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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의 나라의 행복한 젊은이들 - 어려운 시대에 안주하는 사토리 세대의 정체
후루이치 노리토시 지음, 이언숙 옮김, 오찬호 해제 / 민음사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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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행복의 나라의 절망한 늙은이들을 위해

 -후루이치 노리토시의 '절망의 나라의 행복한 젊은이들'을 읽고-

 

 

 

 

 

 

 천국과 지옥

 

 

  행복과 불행의 차이점은 무엇일까? 후루이치 노리토시는 오사와 마사치가 연구를 통해 내린 불행의 정의를 언급한다. 불행은 지금의 불만족과 미래에 다가올 행복에 대한 희망에서 비롯된다. 그렇다면 행복은 어떨까? 현재의 불행이 미래의 행복을 담보한다면, 현재가 될 미래에서는 행복해질 수 있을까. 후루이치 노리토시는 이를 기반으로 행복에 대해 말한다. 행복은 지금의 생활에 만족하는 것뿐만이 아니라, 사실상 미래가 더 나아질 것이라는 희망이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각고의 고통과 노력을 통해 더 나은 미래를 꿈꾼다는, 자수성가 신화의 폐기를 뜻하는 것이기도 하다. 현재 한국사회에서 만연한 갑과 을의 관계에서 이 되는 것은, 선천적인 계급성으로 명명된다. 한국 드라마에서 주인공에게 자수성가의 신화보다는 숨겨진 가족의 비밀이 있는 편이 더 신빙성이 있을만큼 상류층으로의 진입은 불가능해 보인다. 혹 숨겨진 출생의 비밀이 없는데도 상류층으로 진입하는 주인공의 경우, 그 사람의 독한 근성이 주목된다. ‘황금의 제국왔다 장보리의 경우, 주인공은 선인과 악인의 경계를 쉼없이 오간다. 그러나 이들의 경우 비극적인 결말을 맞고, 냉각된 사회구조는 그대로 지속된다. 그들의 시도는 헛된 것이 되어버리며 시청자들은 배드 엔딩에 대해 익숙해진다.

  젊은이의 정의는 시대에 따라 달라진다. 영국 산업혁명 당시 어린이의 정의가 달라졌던 것처럼, 연령대에서 직업의 유무 등 여러 기준이 제시된다. 과거 일본의 젊은이었으나 이제는 젊은이들을 한심하게 보는 단카이 세대들은, 현재의 행복한 젊은이들을 보며 혀를 찬다. 그들에게는 어떠한 포부나 도전심이 없으며, 끈기도 없고 지적인 능력도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과연 그들은 우둔한가? 파도에 모래성이 무너져도 끊임없이 모래성을 짓고 또 짓는 게의 모습에 눈물짓고 응원하던 때가 있었다. 그러나 이 응원은 언젠가는 무너지지 않는 모래성을 지을 것이라거나 파도가 안 오길 바란다는 의미의 응원이 아니었다. 실패 앞에서도 계속 일어나는 끈기를 응원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끈기는 무엇에든 쿨함이 우선인 현대 사회에서는 멍청하고 아둔한 것으로만 보일 뿐이다. 아니, 이미 미래에 대해 배우고 알고 있는 이상 예지된 실패의 미래를 앞당겨 올 필요가 있겠는가? 젊은이들이 가미가제라는 내셔널리즘의 희생물이 되었던 과거와 달리 행복한 젊은이들은 내셔널리즘이라는 유령보다 개인의 행복을 추구한다. 나라를 지키자는 운동마저도 분신이나 비장한 결의를 다지는 대신 그와 비슷한 생각을 가진 다른 사람과의 연대와 소통으로 여긴다. 한국 또한 마찬가지로, 어떤 시위에서 일정한 상징물을 도입하거나 춤, 노래로 공연을 펼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행동은 동시에 진지하지 못하다라는 비판을 받는다. ‘진지함이 강요되는 것이다.

 

 

 

  이지메의 사회학

 

  그들은 젊은이들을 진지하게대하고자 한다. 그들의 농담이나 패션에 대해 날카로운 눈빛으로 훑어보고 정의를 내린다. 마치 병에 대해 그 증상을 관찰하고 진단을 내리듯이 말이다. 그리고 그들은 나름대로 처방을 내린다. 처방은 그 자체로 권위를 지닌다. 하지만 세계의 병리사에서 수많은 처방들이 제시되고 폐기되었다. 그리고 처방을 통해 원래대로 돌려놓을 젊은이는 어떤 모습인가?

  문제가 있는 요즘 젊은이를 지칭하면서 발칙하다라고 말하는 것이야말로 그가 젊은이가 아니라는 증거다. 후루이치 노리토시는 이러한 부정적인 비판을 통해 성립되는 것은 단순히 젊은이에 대한 정의 뿐만이 아니라, 상대적으로 형성되는 젊은이반대 편에 속한 사람들의 정의라고 말한다. 또한 이러한 정의를 통해 젊은이에 대한 대오와 각성을 부르짖으며 그들의 멘토가 되는 대신, 그들에 대한 맹렬한 질투심과 불안이 드러난다고 본다. 그들이 끈질기게 일하면서 정사원이 되어 세금을 꾸준히 내야 할 테고, 그들의 소비를 통해 새로 나오는 물건들이 소비되어야 일본이 유지된다. 하지만 젊은이들은 이제 그들을 희생해 일본의 대틀을 세우기를 거부한다. 그들은 한국 은어로는 리얼충, 현실을 지키고 싶어하는 리아주에 가깝다. 국가가 뭘 해주었는지 묻지 말고 국가에게 무엇을 해줄 수 있는지 물어보라는 말에 수긍하기보다는 이를 강압으로 받아들이며 되묻는 것이다. ‘국가가 뭔데요?’

이소마에 준이치의 상실과 노스탤지어에서 천황은 일종의 국가 신교로, 일본이라는 내셔널리즘을 형성하는 기반이 된다. 이러한 국가 신교에 대해 질문하는 것은 금기가 된다. 하지만 젊은이들이 소비하는 애니메이션에서 천황은 여러 가지 이미지로 변형되는 패러디이다. 진지함은 상실된다. 천황을 떠받드는 반대축들은 이에 반박한다.

  하지만 이러한 행동이 바람직하지 못하다라고 한다면, 그 반대축에 있는 것은 과연 바람직한가? 상대화를 통해 자신을 옳은 측으로 정의하고, 그른 쪽을 비판하지만 정작 그러한 그름이 사라지는 순간 그들은 어떤 사람으로 남을 수 있을 것인가. 이지메, 왕따에 대해 어떤 사람들은 그들에게도 그런 따돌림을 당할 만한 원인이 있지 않겠느냐고 묻는다. 그렇다면 그 원인은 다른 사람들에게는 없는 것이며, 평생 가지지 않을 것인가. 그리고 그 원인이 과연 그의 탓이라고 할 수 있는가? 이지메는 집단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가장 쉬운 방법이다. 집단이 사람이 아닌 집단을 위할 때는 더더욱, 집단의 규격에 맞지 않는 이들을 떨쳐내고 이들을 으로 정의하면서 집단은 집단으로서 유지된다.

 

 

  전차남 신화

 

  결혼도 연애도 개인의 만족을 배가시키기 보다는 끊임없는 노력과 희생을 요하는 것으로 판단된다. 서로의 윈-윈을 위한 협상이 아니라 어느 한쪽이 이기고 지는 게임에 가깝기 때문이다. 게임과 연애의 차이점이란 게임은 실패했을 때 끄고 다시 하거나 아예 그만 둘 수 있지만, 연애는 그 상처를 계속 안고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게임에서 지는 것 또한 상처가 될 수 있지만, 게임은 게임에서 실패한 자에게 복수심을 품지 않는다.

  일본에서 드라마와 만화, 소설로 유명해진 전차남의 경우, 인터넷과 오타쿠 문화에 익숙해진 남자와 인터넷에 대해 잘 모르는 여자의 만남을 소재로 삼는다. 그들은 서로 다른 세계에 속해 있는 것처럼 제시된다. 에르메스 명품 접시를 선물하는 여자의 부유함과 예의바름, 공손함은 부각되며 그녀에게 다가가려는 주인공의 고충은 눈물겹다. 그는 인터넷을 통해 사람들에게 대화법연애 코치를 받는다. 최대한 오타쿠 티를 내지 않으려고 하지만, 가끔씩 드러난다. 왜 오타쿠임을 드러내서는 안 되는가. 그들이 서로 교제하고 소통하기 위해서는, 그들이 같은 세계 사람이어야 한다는 규칙이 있기 때문이다. 그는 에르메스와 같은 세계에 속해 있다고 애써 가장하지만, 결국 실패한다. 만약 젊은이들을 상대화해 정의하려는 사람들이라면 전차남의 노력을 가상하게 여기며, 에르메스의 착한 심성에 주목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에르메스는 전차남의 세계로 건너오지 않으며, 전차남도 에르메스의 세계로 건너가지 않는다. 그렇다면 그들은 결국 실패하는가? 그들은 성공한다. 그들이 원했던 건 서로의 모습이 되는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서로 다른 세계에 속해 있어도 사랑할 수 있는, ‘만남을 원했던 것이다. 그들을 방해하는 것은 오히려 그들 자신이 아니다. 그들은 서로 만나기 위해 노력하고, 그 노력에서 행복을 느낀다. 하지만 그들 주변에서 견고한 세계에 속한 이들은 끊임없이 그들을 질투하거나 의아해하며,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투로 어깨를 으쓱거릴 것이다.

  현대 사회의 전차남은 존재하는가? 개인에게 의미 있는 개인적 신화의 형성은 가능할 것인가. ‘행복한 젊은이들에게 세계적인 인물이 되겠다는 야망이나 질투심은 이미 소멸한 듯하다. 다만 하나 희망적인 것처럼 보이는 모습이 있었다면, ‘전차남에서 주인공을 인터넷으로 응원하는 사람들이 그와 동년배에 똑같은 흥미를 지닌 사람들이 아니라, 다양한 연령대와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응원을 통해 맺어진 연대의 감정은 그들로 하여금 절망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주었다. 물론 드라마라서 더 희망적인 면이 있을지도 모르고 전차남을 방해하는 사람도 인터넷에 있었지만, 그러한 긍정적인 면이 아예 없다고는 할 수 없지 않겠는가. 아무런 진보의 미래가 없다고 주저앉은 절망의 나라에서, 철저하게 개인화된 독방을 발명했지만 행복한 젊은이들은 그 독방을 넘어서는 연대를 발견해 행복

을 살아가려 했다.

비일상이 일상이 될지라도 그들은 끊임없이 다른 토끼굴을 찾아 뛰어든다. 토끼굴이 없어질 미래보다는, 눈앞의 굴을 향해서.

 그렇다면 결국, 이러한 치킨 게임에서 진정으로 불행해지는 건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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