격에 다량으로 포장된 물건들이 그득하다. 아메리칸 드림의 현실성이 부정된 지금, 새로운 아메리칸 드림이 재현되는 것이다. 누구든 돈과 회원권만 있으면 새로운 맛의 과자를 사먹어 볼 수 있다. 부드러운 쿠션도 최신 카메라도 구경할 수 있다. 소비는 여가가 된다. 롯데월드는 놀이 공원이지만 누구든 들어와서 즐길 수 있게 만든 공간이 아니다. 담으로 둘러쳐진 공간으로, 즐기기 위해서는 일정한 돈을 내야 한다. 미키 머리띠를 쓰고 풍선을 든 채 환하게 웃고, 도날드덕이 그려진 오므라이스를 먹으면 모두가 원하는 디즈니의 세상에 들어온 것만 같다. 악인이 벌을 받고 선인이 행복해지는 디즈니 동화의 법칙은 현실에서는 돈이 없는 자와 돈을 가진 자로 전이된다. 꿈을 재현한 공간은 동시에 자본을 요구하면서 꿈을 기만한다.

  오히려 오늘날 노골적으로 자본을 요구하는 공간들의 경우, 공간의 기만성을 깨달을 수 있다는 점에서 새로운 가능성이 있을지도 모른다. 공간이 문제가 되는 순간은, 공간을 일정한 의미의 장소로 환원하는 인간의 의도가 작동할 때다. 매번 자신에게 이득이 되는 일정한 계층만을 우대하고 소통을 피한다는 비판을 받을 때마다 그들이 가지 않을 공간, 전통 시장이나 골방촌을 찾는 사람들이 있다그들은 서민들의 음식이라고 표방된 김치찌개나 설렁탕을 맛있게먹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 설렁탕 한 그릇으로 우리는 그들을 너무나도 쉽게 믿는다. 그들이 실제로 설렁탕을 먹더라도 시장 국밥집에서 먹을지 고급 한식 레스토랑에서 먹을지 확신하지 못하면서 말이다.

 

 

 

  개천에서 이무기가 익사한 날

    

  개천에서 용난다는 말이 있었다. 노력하면 이무기도 용이 된다는 것이다. 노량진 고시원에 들어찬 수많은 사람들이 용이 될 날만을 기다리고 있다. 날아오르진 못해도 용트림을 할 날만을. 그러나 책에 인용된 박민규의 갑을 고시원 체류기에서도 보이듯, 고시원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뿐이며, 그들을 을로 주저앉히고 고시원에서 나가지 못하도록 하는 사람들은 이다. 을의 처지에서 벗어나기 위해 애쓰지만 그 시도는 가로막힌다.

  왜냐하면 그들의 거주지는 고시원이며, 그 거주지는 그들의 계급적 정체성을 규정하기 때문이다. 비록 그들의 본질적 거주가 고시원과 일치하지 않을지라도-그들의 본질은 현실 거주지에 기반해 판단된다. 사람을 강남과 강북으로 나누어 귀하게혹은 마구 자란것으로, 혹은 집안의 소득 상황을 파악하는 것처럼.

  하이데거에 의하면 인간의 본질은 그의 본질의 기반이 될 수 있는 공간에서의 거주를 통해 형성이 가능하다. 심적인 고향, 노스탤지어를 느끼게 하고 모든 사유의 기반이 될 수 있는 공간은 인간에게 개별적인 의미의 장소가 된다. 인간은 공간을 통해서 인간이 되고, 또 공간을 규정함으로써 인간이 된다. 하지만 현대 사회에서 인간은 그가 속한 공간에 의해 규정될 뿐, 공간에 의미를 더해 장소를 창출하지 못한다. 모든 공간에서 인간은 월세가 끝나면 깨끗이 씻겨나가야 할 오물과 다를 게 없다.

  그러한 공허를 부정하고 뿌리를 내리겠다는 환상으로, 사람들은 성공하고 싶어한다. ‘성공을 통해 어딘가에 안심하고 정박할 수 있다면, ‘월세 전세 대란에 휩쓸리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의무교육을 좇아 아무리 공부를 열심히 해도 학교가 끝나면 학원에서 학원으로 옮겨 다니는 아이들을 이길 방법은 없다. 학원은 그들에게 현실을 넘어선 미래까지 준비하도록 가르친다. 그러지 못한 아이들은 현실이라는 역풍을 헤치고 나아가느라 정신이 없다. 결국 사교육은 부모의 욕심 때문이 아니라, 아이들을 현실에서 살아남게 하기 위한 구명조끼가 된다. 설령 그 구명 조끼가 불량이라 하더라도, 자신의 아이를 맨 몸으로 바다에 빠지게 할 사람은 없다. 수영을 배우는 것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사회구조는 매일 변화한다. 홍대나 신촌이라는 번화가의 가게들이 몇 달 가지 못하고 바뀌는 것처럼 말이다. 그들은 길을 잃고 만다. 결국 모든 노력이 용이 되기 위해 안간힘을 쓰던 이무기는 현실에 의해 익사하게 되는 것이다.

 

 

 

  교회, 로또 복권, 생명 보험

 

 

  한 때 사람들을 경악하게 했던 교회 세습 사건이 있었다. 한 대형 교회의 목사가 은퇴할 즈음이 되자 그 아들들이 교회의 소유권을 두고 치열하게 다툰 것이 계기가 되었다. 단순히 소문을 퍼뜨리는 것에만 그친 것이 아니라 장로 뻘이 되는 사람들에게 뇌물을 주고 폭력을 사용하기를 서슴지 않았다. 자비와 사랑의 하느님은 그 곳에 없었다. 한 때 민주화 운동을 하던 사람들이 경찰의 단속을 피해 숨어들던 불가침영역이었던 성지는 사라졌다. 이제는 금싸라기 땅에 선 사업체일 뿐이다. 종교의 신실함을 통해 사람의 됨됨이를 볼 수 있다는 믿음조차도 고갈된다. 우리는 우리의 영혼이 어디로 향하는지 믿을 수 없게 된다.

  결국 우리가 믿을 것은 매주 방송되는 로또의 추첨 뿐이다. 사람들은 로또의 공이 굴러가는 것을 눈으로 보고, 그 공이 뽑히고 숫자를 말하는 아나운서의 입을 응시한다. 만약 1등과 2, 3등이 나중에 발표되는 식이라면 로또를 믿지 않게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눈 앞에서 로또의 숫자가 정해지는 과정을 보면 자신이 찍은 숫자가 나오기를 빌게 되고, 그 간절함은 마법을 현실로 바꿀 것처럼 강력해 보인다. 하지만 과연 로또에 당첨되더라도 그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 있을까? 로또 복권을 파는 장소는 크게 버스 정류장 앞과 편의점으로, 대중교통을 이용하거나 간단하게 끼니를 때우는 사람들이 자주 들리는 곳이다. 출퇴근 중에 사람들에게 치이면서,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하는지 의문을 품는다. 졸린 눈을 겨우 뜨면서 내릴 역을 지나치지 않았는지 확인하고, 사람들 사이에 낑겨 겨우 내리고 탄다.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거나 간단한 끼니를 사가고 담배 한 갑이 오른 가격에 혀를 차며 돌아선다. 그 와중에 당첨자가 여기서 나왔다는 플래카드를 보면 그들의 마음은 흔들린다. 복권을 통해 빈민층을 돕겠다는 홍보는, 복권을 사는 사람들이 빈민층이 아니라는 추론을 가능케 한다. 복권을 사는 사람들은 복지를 베풀어야 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어쩌면 복지를 받아야 하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로또의 희망에 메말라갈 때, 그들은 생활이라는 공간에 억눌린다. 월세와 전세의 대란에서 살아남아야 한다. 가족을 이룬 이들은 더더욱 그들의 자녀 문제로 갈등한다. 혹은 그들이 책임지거나 책임을 져줄 사람들을 위해서. 사람들은 그들이 빠진 자리로 그들이 잊혀지기를 걱정하기보다는 손실이 날까봐 걱정한다. 장례식장은 죽은 사람들을 추모하는 공간이 아니라 죽은 이들의 처리에 드는 금액이 점점 늘어나는 곳이다. 그들은 손실이 된다. 부조금은 그들의 손실을 어느 정도 메꿔주기는 하지만, 완전히 메꿔줄 수 없다. 그들의 생명에 일정한 가격을 부담하는 생명보험이 절실해지게 되는 것이다.

  공간은 그 공간을 점유하는 인간을 통해 일정한 의미의 공간이 되며, 인간은 공간에 의해 일정한 의미의 인간이 된다. 계급화의 진행은 부유층의 은폐가 아니라 노출로, 이너시티에 속해 도시 공간의 엔진을 담당하는 사람들은 은폐되는 것으로 드러난다. 결국 서울은 어떻게 작동하는가는 서울의 공간 뿐 아니라 서울(이라는 공간)(인간에 의해) 어떻게 작동하는가라는 부제를 숨기고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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