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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택의 가능성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극장을 더 좋아한다.

고양이를 더 좋아한다.

바르타 길에 서 있는 참나무들을 더 좋아한다.

도스토예프스키보다 디킨즈를 더 좋아한다.

인간성을 사랑하는 나보다는 사람을 좋아하는 나를 더 좋아한다.

비상용으로 실을 끼운 바늘을 준비해놓는 것을 더 좋아한다.

초록을 더 좋아한다.

모든 것이 이성의 탓이라고 말하지 않는 편을 더 좋아한다.

예외를 더 좋아한다.

약속엔 조금 일찍 나서는 편을 더 좋아한다.

의사들과는 다른 이야기를 하는 것을 더 좋아한다.

가장자리가 예쁜 옛날 삽화들을 더 좋아한다.

시를 쓰지 않을 때의 어리석음보다 시를 쓸 때의 어리석음을 더 좋아한다.

해마다 맞이하는 특별한 기념일이 아닌 사랑으로 모든 날들을 기념하는 것을 더 좋아한다.

내게 아무것도 약속하지 않지만 도덕적인 사람을 더 좋아한다.

너무 많은 걸 믿는 것보다 현명한 친절을 더 좋아한다.

문명이 있는 땅을 더 좋아한다.

정복하는 나라보다 정복당하는 나라를 더 좋아한다.

약간 주저하는 것을 더 좋아한다.

질서 잡힌 지옥보다 혼돈의 지옥을 더 좋아한다.

신문의 제 1면보다 동화를 더 좋아한다.

잎이 없는 꽃보다는 꽃이 없는 잎들을 더 좋아한다.

꼬리의 일부를 잘라내지 않은 개를 더 좋아한다.

내 눈이 짙은 색이기 때문에 옅은 색 눈을 더 좋아한다.

서랍을 더 좋아한다.

여기서 말한 많은 것들보다 여기서 말하지 않은 것들을 더 좋아한다.

숫자의 대열에 정렬되지 않은 분리된 제로를 더 좋아한다.

별들의 시간보다 벌레들의 시간을 더 좋아한다.

나무를 두드리는 것을 더 좋아한다.

얼마나 더 오래, 그리고 언제라고 묻지 않는 것을 더 좋아한다.

모든 존재가 그 자신만의 존재 이유를 갖고 있다는 가능성을 마음에 담아 두는 것을 더 좋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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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유하는 세상의 화가
가즈오 이시구로 지음, 김남주 옮김 / 민음사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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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메리카나 2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 지음, 황가한 옮김 / 민음사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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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메리카나 1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 지음, 황가한 옮김 / 민음사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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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형제들에게 전화를 거네
요나스 하센 케미리 지음, 홍재웅 옮김 / 민음사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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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벌레들의 작은 귀를 생각함

김기택

 

텔레비전을 끄자

풀벌레 소리

어둠과 함께 방 안 가득 들어온다

어둠 속에서 들으니 벌레 소리들 환하다

별빛이 묻어 더 낭랑하다

귀뚜라미나 여치 같은 큰 울음 사이에는

너무 작아 들리지 않는 소리도 있다

그 풀벌레들의 작은 귀를 생각한다

그 통로의 끝에 두근거리며 매달린

여린 마음들을 생각한다

발뒤꿈치처럼 두꺼운 내 귀에 부딪쳤다가

되돌아간 소리들을 생각한다

브라운관이 뿜어낸 현란한 빛이

내 눈과 귀를 두껍게 채우는 동안

그 울음소리들은 수없이 나에게 왔다가

너무 단단한 벽에 놀라 되돌아갔을 것이다

하루살이들처럼 전등에 부딪쳤다가

바닥에 새카맣게 떨어졌을 것이다

크게 밤공기 들이쉬니

허파 속으로 그 소리들이 들어온다

허파도 별빛이 묻어 조금은 환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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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p.11-12) 어제는 재미있는 기사를 하나 읽었어요. 한번 상상해보세요. 언니는 희귀 언어를 사용하는 중앙아시아 산악 지대의 소수민족 출신으로, 스탈린 치하를 피해 미국 뉴욕으로 이민을 떠난 수십 명 중 하나예요. 뉴욕에서 이 언어를 쓰는 사람은 언니네가 전부예요. 고향에서는 러시아어가 표준어가 되었고, 언니네 언어는 이미 소멸되었다는 소식도 들려와요. 하지만 언니네가 정착한 뉴욕은 달라요. 수백 개의 화석 언어들이 아직도 활발하게 사용되고 있어요. 고향에서조차 잊힌 말을 그대로 쓰는 이들이 있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뉴욕을 언어의 박물관이라고도 한 대요. 하지만 자식들은 영어로만 소통하고 처음에 같이 고향을 떠나왔던 사람들은 하나둘 세상을 등져요. 마침내 오직 언니하고 다른 한 명만 남아요. 둘은 어쩌면 전 세계에서 이 언어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유일한 생존자들일지도 몰라요. 그러던 어느 날 이 둘, 최후의 두 사람이 사소한 말다툼 끝에 의절을 해요. 그러곤 수십 년 동안 대화를 나누지 않아요. 결국 한 사람이 먼저 세상을 떠나요. 저는 생각했어요. 아무와도 대화할 수 없는 언어가 모국어인 사람의 고독에 대해서요. 이제 그만 화해하지 그래, 라고 참견할 사람도 없는 외로움. 세상에서 가장 치명적인 말다툼. 만약 제가 사용하는 언어의 사용자가 <오직 두 사람>만 남았다면 말을 조심해야겠어요. 수십 년 동안 언어의 독방에 갇힐 수도 있을 테니까. 그치만 사소한 언쟁조차 할 수 없는 모국어라니, 그게 웬 사치품이에요?
 
(p.13) 명언이나 상투어를 뒤집어서 새로운 말을 만드는 것은 오빠의 오랜 버릇이거든요. “해봐, 이상하게 다 말이 된다니까.” 오빠가 사람들에게 장담하면 그때마다 사람들이 이것도 해보라, 저것도 해보라며 문장을 던져요. “피할 수 없다면 즐겨라.” 누군가 이렇게 말하면 오빠는 빙글빙글 웃으며 “즐길 수 없다면 피하라”고 답하고요. “사막이 아름다운 것은 어딘가에 샘이 숨겨져 있기 때문이다”라고 ⌜어린왕자⌟의 유명한 구절을 제시하면, “어딘가에 샘이 숨겨져 있다면 그게 바로 사막이다”라고 받아요. 가끔 어떤 격언은 뒤집어놓으면 더 의미심장해 보이기도 하더라고요. 예를 들어, ‘금이 침묵이다’ 같은 말이 그래요. 오빠가 해고를 당하던 날, 인사팀의 입사 동기가 그러더래요. “힘내라. 위기가 기회라잖아.” 오빠가 뭐라고 했을지 언니도 이제 아시겠죠? “웃기시네. 기회가 위기야.”
 
(p.39)  언니, 제가 좋아하는 농담이 하나 있어요. 전에 어떤 일간신문 만화에서 본 건데요. 어떤 남자가 교통방송에서 뉴스를 들어요. 고속도로 어느어느 구간에 역주행을 하는 승용차가 있으니 일대를 운행하는 차량들은 모두 주의하라는 거예요. 그는 문득 그 방면으로 출장을 간 친구가 떠올라서 전화를 걸어요. 야, 그 부근에 역주행을 하는 미친놈이 하나 있대. 조심해. 그 친구가 이렇게 대답하는 거예요. 한둘이 아니야. 얼른 전화 끊어.
  다들 충고들을 하지요. 인생의 바른길을 자신만은 알고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서요. 친구여, 네가 가는 길에 미친놈이 있다니 조심하라. 그런데 알고 보면 그 전화를 받는 친구가 바로 그 미친놈일 수 있는 거예요. 그리고 그 미친놈도 언젠가 또다른 미친놈에게 전화를 걸고 있는 거예요. 인생을 역주행하는 미친놈이 있다는데 너만은 아닐 줄로 믿는다며. 그 농담의 말미처럼 인생에서 맞닥뜨리는 미친놈은 아마 한둘이 아닐 거고 저 역시 그중 하나였을 거예요.
  지금 병상에 누워 있는 저 낯선 몸뚱어리를 보고 있노라면, 참으로 허망한 존재에게 인생이 바쳐졌구나 싶어요. 저는 저 사람 잘 모르겠어요. 그런데도 바이털 사인이 꺼지고 더 이상 저 육체로부터 아무 반응도 받아오지 못한다면, 즉 아빠가 마침내 의학적으로 사망한다면 한동안은 좀 막막할 것 같아요. 그래서 요즘은 자주 생각하게 돼요. 뉴욕에 있었다던 그 두 사람, <오직 두 사람>만이 느꼈을 어떤 어둠에 대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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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대립군>을 보았다.

임진왜란 당시 백성들과 나라를 버리고 도망간 선조를 대신해 왕의 역할을 대신해야 했던 어린 광해와

남의 군역을 대신하는 '대립군'의 이야기다.

 

- 어린 광해는 아버지의 자리를 대신하기에 무섭고 두려운 것이 많았으며, 정작 임금인 아버지도 자신의 목숨을 지키기 바빠 백성들과 세자를 두고 왜군을 피해 도망을 간 마당에 강계로 의병을 모으고자 떠나는 길 어찌 발걸음이 무겁지 않을 수 있었을까. 심지어 처음엔 그래도 세자라고 귀하신 몸이니 가마에 모셔져 다니느라 자기 발로 나설 수도 없었다. 불안하고 두렵고 부끄럽고 참담하고 그리고 이런 황당하고 참담한 상황에서 내 손으로 바꿀 수 있는 것이 단 하나도 없다는 그 무력감. 그는 무엇보다도 이 무력감을 견뎌내야 했다.

 

- 자기만 살겠다고 도망간 왕의 무능력과 무책임을, 그런 왕을 마지못해 대신해야 하는 왕세자의 무력함을, 밀려오는 왜군들을, 가족들의 생사조차 정확히 알 수 없는 불안하고도 혼란스러운 이 시기를 다른 이의 이름으로 군역을 대신하며 견뎌야 했던 대립군의 모습은 광해의 처지와도 닮아있다.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나아질 것이 없다는 것을 알지만 그들은 내일의 희망같은 것은 오래전에 버린 채 그냥 현재, 지금 이 순간을 버텨내기 위해 산다. 먹고, 싸우고, 잠을 자고. 그들은 진작에 염라대왕에게 양심같은 것이 있을거라고 기대하지 않았을 것이다. 있다고 생각하는 순간 현재를 버텨내기 더 힘들테니까.

 

- 현재를 버티기 위한 힘은 초월적인 힘을 가진 어떤 존재를 상상하는 것에서 오지 않는다. 대신에 (이런 뭣같은) 현재 상황을 나와 함께 옆에서 겪고 있는 사람들을 바라볼 때 버티고 나아갈 힘이 생긴다. 신에게 기도하는 사람들도 같은 마음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내가 이렇게 힘들고 답답하고 견디기 힘든데 대체 신은 어디있는가. 어서 날 좀 보고 구원해달라. 이렇게 마음 속으로 외치면 신이 와서 이렇게 속삭이지 않을까. 너를 구원할 것은 오로지 너뿐. 난 모두에게 공평하단다. 주위를 둘러봐. 힘들고 괴로운 것은 너뿐이 아닐테니. 난 상황에 어떤 힘도 가담하지 않을 것이고 그저 쭉 지켜만 볼 뿐. 신에게 기도하는 행위는 결국 자신에게 주문을 거는 것일테다. 모두가 나와 같다. 그러니 나도 너도 잘 좀 버텨보자. 

 

- 세월호 사건이 있었던 이후로 어떤 이야기를 접하든-작가가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이야기 속 상황이 세월호와 은유적으로 겹쳐보이는 경우가 많은 듯하다. 이 이야기도 그러했다. 굳이 그 모든 은유를 나열하고 싶지는 않다. 아마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떠올렸으리라 생각되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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