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장 / 구운몽 문학과지성 소설 명작선 1
최인훈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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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운명이 만나는 자리 '광장'


  『광장이라는 작품을 기억하시나요제목만을 기억하는 분도 계실 수 있고혹은 중립국이라는 단어를 듣고 떠올리실 분도 있으시겠지요저 역시 어렴풋이 고등학교 시절 읽었던 기억이 납니다그 당시에는 국어책에 실린 문학작품들에 그다지 관심을 갖지 않았었습니다내신 공부수능 공부를 하느라 정신이 없던 때였죠작품의 재미아름다움을 느끼기보다는 빠르게 주제의미출제 가능성들을 따지던 시기였습니다지금 생각해보면 참 아쉬워요왜 그때는 몰랐을까그 한편 한편이 재미있고 읽을 가치 역시 충분하다는 것을그때 알았더라면 분명 더 좋았을 텐데 말이죠.

 

  그때로부터 시간이 한참(?) 흐르고 나서야 광장을 다시 떠올리게 되었습니다익숙한 제목인데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았고국어책에 선정될 정도의 작품을 새삼 한번 읽어보고 싶었던 이유였지요그렇게 당시 운영하던 독서모임을 통해 최인훈의 광장을 읽게 되었습니다그리고 진작 읽어보지 않았음을 후회하였었죠.

 


  『광장의 주인공 이명준에 대해 먼저 살펴보려 합니다그가 살았던 삶과 고뇌를 이해하기 위해서 그가 어떤 인물이었는지 이야기할 필요가 있겠지요단적으로 말하자면 이명준은 흡사 철학자 같은 인물입니다언제나 생각에 잠겨있기 마련이지요이성관계 혹은 유흥 거리들에 관심을 가지기보다는 자신의 방에 앉아 책을 읽고 사색에 잠기기를 즐기는 인물이지요잠깐 그의 생각을 들여다볼까요.

 

무언가 마지막 것을 얻기만 하면 다시 생각이란 이름의 화냥년을 잠자리에 들이지 않으리라 마음먹으면서낯빛과 몸짓을 가꾸는 마음의 거울 속에서는 자꾸 연지가 빗나가고 곤지가 번진다끝없이 실수를 거듭하고 뉘우침이 따른다.

 

  흔하지는 않지만 종종 주변에 보이는 늘상 생각에 잠겨있는 그런 인물이랄까요지금의 우리 젊은이들과는 시대는 다소 차이 나지만 그의 사색과 방황이 그렇게 낯설지만은 않습니다시대가 달라도 통하는 것이 있는 것일까요그나마 명준의 독특한 면을 보자면책을 많이 읽는다는 점입니다조금은 씁쓸한 사실이지만요즘의 우리들은 책을 많이 읽지 않으니까요유달리 명준이 자신의 책장을 바라보며 하는 생각이 제게는 기억에 남습니다.

 

  윗목에 놓인 책장에 마주 선다한번 죽 훑어본다얼른 뽑아보고 싶은 책이 없다. 400권 남짓한 책들선집이나 총서사전류가 아니고 보면한 책씩 사서는 꼬박 마지막 장까지 읽고 꽂아놓고 하여 채워진 책장은 한때 그에게는 모든 것이었다월간 잡지가 한 권도 끼지 않았다는 게 자랑이다그때그때입맛이 당긴 책을 사서 보면자연 그다음에 골라야 할 책이 알아지게 마련이다벽 한쪽을 절반쯤 차지하고 있는 이 책장을 보고 있으면그 책들을 사던 앞뒷일이며그렇게 옮겨간 그의 마음의 나그넷길이임자인 그에게는 선히 떠오르는 것이고한 권 한 권은 그대로 고갯마루 말뚝이다.

 

  무언가를 찾는지 모르면서도 무언가를 찾는 명준그게 삶의 의미일지맺음말일지 모르지만 명준은 늘 생각하고 생각합니다.

 


  그런 명준의 삶을 뒤흔드는 사건이 하나 있습니다소식도 모르는 자신의 아버지 때문에 경찰서에 불려가는 사건이지요이미 명준에게는 그 존재마저 희미한 아버지가 북에서 대남 활동을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사상의 대립이 치열했던 시절명준은 현재의 자신의 삶과는 전혀 상관없는 이유로 추궁을 받고 형사에게 얻어맞지요아무리 이성적으로 아니라고 말해도 소용없습니다잃어버렸던 아버지가 명준에게 되살아나는 순간입니다형사에게 얻어맞아 코피를 흘리며 경찰서를 나설 때 명준은 생각합니다.

 

좋은 철

궁리질 공부꾼은

보람을 위함도 아니면서

코피를 흘렸는데

내 나라 하늘은

곱기가 지랄이다.

 

  눈물이 흐르고분하고 서러웠던 그날명준은 그의 방문이 무너지는 소리를 듣습니다명준의 밀실이 무너지는 소리였습니다튼튼하다고 생각하던 그의 문이 속절없이 무너지는 순간자신의 밀실이 무너졌을 때그리고 자신과 같은 방향을 바라본다고 생각했던 윤애가 명준을 거부했을 때명준은 남한을 떠나기로 결심합니다.

 

  『광장에서 광장과 밀실의 개념은 핵심입니다인간은 광장에서만 혹은 밀실에서만 갇혀서 살수는 없죠그 둘 모두를 적절히 누릴 수 있을 때비로소 인간은 살 수 있습니다명준이 보기에 남한에는 밀실만이 존재했습니다남한의 광장에는 추악함과 배신만이 남아있었죠모두가 그 광장에서 서로를 등쳐먹으며 오직 자신의 밀실만을 가꾸는 데 치중합니다마치 개미가 먹을 것을 물어다 자신의 집으로 가져가듯이 말이죠그러니 명준 자신의 밀실이 무너졌을 때그는 떠나기로 결심한 것입니다.

 

  하지만 북에서마저도 명준은 만족할 수 없었습니다명준이 제대로 된 광장을 찾으리라 생각하고 간 북의 광장은 생각과 달랐습니다열정을 가장한 그곳에는 진짜 열정은 존재하지 않았음을 보게 되지요.

 

신명이 아니고 신명 난 흉내였다혁명이 아니고 혁명의 흉내였다흥이 아니고 흥이 난 흉내였다믿음이 아니고 믿음의 소문뿐이었다.

 

  명준이 보람을 느끼고 살만한 광장은 남에도 북에도 존재하지 않았습니다북은 어딜 가나 흉내뿐이었고숨이 막히는 잿빛 공화국이었습니다도대체 한 인간이 온전히 누릴 수 있는 광장은 어디에 있는 것인지요결국 명준이 찾아낸 최후의 광장은 초라하기 그지없습니다그곳은 양손 끝을 맞잡아 만든 광장이었습니다.

 

두 팔이 만든 둥근 공간사람 하나가 들어가면 메워질 그 공간이마침내 그가 이른 마지막 광장인 듯했다.

 

  그 안을 채울 수 있는 것은 명준이 북에서 만난 은혜입니다남한도 북한도 그 어느 곳에서도 자신이 보람을 느낄 곳을 찾지 못한 명준에게 남은 것은 은혜뿐이지요당도 동무도 명준에게는 필요 없습니다오직 자신의 조그마한 광장과 은혜만이 소중합니다하지만 시대가 낳은 끔찍한 전쟁으로 은혜마저 잃고만 명준은 어디로 가야 했을까요그는 광장을 잃고그의 밀실은 이미 비었습니다.

 


  이제 우리가 익히 기억할 장면으로 넘어갑니다전쟁이 끝난 후 명준의 거취를 정하는 순간이지요남과 북은 각각 명준과도 같은 지식인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설득합니다하지만 명준은 남과 북 그 어느 곳에도 가고 싶어 하지 않지요그래서 그는 단호하게 말합니다.

 

  “동무앉으시오.”

  명준은 움직이지 않았다.

  “동무는 어느 쪽으로 가겠소?”

  “중립국.”

  그들은 서로 쳐다본다앉으라고 하던 장교가윗몸을 테이블 위로 바싹 내밀면서말한다.

  “동무중립국도마찬가지 자본주의 나라요굶주림과 범죄가 우글대는 낯선 곳에 가서 어쩌자는 거요?”

  “중립국.”

  “다시 한 번 생각하시오돌이킬 수 없는 중대한 결정이란 말요자랑스러운 권리를 왜 포기하는 거요?”

  “중립국.”

 

……

 

  “자넨어디 출신인가?”

  “……

  “서울이군.”

  설득자는앞에 놓인 서류를 뒤적이면서,

  “중립국이라지만 막연한 얘기요제 나라보다 나은 데가 어디 있겠어요외국에 가본 사람들이 한결같이 하는 얘기지만밖에 나가봐야 조국이 소중하다는 걸 안다구 하잖아요당신이 지금 가슴에 품은 울분은 나도 압니다대한민국이 과도기적인 여러 가지 모순을 가지고 있는 걸 누가 부인합니까그러나 대한민국엔 자유가 있습니다인간은 무엇보다도 자유가 소중한 것입니다당신은 북한생활과 포로 생활을 통해서 이중으로 그걸 느꼈을 겁니다인간은……

  “중립국.”

 

  자우리가 알던 중립국은 바로 이 모든 일들의 결과였습니다중립국에 가고 싶어서가 아니라겪어본 두 곳이 모두 싫었기 때문이죠그렇게 중립국으로 가는 배를 탄 명준입니다명준의 고뇌와 슬픔 그리고 결정을 생각하면 안타깝습니다그리고 부디 바라는 대로 중립국에서 자신이 원하는 것을 찾기를 빌어보지만그는 중립국으로 가는 배 안에서마저 소외감을 느끼고 고독해지죠그럴 때마다명준은 하릴없이 자신의 좁디좁은 광장을 찾아갑니다배 뒤쪽 난간 그 어딘가.

 

  이야기의 끝에 명준은 광장을 찾아 떠납니다물론 그곳이 결과적으로 중립국은 아니었습니다명준은 은혜와 자신의 딸일지도 모르는 흰 새와 작은 새를 보며 남한도 아니고북한도 아닌그리고 중립국도 아닌 다른 광장을 찾게 되죠비로소 찾은 푸른 광장.

 

  돌아서서 마스트를 올려다본다그들은 보이지 않는다바다를 본다큰 새와 꼬마 새는 바다를 향하여 미끄러지듯 내려오고 있다바다그녀들이 마음껏 날아다니는 광장을 명준은 처음 알아본다부채꼴 사북까지 뒷걸음질 친 그는 지금 핑그르 뒤로 돌아선다제정신이 든 눈에 비친 푸른 광장이 거기 있다.

 

  그리고 곧 중립국으로 향하는 배의 선장은 보고를 받게 되죠석방자 한 명이 사라졌다는 보고그리고 그 석방자는 이명준이라는 보고였습니다.

 


  21세기인 지금우리는 어떤 광장을 가지고 있습니까그리고 우리의 밀실은 안전한가요시간은 흘렀지만 확신이 없습니다우리의 광장은 이명준이 그토록 바라던 보람을 느낄 수 있는 곳인지요. 1973년 일역판 서문에서 최인훈 작가는 말합니다.

 

  살아 있는 사람의 한 사람으로서작자는 이 소설의 주인공에 대해서 큰소리칠 자리에 있지 못하다그가 쓰러진 데서 한 걸음인들 내디뎠다는 믿음을 못 가졌기 때문이다

 

  작가는 이와 같은 아쉬움을 1989년판을 위한 머리말에서도 밝히고 있지요물론 우리의 부모님이 이뤄온 눈부신 업적들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과거보다 경제상황과 생활환경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좋아졌지요하지만 여전히 우리가 바람직한 광장을 가졌냐고 묻는다면 아직은 잘 모르겠습니다이제는 생활이 단순히 살아 있음만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니까요.

 


  성공 신화대박 신화가 광장에 떠돕니다우직하게 자신의 꿈을 펼쳐 보란 듯이 성공했다는 이야기가 여기저기 들립니다작게는 모두가 풍족하게 사는 듯이 자신의 삶을 갖가지 창구를 통해 내보입니다모두가 잘 살고모두가 성공을 향해 나아가는 듯 보이기도 합니다하지만 인터넷티비핸드폰이라는 작은 창이 아니라내 주변 삶의 현장을 바라보고 있노라면조금 다른 생각이 들기도 하지요마치 풍문만을 듣고 사는 것 같네요.

 

  막상 나가본 현장지금의 광장 역시 아직 완벽하진 않습니다여전히 이명준이 남에서 느꼈던 배신탐욕추악함이 여기저기 보이고더불어 북에서 느꼈던 흉내와 소문이 즐비하지요다양한 의견을 존중하는 사회라고 말하면서도다른 가치관을 들이밀며 내 방을 부수고 들어오는 경우도 여전히 허다합니다. ‘헬조선이라는 말로 국내를 떠나려는 모습들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명준의 선택과 같다고 생각합니다정말 우리는 한 걸음도 내딛지 못한 것일까요?

 

  밀실을 온전히 누릴 수 있는 자유와바람직한 열정이 가득한 광장중립국으로 가지 않아도 되는 그런 곳우리는 여전히 광장과 밀실을 위해 싸우고 있습니다때로는 한 쪽에 갇혀 숨이 막히기도 하지요하지만 앞서 말한 것처럼 인간은 광장과 밀실 어느 한 곳에서만 살 수는 없습니다평범한 이명준이 남과 북으로 그리고 중립국으로 갔던 이유입니다방황하는 모든 21세기 이명준에게 바랍니다부디 자유와 열정을 동시에 누릴 수 있는 광장과 밀실이 살아 있는 곳을 찾기를풍문에 살지 말고현장으로 나아가기를. 최인훈의 광장』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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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르멘 펭귄클래식 123
프로스페르 메리메 지음, 송진석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웅진)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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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유할 수 없는 붉은 꽃


  ‘카르멘(Carmen)'에 대해 들어보셨나요구체적인 내용은 모르더라도 들어봄직한 이름이죠무엇보다도 조르주 비제가 작곡한 오페라 카르멘으로 가장 유명합니다. 1875년 첫 공연 당시에는 상당한 비판을 받았으나현재는 오페라 하면 빠지지 않는 단골처럼 많이 무대에 오르는 작품입니다그런 카르멘은 사실 조르주 비제의 온전한 창작물은 아닙니다원작이 따로 있지요작가는 프로스페르 메리메작품 이름은 동명인 카르멘입니다메리메가 1845년 집필한 이 소설은 한글 번역으로 70여 쪽에 달하는 단편입니다이 카르멘을 이후 비제가 오페라로 각색하여 무대에 올린 것이지요그리고 흥미롭게도 원작보다 더 유명해진 것입니다.

 


  메리메의 카르멘은 그리 복잡한 이야기는 아닙니다오페라 역시 메리메의 작품을 기초로 각색을 하였으나 크게 달라지진 않았습니다간단히 말해 카르멘이라는 한 집시와 그녀에게 빠져 비극을 맞게 되는 한 남자의 이야기지요.

 

  작품은 액자식 구조를 취하고 있습니다고고학자인 는 우연히 안내인과 협곡에 들어섭니다잠시 쉬기 위해서였죠그러나 이미 누군가 자리 잡고 있음을 발견합니다안내인은 경계하지만 는 태연하게 총을 든 상대에게 시가와 음식을 권하며 친해집니다안내인은 낯선 남자가 강도일 것이라 생각하여 경계를 풀지 않습니다그리고 밤중 몰래 안내인이 이 남자를 신고하러 간 사이 는 그에게 호의를 베풀어 미리 언지를 해주고남자는 고마워하며 도망갑니다그리고 이런 인연으로 후에 감옥에서 죽음을 기다리는 이 남자는 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해주게 되는 것이지요바로 이 이야기가 카르멘의 주 서사가 됩니다.


  남자의 이름은 돈호세 리사라벤고아입니다이름에 돈이 붙어있는 것으로 보아 남자는 귀족이었지만 어느 날의 싸움의 결과로 고향을 떠나야만 했지요직업 군인으로 하사가 된 돈호세는 원사를 바라보는 상황에서 세비야의 담배 공장 경비를 맡게 됩니다그리고 이곳에서 그를 비극으로 이끌고 갈 카르멘을 만나게 되는 것이지요카르멘 하면 어떤 이미지가 떠오르시나요카르멘에 대한 돈호세의 묘사가 여기 있습니다.

 

그녀는 붉은 치마를 입었는데 몹시 짧아서 구멍이 여럿 뚫린 흰색 비단 양말과불 빛깔의 리본이 달린 귀여운 붉은색 가죽 구두가 보였습니다어깨가 드러나도록 그녀는 만틸라를 벌리고 있었고커다란 아카시아 꽃다발을 블라우스 가장자리에 꽂고 있었습니다그녀는 입 가장자리에도 아카시아 꽃을 물고 마치 코르도바 종마 사육장의 암망아지처럼 엉덩이를 일렁이며 걸어갔습니다.

 

  처음에 돈호세는 카르멘에게 관심을 보이지 않습니다돈호세에게 그녀는 너무 선정적으로 보였기 때문일까요하지만 부르면 오지 않고 안 부르면 오는 고양이처럼 카르멘은 도리어 돈호세에게 다가옵니다.

 

그녀는 입에 물고 있던 아카시아 꽃을 엄지손가락으로 톡 튕겨서 정확히 제 미간을 향해 날렸습니다선생님그것은 마치 총알이 날아오는 것 같았습니다……저는 어디로 숨어야 할지를 몰랐고마치 널빤지처럼 미동도 않은 채 가만히 있었습니다그녀가 공장으로 들어갔을 때저는 제 발 사이 땅바닥에 떨어져 있는 아카시아 꽃을 보았습니다제가 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저는 동료들 모르게 그 꽃을 주워 들었고웃옷 속에 소중히 간직했습니다제 첫 번째 실수입니다!

 

  그렇습니다카르멘은 미끼를 던졌고 돈호세는 미끼를 물어버렸죠이후 돈호세의 삶은 모두 카르멘 때문으로 흐르기 시작합니다그가 그녀의 아카시아 꽃을 간직하기 시작한 순간그가 살인을 저지른 카르멘을 일부러 놓아주게 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운명이 된 것입니다그로 인해 감옥에 갇히게 된 돈호세의 승진에 대한 꿈은 모두 물거품이 되어버리죠카르멘을 만나고부터 그의 인생은 완전히 어긋난 방향으로비극의 종착점을 향해 나아갑니다.

 


  그런 사실을 돈호세가 몰랐을까요그렇지 않습니다카르멘은 누차 그에게 경고합니다자신이 유혹해놓고도 자신과 얽히면 불행해질 수밖에 없다고 말하죠계속해서 미끼를 거두지 않고 돈호세 앞에 흔들면서도 미끼를 물면 위험하다는 이야기를 하는 카르멘입니다.

 

  저는 그녀에게 언제 다시 볼 수 있는지 물었습니다.

  “당신이 좀 덜 멍청해지면.” 그녀가 웃으면서 대답했습니다그러고는 진지한 어조로 덧붙였습니다. “그거 알아내가 당신을 약간 사랑하고 있는 것 같다는 거하지만 이건 지속될 수 없어개와 늑대는 오래가지 못해만약 당신이 이집트의 법을 받아들인다면 나는 아마도 기꺼이 당신 색시가 될 거야하지만 그건 바보짓이야있을 수 없는 일이지아저씨당신은 싸게 막는 거야당신은 악마를 만났어그래악마악마가 언제나 검은색인 건 아니야당신 목을 비틀지도 않았지나는 양모로 된 옷을 입었어하지만 내가 양인 건 아니잖아.

 

  돈호세도 알고 있었습니다더 이상 카르멘을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요그녀는 위험하고그러니 그녀에게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을요하지만 이미 그는 카르멘에게 빠져버렸습니다결국 그녀에 대한 질투로 살인까지 저지르게 되지요카르멘 때문에 위험에 빠진 그는카르멘 덕분에 위험을 모면하게 되고울며 겨자 먹기로 카르멘과 한 패가 되어버립니다울며 겨자 먹기라고 이야기하였지만 카르멘과 함께 할 수 있다는 생각에 돈호세는 기꺼이 그리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제부터는 영원한 고통뿐입니다카르멘과 한 패가 되었지만 카르멘은 절대 누군가가 소유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그리고 돈호세는 카르멘을 자기만의 것으로 소유하고 싶어 하죠언제나 카르멘은 돈호세의 손아귀에서 도망치고돈호세는 그런 카르멘의 뒤를 쫓습니다카르멘의 남편이었던 가르시아를 죽이고카르멘과 함께 있는 모든 남자를 질투하죠이야기가 진행될수록 돈호세의 광기가 짙어져가는 게 느껴집니다문제는 카르멘은 여전히 변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알아그거?” 그녀가 제게 말했습니다. “당신이 남편이 되고 나서부터 난 당신을 덜 사랑해당신이 애인일 때보다 말이야난 괴롭힘 당하고 싶지 않아특히 명령은 질색이야내가 원하는 건 자유로운 것그리고 하고 싶은 걸 하는 거야나를 막다른 길로 몰지 마계속 짜증 나게 하면 착한 남자 하나를 골라서 당신이 애꾸눈에게 해준 것처럼 해주라고 할 거야.”

 

  새로운 곳으로 떠나 완전히 새롭게 살아가자고 이야기해도 카르멘은 듣지 않습니다그녀는 다른 사람이 어찌 바꿀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니까요사실 이쯤 되면 카르멘이 도망갈 법도 하지만카르멘은 도망가지 않습니다그녀는 돈호세가 위급한 순간에는 언제나 찾아와 그야말로 헌신적으로 돈호세를 위합니다도대체 뭘까요이 사랑은.

 


  이윽고 비극이파국이 찾아옵니다카르멘의 자유로움을 더 이상 참지 못하는 돈호세는 그녀와 함께 죽으려 결심하죠카르멘도 알고 있습니다보헤미안인 그녀는 애초에 점을 치면서 수없이 그렇게 될 운명임을 알고 있었죠참으로 비극적인 사랑입니다.

 

  “제발,” 제가 그녀에게 말했습니다. “이성적으로 생각해 봐내 말 잘 들어모든 과거를 잊었어하지만 당신도 알다시피 나를 파멸시킨 건 당신이야당신 때문에 나는 강도가 되고 사람을 죽였어카르멘나의 카르멘당신을 구하게 해줘당신과 함께 나를 구하게 해줘.”

  “호세,” 그녀가 대답했습니다. “당신은 나에게 불가능한 걸 요구하고 있어나는 더 이상 당신을 사랑하지 않아당신은 나를 사랑하지그리고 그 때문에 나를 죽이려고 해나는 아직도 당신한테 얼마간의 거짓말을 할 수 있을 거야하지만 그러고 싶지가 않아우리 사이는 끝났어당신은 남편으로서 나를 죽일 권리가 있어하지만 카르멘은 언제나 자유로울 거야보헤미안으로 태어나서 보헤미안으로 죽을 거야.”

 

 

  우리는 살면서 많은 것을 필요로 하고 원합니다하지만 모든 것을 가질 수는 없죠그 어떤 것은 아무리 바라고 욕망하여도 결코 얻을 수 없습니다카르멘이 바로 그런 존재이지 않을까요그러니 사실 돈호세의 사랑은 이미 시작부터 결말이 정해진 비극이었습니다설령 알고 있었음에도 멈출 수 없었지만요.

 

  카르멘은 불꽃같은 여자입니다그녀는 지치지 않고 끝없이 타오르는 존재죠그리고 불꽃이 꺼지지 않기 위해 태울 것을 찾아 탐욕적으로 돌아다닙니다그런 카르멘에게 접근하는 모든 남자는 마치 불나방 같습니다가까이할수록 자신이 파멸에 이를 것임을 알면서도 어느새 그녀 곁에 가지 않을 수 없는불로 뛰어드는 불나방.

 

  『카르멘을 읽노라면 돈호세의 마음을 알 것도 같습니다카르멘은 남성들에게는 마치 판타지 그 자체이죠비현실적인 그 달콤한 마법에 어떤 누가 빠지지 않을 수 있을까요그녀와 같은 존재를 우리 주변에서 쉽게 찾아볼 수 없음은 아주 다행인지도 모르겠습니다아니아주 다행이겠습니다하지만 또 어찌 알겠습니까예상치 못한 그 어느 순간에 번개처럼 카르멘이라는 불꽃을 보게 될지소유할 수 없는 붉은 꽃카르멘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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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머신 펭귄클래식 100
허버트 조지 웰즈 지음, 한동훈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웅진)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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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학적 상상력이라는 의자에 앉아 시간을 유영하다


  째깍째깍평소에는 들리지 않던 소리가 들립니다째깍째깍이런저런 소리로 가득 찬 삶이 적막에 빠져 부산 거리기를 멈출 때비로소 시계 초침이 흐르는 소리가 들리죠요즘은 탁상시계마저도 디지털이고 대부분의 시간을 핸드폰으로 확인하기에 시간이 흐르는 소리를 듣는 경우가 드뭅니다하지만 집 벽면 어디엔가 걸려있는 시계초침이 돌아가는 손목시계에 귀를 기울여보면 여전히 시간이 흐르는 소리가 들립니다째깍째깍.


  때로는 그 소리가 너무 느려서 답답할 때도 있지요왜 이리 시간이 안 가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 순간들이요쉽게 생각해보면 점심시간을 목전에 둔 수업의 끝자락이라든지초조하게 그러나 초조한 티를 내지 않으며 기다리는 퇴근시간 등이요. 1초가 이렇게도 느렸나, 1분이 이렇게도 길었나 생각하며 의심해보는 그런 순간들이 있지요물론 반대의 순간들도 있습니다시간이 너무 빠르게 흐르는 것만 같을 때이제 막 시작한 연인과의 달콤한 시간출근을 앞둔 일요일 저녁 혹은 휴가의 마지막 순간그런 때에는 시계 초침이 야속하기만 합니다.



  우리가 신경을 쓰건 말건 시간은 여전히 흐릅니다우리는 그 안에서 희로애락(喜怒哀樂)을 느끼며 삶을 살아가죠그런 생각해본 적 다들 있으시겠죠? ‘시간을 되돌려 그 때로 돌아갈 수 있다면’ 혹은 반대로 지금 이 시간을 건너뛰어 미래로 갈 수 있다면’ 이런 생각들이요크나큰 실수를 저질렀을 때시간을 돌리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죠그렇게만 할 수 있다면과거로 돌아가 지금의 난처한 상황을 모면할 수 있었을 거라는 생각을 하면서요지루한 순간에는 반대겠죠지금 이 순간을 그냥 건너뛰어 주말이 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혹은 좀 더 거시적인 관점으로 누군가는 과거로 돌아가 역사의 한 장면을 면밀히 살펴보고 싶을 수도 있고미래로 나아가 인류 발전의 양상을 목도하고 싶을 수도 있겠습니다.

 

  이런 상상은 사실 특별하다고 하기에는 너무나 일상적인 상상입니다시간을 여행하고 싶다는 상상인류는 언제나 시간여행을 꿈꿔왔습니다그리고 시간여행을 위해 필요한 것은 마법과도 같은 장치 타임머신(Time Machine)’입니다영화나 판타지 소설 속에서 자주 등장하는 타임머신은 인류의 시간여행에 대한 꿈을 충족시켜주는 장치입니다물론 아직 실현된 적은 없지만요오늘 이야기할 책은 바로 이 타임머신이 처음 등장한 소설허버트 조지 웰스(H. G. Wells)의 타임머신(The Time Machine)입니다.


  ‘허버트 조지 웰스는 SF(Science Fiction) 문학 장르의 대부와도 같은 존재입니다타임머신뿐만 아니라 투명인간그리고 2005년 영화로 리메이크되기도 한 우주전쟁의 원작자이기도 하죠.

 


  『타임머신의 내용 구조는 액자식 구조를 띄고 있습니다이야기는 시간여행자’(이름은 나오지 않습니다.)에게 초대받아 찾아간 로부터 시작합니다. ‘말고도 심리학자의사 등 저명한 인사들이 자리를 함께 하지요그리고 그 자리에서 시간여행자는 먼저 시간에 대한 우리의 통념과 그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며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모든 실물은 네 방향으로 뻗어 있네가로세로높이그리고 지속되는 성질을 가지고 있지하지만 우리는 (곧 설명하겠지만어떤 타고난 육체적 결함 탓에 이 점을 간과하기 쉽네분명 네 개의 차원이 있어세 개 차원은 공간의 세 변을 일컫고네 번째 것은 시간이지그런데 우리는 전자의 삼차원과 후자 사이의 비현실적인 선을 긋는 경향이 있어왜냐하면 우리의 의식이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우연히 시간을 따라 한 방향으로 단속적으로 움직이기 때문이지.”

 

  그렇죠우리는 시간을 한 방향으로 흐른다고 인식합니다실제로 우리는 나이 들기만 하지 젊어지지는 않으니까요이에 시간여행자는 시간을 중력에 비유합니다마치 중력처럼 시간은 올라가기보다는(거스르기보다는내려가는 게(앞으로 흐르는 게훨씬 쉽죠하지만 기구(氣球)’가 있다면 어떨까요기구를 통해 우리는 조금이나마 중력을 거슬러 올라갈 수 있습니다시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라고 시간여행자는 생각합니다그에 맞는 기구가 있다면 우리는 시간을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고 말이죠.

 

기구를 타고 중력을 거슬러 오를 수 있고궁극적으로 시간 차원을 따라 이동하다가 정지하거나 가속하거나 심지어는 방향을 돌려 다른 길로 갈 수도 있다는 희망쯤은 품을 수 있으니.”

 

  어떤가요허무맹랑한 소리로 들리시나요아니면 조금 일리 있는 말이라고 들리시나요여기서 시간여행자가 말하는 기구는 당연히 타임머신입니다그러면서 그는 빛나는 금속 구조물을 가져와서 믿지 못하는 이들의 눈앞에서 기계를 작동시키죠.

 

한 줄기 바람이 불면서 램프 불꽃이 일렁거렸다맨틀피스 위 촛불 하나가 꺼지고그 작은 기계가 갑자기 회전했다흐릿해진 그것은 일순 유령처럼 보였다희미하게 반짝이는 놋쇠와 상아의 어떤 소용돌이처럼 보였다그리고 사라졌다없어졌다테이블 위에는 램프만 휑뎅그렁했다.

 

  물론 신기하기는 하지만 정말 그 작은 금속물이 타임머신이라고 믿는 이는 아무도 없었습니다이후 시간여행자가 실물 크기의 타임머신을 만들었다고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지요아무리 좋게 생각해준다고 해도 그런 말을 쉬이 믿기는 어렵지요.

 

 

  이야기의 본격적인 시작은 다음 번 모임에서 시작됩니다저녁 시간이 다 되어서도 집주인 시간여행자는 나타나지 않습니다그리고 오후 7시 반이 넘어서야 시간여행자가 문을 열고 나타납니다그런데 조금 이상한 모습으로 나타나지요.

 

시간 여행자는 굉장히 처참한 몰골을 하고 있었다외투는 먼지투성이에 더러웠고 소맷자락은 녹색으로 더럽혀져있었다머리칼은 헝클어지고 허옇게 센 것 같았다흙먼지를 뒤집어쓴 탓이거나 실제로 변색됐을 수도 있었다얼굴은 유령처럼 허옇고 턱에는 갈색의 벤 상처가 아물고 있었다얼굴은 무지막지한 고생이라도 한 것처럼 수척하고 찡그린 채였다빛이 눈부시기라도 한 듯 그는 문간에서 잠깐 머뭇거렸다그러곤 방 안으로 들어왔다발이 아픈 사람처럼 절뚝절뚝 걸었다.

 

  자이쯤 되면 눈치 빠르신 분들은 이미 아시겠지요시간여행자는 이름에 걸맞게 자신이 만들었던 타임머신을 타고 시간여행을 하고 온 것이지요그리고 를 통해 시간여행자의 경험을 듣게 됩니다.

 


  처음에 시간여행자는 미래로 향하는 시간여행에 큰 기대를 갖습니다인류 문명의 진보가 계속되는 시기였기에 그 미래가 얼마나 휘황찬란한 결과일지 궁금했던 것이지요시간여행자가 도착한 시기는 서기 802,701년이었습니다하지만 그곳에서 발견한 인류는 실망스럽기 그지없었죠.

 

  ‘엘로이라는 이름의 미래인들은 키가 작은 소인들이고몸은 전체적으로 매우 연약합니다그들의 언어는 매우 단순한 것들을 지칭하는 정도일 뿐이고그저 하릴없이 들판을 뛰놀며 과일을 주식으로 살아갑니다큰 동물들은 이미 멸종하고어떠한 위험도 없어 보이며띄엄띄엄 숲 너머에 웅장한 크기의 잔해물들이 존재하죠시간여행자가 내린 결론은 조금 충격적입니다.

 

쇠퇴기에 접어든 인류를 내가 조우한 듯했다불그레한 황혼이 인류의 황혼을 생각나게 했다우리가 현재 기울이고 있는 사회적 노력의 기이한 결과를 비로소 깨닫기 시작했다하지만 생각해 보면 당연한 귀결이었다육체의 힘은 필요의 결과이므로안전한 상황은 연약함을 낳는다생활환경을 개선하는 일생활을 끊임없이 안정화하는 참된 문명화 과정이 꾸준하게 진행되어 그 극점에 다다른 것이다인류가 힘을 합쳐 자연을 차례차례 정복하게 되었다지금은 꿈에 불과한 것들이 미래에선 계획적으로 착수되고 수행되었던 것이다그 결과를 나는 보고 있었다!

 

  믿거나 말거나 802,701년의 미래에는 모든 문명화 과정이 극에 이르러 생활이 안정되었고그로 인해 모든 인류가 더 이상 어떤 고통두려움투쟁도 필요하지 않게 되어 그에 맞는 진화를 하게 되었다는 것이지요물론 시간여행이 단순히 이렇게 끝나지는 않습니다타임머신이 없어지는 사건이 발생하죠처음에는 엘로이를 의심하지만 그들은 그럴 신체적 능력이 없고그만한 흥미를 가지지도 않습니다후에 시간여행자는 지하에 사는 몰록이라는 또 다른 인류의 존재를 알게 됩니다그리고 당연히 이 몰록이 타임머신을 훔쳐 간 것이지요.

 

  ‘몰록은 생김새가 괴기스럽습니다부정적 존재에 대한 부정적 묘사는 익숙하지요시간여행자는 몰록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놈들이 얼마나 구역질 나는 마귀같이 생겼는지 여러분은 상상도 못 하리라창백하고 턱 없는 얼굴눈꺼풀 없고 큼지막하고 불그스름한 회색 눈이란!’

 

  ‘몰록은 엘로이와는 다르게 재빠르고 공격적입니다심지어 몰록은 육식을 하죠하지만 앞서 말한 대로라면 이미 큰 동물들은 다 멸종하였는데어떻게 육식을 할 수 있을까요조금 힌트를 드려보자면, ‘엘로이들 중에 노쇠한 이들이 없다는 점해가 지면 어둠을 틈타 지상으로 올라오는 몰록’, 어둠에 극심한 두려움을 느끼는 엘로이들을 생각하면 몰록이 먹는 고기가 어떤 고기인지 유추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시간여행자가 생각하기에 엘로이는 과거 자본가의 후손들입니다그들은 돈의 힘으로 지상을 자연스럽게 차지했고하층민들은 지하로 내려가게 되었다는 것이지요그리고 몰록이 지하로 내려가게 된 하층민들의 후손들이 되었고요처음에는 이러한 수직적인 구조가 잘 운영되었으나, 인류 지성이 자살에 이른 이 시기가 되어서는 힘의 구조가 뒤바뀌게 된 것이라 추측하지요.

 

 

  시간여행자와 위나라는 엘로이의 관계도 묘사됩니다이에 대해서는 자세하게 다루진 않으려 합니다흡사 애인과도 같은 존재이지요물론 마지막 시간여행자의 실수로 위나를 잃게 되지만요.

 

  그렇게 우여곡절을 겪으며 시간여행자는 타임머신을 재 탈취하여 시간여행을 떠납니다급박한 상황을 벗어나느라 그보다 더욱 미래로 향하게 되지요그리고 인류가 모두 사라지고대부분의 생명체도 사라진 미래를 보게 됩니다시간의지구의모든 것의 끝을 보게 된 것이라고 할 수도 있겠네요시간여행자의 이야기는 일단 여기서 끝이 납니다물론 증거는 아주 빈약합니다그가 챙겨온 것은 위나가 자신의 호주머니에 꽂아준 흰 꽃 두 송이에 불과하죠그 스스로도 이런 이야기를 다른 사람들이 믿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아니자네더러 믿어달라는 게 아니야거짓말이나 예언으로 치부하게실험실에서 꿈을 꾼 거라고 말하게인류의 운명을 사유하다가 지어낸 이야기쯤으로 생각하게사실이라는 내 주장을 그저 흥미를 돋우기 위한 얄팍한 기교쯤으로 받아들이게. ‘허구라고 전제하고서 다들 이 이야기를 어떻게 생각하나?”


  이후에 그를 찾아간 는 다시 시간여행을 떠나려는 시간여행자를 보게 됩니다이번에는 만반의 준비를 한 시간여행자였죠카메라도 챙기고 갖가지 도구를 들고 있습니다그리고 그로부터 3년이 지난 지금까지 시간여행자는 돌아오지 않았다고 는 말하며 이야기는 끝이 납니다.

 

 

  사실 웰스의 작품은 과학소설이지만 동시에 비과학적입니다타임머신을 읽어보아도 과학적 근거는 거의 보이지 않죠이런 부분이 웰스의 작품을 읽는 독자들로 하여금 거부감이 들게 할 수도 있겠습니다만사실 이는 웰스가 살았던 시대를 생각하면 당연한 것입니다웰스는 지금 21세기 사람이 아닌 무려 1866년생으로 19세기 사람이죠그가 살았던 시기에는 지금 우리가 아는 많은 과학적 지식들이 정립되지 않은 시기였습니다그러니 어찌 보면 오히려 그의 뛰어난 상상력에 대해 놀라움을 느끼는 것이 더 맞겠습니다.

 

 

  웰스의 작품을 감히 평가한다면저는 이렇게 말하겠습니다. ‘문학적 상상력으로 나타낸 과학적 열망’ 기회가 된다면 웰스의 작품 중 읽어 본 다른 작품 투명인간도 다뤄볼 수도 있겠습니다만두 작품 모두 비슷한 생각을 했습니다내용이 얼마나 과학적인지가 아닌 웰스의 문학적 상상력과 그에 맞는 적절한 서술이 인상적이었죠결과적으로 웰스가 후의 과학소설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는 점은 절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우리의 인생은 짧습니다긴 시간 축에서 끽해야 1세기를 사는 인간입니다구태여 더 말하지 않아도 쉬이 동의할 부분이지요언제까지 인류는 계속될 수 있을까요앞으로 100아니면 1000혹은 그 이상 계속할 수 있을까요매 시기 인류의 종말은 화두 거리입니다하지만 아직 우리는 그 끝을 보지는 못하였죠그렇다고 낙관하기는 어렵습니다여전히 인류는 고통받고, 분쟁은 끊이지 않고갈등은 계속되고 있으니까요이렇게 생각하면 웰스의 인류 미래에 대한 절망적 비관은 너무 엇나간 것이라고 폄하하기 어려울지 모릅니다.

 

  현재를 벗어나고픈 시간여행에 대한 인류의 열망여러분이라면 시간여행자가 만든 타임머신에 앉아 어느 방향으로 레버를 당기시겠습니까과거혹은 미래그리고 어느 시점에 이르게 될까요? ‘시간여행자들의 모임에서 모여 자신이 보고 생각한 것을 말하는 장면도 흥미롭겠군요타임머신이었습니다.

 

그는 인류의 진보를 어둡게 보았다쌓아 올린 문명이 필연적으로 무너져서 결국에는 그것을 쌓아 올린 자들을 파멸시킬 것이기 때문에 애초에 헛고생이라고 했다그게 사실이라면 우리는 그렇지 않다는 듯 살아낼 도리밖에 없다하지만 내게 있어 미래는 여전히 암흑이고 공백이다기억에 의존한 그의 이야기가 밝힌 몇몇 군데만 빼면 광활한 미지다나는 위안 삼아 이상한 흰 꽃 두 송이를 곁에 두고 있다이젠 갈색으로 쭈그러들고 납작해지고 버석버석해진 그 꽃은 지력과 체력이 사라진 미래에도 여전히 감사하는 마음과 서로를 아끼는 마음이 인간의 가슴속에 살아있었음을 증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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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킬 박사와 하이드 (반양장) 펭귄클래식 31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 지음, 박찬원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웅진)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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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어두운 달밤 체구가 작고 지팡이를 든 남자


  최근에 개봉했던 영화 23 아이덴티티(Split)을 아시나요? M. 나이트 샤말란 감독제임스 맥어보이 주연인 영화로, 23개의 인격을 가진 남자의 이야기죠. ‘23개나?’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실제 다중인격의 사례인 빌리 모리건이라는 사람은 24개의 인격을 가지고 있었다고 합니다그리고 법정에서 다중인격을 이유로 무죄를 선고받은 최초의 사람이라고도 하네요사실 이중인격 혹은 다중인격이라는 소재는 우리에게 그다지 낯선 소재는 아닙니다영화소설 등에서 흔한 단골 소재이기도 하죠그래서 마치 이런 경우가 흔한 것처럼 느끼게 됩니다.

 

  하지만 이중인격은 전혀 흔한 경우가 아닙니다정식 명칭은 '해리성 정체감 장애(Dissociative Identity Disorder)'이고실제 세계적으로 350명 정도의 증례만 보고되었을 정도로 희귀한 경우라고 합니다또한 환자마다 워낙 경우가 다양하여 구체화된 자아를 따로 가진 경우도 있고 아닌 경우도 있을뿐더러진단 자체도 아주 어렵다고 합니다이러한 해리성 정체감 장애’와 관련하여 가장 유명한 작품이 있지요그리고 그 이후로 우리는 같은 소재를 사용한 수많은 작품들을 보게 됩니다바로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의 지킬 박사와 하이드입니다.

 

 

  사실 이제 지킬 박사와 하이드는 따로 설명도 필요 없이 자연스럽게 쓰입니다워낙 유명하기에 우리는 그 말만 들어도 이중인격이라는 단어를 떠올리게 되죠국내에서는 뮤지컬로 재탄생하여 엄청난 흥행을 이끌기도 했습니다이중인격이라고는 하지만 지킬 박사와 하이드는 완전히 다릅니다둘은 같은 신체를 공유하면서도 실제 모습과 성격그에 따른 행동까지 판이하게 다르지요지킬 박사의 지인 변호사 어터슨은 지킬 박사를 이렇게 묘사합니다.

 

쉰 살의 건장하고 균형 잡힌 체형에 수염을 기르지 않은 얼굴이었다무언가 숨기는 듯한 인상도 주었지만 포용력과 친절함이 풍겼고그가 어터슨을 바라보는 표정에서는 진정이 담긴 따뜻한 애정을 읽을 수 있었다.

 

  책에서 묘사되는 지킬 박사는 사회적으로 평판도 좋고 재산도 많으며 잘생긴 인물입니다지킬 박사의 주변 인물들 역시 선하고 평판이 좋은 인물들임은 당연하지요그런 지킬이 나쁜 일을 저지른다는 것은 누구도 상상하지 못하는 일입니다.

 

  그런 지킬이 하이드를이미 대부분 아시겠지만 하이드는 지킬이 만들어낸 약물로 나타나게 되는 존재입니다선한 지킬이 그런 약물을 만들어내는 이유가 이해가지 않으실 수도 있겠습니다그러나 언제나 완벽한 사람은 없는 법지킬에게도 결점은 있고지킬은 스스로의 결점을 잘 알고 있습니다.

 

나의 큰 단점은 쾌락을 탐하는 성향이었다쾌락은 많은 사람을 행복하게 하지만고고한 자긍심으로 대중들 앞에서 철저하게 근엄한 모습을 보이고 싶다는 오만한 욕망을 가진 내게 쾌락은 양립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지킬은 스스로의 성향을 잘 알고 있고상당히 이중적인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그는 자신이 정한 고귀한 가치관에 따라 거의 병적인 수치심으로 내 부조리를 감추었다.’고 고백합니다지킬에게 이러한 상충되는 욕망은 매우 견디기 힘든 것이었습니다그래서 그는 두 욕망의 분리를 생각하지요.

 

나는 생각했다만약 각각의 본성을 별개의 개체에 담을 수 있다면참을 수 없는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롭게 사는 일이 가능해지지 않을까부조리한 존재는 그의 고결한 쌍둥이의 열망과 자책으로부터 해방되어 그만의 길을 가고정의로운 존재는 흔들림 없이 확고하게 높은 곳을 향한 그의 길을 가면 될 것이다그는 선행을 하는 가운데 기쁨을 느낄 것이며더 이상 이질적인 악마가 행하는 불명예 탓에 괴로워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이들 모순되는 한 쌍이 함께 묶였다는 것은고뇌하는 의식이라는 자궁 속에 이렇게 극과 극인 쌍둥이가 계속 갈등하며 함께 지내야 한다는 것은 인류가 받은 저주였다.

 

  지킬이 생각하기에 인간은 그 내면에 선과 악을 동시에 갖고 있는 존재입니다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인간들도 마찬가지로 이러한 내면의 상충되는 욕망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지요고개를 끄덕이기 어려운 부분은 아닙니다언제나 선하게 살아야 한다고 우리는 의식적으로 생각하지만무의식적으로 간혹 차오르는 증오와 욕망은 부정할 수 없는 것이니까요모든 인간이 그런 것은 아니라고온전히 선하기만 한 사람도 있다고 주장하실 수도 있겠습니다정말 그렇다면 지킬 박사와 그의 의견에 동의하는 제 생각이 틀린 것이겠지요그리고 저 역시 진심으로 그러길 바랍니다만역시 아무래도 아직은 지킬 박사의 손을 들어주게 되네요.

 

 

  결과적으로 지킬 박사는 성공합니다훗날 밝혀지지만 지킬이 처음 구매했던 염료는 불순물이 섞여있었고아이러니하게도 그래서 실험은 성공하죠철저히 우연의 산물이랄까요신체가 변형되는 극심한 고통에도 불구하고 지킬은 결과에 만족합니다자신이 원하던 대로 지킬은 내재되어 있던 욕망에 죄책감을 느낄 필요가 없어지고모든 악은 순수하게 하이드가 담당하게 되지요.

 

감각이 뭔가 낯설었다뭔가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새로웠고그 새로움 때문인지 믿을 수 없을 만큼 달콤했다내 육체는 더 젊어지고 더 가벼워지고 더 행복해졌다나는 그 육체 안에서 마치 환상 속에서 물방아에 물이 흐르듯 무모한 무분별과 무질서한 관능적 이미지의 물결이 흐르는 것을 의식했다책임감이 녹아 사라지고알려지지 않은그러나 결코 순수하지 않은 영혼의 자유로움도 인식할 수 있었다.

 

  이로써 지킬과 하이드는 철저히 다르면서도 떨어질 수 없는 관계를 시작합니다하이드에 대해서 이야기해볼까요하이드는 지킬과 분명 다르게 생겼습니다체구도 훨씬 작고하이드의 얼굴을 본 사람이라면 기형이라는 단어를 자동적으로 떠올립니다사실 이런 설정은 우리에게 지극히 익숙합니다좋은 사람주인공은 언제나 수려한 외모에 기분 좋은 에너지를 내뿜죠그리고 반대로 악한 사람범인은 흉측한 외모 혹은 혐오감을 불러일으키는 모습을 가지고 있죠이러한 공식이 지킬 박사와 하이드에도 똑같이 적용되어 있죠여담입니다만이러한 설정은 익숙하면서도 불쾌한 것도 사실입니다외모로 사람을 평가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면서도 우리는 너무도 당연하게 선과 악에 대응하는 그릇된 이미지를 받아들이곤 하는 것 같습니다저번에 보았던 프랑켄슈타인이 생각나기도 합니다물론 하이드의 경우는 프랑켄슈타인의 크리처와는 다른 경우긴 하지요하이드는 태생부터 지킬의 욕망을 대변하는 순수한 악의 결정체니까요.

 

  시간이 흐르면서 하이드는 점차 지킬의 통제를 벗어납니다하이드의 ()’이 지킬이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날뛰기 시작하죠대표적으로 두 가지 사건을 예로 들 수 있습니다첫 번째는 넘어진 아이를 무참히 발로 밟고 지나갔던 일두 번째는 평판이 좋은 노신사 커루 경을 야심한 밤에 지팡이로 때려죽인 사건이지요분명 두 사건 모두 하이드가 저지른 일입니다그러니 하이드가 책임을 져야겠죠그렇다면 지킬은 이에 대해 무고한 것일까요이 부분에서는 여러 의견이 있겠지만저는 지킬에게도 질타의 시선을 보내려 합니다하이드가 범죄를 저지를 때에는 지킬이 관여하지 못한 것은 사실입니다하지만 그 모든 뒤처리를 하는 것도하이드가 살아갈 수 있게 돕는 것도 지킬이니까요지킬은 자신의 악의 결정체인 하이드를 버리지 못합니다결국 하이드 역시 자신이니까요.

 

그리하여 지킬 박사로서의 내가 무슨 일을 당하더라도 재정적인 손실 없이 에드워드 하이드로 새 생활을 시작할 수 있도록 해두었다그렇게 내가 생각했던 대로 모든 면에 대비를 끝내자 나는 내 상황의 기이한 면책에서 오는 득을 보기 시작했다.


  상황은 점점 악화됩니다약물 없이 제멋대로 지킬과 하이드 사이를 왔다 갔다 하는 지경에 이르죠그리고 모든 진실이 밝혀지려는 순간결국 파국에 이릅니다어터슨이 집사와 함께 문을 부수고 들어갔을 때 보게 된 것은 체구에 맞지 않는 옷을 입고 있는 하이드의 시체였지요의아한 구석도 있는 결말이지만어떤 면에서는 쉬운 결말이기도 합니다실제로 하이드를 잡는다 하여도지킬과 하이드를 오가는 이 존재를 과연 처벌할 수 있느냐는 문제가 남으니까요어렵지만 생각해 볼 주제입니다.

 

 

  1886년 출간된 스티븐슨의 지킬 박사와 하이드는 당시로서는 상당히 파격적이고 무서운 작품이었습니다이중인격이라는 소재도 흔하지 않았을뿐더러 인간 내면에 자리 잡은 악함에 대한 조명이 사람들을 공포에 떨게 했죠두려움의 대상이 인간 외부의 존재에서 인간 내면의 존재까지 포함하게 되었으니까요.

 

  『지킬 박사와 하이드를 읽고 나면 이런 생각도 하게 됩니다. ‘나는 하나의 자아인가?’, ‘사실은 여러 가지 내면에 존재하는 자아의 가능성들 중 상황에 따라 유력한 것들이 튀어나오는 복합적인 존재는 아닐까?’ 간혹 나 자신이 너무나 낯선 행동을 하거나 이전과는 크게 다른 생각을 할 때 섬뜩한 기분이 들기도 하지요앞서 말했듯이 해리성 정체감 장애는 극히 드문 사례입니다그러니 우리와 우리 주변 대부분이 이에 해당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보는 게 맞겠지요가끔 아무리 친구나 지인이 이상하게 보인다고 해도 말이지요.

 

  유독 하나의 이미지가 마음에 남습니다달빛이 환히 비추는 어두운 밤 골목지팡이로 노인을 때리는 사악한 하이드의 모습그리고 그 모습을 멀리서 지켜보는 나의 시선물론 그럴 리는 없겠지만지켜보는 입장에서 지켜봄을 당하는 입장으로 변해서는 안 되겠지요언제고 사라지지 않고떼어낼 수도 없는 관계의 공포지킬 박사와 하이드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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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도를 기다리며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3
사무엘 베케트 지음, 오증자 옮김 / 민음사 / 200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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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다렸고, 기다리고, 기다린다.


  가끔 오늘이 무슨 요일인지며칠인지 헷갈릴 때가 있어요. ‘벌써 수요일이야?’ 혹은 벌써 3월이야?’라며 놀라는 순간들이 있죠열심히 하루를 보내시고 알차게 지내시는 분들에게는 해당하지 않는 말일 수도 있습니다만제게는 때로 삶이 그저 구간반복을 시켜 놓은 것처럼 되풀이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할 때가 있어서요물론 언제나 그런 것은 아니지만요주어진 하루를 나름의 순서대로 보내고다음 날 일어나서 다시 똑같은 순서로 반복하다 보면 그런 순간이 올 때가 있죠문득 인지하게 되는 그냥 반복되는 삶오늘의 책은 사뮈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입니다.

 

  『고도를 기다리며의 내용은 굳이 구구절절 이야기할 필요도 없이 간단합니다정말 고도를 기다리는 내용이니까요.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은 나무 한 그루가 서있는 어느 언덕에서 하루 종일 고도를 기다립니다의미 없는 말들과 행동을 하면서요맞지 않는 구두를 벗으려 낑낑대기도 하고서로의 말은 듣지 않으면서 자기 할 말들만 하기도 하죠그럼에도 언제나 마지막은 고도를 기다립니다.

 


에스트라공 

  멋진 경치로군. (블라디미르를 돌아보며가자.

 블라디미르 

  갈 순 없어.

 에스트라공 

  왜?

 블라디미르 

  고도를 기다려야지

 에스트라공 

  참 그렇지. (사이여기가 확실하냐?


  한두 번이 아닙니다의미 없는 행동과 말들을 반복하고 그들 스스로도 그러한 사실을 깨닫는 순간도 있지만 마지막엔 언제나 고도를 기다려야 한다는 말을 반복하죠그리고 어떠한 의문도 없이 고도를 기다리죠.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의 삶은 변하지 않아요. 1막과 2막 모두 같은 배경에 그들이 하는 일이라고는 그저 멍하니 고도를 기다리는 것뿐이지요그들의 삶은 그냥 반복됩니다이쯤 되면 모두가 한 번은 생각하는 질문이 있죠. ‘왜 고도를 기다리지고도가 누구길래?’ 고도가 누구인지는 1막과 2막의 마지막에 등장하는 소년이 주는 아주 조금의 힌트밖에 없습니다그마저도 고도가 누구이고 무엇을 하고 왜 오는지 그리고 와서 무엇을 하는지에 대한 내용과는 전혀 관련이 없죠.

 

  그러니 이 짧은 극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이 고도를 기다린다는 사실 딱 하나뿐입니다. 1막과 2막의 구성도 거의 비슷하고 내용 전개도 큰 차이가 없습니다심지어 1막 마지막에 찾아온 소년이 2막 마지막에 또 찾아와 같은 소식을 전합니다고도가 못 온다는 말을요.

 

<1막 중>

 

블라디미르 

  그래서?

 소년 

  고도 씨가…….

 블라디미르 

  (말을 가로막으며너를 전에도 본 일이 있는 것 같은데…….

 소년 

  글쎄요…….

 블라디미르 

  넌 나를 모르겠니?

 소년 

  모르겠는데요?

 블라디미르 

  너 어제도 오지 않았냐?

 소년 

  아뇨.

 블라디미르 

  그럼 처음 온 거야?

 소년 

  네.

 

침묵

 

 블라디미르 

  그렇게 말하겠지. (사이그래얘기해 봐라.

 소년 

  (단숨에고도 씨가 오늘 밤엔 못 오고 내일은 꼭 오겠다고 전하랬어요.

 블라디미르 

  그게 다냐?

 소년 

  네.


 

<2막 중>

 

 소년 

  아저씨…… (블라디미르가 돌아선다알베르 아저씨는…….

 블라디미르 

  다시 시작이로구나. (사이소년에게너 나 모르겠니?

 소년 

  모르겠어요.

 블라디미르 

  너 어제도 왔지?

 소년 

  아니요.

 블라디미르 

  그럼 처음 오는 거냐?

 소년 

  네.


침묵

 


 블라디미르 

  고도 씨가 보낸 거지?

 소년 

  네.

 블라디미르 

  오늘 밤에는 못 오겠다는 얘기겠지? 

 소년 

  네.

 블라디미르 

  하지만 내일은 온다는 거고? 

 소년 

  네.

 블라디미르 

  내일은 틀림 없겠지? 

 소년 

  네.

 

  사실 이쯤 되면 기다리지 않을 법도 하지 않나요매일 오기로 해놓고 오지 않는 고도와 그럼에도 기다리는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그들은 언제나 기다리기만 합니다그들의 기다림이 끝나는 날이 오기는 할까요정말 고도가 도착하는 날이 올까요그리고 혹은 고도가 도착하고 나면 어떻게 될까요정말 끝이 찾아올까요아니면 새로운 시작이 되는 것일까요.

 

  부조리극의 정수라고 이름 붙여지는 고도를 기다리며실제로 읽어보면 그 말이 이해가 갑니다인물들의 대부분 행동과 말이 어처구니가 없으니까요조리라고는 찾아 볼 수가 없죠그렇다고 여기서의 부조리가 옳고 그름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어디까지나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어떤 것들로 가득 차 있다는 의미입니다그리고 그것을 부조리라고 이야기하는 것이지요.

 

  그렇지만 생각해보면 우리도 비슷하지 않나요우리 역시 평생 동안 무언가를 기다리며 살죠그게 사랑일 수도 있고요행복일 수도 있고혹은 죽음일 수도 있겠습니다구구절절 이유는 없어요그냥 기다리죠그도 그럴 것이 우리는 기다릴 수밖에 없으니까요너무 수동적으로 느껴지시나요조금은 극단적으로 이야기하여 그렇게 생각하실 수도 있겠습니다.

 

  그래도 사실은 사실이니까요우리는 언제나 무언가를 기다립니다어찌 보면 삶이란 영원한 기다림의 연속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사람마다 나이마다 모두가 기다리는 것은 다르겠지만우리는 분명 무언가를 기다리니까요마찬가지로 생각해봅니다우리가 기다리는 것이 고도라면정말 고도는 올까요그리고 고도가 도착하면 기다림은 끝나는 것일까요저 역시 언제나 무언가를 기다립니다때에 따라 죽음일 수도 있고요기회일 수도 있고요행복이기도 하죠아니면 이것저것 다 섞여서 하나라고 말하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그런 때에는 그냥 고도를 기다린다고 하면 될까요?

 

  반복되는 기다림반복되는 삶왜 그리 계속 반복해서 이야기하느냐고 물으실 수도 있겠습니다만그게 바로 고도를 기다리며이니까 어쩔 수 없습니다역시 여전히 납득이 안 가실 수도 있겠지만요무엇을 기다리는 지도 모른 채 오늘도 기다리는 우리의 삶그러니 그저 고도를 기다린다고 말해봅니다분명 언젠가는 오겠죠제 삶에도혹은 여러분의 삶 어느 순간에 언제인가는요고도를 기다리며였습니다.

 

 에스트라공  

뭐랄까…… 넌 늘 마지막 순간을 기다리고 있는 거지.

 블라디미르  

(꿈꾸듯이마지막 순간이라…… (생각에 잠긴다그건 멀지만좋은 걸 거다누가 그런 말을 했더 라?

 

 에스트라공  

나 좀 안 거들어줄래?

 블라디미르  

그래도 그건 오고야 말거라고 가끔 생각해 보지그런 생각이 들면 기분이 묘해지거든. (모자를 벗는다모자 속을 들여다보고 손으로 만져보고 흔들어보고 다시 쓴다뭐라고 할까기분이 가라앉으면서 동시에…… (적당한 말을 찾는다……섬뜩해 오거든. (힘을 주며진단 말이다. (다시 모자를 벗고 속을 들여다본다이럴 수가! (무엇을 떨어뜨리려는 듯 모자 꼭대기를 툭툭 친 다음 다시 안을 들여다보고 다시 쓴다결국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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